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한 평생 그리고 이제 여기
문은희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
월요일과 수요일 개별상담을 합니다. 각자 살아온 햇수만큼 자신과 환경을 파악합니다. 어느 국회의원이 오늘의 20대의 특징을 정치상황과 연관 지어 말했다가 혼이 나서 사과하는 입장에 섰었습니다. 꼭 한 요인에만 연관 짓고, 결과를 획일로 직결했다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되었지만 우리 모두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그리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오늘의 20대가 정말 건강하게 문제가 없는지 스스로 반성하려 하지 않고 발끈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이기도 합니다. 늙은이가 되어 늙은이의 문제점을 지적받으면 스스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삼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지난 토요일 여진이 첫 돌이었습니다. 이제 제법 걷기도 합니다. 그 아이는 한 해와 열흘 남짓을 살았습니다. 이제까지의 여진의 평생이지요. 여진이 자기 나름으로 자신과 환경을 인식하고 사회화되고 있습니다. 어제 있었던 일입니다. 윤미 이모가 해준 점심을 맛있게 먹고 예지와 오빠가 재미있게 노는 데 끼고 싶어 아기들을 위한 높은 걸상에서 엄마 힘을 빌려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후식을 먹는 어른들의 식탁 위가 궁금해졌습니다. 높은 걸상에 앉으면 식탁 위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여진이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낑낑 거리며 오르고 싶다는 표시를 합니다. 곁에 있던 언니가 도와주려 합니다. 그런데 그 언니는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도움받기를 거절합니다. 익숙하게 아는 지영 이모가 올려주니 만족합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누구를 도와줄 것인가? 우리는 평생 살면서 이렇게 이웃과 생소한 사람을 구분하며 익혀갑니다. 집안에서 누가 제일 힘이 센가? 누가 만만한 사람이고 또 불쌍한 사람인가? 때마다 판가름 하며 삽니다. 믿을 사람과 믿지 못할 사람을 구분합니다. 돌쟁이 여진이는 자기가 필요한 만큼 알고 있습니다. 자기의 궁금증을 풀고 싶은 욕구를 알고, 식탁의 높이와 자기의 눈높이를 알고, 걸상을 쓰는 연장 개념도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시를 합니다. 이 할머니가 알아보게 표시합니다. 그런데 수십 년을 살아온 우리는 자기의 필요와 욕구를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그 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물어보게 됩니다. 혼자할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하고, 도움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살면서 걸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여 순조롭게 풀어가는 품을 길러야 합니다. 그걸 해내지 못하면 자기 혼자 할 수 없는데, 자기 생각의 틀로만 주장하며 남 탓, 환경 탓을 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사람답게 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 모두 제대로 건강하게 자라고 바뀌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진이만 자라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 80년을 산 늙은이인 나도 이제도 자라고 바뀌어야 합니다. 몸으로는 다 자랐고, 오히려 줄어들고 있지만 마음은 더 자라고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보면 “짐승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본으로 사람답게 살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 기본에 더해서 여러 가지 부분이 자라고 마침내 전체로 완성되기를 기대합니다. 모람들이 아기를 낳아 데려오면 그 아이들이 처음부터 ‘아기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마주 보고 웃기도 하고, 옹알이도 하고, 뒤지고, 기고, 앉고, 서고, 걷고, 말하고, 노래하고 춤을 춥니다. 걷기 시작한 동주는 아예 달리기를 합니다. 영준이는 멋지게 춤을 춥니다. 걱정하며 학교에 간 동화는 하루만에 걱정도 싹 사라졌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잘 보고 알고 있을까요? 그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고 있나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사람들을 간혹 봅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기억하기 괴로울까요? 주변 사람들이 관심두지 않고 무심하게 넘겨, 무슨 경험이었던지 아예 머리에 입력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이제라도 ‘이제’의 나를 알고 더 건강한 ‘올제’의 나를 위해 ‘어제’의 나를 찾아가기로 합시다. 지난날의 자기의 역사가 이제와 올제의 자신을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