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연공급의 진화와 생존: 도태 아닌 ‘적응’의 역사
(매일노동뉴스)
1. 현장에서 지켜본 임금체계의 생태계적 관점
오랫동안 노사관계 현장을 다니면서 수많은 기업의 임금체계를 관찰하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노사관계 맥락에서 임금제도가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했는지 그 역사적 과정은 필자에게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연공급 임금체계가 그토록 비판받으면서도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가 연구의 동기를 자극했다. 수년간 한국의 임금체계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연공급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기업 환경과 노사관계 생태계에서 끊임없이 적응하며 ‘적자생존’해온 제도에 가깝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87년 노동체제 성립 이후 5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연공급은 숱한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2. 연공급은 정말 경쟁력을 저하시키나
흔히 연공급은 고비용·저효율의 상징으로 공격받는다. 근속연수만 쌓이면 생산성과 무관하게 임금이 올라가기 때문에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논리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증하는 사례가 많다. 연공급을 주된 임금체계로 사용하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오히려 글로벌 시장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국내 조선 3사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자동차산업 역시 글로벌 판매량 3위라는 성적을 거두고 있다. 주목할 점은 이들 조선업과 자동차 업종의 핵심 임금체계가 여전히 견고한 연공급(호봉제) 기반이라는 사실이다.
연공급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현장의 실증적 성과 앞에서 그 설득력을 잃는다. 오히려 연공급 특유의 고용안정성과 숙련 형성이 국제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고 해석할 여지조차 충분하다. 노사관계를 안정화하는 데도 충분히 기여했다고 확신한다. 실제 독일의 연구자들은 최근 한국의 임금체계에 깊은 관심을 보인다. 과거 우리 노동계가 독일의 직무급을 배우기 위해 부지런히 유럽 출장길에 올랐던 것과 대조적이다.
3. 인간 본성의 보편성과 사회문화의 역사적 산물
임금체계란 결국 ‘어떤 요소를 기준으로 임금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이다.
근속연수를 기준으로 삼으면 연공급, 직무의 가치를 기준으로 삼으면 직무급, 숙련의 정도를 기준으로 삼으면 직능급이라 부른다.
흔히 한국은 연공급, 독일과 미국은 직무급, 일본은 직능급의 대표 국가로 분류된다.
이들 국가의 임금체계에 연공적 요소가 반영되지 않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다. 단지 국가나 기업마다 각 요소의 ‘가중치’를 다르게 선택할 뿐이다.
직무급의 전형이라는 독일의 금속노조 임금체계(ERA)를 보더라도 직무가치를 등급화해 기본급을 책정하지만, 그 안에는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 상승하는 구조를 포함하고 있다.
도요타의 기준임금에 반영되는 ‘습숙급(習熟給)’은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정해져 있다. 미국의 자동차산업 사례에서도 마찬가지다. 2023년 전미자동차노조(UAW)는 GM과 단체교섭에서 이중임금제를 완화하고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을 대폭 인상하기로 합의했다.
이처럼 연공적 요소는 모든 나라의 임금체계에 반영돼 있다.
이는 인간의 노동이 가진 보편적 속성 때문이다.
인간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술에 적응하며 숙련도가 향상되고, 생애주기에 따라 가족을 구성하면서 필요 생계비가 증가한다.
연공급은 이러한 인류의 보편적 생활 양식을 임금제도라는 그릇에 담아낸 결과다.
제도는 진공 상태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행위자들이 선택하고 타협한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4. 한국형 연공급이 진화해온 두 가지 경로
그렇다면 한국의 연공급은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키며 살아남았을까.
필자는 현장에서 경험한 바를 토대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 임금 평준화에 대한 노조의 정책적 의지 때문이다.
연공급은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격차가 무한정 벌어지는 구조적 약점을 지닌다. 시간이 흐를수록 저연차와 고연차 간의 임금 차이가 벌어지고 세대 간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노조는 이러한 부작용을 민감하게 포착했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임금인상을 ‘정률제’ 방식으로 정했다. 이는 고임금자에게 더 많은 인상액이 돌아가는 구조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조는 정률과 정액을 혼합하거나, 아예 ‘정액제’로 전환하는 정책적 결단을 내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자동차다. 호봉제를 공식 도입한 2006년 당시, 기본급 기준 근속 1년차 대비 30년차의 임금은 약 1.84배(금액 차이 85만6천800원)였다. 그러나 20여 년간 정액인상 기조를 유지한 결과, 올해 호봉표를 기준으로 한 동일 근속 간 격차는 1.45배(금액 차 88만5천600원)로 대폭 축소됐다. 과거처럼 정률 방식을 고수했다면 두 집단 간의 차이는 160만원 이상 벌어졌을 것이다. 노조의 개입이 연공급 내부의 불평등을 완화하며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높인 것이다.
둘째, 수당을 통한 ‘직무급적 보완’이다.
한국 임금제도의 특징 중 하나는 수당이 정교하게 발달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경험한 거의 모든 기업에는 직무와 연동된 수당이 존재했다. 노동강도가 높거나 위험한 환경, 특수한 기술이 필요한 직무에는 어김없이 수당이 붙었다. 대기업일수록 이러한 수당의 지급 기준은 매우 합리적으로 설계돼 있다.
노동강도와 직무가치를 등급화해 금액을 차등화하는 방식은 표현만 ‘수당’일 뿐, 실질적으로는 독일이나 미국의 직무급과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기존의 연공급이라는 토대 위에 직무적 요소를 수당으로 덧입혀(Layering) 제도의 경직성을 극복해온 것이다.
5. 연공급의 미래와 새로운 과제
연공급은 계속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의 질문에 직면해 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인 ‘정년연장’은 연공급 체계에 새로운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장에서는 정년연장 입법에 앞서 퇴직 뒤 재고용 방식이 확산 중인데, 여기서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다. 퇴직 전과 동일한 숙련도를 가진 노동자가 재고용되는 순간, 임금은 신입사원 수준(약 60%)으로 떨어진다. 이는 ‘숙련도에 비례해 임금을 준다’는 연공급의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고, ‘일의 가치에 따라 준다’는 직무급의 논리와도 배치된다.
이러한 모순은 향후 정년연장이 법제화될 때 현장의 극심한 혼란을 야기할 폭탄과 같다. 또한 기술의 진보는 기존 수당체계의 근거를 약화시키고 있다. 포디즘 생산방식의 상징이었던 컨베이어 수당, 위험·유해 작업수당 등은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과 자동화 공정의 도입으로 그 존재 이유를 잃어가고 있다. 직무의 내용이 변하면 임금의 구성 항목 역시 근본적인 변화를 피할 수 없다.
6. 혼합형 임금체계와 초기업 단위 교섭
임금 결정 요소를 보다 정교하게 혼합하고 체계화해야 한다.
기존의 호봉표가 가진 ‘생계비 보장’ 기능을 노동력 재생산비에 맞게 곡선형으로 재조정하고, 현재의 파편화된 직무수당을 체계적인 ‘직무급’으로 전환해야 한다.
호봉표 전체를 한꺼번에 직무급으로 바꾸는 것은 노사 갈등만 부추길 뿐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현재의 수당 체계를 정비해 기술 변화에 부합하도록 직무가치 평가 항목을 도출하고, 이를 기본급화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나아가 필자는 연공급이 ‘초기업 단위’ 교섭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봉표의 본질이 생계비라면, 이는 적어도 지역이나 업종 수준에서는 표준화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직무급만이 초기업교섭의 필요조건이라는 인식에서 탈피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지역별 표준 생계비를 기준으로 공통의 호봉표를 구성하고, 여기에 업종별 직무급을 얹으며, 개별 기업의 이익을 성과급 형태로 더하는 ‘3층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이런 모델이 오히려 초기업 단위 임금교섭과 연대임금 정책의 실질적인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형 연공급은 이제 과거와의 결별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더 큰 진화를 준비해야 한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제도의 생명력을 믿고, 노사정이 함께 그 미래 지도를 그려나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