축문의 간지삭(干支朔)에 대하여
제삿날에 쓰는 축문의 첫머리를 보자,
維 歲次 辛丑 七月戊子朔 初五日壬辰(유 세차 신축 칠월무자삭 초오일임진)으로 시작된다. 음력으로 신축년 칠월 초닷새가 제삿날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해, 달, 날(제삿날)의 간지(干支)가 들어가 있다. 세 군데다. 해의 간지를 태세(太歲)라 하고, 달의 간지를 월건(月建)이라 하고, 날의 간지를 일진(日辰)이라 한다. 그러면 이 축문에 쓰인 이들 간지를 정리해 보자.
태세[歲次]: 신축(辛丑)
월건: 칠월 무자삭(七月戊子朔) - 戊子는 칠월 초하룻날의 간지
일진: 초오일 임신(初五日壬辰)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아한 점이 발견된다. 세차와 일진은 그해와 그날의 간지를 그대로 썼는데, 월건은 왜 월건을 그대로 쓰지 않고 그달 초하룻날의 간지를 쓰고 뒤에 ‘朔(초하루 삭)’ 자를 붙였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하루[朔]와 월건법의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어떤 이는 삭(朔) 자는 초하루도 되지마는 ‘달 삭’ 자로도 해석되는 복합적 의미를 갖는 글자로서, 이 경우는 ‘달 삭’으로 본다고 하였다. 예로 삭월세(朔月貰) 또는 만삭(滿朔) 등은 ‘달 삭’자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월건(月建)이 있어야 할 자리에 초하루 간지가 들어감으로, 다음에 오는 일진(日辰)과 중복되는 모순이 있다고 보아, 그런 의견을 피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초하루[朔]가 옛날 음력을 사용하던 시기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음력의 달은 초하루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만큼 오래도록 달의 이름은 월건으로 하지 않고, 그달 초하루의 일진을 넣어 갑자삭(甲子朔), 을축삭(乙丑朔)으로 하여, 갑자일인 초하루가 그달을 나타낼 정도가 되도록 써 왔다. 春秋(춘추)에도 ‘秋七月 壬辰朔(추칠월 임진삭)’이란 기록이 보이고, 조선왕조실록을 보아도 매월 초하루에만은 일진에다 꼭 朔(삭) 자를 붙였다. 무령왕릉 묘지석(墓誌石)에도 ‘백제 사마왕년 62세 계묘년 오월 병술삭 칠일임진 붕(百濟斯麻王年之十二歲 癸卯年 五月 丙戌朔 七日壬辰 崩)’이라 명기되어 있다. 이를 보면 옛날인 백제 시대에도 朔(삭)이 달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朔(삭)은 천자가 제후에게 나누어 주던 달력을 뜻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천자가 연말에, 이듬해 달력을 제후에게 나누어 주면서 시정의 방침을 내렸다. 제후는 이를 받아 종묘에 보관하고, 매월 초하룻날에 양을 희생으로 바친 다음, 그달의 달력과 거기에 적힌 정령에 따라 정사를 행하였다. 그래서 朔은 천자의 정령을 뜻한다. 수서(隋書)에는 여섯 오랑캐가 정령[朔]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朔(삭)을 받는 것은 황제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正朔(정삭)이란 말이 있다. 일 년 동안의 월일, 해와 달의 운행, 월식과 일식, 절기, 특별한 기상 변동 따위를 날의 순서에 따라 적은 책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달력을 말한다. 달력을 만들어 반포하는 것을 ‘정삭’을 반포한다고 한다.
왕이 된 자가 새로 건국하면 반드시 달력을 고쳐 천하에 반포하여, 그 달력이 통치권이 행해지는 영역에서 쓰이므로 그 영역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의 신민이 되는데, 이것을 ‘정삭을 받든다’[奉正朔]라고 한다.
또 定朔(정삭) 이란 말도 있다. 떠오르는 새달[新月]이 초하루가 되도록 달의 대소를 적절히 배정하는 역법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삭(朔 초하루)이 중시되다 보니, 초하루[朔]의 일진이 본디의 월건을 제치고 그달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으로 월건을 쓰지 않은 것은 월건법 자체에서도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월건을 붙이는 법이 매우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월건법을 보자.
월건의 支는 음력으로 11, 12, 1, 2, …, 8, 9, 10월에 각각 자(子), 축(丑), 인(寅), 묘(卯), …, 유(酉), 술(戌), 해(亥)월로 부여한다. 월건의 시작이 11월인 까닭은, 음력이 정형화된 뒤로 여러 차례 역법 개정이 있었고, 그러한 역법 개정이 있기 전 최초의 음력에서 11월(정확하게는 동지)을 정월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음력 1월(정월)은 寅月이고, 2월은 卯月, 3월은 辰月, 4월은 巳月, 5월은 午月, 6월은 未 月, 7월은 申月, 8월은 酉月, 9월은 戌月, 10월은 亥月, 11월은 子月, 12월은 丑月이다. 그래서 지(支)는, 정월은 모두 인(寅)이 붙고, 2월은 모두 묘(卯)가 붙고, 3월은 진(辰)이 붙고, ·… 11월은 언제나 자(子)가 붙고, 12월은 축(丑)이 붙는다. 이와 같이 지(支)가 월명에 고정되는 이유는 1년은 12개월이며 지(支)의 수도 12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달에는 월건을 배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윤달은 오는 해나 순서도 불규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의 干은 甲己년, 乙庚년, 丙辛년, 丁壬년, 戊癸년에 따라 干이 달라지게 된다. 甲己年이라고 한 것은 갑년(甲年)과 기년(己年)이라는 뜻인데, 이를테면 甲子年·甲寅年·甲辰年 등과 己丑년·己卯년·己巳년 등을 말한다. 干에 甲과 己가 붙는 해이다. 이러한 해에는 1, 2, 3 … 10, 11, 12월의 경우 干은 丙,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의 순서로 된다. 그래서 1월은 이달의 干인 丙이 이달의 支인 寅과 만나 丙寅이 되고, 2월에는 干인 丁이 支인 卯와 만나 丁卯가 되고, 3월에는 干인 戊가 支인 辰과 만나 戊辰이 된다. 이하 乙庚년, 丙辛년, 丁壬년, 戊癸년도 모두 이런 방식으로 월건이 이루어진다.
이를 표로 보이면 다음과 같다.
節氣 ㅣ 年干 甲己年 乙庚年 丙辛年 丁壬年 戊癸年
정월 (입춘후 경칩전) 丙寅 戊寅 庚寅 壬寅 甲寅
이월 (경칩후 청명전) 丁卯 己卯 辛卯 癸卯 乙卯
삼월 (청명후 입하전) 戊辰 庚辰 壬辰 甲辰 丙辰
사월 (입하후 망종전) 己巳 辛巳 癸巳 乙巳 丁巳
오월 (망종후 소서전) 庚午 壬午 甲午 丙午 戊午
육월 (소서후 입추전) 辛未 癸未 乙未 丁未 己未
칠월 (입추후 백로전) 壬申 甲申 丙申 戊申 庚申
팔월 (백로후 한로전) 癸酉 乙酉 丁酉 己酉 辛酉
구월 (한로후 입동전) 甲戌 丙戌 戊戌 庚戌 壬戌
십월 (입동후 대설전) 乙亥 丁亥 己亥 辛亥 癸亥
십일월(대설후 소한전) 丙子 戊子 庚子 壬子 甲子
십이월(소한후 입춘전) 丁丑 己丑 辛丑 癸丑 乙丑
이에서 보는 것처럼 월건은 그 규칙이 매우 어렵고 또 윤달은 그 이름이 없다. 이것이 축문에서 월건을 쓰지 않는 이유가 된 것이다.
축식(祝式)에서 해는 태세로 일컫고 날짜도 일진으로 하는데 달만은 무슨 삭(朔)이라 하여 ‘초하루 朔’ 자를 쓰는 연유를 朔(초하루)과 월건법에서 살펴보았다. 옛날에는 朔(초하루)이 역법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고, 또 월건법은 매우 복잡하고 윤달에는 월건을 붙이지 않는 불규칙성에 의하여 월건 자리에 초하루의 간지를 넣어 ‘○○朔’이라 표현한 것이다.
첫댓글 어느 해 였던가 예절아카데미 수강을 할 때 제례 절차와 축문법을 배웠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리고 만약에 질문을 받는다면 난감 할 것 같아요.
고차원의 축문 간지삭의 내용을 올려 주신 박사님 애 많이 쓰셨습니다.
'삭'자에 대한 뜻은
잊지 않겠습니다.
박사님 고맙습니다.
다은 선생님 늘 감사합니다. 간지삭에 대해서 정확히 해석해 놓은 것이 없어서 제가 소략하나마 풀이해 본 것입니다. 해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