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원문수록, 학술고증의 완결판)
- 새로운 발견으로 이순신의 필적을 복원한 불후의 명저 -
이순신 저 노승석 역주
도서출판 여해 2021년 03월 22일 발행
책소개
최대 규모의 문헌고증으로 국보 76호 난중일기를 완전 해독한 교감 역주본
새로운 발굴 자료와 고증 내용을 망라한 소장가치 높은 불후의 명저
2014년 7월에 출간된 <교감완역 난중일기 증보판>(여해)이 명량 영화에 대본이 되었기 때문에 이때 폭발적인 인기를 받아 베스트셀러작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명량 영화 스크린 자막에도 내용이 다수 인용되었다. 그후 이 책은 두 차례 개정을 거쳐 2021년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으로 출간되어 교감본의 전통을 잇게 되었다. 이 역시 영화 노량을 제작하는데 모티브가 되었다.
특히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에 실린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전사>논문은 학술적으로 새롭게 고증한 논문이므로 주목할만하다. 노량해전 관련한 여러 사료들을 토대로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그 당시 이순신의 전사 상황을 자세히 분석하였다. 항간에 이순신이 자살했다는 낭설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전사설의 근거가 되는 이 논문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노승석 박사는 2022년 11월 <경자년 대통력>에 유성룡이 적은 이순신의 전사기록을 처음 해독하여 발굴하였는데, 이 역시 학계에서는 전사설에 근거가 되는 중요한 내용으로 평가하였다.
1598년 무술년 초부터 일본의 수륙병진 작전이 시작되어 순천 왜교성에 주둔한 일본군이 분탕하자 명나라의 경리 양호는 조선군과 함께 수륙 4로로 정벌을 계획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군문 형개(邢玠)는 북방에서 서울로 돌아와 양호(楊鎬)와 상의하여 마침내 군사를 나누어 수륙 4로를 만들었다. 즉 동로는 제독 마귀가 맡아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공격하고, 중로는 제독 동일원이 맡아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를 공격하고, 서로는 제독 유정이 맡아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공격하고, 수로는 제독 진린이 맡아 해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후시미(伏見城)에서 병사(病死)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은 일본군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왜교성 전투가 9월 20일부터 10월 6일까지 모두 일곱 차례 치러졌는데
명나라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실패했지만, 해상을 담당한 명나라 제독 진린과 이순신은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계속 이어갔다.
같은해 10월에 일본의 히데이에(秀家)와 여러 장수들이 귀국하기 시작하여, 11월 10일 사이에 이순신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를 계획하였다. 유정과 진린은 일본의 뇌물을 받고 일본군의 귀환을 허가하려고 했으나 이순신의 강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11월 17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남해에 있는 일본군에 지원을 요청하자, 18일 유시(酉時)에 사천의 요시히로와 남해의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산의 데라자와 마사나리(寺澤正成)와 다카하시 무네마스(高橋統增) 등이 연합한 일본선 500여 척이 노량 일대에 집결하였다.
이튿날 이순신인 일본의 지원병이 오기 전에 묘도를 출발하여 조선수군은 노량 관음포에 주둔하고 명나라 수군은 곤양 죽도에 주둔하고 있는데, 일본군은 사천 수로를 출발해서 왜교를 향하고 있었다. 19일 삼경에 이순신이 배 위에서 하늘에 빌기를, “이 원수를 제거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후 새벽 2시경부터 새벽까지 조명군과 일본군이 격전을 벌였다. 관음포에서 이순신은 일본군을 추격하다가 반격하는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