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조 · 톺아보기
무량한 기쁨
-박경용의 「어느 초가을날 1」
홍성란
어느 초가을날 1
박경용
할아버지가 뱉으신
딱, 두 마디의 말씀,
“아, 바람이 달다!
처음 보는 하늘같다!”
풋대추
볼 붉힌 뒤란에
고추잠자리가 떴다.
-(2022. 9. 7)
동시조 동인 ‘쪽배’의 13호 동인지 『자작나무의 봄』은 김용희, 신현배, 진복희 시인의 작품과 함께 박경용 시인의 ‘미발표 신작’ 83편 ‘특집’을 싣고 있다. 헌정시집을 따로 묶자는 쪽배동인들의 의견을 사양한 도사공(都沙工) 송라 박경용 선생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83편의 동시조를 찬찬히 읽어본다. 시조에 담아 어린이에게 전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시인은 아침마다 명상 산책길에 오르시나 보다. 어느 날엔 두 편의 작품 쓰기도 한다. ‘수북이 쌓인 낙엽이/ 산길을 묻어 버렸다.// 사라진 오솔길 탓에/ 동산이 온통 낯설다.// 청설모/ 폴짝 튀어나와/ 길라잡이 나선다. -「어느 가을날 4」(2020. 11. 2)’ 일기와도 같은 이런 작품은 어린이에게 시조를 쓴다는 어려움을 덜어줄 것 같다. 오늘 있었던 일을 옆 사람에게 말하듯이 그대로 시조에 담을 수 있지 않은가. 청설모 지나간 길을 따라 오르며 밤나무를 만나면 밤나무를 자세히 본다. 오래 살핀다. 그러다가 밤나무 몸통에 붙어사는 담쟁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밤나무 몸통을 안고/ 더부살이해 온 담쟁이.// 초가을까지 줄곧/ 신세만 지고 살다가// 늦가을,/ 빨간 단풍 머플러를/ 목에 둘러 주고 있다. -「어느 가을날 5」(2020. 11. 2)’ 밤나무 몸통에 붙어사니 신세 지는 것 같지만 담쟁이는 얼굴 발개지도록 밤나무 목에 단풍 머플러를 둘러주려고 힘썼던 거다. 가을 숲의 정경을 이렇게 묘사할 수 있다고 어린이에게 일러주는 시인 할아버지.
시인 할아버지의 뒷동산에 가을 지나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장끼는 수컷 꿩을 가리키는데 빨강 노랑 초록 감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깃털을 뽐내며 봄이면 암컷 까투리를 목청껏 부른다. ‘싱그러운 빛깔보다/ 더 풋풋한 목청으로// 눈부신 푸름을/ 색칠하던 장끼가// 꿩, 꿩~ 꿩~/ 5월 뒷동산을/ 내 방에 들여놓았다. -「장끼 소리」(2021. 5. 6)’ 얼마나 있는 힘을 다해 까투리를 부르는지 ‘꿩, 꿩~ 꿩~’ 고함치듯 장끼가 노는 뒷동산이 시인 할아버지의 방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산을 방에 들여 놓는 지혜가 어린이에게 닿기를 바라는 큰 생각 아닌가.
시인 할아버지의 지혜는 어린이에게, 어른에게 우리가 세상 다하는 날까지 동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호박꽃이 눈에 띄면/ 떠오르는 외숙모.// “호박을 낳는 꽃이라/ 호박꽃이 난 좋아!”// 외숙모 그 한마디 말에/ 호박꽃이/ 달라졌다.-「외숙모 호박꽃」(2022. 8. 7)’ 호박꽃이 호박을 낳는다. 그 당연한 이야기가 낯설고 재미있다. 호박꽃이 맛있는 열매채소를 주니 고맙다. 그래서 퍽 예쁘지는 않아도 호박꽃이 좋다. 이 꾸밈없는 마음을 보여주는 외숙모의 진심이 자연의 진기(眞機)다. 동심이다. 동심은 세상을 맑고 밝게 하지 않는가.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듯 한 생각에 우주가 환해진다. 시인도 달라졌다. 호박꽃이 좋아지는 것이다. 나도 호박꽃이 좋다. 길가다 호박꽃을 만나면 꽃 속을 들여다본다. 풍뎅이가 있을 것 같아서. 시인 할아버지도 그러실 것 같다.
귀가 어두운 할머니 할아버지도 잘 들리는 게 있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소리. 그 익숙한 소리는 문화적 기억이 되어 귀가 어두워져도 잘 들린다. 도시에서 만나기 어려운 장독대 풍경이나 아파트에서는 살 수 없는 귀뚜라미 노래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귀가 좀 어두운데도/ 잠귀는 밝은 할머니.// “오, 돌아왔구나,/ 우리 집 귀뚜라미!”// 더불어/ 풋잠 들었던/ 장독대가 깨어난다. -「어느 초가을날 2」(2022. 9. 8)’ 숨기 좋은 장독대나 장독대 가까운 푸나무 섶에 깃들어 또르르 똘똘 우는 가을벌레 소리를 도시에서는 듣기 쉽지 않다. 천변에나 나가야 들을까. 어른은 어린이에게 사라져가는 것들을 일러줄 의무가 있다. 이 작품이 우리의 문화적 기억 속에 자리한 아름다운 유형무형의 자산이 사라져가는 시대를 생각하게 한다. 이 작품에 궁핍한 시대에도 우리가 누려왔던 작고 아름다운 풍경을 미래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시인의 마음이 담긴 것 같다.
누가 맛보았을까. 바람의 맛을. 누가 가르쳐주는가. 바람이 달다는 것을. 시인 할아버지가 기침하듯 그냥 하신 말씀. ‘할아버지가 뱉으신/ 딱, 두 마디의 말씀,// “아, 바람이 달다!/ 처음 보는 하늘같다!”// 풋대추/ 볼 붉힌 뒤란에/ 고추잠자리가 떴다.-「어느 초가을날 1」(2022. 9. 7)’ 처음 보는 하늘을 보는 것 같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가없는 시인의 마음. 작고 낮으나 무량(無量)한 기쁨. 그 그릴 수 없는 마음자리에 풋대추가 볼을 붉힌 뒤란이 들어온다. 거기 풋대추 볼 붉힌 뒤란에 고추잠자리가 떴다. 풋풋한 향기가 나는 가을 뒤란에 고추잠자리가 후경(後景)으로 앉는다. 맛볼 수 없는 것의 맛을 알게 하는 시인의 마음. 늘 보아온 하늘의 새로운 출현. 이런 심상을 맛보는 시인의 무량한 기쁨을 어린이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마음을 본다. 일상의 말을 담은 초장과 중장의 발화를 부양(浮揚)하는 종장 이미지의 낙차(落差)에 오래 머문다. 초장의 제시로부터 중장의 전개로 이어지다 반공(半空)에 솟는 전환 종결의 맛에 머문다. 주마축지(走馬蹴地). 이 단시조 종장의 미적 거리에서 대방가(大方家)의 시경(詩境)을 본다.
洪性蘭 srorchid@hanmail.net 시조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 장원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황진이 별곡』『춤』『매혹』 등. 오디오북 『춤』과 시선집 『애인 있어요』등을 펴냄. 엮은 책 『중앙시조대상 수상 작품집』, 낭송하기좋은시조100선 『세상의 가장 안쪽』등을 펴냄. 논문집 『시조시학의 현대적 탐구』를 펴냄.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문학부문),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받음.
첫댓글 어느 발레리나의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