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20일
긴 어린이 시절을 정리하고 마감하며
문 은희 한국알트루사여성상담소장
열네 살 아이가 죽은 친구의 옷을 빼앗아 입고, 그 친구를 같이 괴롭힌 다른 아이들과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을 tv 화면에서 봅니다. pc방에서 일하던 젊은이를 살해한 젊은이의 얼굴을 보여주어, 보고 또 보게 됩니다. 이수역에서 있었다는 사건, 젊은이들이 남녀 대결해서 싸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나가던 할머니를 무지막지하게 때려 눕히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끔찍한 일이 아니라고 세계 뉴스가 알려줍니다. 그런 말이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그렇게 험악해졌다 했으니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며 “괜찮다” 할 수 없습니다.
그 젊은이들이 ‘심신 미약자’가 아니라고 진단 내려졌다 해도 꺼림찍한 마음은 풀리지 않습니다. 그들이 괴롭힌 사람들은 “그 폭행을 당하며 얼마나 아프고 괴로웠을까!” 그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그 아이들의 상태를 어떤 말(용어, 증상으)로 진단 내려야 할까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아이들의 얼굴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노인이 되도록 살아온 우리 어른들의 작품이라고 보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그렇게 길러낸 것입니다. “난 아니야!” 하고 천진하게 손을 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아이들 부모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 ‘어린이 때'가 깁니다. 문화에 따라 더 길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옛날 보다 더 길어지고 있습니다. 19세기에 태어나신 내 어머니는 17살에 시집와서 어른 구실을 다 하셨습니다. 점점 더 길어지는 어린이 때를 거치는데 어른들이 아이들을 어떻게 길러냈고, 또 이 사회가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지 아이 자신이 예리한 눈치로 터득하고 실천합니다. 어른들보다 더 일찍 약아집니다. 손익을 따지고, 귀찮고 어려운 과정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서, 노력일랑 최소한으로 줄여 힘들이지 않고 살아낼 궁리로 머리를 굴립니다. 아마 숨도 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리 할 것입니다. <멋진 신세계>에서 그린 올더스 헉슬리의 예언대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느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집니다. 괴로운 느낌일수록 느끼지 말아야 하고, 고민할 일은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는 끼어들지 말아야 합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어리석다는 흉 꺼리일 뿐입니다. 돈이 안 되는 일은 아예 선택지에도 오르지 않습니다. 내신 성적이 필요 없는 대입 길을 선택한 아이는 입시에 끼지도 못하는 과목은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이 자라고 배우고 성숙하는 훈련 과정에서 만나는 어떤 일도 성실하게 능력껏 하려는 자세를 요즘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내는 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교육 전문가들에게 재빠르고 손쉽게 할 요령을 배우려 큰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부모가 상담 받습니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얻으려는 경제 원칙에 따라 사는 부모의 생활 철학을 아이들에게 전수합니다. 개별 상담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막강한 힘을 가진 언론도 교육전문가라며 사교육 사업가들의 견해를 독자들에게 풀어 먹입니다.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 볼 생각도 없는 어른들이 그 언론이 먹여주는 정보를 경전인양 받아들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리는 줄도 모르고 하는 어른들의 행태입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담긴 눈을 보려하지 않는 어른들의 시선에서 아이들은 마음으로 고아가 됩니다. 그래서 아이는 외롭게 ‘혼자’ 살게 됩니다. 그 ‘혼자’인 아이들이 다른 ‘혼자’인 아이들의 마음을 알아주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힘이 없기에 어른의 경제 원칙을 거슬려 대항하여 딴 길, 자기만의 새로운 길, 참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어렵습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의 불평등은 아이들이 태어나 처음부터 맞는 첫 불평등입니다. 어른이 ‘갑질’하는 것을 아이가 막을 수 없습니다. 어른만이 스스로 ‘갑질’을 멈출 수 밖에 없습니다.
늙은이가 바로 그 불평등을 바로 잡으려 나서야 하고, 화급하게 실천해야 할 중대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