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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우물> 창26:17~33
1)서론(序論)
성경은 인물이야기와, 사건들과 모든 상징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형론적, 예표론적, 관점으로 봐야 그 비밀이 열립니다.
<모형론 [ 模型論 , typology ] >
'모형'(模型, type)이란 마치 틀(pattern)이나 사본(copy)처럼 원형의 그림자로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표시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모형은 항상 그 원형(原型, original type)을 가지고 있게 된다. 이처럼 모형과 원형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모형론이다. 일명 '예표론'(豫表論)이라고도 한다.
< 예표론 [ 豫表論 , typology ] >
일명 '모형론'(模型論).
성경에서 예표론적인 연구를 가능케 하는 표현으로,
① 본래의 원형에 대한 복사(모형), 기준, 견본(見本), 예표(롬5:14; 고전10:6,11).
② 실체에 준하는 그림자, 물체의 희미한 윤곽이나 영상(골2:17; 히8:5; 10:1).
③ 형틀이나 설계도와 같은 모사(模寫)나 모범(히8:5; 9:23).
④ 증표, 기호, 상징 그 자체 또는 숨겨진 능력과 진리의 밖으로 나타나되 보이지 않는 표적(마12:39).
⑤ 자연계와 인간생활에서 인용되는 비유(히9:9; 11:19).
⑥ 상(像), 형태, 흔적, 원형의 사본(히9:24; 벧전3:21) 등이 있다.
예표론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① 항상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설이나 신화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실재한 사건과 인물에 기초한다(마12:40; 요3:14).
② 본래 예언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 목표는 항상 메시야와 그의 시대에 맞춰진다(창14장; 시110편; 히7장).
③ 예표론은 구원사(救援史)의 일부로 자리매김한다(고전10:1-11).
④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모든 사건과 인물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눅24:25,44; 행3:24).
⑤ 예표론은 신구약 시대 모든 주의 백성에게 영적인 의미를 지니며, 그 모든 메시지는 신앙 건덕상(建德上) 유익하다(신30:6; 호14:2; 슥6:9-15).
<모형론적 성경해석이란 무엇인가?>
상징적 성경 해석
우선적으로 기억할 것은 모형론적 성경해석이란 성경에 대한 상징적 해석이라는 상위 범주에 종속된 하위 범주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상징적 성경해석의 본질을 먼저 다룬 후 상징적 성경해석과의 관련 속에서 모형론적 성경해석을 다루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여진다.
# 상징적 성경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좁은 의미에서의 상징적 성경해석이다.
그것은 상징적 언어를 사용한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방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 23:1)고 노래했다.
여기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여호와가 짐승인 양을 치는 인간 목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비유적인 혹은 상징적인 의미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같은 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비유적인,상징적인,시적인표현이다.
이렇게 비유적인, 상징적인, 시적인 언어와 표현을 사용한 성경본문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할 때에는 심각한 혼란과 오류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여호와는 문자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목자’가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이며, 우리 역시도 문자적인 의미에서 ‘양’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서 ‘양’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표현법에는 직유, 은유, 제유, 비유, 유비 등이 포함된다. 성경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 언어와 표현을 해석하는 방법이 바로 좁은 의미에서의 “상징적 성경 해석”을 의미한다.
(2)넓은 의미에서 상징적 성경해석이 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을 일단 문자적/문법적/역사적(literal/grammatical/historical)인 방법으로 해석한 후 그 성경 본문이 가지고 있는 ‘보다 충만한 의미’ (sensus plenior)196)를 밝히는 해석법이다. 여기서 ‘보다 충만한 의미’란 ‘영적 의미’(spiritual sense), ‘상징적 의미’ (symbolic sense) 혹은 ‘신학적 의미’ (theological sense)를 뜻한다.
즉, 상징적 성경해석의 전제는 성경 본문이 원래의 기록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본래적 혹은 문법적, 역사적 의미를 넘어서,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께서 담아 놓으신 보다 깊고, 풍성하고, 충만하고, 숨어 있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성경 해석법이다.
그래서 성경본문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어떤 성경본문이 단일한 의미(single sense)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 (doublesenses) 혹은 다중적 의미 (multiple senses)를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다.(삼중계시,오중복음등)
상징적 성경해석과 관련해서 오랜 교회 역사 동안 기독 교회 내에서 큰 영향을 미친 해석법이 바로 모형론과 예표론(typology)이다.
모형론과 예표론이란 구약성경에 기록된 사람, 사물 (동물, 식물 포함), 사건, 제도들이 그 당시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 속에서 문자적인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모형과 예표로서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상징하는 이중적 혹은 다중적 의미를 갖는 다고 보는 성경해석법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구약의 사람, 사물, 사건, 제도들을 모형 (type), 예표(prefigurement), 그림자 (shadow)라고 부르고,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원형 (antitype), 실체 (substance), 몸(body)이라고 부르는 해석법이다.
# 여기서 기억해야할 것은 신약성경 자체가 모형론과 예표론을 사용해서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히브리서이다.
히10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는니라” (히10:1)고 증거한다.
이 말은 구약의 율법은 그림자, 모형, 예표일 뿐이며 그것의 원형, 참형상,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대속사역임을 의미한다. 신약성경 자체가 구약에 대한 모형론적/예표론적 해석을 실행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 해석은 구약성경에 대한 정당한 해석방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상징적 성경해석과 모형론의 역사>
1) 예수님과 사도들
(1) 상징적 성경해석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하셨고, 상징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셨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대표적인 실례가 요2장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성전”이란 예루살렘에 물리적으로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친히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은 요6장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자신을 “세상의 빛” (요8:12) “양의 문” (요10:7) “선한 목자” (요10:11) “참 포도나무” (요15:1) 등의 상징적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계시하셨다.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한 성경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은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넘어서 상징적인 해석 방법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밀가루나 쌀로 만든 떡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적인 양식을 주시는 분이며,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시고. 그 비유을 풀어주시는 상징적 해석작업을 친히 수행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상징적인 성경해석의 열어 놓으셨다.
(2) 모형론적 성경해석
예수님은 또한 넓은 의미에서의 상징적 성경해석을 수행하셨다. 즉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을 실행하셨다.
대표적인 실례가 요3장14절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민수기에 기록된 대로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사건이 그 시대의 문자적/역사적 의미를 넘어 장차 죄인의 대속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예수님은 요6장에서 유대인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자신을 비교하셨다. 광야의 만나는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예표요, 그림자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모형론적 성경해석의 본질과 방법을 요약해 주는 구절이 바로 요5:39절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역사와 율법과 시와 잠언과 예언 등 다양한 장르의 본문을 포함하고 있지만,
결국 모든 구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임을 확인시켜주신 것이다.
동시에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문자적/문법적/역사적 해석을 넘어서, 영적/신학적/상징적/예표론적/모형론적/기독론적 해석으로 나아가야 함을 확증하신 것이다.
신약계시를 기록한 사도들 역시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따랐다.
대표적인 것이 사도바울의 예표론적/모형론적인 구약 해석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1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그들이 단체적으로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해석하고, 광야에서 물을 낸 반석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과 예표로 해석함으로써 구약성경에 대한 상징주의적, 예표론적 해석을 수행했다.
사도 바울뿐 아니라 사도 요한, 사도 베드로, 사도 마태 그 외의 거의 모든 신약성경의 기자들 역시 모형론적/예표론적인 관점에서 구약성경을 해석하고 그 해석 내용을 신약계시 기록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모형론적/예표론적 성경해석이,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정당한 성경해석방법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2)본론(本論)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요5장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을 구속사중심, 예수님 중심으로 봐야함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그 계시의 비밀을 알수가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하였고,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2:13)라고 하였기에
영적(성령)으로 듣고 봐야 그 계시의 비밀을 알수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영의눈과 영의귀가 활짝열려서 말씀의 비밀을 깨닫는 복된 시간 되시기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삭은 참 바보 같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생명과도 같은 귀중한 우물을 매번 빼앗기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보 같아 보이는 이삭의 삶은,
진정 바보같은 삶이 아니라 놀라운 축복의 삶이었습니다.
<먼저 이삭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1) 아브라함 100세에(B.C. 1890) 사라의 몸에서 출생한 아들(창21:-3,마1:2).
(2) 성품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정직함
(3) 25세에 부친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결박하여 제단에 올려 놓고 잡아 제사하려고할 때 효심이 극진한 그는 조금도 원망이나 반항이 없었음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모형(창20:1-5,22:2-13).하나님의 자기 계시
(4) 40세에 외종형 부두엘의 딸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여 60세에 쌍동이 에서와 야곱을 낳음(창24:67, 25:20-26).
(5) 흉년을 피하여 그랄에 거하는 중 그 아내를 누이라 하였다가 탄로되었으나 거기서 농사로 거부가 되니 그곳 사람들이 시기하여 우물을 메우니 다른 곳에 옮겨 팠더니 블레셋이 따라 다니며 메웠다.
(6) 나이 많아서 장자 에서에게 축복하려는 것을 야곱이 알고 가장하여 들어 가니 눈이 어두운 이삭은 속아서 축복하였고 에서가 축복을 빼앗기고 야곱을 죽이려 하니 야곱을 불러 다시 축복하고 이르기를 밧단 아람에 가서 외삼촌 라반의 딸에게 장가들라 하여 보냈다(창27:28:1-4).
(7) 180세에 헤브론에서 별세하니 막벨라굴에 장사하였다(창35:28-29).
오늘 이삭과 우물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축복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의 시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이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보통 아들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아들,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을보면 이삭의 삶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이나 요셉처럼 극적인 삶의 내용이 별로 없습니다. 영화로치면 그냥 밋밋합니다.
그러나 이삭의 생애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이삭이 우물을 많이 파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물 파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기가 쉬운데, 이삭의 우물파는 이 내용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이삭의 신앙과 인격과 비전을 엿볼수가 있습니다.
창26장에 보면 이삭이 우물을 6번이나 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 아브라함때에 팠던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매운것을 다시 파서 사용했고, 나머지 5번은 이삭이 판 우물입니다.
5개 중에 4개의 우물 이름이 나옵니다.
1)에섹(시기) 2)싯나(반대)
3)르호봇(넓은곳) 4)브엘세바(맹세/일곱)
여러분!
우리가 다 아는대로 중동 땅은 물이 몹시 귀한 광야와 사막의 땅입니다. 거기는 물이 없으면 사람도 가축도 식물도 못삽니다.
지금이야 첨단 장비들이 즐비하게 있어 쉽게 우물을 팔수 있지만, 당시에는 중동 땅에서 우물 하나 파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지금도 많은 지역에서 물이 없어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물선교회에서 어려운 지역마다 찾아다니며 우물을 파주며 선교하고 있습니다.
이삭의 시대에는 보통사람들은 평생에 우물 하나도 파지 못하고, 그저 남이 파 놓은 우물물을 마시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 제가 어릴적 한 55년전만해도 동네에 공동 우물이 있어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와 줄을서서 물을 길어가야 했습니다.
가뭄이 오면 물이 없어 난리가 아니었죠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 광야와 사막의 저 중동땅에서는 물이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저 땅에서 무려 여섯 번이나 우물을 팠는데, 파는 곳마다 물이 솟아나서 자신의공동체와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마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이삭이 하나님이 복을 받아 하는 일마다 잘되고 번성케 되니, 원주민(블레셋)들이 이삭을 시기하여 그의 우물을 빼앗으려 시비를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물때문에 수시로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역사적으로 물때문에 많은 곳에서 많은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물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죽고 죽이고 빼앗고 사는 시대이니 우물때문에 분쟁이 나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물이 너무 귀하기에 빼앗는자도 목숨걸고 싸우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또한 목숨걸고 싸우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물 때문에 분쟁이 날때마다 이삭은 생명과도 같은 물이 나오는 우물을 지키려고 싸우지도 않고 순순히 우물을 양보하여 그들에게 주고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골짜기로 옮겨가서 터전을 잡고 다시 또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지하수가 솟아나 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삭이 판 우물로 원주민(블레셋)들이 쳐들어와서 다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물때문에 분쟁이 일어나면 싸우지도 않고 바보처럼 양보하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에 가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삭의 우물을 빼앗으며 괴롭히고, 이삭을 쫒아냈던 강퍅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난것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삭을 몰아내고 우물을 빼앗은 우리는 늘 이렇게 빈곤하게 살아가는데, 우물을 빼앗기고 바보처럼 물러난 이삭은 어찌하여 가는 곳마다 저렇게 번성하며 잘 사는가?”
그들은 그것이 늘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물을 빼앗던 그들이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이삭이 바보스럽지만 이삭이 믿는 하나님이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시란 사실을 알게 된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삭은 어수룩했지만 그가 믿는 하나님이란 분이 엄청난 능력이 있는 분이라서 이삭이 가는곳마다, 하는일마다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이 믿는 하나님이 저토록 위대하시니 우리가 이삭과 평화롭게 지내야겠구나, 안그러면 우리가 화를 당하겠구나”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삭을 쫒아냈던 족장 아비멜렉이 이삭을 찾아와 화해를 요청하였습니다.
“아비멜렉이 …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로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26:26~29)
이삭은 아비멜렉의 화해 요청을 받아들여 화해의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드디어 그 땅에 평화가 온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삭이 다시 우물을 팠더니 물이 펑펑 솟아났습니다.
이삭이 그 우물 이름을 ‘브엘세바’ 즉 ‘약속의 우물’이라 지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 보았던 창26장 말씀은 이삭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삭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이삭의특징
1)절대순종의 사람이다.(번제단의 제물됨)
2)절대믿음의 사람이다.(흉년에 애굽으로가지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랄에 거함)
3)온유한 사람이다.(빼앗겨도빼앗겨도 싸우지 않고 참는다)
이삭이 왜 그렇게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물을 파고, 양보하고, 또 빼앗기고 할지라도 블레셋과 싸우지 않고 살았을까요?
이는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고,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창26:1-5) 이삭은 이 약속을 붙잡고 산것입니다.
3)결론(緖論)
오늘 본문의 이삭의 우물 사건이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깨닫고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영적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
이삭의 삶은 우물파는 삶이었습니다.
왜 성경은 이삭의 우물파며 사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았을까요?
이 사건 속에 담긴 계시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이 사건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1)우물의 의미입니다
구약의성전,신약의교회/참성전이신예수님
(2)물(생수)의 의미입니다
물은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말씀이요, 또한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 우물과 물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참성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물의 물은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히 마르지 않고 흘러나오는 영원한 생명수, 성령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7-39)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면 자신을 통해서 흘러 나오는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마시게 될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광야와 사막땅에서 일생동안 우물을 팠고, 그 우물을 통하여 부족함이 없는 물을 공급받으며 복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약에서 우물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요4장에 보면 한 여인이 광야같은 세상에서 목말라 헤매다가 한 우물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그러니까 여인이 주님께 말합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그런데 주님께서 난데없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요4:16)
깜짝놀란 여인이 대답합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4:17-18)
왜 주님은 갑자기 물이야기 생수이야기 하시다가 남편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이 여인의 목마름을 일깨워 주신것입니다
이 여인의 목마름은 무엇입니까?
인물인지, 재물인지, 성적쾌락인지, 마음인지, 사랑인지…암튼 목마름을 채우려…
남자를 5번이나 만나 목마름을 해결해 보려했으나 만족을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어찌어찌하여 이제 6번째 남자를 만나 목마름을 채워보려 했으나, 이 사람도 또 아닌것 같습니다.
갈등하고 있는중에…
주님께서 “네 남편 데려와라” 하니까
“없습니다”고 대답한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인간은 이 사마리아 여인처럼 목마름에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어떤이는 재물(돈)에 목마르고,
어떤이는 쾌락(술,도박,마약)에 목마르고,
어떤이는 세상 지위와 명예에 목마르고,
어떤이는 권력과 권세에 목마르고,
어떤이는 세상의 지식에 목마르고,
어떤이는 정과 사랑에 목마르고,
6남편을 만나기까지 헤매던 여인처럼,
인생의 목마름으로 이리 헤매고, 저리헤매고 일평생 헤매고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울증,자살충동,애완견집착,술,마약,도박,동성애,무한젠더등,이생의 모든 목마름은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목마르고 목말라하며 살아가는게 인간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위에서 말한 이런것, 육신의것, 땅의것으로는 인간의 목마름을 해결할수가 없습니다.
이 목마름의 갈증은
오직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만나야만 해결이 됩니다.
인생의 목마름으로 일생을 해매이던 사마리아 여인이 7번째로 생수의 근원되신 참신랑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토록 오랜세월 해결하지 못했던 이 여인의 갈증이 일시에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이렇게 외칩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요4:28-29)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생수의 말씀, 생수의 은혜를 받아마셨더니…지금껏 목말랐던 모든 목마름이 순식간에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우물에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내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는 “그리스도”(요4: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의 물은 먹어도 먹어도 목마름니다.
그러나 완전한 신랑되신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고 하셨습니다.
이 생명수는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에서 완전하신 신랑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마르지 않고 흘러 나올 것입니다.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2)
이 생수가 곧 예수님에게로부터 영원토록 마르지 않고 흘러나오는 생명수 곧 그의 말씀과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생수의 근원되신
참우물예수님, 참신랑되신 예수님을 굳게믿고 오직예수 신앙으로 살아갈때, 광야같은 이 세상을 더 이상 헤매지 않게 될것입니다.
참신랑되신 주님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고 사시므로 주님 주시는 말씀과 성령의 은혜안에서 날마다 기쁨으로 감사찬송하며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예수! 오직믿음!
GOD Bless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