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과 임금체계, 다시 논의의 자리로
(매일노동뉴스)
직무급 이야기를 꺼내면 이상하게 논의가 멈춘다.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들여다보기도 전에 너무 익숙한 뻔한 반박이 자동으로 재생된다. 마치 버튼 하나를 누르면 늘 같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런데 그 반복 때문에 정작 다뤄야 할 중요한 논점들이 가려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연구자의 작업이 사회적 논쟁의 장으로 소환되는 것은, 그 결과가 동의이든 비판이든 기쁘고 고마운 일이다. 다만 최근 칼럼들에서 소개된 제 견해 중 일부는 이미 보고서 전문·발제문·공개 발표 영상 등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데, 본래 맥락과 다소 다른 방향으로 설명된 부분이 있어 보다 정확히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다.<본지 장진희의 ‘여성과 일’ 칼럼 2025년 11월25일자 “직무급제와 정년연장이 무슨 상관입니까” 12월2일자 “직무급제와 정년연장의 잘못된 만남” 참조>
문제는 나이가 들어도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첫째, ‘정년까지 닿지 못하는 80% 노동자’ 논의의 핵심은 직무급이 아니라 고령층이 계속 일할 수 있는 안정적 시간제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요지는 고령층에게 이미 존재하는 유연성 위에 안전망과 안정성을 더하는 구조를 마련하는 데 있다. 2025년 고령층부가조사에 따르면 노동자 세 명 중 한 명이 평균 52.9세에 해고·경영상 어려움 등 비자발적 이유로 정년 전에 주된 일자리에서 이탈한다. 이후 55~79세 경제활동인구의 60%, 65~79세의 절반이 계속 일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일자리는 단시간·일용·비정규로 이동하고 직업도 단순노무 중심으로 재편되며 임금은 가파르게 낮아진다. 법정 정년이 존재해도 다수가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다.
따라서 노동시장 다수(80% 이상)를 위한 논의는 “나이가 들어도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여야 한다. 나는 오랫동안 한국 노동정책을 지배해 온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접근만으로는 고령층 고용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미 중고령층의 고용 형태는 비정규·단시간·특수고용 등 충분히 유연하며, 문제는 낮은 임금, 경력·숙련의 미인정, 사회보험 사각지대라는 구조적 불안정성에 있다.
고령사회라는 새로운 조건에서는 기존의 시각을 넘어서는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오랫동안 직종·업종 중심의 조직 전략을 통해 큰 성과를 만들어 왔지만, 이제 고령층을 연령 기반의 취약집단으로 함께 바라보는 전략이 더해질 필요가 있다. 정부 역시 이를 단순한 시장의 자연적 결과로 방치할 것이 아니라, 고령노동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기준과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고령자 고용에 한해 기존의 정규직·비정규직 이분법을 넘어서, 유연성과 안정성을 함께 갖춘 새로운 시간제 일자리 모델을 제안해 왔다. 고령층의 일은 이미 유연하므로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위에 안정성을 더하는 정책 설계라는 내용이다. 문제의식은 바로 이 지점에 있으며, 앞으로 이 논의가 보다 현실적이고 의미 있게 발전하길 기대하고 있다.
권리는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둘째, 정년이 실효성을 가지려면 임금체계와 고령자 고용관리라는 구조적 조건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 앞선 칼럼에서는 정년은 권리이고 임금체계는 노사 교섭의 사안이므로 논의를 연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주장을 했지만, 권리는 선언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실제 노동시장 속에서 작동하려면 그에 맞는 구조가 필요하다. 정년이 권리라고 말하는 것과 그 권리가 현실에서 지켜지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한국은 이미 60세 정년제를 도입했지만 조기퇴직·명퇴·정년 이전 구조조정 등 다양한 우회 관행이 지속돼 왔다. 법정 정년이 곧 실질적 고용유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확인됐다. 따라서 정년을 실제로 보장하려면 고령 노동자가 어떤 직무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지, 그 직무에서 어떤 임금곡선이 현실적인지, 기업은 어떤 방식으로 고령자 고용을 관리할 수 있는지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
이는 정년을 조건부로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정년이 지속 가능한 제도로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기반을 마련하자는 문제의식이다. 정년의 권리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권리가 현실에서 실현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나는 법정 정년 연장 자체에 분명히 찬성한다. 다만 지금처럼 20%도 채 되지 않는 노동자만이 법정 정년에 도달하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정년제의 의미는 반쪽에 머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노동자가 실제로 정년에 도달할 수 있을지, 이 질문을 관련 전문가들이 보다 깊게 다뤄주길 기대한다. 정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도달 가능한 정년을 만드는 일, 이것이 지금 필요한 논의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임금체계 개편과 직무 논의가 반복해서 제기되는 것이다. 결국 필요한 것은 법정 정년 연장을 넘어 그 권리가 실제로 작동하도록 뒷받침하는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직무급, 만능 해법이라 말한 적 없다
셋째, 직무급을 만능 해법으로 제시한 적은 없다. 더구나 개별 기업 수준에서 직무급 도입은 본래 직무급의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내가 말해 온 직무급은 어디까지나 산별교섭 기반이 갖춰져야만 작동할 수 있는 제도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지불능력의 격차가 크고 기업별 교섭체계가 고착된 한국에서 직무급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나 역시 갖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연구자가, 그리고 나 또한 사회적 직무급을 포함한 직무가치 기반 임금체계 논의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의 이중노동시장 구조가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고, 불완전하나마 격차를 완화할 수 있는 경로를 찾고자 하는 고민에서다.
이런 생각 끝에 나는 산별교섭 법제화를 일거에 추진하자는 단선적 접근보다 이미 산별 체계를 갖춘 보건의료노조·금융노조 등에서 시범적·단계적으로 직무급 교섭을 시도해 보자는 제안을 했다. 즉 가능한 영역부터 제도 실험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또한 2차 노동시장(비정규직·하청·돌봄 등 주변부 영역)에서 직무·숙련·경력 기준을 표준화해 가장 취약한 곳부터 직무급이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는 박명준 박사의 분석을 참고해 논의를 확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2차 노동시장 영역부터 산별교섭의 효력확장·표준화·사회적 조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는 박 박사의 주장 역시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결국 내가 강조해 온 문제의식은 단순하다. 직무급을 일률적으로 확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실이 허락하는 방식으로, 단계적으로,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넷째, 연구에서 불편한 통계나 사실이 드러났다면 이를 부정하기보다 그 구조적 의미를 분석하고 그 위에서 대안을 설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사실만 취해 논리를 구성하는 방식으로는 건강한 사회적 논의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첫 번째 칼럼은 1년 차와 30년 차 임금 격차가 연공성 때문이 아니라 30년간의 성장 누적 효과 때문이라며 한국의 임금 연공성이 과장돼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비교는 모두 2023년 한 시점의 단면 분석이며, 그 수치에는 이미 과거의 성장률과 물가 변동이 반영돼 있다. 따라서 여기에 다시 30년간의 경제성장을 끌어와 설명하는 것은 단면 분석과 시계열 분석을 혼동한 기본적 오류다.
또한 정년연장이 청년고용에 일부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연구나 60세 정년제가 일부 사업장에서 조기퇴직을 유발했다는 분석 역시 경총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KDI나 한국노동연구원 등에서 제기된 실증연구들이다. 연구방법에 따라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현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구체적인 대안을 설계하는 것이 노동계 정책 연구자나 활동가의 역할이 아닐까.
우리가 바라는 것은 특정 제도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변한 현실을 정확히 보고, 그 위에서 가능한 해법을 찾자는 것이다. 정년·임금체계·고령자 일자리 문제는 서로 연결된 구조의 문제다. 어느 하나만 떼어 해결할 수 없고, 마주하기 껄끄러운 사실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앞으로 논의가 사실에 기반하고 변화한 노동시장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더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깊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