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시조의 효용>, <<시조시학의 현대적 탐구>>(푸른사상, 2024)의 일부입니다.
3) 시조만이 시절가조인가
우리는 흔히 시조를 시절가조(時節歌調)라 하여 그 시절 세태를 노래해온 장르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단초는 시조의 가장 특징적인 표현방법이 우의(寓意) allegory라는 데 있다. 알다시피 우의는 시절 세태를 즐거이 노래하거나 개탄하는 데 있어 현실을 직접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자연세계에서 소재를 빌려와 그 이면에 작자의 뜻을 숨겨 놓는 방식이다. 그러기에 고려 말 공민왕 때 충신 이존오는
구름이 무심(無心)탄 말이 아마도 허랑(虛浪)하다
중천(中天)에 떠이셔 임의(任意)로 다니면서
구타야 광명(光明)한 날빗츨 따라가며 덥나니 -이삭대엽(二數大葉)
라고 노래함으로써 공민왕(光明한 날빛)의 정사(政事)를 흐리게 하는 간신 신돈(구름)의 횡포를 우의적으로 드러냈다. 높이 떠 있는 구름이 그냥 떠있는 게 아니라 광명한 날빛을 따라다니며 덮어서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우의의 방식은 사대부와 기녀 간의 수작시조(酬酌時調)에서도 볼 수 있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업시 길을 나니
산의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마자시니 얼어잘가 하노라 -이삭대엽(二數大葉)
널리 알려진 임제의 시조다. 이에 화답하여 한우(寒雨)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어이 얼어 잘이 므스 일 얼어 잘이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듸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맛자신이 녹아 잘가 하노라 -이삭대엽(二數大葉)
이렇게 주고받은 시조는 세간의 이해대로 임제의 동침 제의에 동의하는 한우의 의사표현이며 이것이 일차적 우의다. 그런데 북천을 임금이 계신 조정의 우의로 보면 눈이 오고 찬비가 오는 자연현상은 임제에게 닥친 부정적 정치현실을 뜻하는 풍자적 우의로 이해된다.
시절가조가 세태를 노래한 것이라면 정철과 진옥이 송곳(남성 상징)과 골풀무(여성 상징)를 운운하며 언어유희를 즐긴 놀이 또한 세태 속의 풍경이다. 그러고 보면 시조가 시절가라 하여 정치사회 현실이나 세태를 노래한 것이라는 데 의문이 생긴다. 시라는 것이 당대의 현실을 노래한 것이 아닌 것이 어디 있을까. 신라시대에는 향가로서 당대인들의 세계관을 노래했고 고려시대에는 대표적 장르인 속요로서 고려인들의 삶의 모습을 노래했다. 조선시대 또한 대표적 장르인 가사와 시조로 당대인들의 세계관이며 세태와 습속을 노래한 것이다. 현대시로서 자유시와 시조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당대적 체험과 욕구, 꿈과 현실을 노래하는 시절가요, 시절가조 아닌가. 우리가 당대의 세계관을 지니고서 당대인의 습속과 세태를 노래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겠다. 모든 시는 시절가다. 다만 시대를 초월한 시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시절가조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일차적 해답은 시조라는 명칭의 기원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시조라는 명칭은 영조 때 사람 신광수(1712~1775)의 『석북집(石北集)』 「관서악부(關西樂府)」에 처음 보이는데
일반으로 시조의 장단을 배열한 것은 장안에 사는 이세춘으로 비롯된다
(一般時調排長短 來自長安李世春)
는 기록이다. 그 후부터는 시조라는 명칭이 종종 쓰이는데, 정조 때 사람 이학규의 『낙하생고(洛下生稿)』에 의하면
그 누가 꽃피는 달밤을 애달파 하는고, 시조가 바로 슬픈 회포를 불러 주네
(誰憐花月夜 時調正悽懷)
라 썼고, 시조에 대한 주해에서
시조란 또한 시절가라고도 부르며 대개 항간의 속된 말로, 긴 소리로 이를 노래한다 (時調 亦名時節歌 皆閭巷俚語 曼聲歌之)
고 적고 있다. 철종 때 사람 유만공(1793~1869)은 서울의 풍속을 월령가체 『세시풍요』에
보아 등 기생의 무리 자못 수다스러워 길에는 아리따운 옷맵시가 널려 있네
시절단가 그 가락이 흥건한 가운데 찬바람 밝은 달에 3장을 노래하네
(寶兒一隊太癡狂 載路聯衫小袖裝 時節短歌音調蕩 風冷月白唱三章)
라는 7언시를 남겼다. 이로 미루어 ‘시조’라는 명칭은 조선 영조 때 비롯된 것으로 시절가조 즉 ‘당대의 유행가조’라는 말이 줄어서 된 말이다. 엄밀히 말해 시조라는 명칭은 음악 곡조의 명칭이다. 그것을 문학적 명칭으로 그대로 받아서 쓰는 것. ‘시조’는 문학상으로는 시조 양식을 가리키고 음악상으로는 시조창이라는 노래하기 방식을 가리킨다. 잘 알다시피, 시조창과 시조문학은 음악예술의 영역과 문학예술의 영역으로 명확하게 분리되었다.
앞에 인용한 옛시조(노랫말) 끝에 이삭대엽(二數大葉)이라는 명칭을 부기하였다. 이삭대엽은 가곡창이나 시조창이 불리던 당시에 노랫말을 얹어 부르던 악곡 명칭이다. 이 옛시조들은 이삭대엽이라는 아주 느린 악곡으로 부른다. 이 짧은 노랫말을 5장 형식의 가곡창으로 부르되 이삭대엽이라는 악곡에 얹어 부르면 12분 정도가 소요된다. 3장 형식의 시조창으로 부르면 4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러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5장 형식의 가곡창보다는 좀 더 빠르고 쉽게 부를 수 있는 3장 형식의 시절가(시조, 시절가조)가 유행하게 된 것. 그 시절에 가곡창보다 빠르게 부르는 시조창이 생겨 유행했다는 것이다.
시조나 시절가 또는 시절가조는 음악적 용어로서 당대에 유행한 가곡창보다는 빠르게 부르는 시조창 형식을 가리킨 것이다. 노랫말을 두고 부른 용어가 아니라 노래의 빠르기 형식을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자연이나 인사(人事), 이치(理致)와 흥취(興趣) 그 무엇을 표현하거나 조화와 안정을 요구하는 미적 욕구에 따라 시조장르를 선택하고 독자는 그에 따른 기대지평을 가질 수 있다. 시조가 당대의 정치사회현실을 꼭 염두에 두고 써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순수서정시든 정치시든 생태환경에 관한 시든 주제는 자유다. 다만 현대시조가 독자 대중이 공감할 수 있도록 보편화하지 못하고 개인 서정에 지나치게 함몰되는 경향이 우세하다는 점은 지적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