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대만댕이(525m) 노고산(360m) 복호산(333m) (삼각점△223m,가야468) 예리산(361m) 덕은산(293m) (삼각점△195m,경고464) 딧갓(137m)은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백리 밤티고개(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에서 백운리를 잇는 고개)에서 좌측능선상의 산으로
깃대만댕이(525m) 노고산(360m) 복호산(333m) 능선은 기륜2리마을로 내려섰다가 우측능선으로 살아 (삼각점△223m/가야468) 예리산(361m) 덕은산(293m) (삼각점△195m/경고464) 딧갓(137m) 능선을 지나 반성리정류장(경북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에서 끝나는 능선상의 산이다.
깃대만댕이(525m) 노고산(360m) 복호산(333m) (삼각점△223m/가야468) 예리산(361m) 덕은산(293m) (삼각점△195m/경고464) 딧갓(137m)은 국립지리원 지도상 무명봉이나 오록스맵Korea지도에 그 이름이 나오는 산이다.
다만 현 오록스맵Korea지도에는 덕은산(361m)으로 표기되어있어 이를 예리산(361m)으로 정정하고 덕은산은 지도상 293m봉 좌측아래 통일교 연수원 입구에 "덕은"이라는 지명이 있어 덕은산(293m)으로 신규등록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아래 첨부한 두산 백과 예리산성 편에도 대가야읍과 덕곡면으로 통하는 삼거리에서 군도 2호선을 따라 5.5㎞정도가면 덕곡면 소재지인 예리마을이 나온다. 예리산성은 이 마을의 북쪽에서 동서로 길게 뻗은 높이 360m의 야산 정상부에 있다. 현재 산 정상부에는 산불 감시 초소와 민묘 등이 들어서 있다. 고령군 덕곡면에 소재하지만 성주군 수륜면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덕은산이란 이름을 버리는 것이 아까와 덕은산은 지도상 293m봉 좌측아래 통일교 연수원 입구에 "덕은"이라는 지명이 있어 덕은산(293m)으로 신규등록을 제안한다.
▶산행일ː2024년 04월 22일(수)
▶산행지ː 노고산(359.7m) 복호산(332.7m) 덕은산(360.8m) 예리산(292.7m) 깃대만댕이(524.9m) 딧갓(136.9m)
▶코스ː 밤티고개-깃대만댕이-노고산(산성)-복호산-깃대봉[1]-예리산(산성)-덕은산-깃대봉[2]-딧갓-반성리정류장
▶난이도ː B+
▶누구랑ː부산 알피니스산악회
▶시 간ː10:54∼15:47(휴식.점심.목욕포함 04ː52분)
▶거 리ː약 11.95㎞ (오르내림포함 약 13.40km)
▶날 씨ː흐림 구름 (구름조금)
☞태왕고시원(출발점)ː경북 고령군 덕곡면 백리 산 61
☞만하동표석(136km)ː경북 고령군 덕곡면 반성리 746-7
노고산성(老姑山城 )은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노리에 있는 가야시대 산성이다. 노고산성의 건립 연대는 문헌자료가 전하지 않고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다만 노고산성 안팎에서 대가야시대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맞은편에는 대가야시대의 백리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노고산성은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산성임이 분명하다. 이후 신라에 의해 재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성벽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덕곡면 소재지의 덕곡초등학교에서 지방도 290호선을 따라 1.5㎞ 정도 가면 노리 오름실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해발 361m의 노고산(老姑山) 정상부에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노고산성은 정상부에 약하게 솟아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만든 테뫼식의 토석혼축 성이다. 성벽은 가파른 능선면을 정지하여 석축을 쌓고 폭 20m 내외의 대지를 만들었는데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동·서·북은 석축이고 남쪽과 동쪽의 일부는 토석 혼축으로 되어 있다. 평면 형태는 장란형에 가깝다. 성의 둘레는 800m 정도이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고 남쪽의 일부에만 성벽의 아래 부분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크기 25~35㎝ 내외의 할석을 횡으로 쌓았는데, 이 성벽으로 추정해 볼 때 높이는 3m 이상이다. 비교적 평탄한 성안에는 우물자리가 2곳 남아 있고,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는 망대로 추정되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또한 성안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확인이 어렵다.구릉 정상부에는 할석으로 조성한 집주시설 1기가 확인되었다. 집수시설의 규모는 직경 6m 정도의 타원형이다. 성벽 안쪽으로는 삭토로 인해 조성된 폭 5~10m 내외의 회랑도가 길게 이어진다. 성곽 내에는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토기편과 기와 편이 출토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경질옹편은 6세기의 것으로, 굽다리접시 편은 신라식 토기로 7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편년 된다.
노고산성은 임진왜란 때에 축조된 것으로 보기도 하나, 성안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인근의 노리 고분군 등으로 볼 때 대가야시대의 산성으로 여겨진다. 특히 이 지역은 대가천을 따라 성주 방면에서 들어오는 최전방에 해당한다. 따라서 대가야시대 성주방면을 방어하는 최전방 감시성이자 차단성의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신라에 의해 재사용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예리산성(禮里山城)은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예리에 있는 대가야시대의 석축산성이다. 대가야시대에 신라군이 침입하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 예리산성을 축조하였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는 설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실제 예리산성은 대가야시대에 축조되어 신라의 침입을 막는 산성으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리산성의 건립 연대는 문헌 자료가 전하지 않고 발굴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다만 예리산성 내외에서 대가야시대의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인근의 대가야시대의 예리고분군과 능선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대가야시대의 산성임이 분명하다.
예리산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온다. “고령군 덕곡면 예동 뒷산에는 쌓다가 그만둔 산성이 있다. 삼국통일을 염원한 신라와 백제사이에 있는 6가야는 늘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마침내 신라의 진흥왕은 대가야 고령을 제외한 5가야의 항복을 받아냈으나 대가야는 항복하지 않았기에 늘 대가야 정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진흥왕은 이사부 장군을 대장으로 삼고 화랑 사다함을 부장으로 하여 마침내 대가야 정벌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대가야 사람들은 덕곡면 예동 뒷산에 산성을 구축키로 하고 산성을 쌓았는데, 산의 경사가 너무 심하여 산성구축이 매우 어려웠다. 그때 염력을 쓰는 도인(道人)이 찾아와 자기가 산성을 구축하겠다고 하니 대가야에서는 그 사람에게 산성을 쌓게 하였다. 그런데 신라의 염탐군이 이 사실을 알고 신라 군사에게 아뢰니 매월이라는 젊은 여자를 보내어 도인을 미인계로 유혹하였다. 미인의 유혹으로 이 도인은 술에 태운 독약을 먹고 죽어버리고 대가야는 망하고 말았다.” 이 예리산성 설화는 대가야가 신라에 끝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는 고령의 지역적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설화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예리산성이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축조된 산성이라는 점을 잘 시사해 주고 있다. 현재의 성벽은 조선시대인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들이 축조한 것으로 전한다. 대가야읍과 덕곡면으로 통하는 삼거리에서 군도 2호선을 따라 5.5㎞ 정도 가면 덕곡면 소재지인 예리마을이 나온다. 예리 산성은 이 마을의 북쪽에서 동서로 길게 뻗은 높이 360m의 야산 정상부에 있다. 현재 산 정상부에는 산불감시초소와 민묘등이 들어서 있다. 고령군 덕곡면에 소재하지만 성주군 수륜면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예리산성의 형태는 정상부를 중심으로 동쪽 능선으로 일부 내려오고 동북 방향으로 길게 뻗어 전체적으로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다. 산의 정상부에 축조되어 있는 테뫼식 산성인데, 둘레는 800m 정도이다. 정상부의 서쪽에 문지가 남아 있고, 남쪽은 자연 경사면에 석벽을 쌓았으며, 북서쪽은 석축과 자연 경사면을 혼용하였고, 동북쪽은 계곡 능선을 따라 토석 혼축을 하였다.
예리산성의 성벽은 유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대부분의 구간에서 석축으로 조성된 편축 성벽이 확인된다. 이 성벽은 장방형의 돌을 횡으로 일부 쌓고 그 사이사이에 막돌을 채워 넣었다. 유존 상태가 양호한 동쪽 석벽은 현재 14~16단 정도 남아 있고, 높이는 3m 정도이다. 하지만 흘러내린 돌을 고려하면 성벽은 최소한 4m 이상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가야시대의 토기 편과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기와 편들이 많이 산포하고 있다. 특히 동쪽 계곡부 일대에서 다량의 기와 편과 토기편들이 노출되어 있다. 이곳에서 채집된 유물은 지산동 45호분 단계로 추정된다고 한다. 예리산성은 성 내부에서 채집되는 유물로 보아 축조 시기는 5세기말 전후로 추정된다. 예리산성은 노고산성과 운라산성 중간 지점에 있다. 따라서 이 산성은 성주방면의 대가천 유역을 방어하는 가야산~노고산성~예리산성~운라산성~본관리산성~본관리 옥산성~고령 주산성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담당했던 산성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대가야 멸망 이후에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암서원.♣
1794년(정조 18)에 정구(鄭矩, 1350∼1418), 정선경(鄭善卿, 1395∼1442), 정종(鄭種), 정비(鄭秠)를 제향하기 위해 창건된 서원이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반암서당(盤巖書堂)으로 현판을 하였다. 1994년에 노후된 건물을 확대·개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암서원은 여말선초의 문신이었던 정구와 그의 아들 정선경, 손자 정종·정비 등 동래정씨 3대를 모신 문중서원으로, 동래정씨 집성촌인 덕곡면 반성리 원전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정종의 별묘(別廟)였던 곳에 1794년 정충사(靖忠祠)에 있던 정구의 위패를 이안하여 함께 모시면서 반암서원이라 이름하였다.
정구는 자가 중상(仲常), 호는 설학재(雪壑齋)로 1377년(우왕 3)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시부령(典校寺副令)을 지내고, 조선이 개국하자 도승지, 대사헌, 예문관학사를 거쳐 공조판서,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정선경은 자가 선지(善之), 호는 반곡재(盤谷齋)이다. 내섬시판관을 역임하고 아들 정종의 훈공으로 정헌대부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정종은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자는 묘부(畝夫), 호는 오로재(吾老齋)이다. 1442년(세종 24) 무과에 급제하여 세조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3등에 책록되면서 동평군(東平君)에 봉해졌다. 이후 충청도도절제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하였다. 정비는 정선경의 아들로 호는 기우자(騎牛子)이다. 충좌위부사정을 지냈으며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서원은 외삼문인 고경문(高景門), 강당인 반암서당, 내삼문인 수궐문(修厥門), 사당인 세덕사(世德詞)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당에는 ‘숭덕재(崇德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세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사당으로서는 보기 드문 다포 형식으로, 어칸에는 2구의 간포, 좌우 협칸에는 1구의 간포를 얹었다. 그 외 경내에는 정구, 정선경, 정종의 신도비 3기가 있다. 그 중 정종의 비문은 그의 후손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가 지었다. 매년 음력 10월 5일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다음백과사전-
♣.사람 만드는 목수.♣
못이 없던 시절에 집을 짓고 가구를 맞추고 배를 만드는 공정은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는 일이었다. 목수는 연결하는 사람,
소통하고 이해하게 만드는, 평화를 만드는이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