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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스린다 함은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원망 등의 감정을 억누르며 남에게 속마음을 진솔하게 표현하지 않고 억지로 참고 마음에 담아두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닦는 게 아니라 감정을 억눌러 놓은 것이기에 가슴에 답답함을 초래하게 되고 심하면 마음의 병인 울화병이 생긴다.
그래서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참고 지내는 것이 미덕이라 배우고,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우리 여인네들에게 마음을 잘 표현하는 서구인들에게는 없는 울화병이 많은 까닭이다.
수련계에서 마음을 다스린다 함은 타인과의 갈등으로 기쁨, 분노, 근심, 걱정, 슬픔, 공포, 두려움, 원망 등이 일어날 때 이성적으로 깨어있으면서, 그런 생각과 감정들이 일어남을 얼른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내가 마음이 들떠서 기뻐하는지 그 감정들의 근원을 내면으로 진지하게 성찰해야한다.
만약 내 마음 속에 쟁투심이 숨어 있다면 남이거슬리는 소리를 할때 마다 화가 나서 맞서 싸우려 들 것이고,
내 생각이 옳다라는 편견과 독선적인 마음이 있다면, 자신의 말을 인정하고 순순히 따르는 사람은 이뻐하고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은 얄미울 것이며, 명예욕이 강하면 남이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면 환희심이 생길 것이요, 비판을 들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분노가 일어날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이 가진 관념과 집착심이 타인과 충돌하여 상대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므로, 자신에게 어떤 관념과 집착심이 있어서, 그와 같은 희노애락의 감정들이 일어나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스스로 내면을 성찰하여 근본적인 집착심을 없애고 나면 남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든
나에게 어떤 무례한 행동을 하든 양손이 서로 마주치지 않으면 아무 소리가 나지 않듯이
내 마음의 평온함과 고요함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렇게 집착심을 제거하면 머리는 아무 번뇌망상이 없어 청정해지고 마음은 텅비어
희노애락의 감정변화가 없이 담담하면서도
평온하고 우주의 본성인 자비심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럼 기존의 내 틀에서 벗어나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며 마음이 선량해지니
운명 또한 좋게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상대가 좋으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되는데, 상대가 나쁘게 행동하기 때문에 나도 그를 나쁘게 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갈등의 원인을 대부분 상대방 탓으로 돌려버리고 먼저 자신이 더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생각은 하지 않으며, 상대방만 좋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서 웃으면 거울 속의 사람도 웃고
거울 앞에 서서 찡그리면 거울 속의 사람도 찡그린다.
인생의 원리도 이 거울의 원리와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이 과거에 남에게 피해를 준게 원인이 되어 나중에 나쁜 결과로 자신에게 되돌아 오는데 사람들은 그 인과를 알지 못하니 잘못을 모두 남탓으로 돌린다.
타인과의 갈등은 필시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우주의 본성(眞善忍)과 어긋나서
진실하지 못하거나, 자비롭지 못하거나, 이기적이어서 발생한 것이므로
타인을 고칠려면 먼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부터 바로 잡아 진솔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감화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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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본성은 구름한점 없이 텅빈 하늘과 같이 본래 밝고 청정하며 평화로웠습니다.
그런데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존중받고자 하는 애욕(갈애)과 이기심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악행을 저질러 타인에게 원한과 미움을 사고,
또 한편으론 분노를 일으키어 그 마음을 탁하게 오염시켜 마음이 평화롭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 속에 빠지게 됩니다.
즉, 본성이 맑고 텅빈 하늘이라면 애욕으로 인해 일으킨 쟁투심, 분노심, 질투심, 과시심,
자존심, 두려움, 근심걱정 등은 청정한 하늘을 어둡게 가리는 먹구름(번뇌, 탁기, 업장)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우주의 본성과 같은데 이를 성인들은 자비, 박애, 진심, 어짐 등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성이 욕망과 집착심으로 인해 생긴 먹구름(번뇌, 탁기, 업장)에 가려져
평소에 발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들이 자비, 박애, 어짐 등을 실천하라고 말해도 실천하지를 못합니다.
누구는 남에게 자비롭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화를 내겠습니까?!
과거에 자기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먹구름 때문에 그 먹구름의 영향을 계속 받아서
자비롭고 싶어도 자비로울 수가 없고 남이 신경을 건드리면 짜증이나 화가 치미는 것입니다.
즉, 몸에 병이 들면 그 통증 때문에 마음도 따라서 계속 고통을 느끼는데,
병이 나을 때까지는 계속 고통을 받다가 병이 사라지고 나면 그때 고통도 사라져서
마음이 다시 평안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래 성품인 자비, 박애, 진심과 지혜가 나오게 하려면 어찌 해야할까?
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본성을 가리는 먹구름을 없애면 됩니다.
먹구름은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 때문에 생긴 것이니 모든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으면 됩니다.
만약 욕망과 집착을 놔두고 먹구름만 없애려고 한다면 이는 뿌리는 놔두고
잎만 잘라서 잡초를 죽이려하는 것과 같은 일로 잡초를 근본적으로 죽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業을 없애는 것은 결국 잡초의 뿌리에 해당하는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는 마음 닦는 일로 귀결되는 것이며,
자신이 전반생에 지은 죄(業)의 소멸을 위해 원수마저도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자비의 실천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자들이 마음을 깨끗이 닦으란 것은 바로 마음을 탁하게 만드는 애욕과 집착심을 모두 내려놓으란 말인데,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으란 말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고 빈털털이로 살라는 말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 성욕이 일어나지 않으면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강간하는 죄를 짓거나,
성욕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인해 욕구불만의 고통도 뒤따르지 않고 그야말로 편안합니다.
이와같이 화평한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성욕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란 것이지,
결혼하지 말고 독신으로 평생 살라는 말이 아님을 잘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자들이 道를 얻을려면 먼저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고 했는데,
육체를 자아로 여기는 고정관념이 근본적으로 개변되지 않으면
모든 이기적인 욕망과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은 성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육체와 관념은 참나가 아님을 스스로 깨달으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李洪志 사부님께서는 "진정한 수련은 마음을 향해 닦아야 하고, 안을 향하여 닦아야 하며,
안을 향해 찾아야 하는데, 밖을 향하여 찾는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전법륜 청정심)
아울러 전법륜 개광편에 보면 세간소도와 우리의 심성제고의 차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교해서 설명하셨습니다.
"주변의 세간소도(世間小道)일수록 설이 더욱 많은데,
수련 방법(修持方法) 또한 복잡하여 중심을 잡지 못하고 수련한다.
사람의 수련은 주로 心性을 닦는 것인데, 그는 여전히 이 점을 모르며
그는 고생만 겪으면 수련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그는 기나긴 시간을 경과하여,
몇백 년, 천여 년을 수련해서 그는 이런 조그마한 功이 자란다.
실제로 그가 고생을 겪어서 수련해 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수련해 낸 것인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젊었을 때는 집착심이 아주 많았으며,
늙어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앞날에 희망이 없어지자 이 마음이 자연히 버려졌고 닳아 없어진 것인데,
이런 소도(小道)는 역시 이 방법이다.
그가 가부좌와 정력(定力), 고통을 겪음에 의거해 위로 수련할 때
그는 역시 功이 자랄 수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그의 그 속인의 집착심이 길고도 간고한 세월 중에서 서서히 닳아 없어지고,
서서히 그 마음을 제거해서 자라 올라온 공(功)임을 모른다.
우리는 겨냥성이 있기에, 진정하게 일어나는 그 마음을 가리켜 그 마음을 제거하는데,
그러면 수련성취가 매우 빠르다."
사부님께서는 진정하게 일어나는 그 마음을 가르켜 그 마음을 제거하면,
수련성취가 매우 빠르다라고 하셨습니다.
사부님 말씀대로 일어나는 그 마음을 가르켜, 그 마음을 제거할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당연히 나쁜 생각, 환희심, 분노심, 근심, 걱정, 슬픔, 공포, 두려움 등의 마음을 주시하고,
그 마음들이 일어난 원인을 안으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부님 가르침과 부합하는 체험글을 아래에 올려놨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습니다.
1. 튀어나온 사람 마음을 그 순간에 잡다.
글/ 산둥 (山東) 대법제자
사부님께서는 ‘미국 서부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순 속에서만이 사람의 마음을 제거할 수 있으며, 모순 속에서만이 자신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과 모순이 발생할 때 틀림없이 당신의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데 몹시 뚜렷하다. 만약 당신이 모순의 그 일순간을 잡지 않고 여전히 다른 사람과 고집을 부리며 당신의 이치를 우긴다면, 당신이 논쟁에 집착하는 그 과정이 바로 그 집착심이 강렬하게 드러나는 과정이다. 만약 더 아래로 깊이 파헤쳐 내려갈 수 있어 그것이 무슨 동기인가를 본다면 이 마음의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튀어나온 사람 마음을 잡는 것에 관해 수련생과 교류했다. 그도 마음이 움직일 때 제일 먼저 그 마음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찾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 이런 마음을 찾을 수 있는 경험을 하였는데,
글로 적어 수련생과 교류하고자 한다.
주말에 시아버지가 몸이 아파 우리는 시댁에 갔다. 우리가 가자 시어머니는 시아버지를 돌보느라 힘이 들었기에 식사를 간단하게 준비했다. 다 먹어갈 때 시누이의 세 식구가 왔다. 시아버지는 그들이 밥을 먹고 온 줄 모르고 외손녀에게 밥을 먹으라고 말했다. 이때 시어머니가 “이런 것을 먹겠어요?”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내 마음은 움찔했다.
나는 즉시 그 마음을 알아차렸다. 뜻밖에도 그것은 열등감이었다! 시누이 집은 우리 집보다 경제적 여건이 좋아 무의식중에 그녀를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숨겨진 열등감이 뛰쳐나왔다! 사부님께서 내가 열등감을 알아차린 것을 아시고 순간적으로 다른 공간의 그 부정적인 물질을 제거해 주셨다. 삽시간에 온몸이 가벼워졌으며 기쁨과 슬픔이 교차했다.
기쁜 것은 사람 마음이 튀어나왔을 때 내가 그것을 즉시 알아차린 것이고, 슬픈 것은 내가 그것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진면목을 보지 못해 표면에 이끌려 다른 원인을 찾을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시어머니가 속물적이고 불공평하다며 원망하는 표면적인 마음을 찾을 수도 있기에 마음이 움직인 근본적인 열등감을 알아차릴 기회를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열등감을 분명히 인식했을 때, 사람 마음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 깊이 파헤치니 열등감도 질투심에서 파생되어 나온 마음이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모든 마음이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린다. 여기에 한 가지 규정이 있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
나는 명리정(名利情)에서 파생되어 나온 많은 사람 마음은 질투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련은 이런 집착심을 없애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만약 집착심이 튀어나올 때 그 순간에 알아차리지 못하면 후에 표면적인 현상만을 논할 뿐 그 마음을 찾지 못한다.
어떠한 마음인지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때는 법의 표준에 따라 자신의 실제상황에 비춰 깨달아야 한다. 모순의 발생원인은 사람 마음 또는 관념일 수 있다. 사람 마음은 관념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각종 사람 마음과 관념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끊임없이 안으로 찾는 기제를 강화해야 한다. 이 기제가 빨리 작동할수록 각종 사람 마음과 관념을 알아차릴 기회가 많아지고 마음의 정화도 빠르며, 수련의 수승한 경험도 더욱 많이 체험할 수 있다.
이상은 약간의 얕은 체험이며 미흡한 점이 있으니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문장발표: 2014년 5월 6일
2. 집착을 자각하고 내려놓기
글 / 대륙 수련생 (2010년 2월 15일)
매 수련자의 길은 서로 다르고 경험하는 것이 아주 많다. 그 과정에서 영혼이 성숙되는 과정은 말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 나는 단지 각자의 직업에 따라 형성된 습관과 성격, 수련의 관계와 어떻게 이러한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것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는 수련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뜻을 선하게 이해할 줄 알았다. 친구들도 많았고 집안의 각종 관계를 모두 잘 처리했다. 자신이 좀 고생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항상 나의 주장만을 고집하지 않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고통을 느꼈고 마음은 화평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수련의 길을 걷게 되었다.
수련 후 나는 점차 그러한 ‘선(善)’은 모두 이기심에서 비롯한 순정하지 못한 위선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우주의 특성인 眞;善;忍에 순응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좋은 사람이고, 이 특성에 어긋나게 행하는 사람은 진정 나쁜 사람이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당신을 나쁘다고 할 수 있지만 당신이 꼭 정말로 나쁜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당신을 좋다고 해서 당신이 꼭 정말로 좋은 것도 아니다. 수련자로서, 이 특성에 동화하면 당신은 곧 도(道)를 얻은 사람인데, 바로 이렇게 간단한 이치다.“
수련 층차가 제고됨에 따라 ‘善을 가장한 위선(爲善)’의 배후에 은폐된 <명예를 추구하고 집착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보았다. 남에게 좋은 말을 들으려 하는 이 이기심에 따라 줄곧 주변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와 가정의 화목한 관계를 수호하려 했었던 것을 깨달았다.
바로 이러한 성격은 나로 하여금 수련의 길에서 아주 고생스럽고도 힘들게 걸어가게 했다. 시댁에는 나만 수련자였으므로 가정에서 크고 작은 고난이 그치지를 않았다.
또한 사람들 속에서 형성된 자아가 강하지 못한 모습은 수련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부님의 한 차례 또 한 차례의 가피가 있었기에 마음속에서 수련을 놓지 않았다.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으로 형성된 내 자아는 강하지 못했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이 문제는 오래 전에 인식했고 법리상에서도 아주 똑똑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행동에서는 여전히 두려워하는 요소가 있었다.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도반의 글 '덮어 감추다'를 보고나서 드디어 나는 실마리를 찾았다. 내가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것이 아니라, 한번 또 한번 자꾸 명예심을 감싸고 보호했던 것이었다.
사부님께서는 맨해튼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어떠한 일이든지 습관이 양성되면 바로 물질이 생성된다. 다른 공간에 그런 물질이 있어서, 이 공간에서 비로소 이런 상태가 나타난다. 그러한 것들을 내가 당신들을 위해 모조리 떼어버릴 수 있으나, 양성된 습관은 당신들이 반드시 제거해야 하며, 반드시 제거해야 하고,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나는 연속 몇 번이나 이 단락의 법리를 읽고 나서야 비로소 그렇게 형성된 성격, 습관은 내 육신에 존재하고 있는 순수하지 못한 부패한 물질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입으로 없어지라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직 법리에 따라 착실히 수련하는 속에서, 그리고 공능을 사용하여서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정념(正念)을 발하며 자신의 공간을 청리할때마다 한 가지 생각을 더하여 주동적으로 이러한 부패된 물질을 깨끗이 제거하였다.
그 후 법 공부도 마음에 들어오게 할 수 있었고, 연공할 때 정신이 맑고 깨끗했다. 사람들에게 진상을 말할 때도 두려운 마음이 점차 담담해져가는 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고 마음은 평온해졌다.
이전에는 靜功을 할 때는 정신이 흐리멍텅해져 언제 손의 자세를 바꾸고 결인했는지도 몰랐다. 이로 인해 한 동안 고뇌에 빠졌었는데, 이는 바로 그 부패한 물질이 방해작용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나는 正念이 끊임없이 강화됨에 따라 내 육신의 에너지가 점차 밝아져감을 알게 되었다. 속담에도 ‘집에 도둑이 없으면, 바깥 귀신을 불러오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성격, 직업에 따라 형성된 스스로 발견하기 힘든 집착심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높은 지위의 사람의 성격은 사람들 속에서 개성이 강하고 강자이며, 표현은 자신을 중심으로 독선적이고 교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며, 다른 사람더러 말을 하지 못하게 하며 말하기만 하면 폭발한다. 이런 사람은 수련 중에 바로 그 집착심에 맞부딪히게 되며, 그것은 밖으로 뛰쳐나와 한바탕 타인과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실은 이것이 바로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우두머리의 습관으로 형성된 가짜 당신이며, 당신의 공간마당에 있는 바로 그 부패한 물질의 반영이다. 당신이 그것을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면 그를 자기 자신(참나)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래서 내가 어떻게 해탈을 하며, 어찌하여 늘 이 상태에 머무르는가 하고 좌절하게 하며, 당신 더러 의지가 강하지 못하게 한다. 실은 즉시 그 독선적이고 교만한 집착심을 똑똑히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깨끗이 제거하지 못한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당신이 의사, 간호사, 건강관리사라면 당신이 사람들과 말할 때 늘 어떻게 영양에 주의하고 어떻게 건강하게 하며, 어떻게 질병을 예방하고 질병이 있으면 어떻게 치료하는가 등을 자신이 사회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관념대로 말한다.
당신이 요리사라면 사람은 영양이 골고루 섭취되도록 식사해야 하며, 식사요법에 주의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하다면 당신은 아직 사회지식을 통해 형성된 관념이 자신에게 영향주고 있는 것을 똑똑히 인식하지 못한 것이며, 관념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며, 사람의 관념에서 뛰쳐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과정 속에서 이러한 관념들은 반면작용을 일으키게 되며, 수련의 발걸음을 저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두 가지 체득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나의 마음을 바라보면서 선한 마음(佛性)이나 악한 마음(魔性)이 표현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성(魔性)을 발견할 때 나는 즉시 그것을 제거한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내가 움직인 첫 일념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다. 만일 이 일념을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로 여길 수 있다면, 거울 속에 비춰진 것이 어떠한 집착이라도 즉시 소멸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잘 파악하지 못하여 이 거울을 다른 사람에게로 비춘다. 사실 그 순간에 바로 내면을 향하지 않고 밖을 향하여 찾은 것으로, 나 자신의 잘못보다 늘 다른 사람의 잘못부터 찾아내려 했다. 바로 나 보다는 다른 사람을 고치고 바꾸려고 하는 이치 속에서 수련한 것으로, 이럴 때는 바로 스스로 심성을 제고할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안을 향하여 찾는 이 방면의 법리에 대하여 사부님께서는 서로 다른 각도에서 아주 많이 많이 말씀하셨다. 모순이 왜 나에게서 발생했을까? 혹은 모순을 왜 나더러 보게 했는가?
내 주위의 환경의 표현은 바로 나의 마음에서 촉발된 것이 아닌가? 우리 수련자들은 모순이 생길 때마다 갈등의 원인을 스스로 ‘안으로 향하여 찾는 것'을 습관화하고, 자신의 집착심을 발견하여 내려놓아야 한다.
이상은 내 개인의 작은 깨달음이다. (출처:정견망)
3. 집착심을 내려놓은 작은 체험
작자: 뉴질랜드 수련생 이성군(李成君)
[정견망] 최근 수련 중에서 하나의 이치를 깨닫게 되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데, 바로 어떻게 재물, 명예, 애정 등에 대한 집착심을 버릴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집착심을 버릴려면 먼저 이 집착심을 배척하고 포기해야 하는데, 한 동안을 견지하고 나면 그것은 약해지고 나중에는 소멸되어 버린다. 실은 또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아주 효과가 있다.
바로 근본에서부터 착수하여 직접 사람의 이기적인 심리(私心)를 겨냥하여 제거하는 것이다. 솥에 끓는 물을 식힐려고 찬물을 계속 들이붓는 것보다, 솥 밑에 타고 있는 장작을 꺼내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사실 모든 집착심은 모두 사람의 이기심(私心)에서 나오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예를 들어보자, 사심(私心)이란 마치 나무의 줄기와 같고, 각종 집착심은 모두 이 나무줄기에서 생겨나는 가지이다. 그러므로 사심이 작아진다면 각종 집착심도 약해질 것인데, 이것이 바로 무사(無私) 경지다.
사부님께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법회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럼 우리는 수련과정 중에서 부딪친 어떠한 일이든지 모두 우선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얻었을 때 역시 다른 사람을 생각해봐야 하는데, 그가 이것을 잃었을 때 그에게 어떤 상해가 있으며 그의 마음이 괴로운가, 괴롭지 않은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어떠한 일이든지 모두 다른 사람을 생각해야 하며 우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나서 그 연후에 자신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바로 당신들이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나중에 자신을 생각(先他後我)하는 正法 正覺의 원만으로 수련성취시키려고 한다.”(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그러므로 나는 매번 우리가 한 사람 혹은 한 가지 사건을 만날 때마다 첫 번째 염두가 자신인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할 수 있고, 매 하나의 염두가 모두 완전히 남을 위하고 자신은 없도록 요구한다면, 매 하나의 염두가 모두 완전히 남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는 수련성취한 생명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하기 쉽지 않으며, 나도 완전히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직 우리가 이런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이 방향을 향해 노력하기만 하면 私心은 모르는 사이에 줄어들고, 업력도 모르는 사이에 감소되며, 신체도 갈수록 좋아진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당신의 心性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에 곧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당신의
心性이 제고되어 올라오면 당신의 신체상 물질에도 보증코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
어떤 변화인가? 당신이 추구하고 집착했던 그런 좋지 못한 것들을 당신은 버릴 것이다.”
사실 남을 위하는 것 역시 하나의 무한한 수행 과정으로서, 당신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할 때, 매 번 자신은 결코 완전히 남을 위하지 않았고 아직도 고쳐야 할 방면이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속인은 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남을 위하는 이 과정은 바로 한 생명이 근본적으로 전변하는 과정이며, 또한 한 사람이 神으로 변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 버리지 못한 집착심은 모두 당신이 남을 위하는 것을 가로 막을 것이며, 모두 당신의 심령을 충격하여 당신을 몹시 괴롭게 만들 것이고, 당신더러 남을 위하는 것을 포기하게 할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내가 이해하기로는, 우리가 집착심을 거의 다 버리게 될 때면, 곧 완전히 남을 위하는 단계에로 승화하게 된다. 이것은 다른 하나의 경지이다.
사실 인류의 최고도덕 경지는 바로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것이다. 왜 사람을 감동시키는 수많은 이야기는 길이 전해지는가? 바로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도덕 준칙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업이든 학습이든 막론하고 우리가 접촉하는 사람에 있어서 늘 먼저 남을 생각할 수 있다면 남들은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할 것이며 아울러 모두들 인정할 것이다.
당신과 다른 사람들 간의 갈등도 갈수록 적어질 것인데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해하기로는 당신이 점차 속인을 초월하게 되고 속인 마음 중에 있지 않을 때면 각종 모순은 당신에 대해 작용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면, 예전에 나는 늘 동료를 도와주었지만 동료는 나를 좋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모순이 있기도 하였다. 후에 사업 가운데서 나는 늘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원칙에 따라 했더니, 그 동료의 나에 대한 태도가 어느새 바뀐 것을 발견하였다. 내심으로부터 나에게 감격했고 일하는 가운데 모순도 많이 줄어들었다.
당신이 늘 진심으로 남을 위할 수 있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정이 무척 유쾌해질 것이고, 예전에 보기에는 아주 큰 고비와 난으로 보이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아주 홀가분하게 넘길 수 있는데, 믿기지 않으면 한 번 실천해 보라.
이것이 바로 내가 수행중에 깨달은 조그마한 체험이다. 부족한 곳은 동료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지적해 주기 바란다. (출처:정견망)
발표시간: 2011년 8월 23일
4. 관념이 집착의 근원임을 깨닫다.
작자 : 청리(淸理)
나는 사부님의 설법을 공부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집착을 인식했지만 어떤 방법으로 없애고 억제하거나 막론하고, 모두 이 집착의 뿌리를 뽑을 방법이 없어 매우 안타까웠다. 최근에, 나는 매우 많은 집착심의 배후에는 모두 뿌리 깊은 관념이 있음을 깨달았다.
이 관념이 형성된 후, 우리는 뼛속 깊은 곳에서도 이 관념을 진리라고 인식하며, 이 관념이 집착심으로 표출되었을 때 단지 표면에서 이 집착심만을 제거할 뿐이다.
마치 부추를 베는 것처럼 아무리 잘라도 영원히 뿌리를 제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지금 본인의 몇몇 집착심의 표현과 그 배후의 관념을 분석해보았으니 틀린 점은 자비롭게 시정해 주기 바란다.
색욕을 제거하다.
수련을 시작하면서부터 사부님께서는 색욕심은 매 수련인이 반드시 넘어야 할 관(關)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색욕심을 닦아버리는 길은 너무나 길고 괴로웠으며, 심지어 남편이 며칠 나를 냉담하게 대하면 나는 마음속으로 그를 몹시 미워하면서 심리적으로 일종의 친밀함을 갈망했다. 수련은 마땅히 욕망을 끊어야 함을 알지만 마음속으로는 이에 대해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끊지 못하고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나중에 분석을 통해 나는 자신이 집착한 것이 남녀간의 그런 욕망이 아니라 일종 친밀한 애정관계였음을 발견했다. 신체 접촉에서 애정이 표현되어 나오면 나는 마음속으로 친밀감을 느끼면서 일종 안전하다고 여기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관념의 형성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공산당이 선양하는 투쟁하는 사회환경에서 우리 부모님은 늘 다투고 싸웠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일종 안전한 것을 갈망해왔고 또 내가 다른 사람과 매우 친밀해야만 충돌이 생기지 않고, 다투거나 싸우지 않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안전한 느낌이 있고 마음이 비로소 편해진다는 관념을 형성했다.
이런 고정관념에 이끌려 동료 사이에서도 나는 늘 그들과 할 말이 없어도 일부러 화제를 찾아서 말하고 줄곧 끊임없이 말하면서 웃곤 했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 우리가 친밀한 것이고 친밀해야 내가 안전하다고 인식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오직 신체를 접촉해야만 우리가 친밀하다는 것이 설명되고 또 이래야만 마음속으로 안전하다고 느꼈다. 이런 잘못된 관념을 인식한 후 표면상의 색욕심은 뿌리 없는 나무처럼 순식간에 대부분 제거되었다.
이기심을 제거하다.
사부님의 설법에서 우리는 많고 많은 집착심이 모두 자신을 위한 ‘이기심(私心)’에서 나온 것임을 안다. 수련하기 전에 나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며, 어떤 일이든지 내 머리 속에는 아주 빨리 나에 대한 이 일의 득실, 내게 어떤 좋은 점이 있으며 내가 어떻게 해야만 이 좋은 점을 극대화할지 분석했다. 설령 이 일이 많은 사람들을 해칠지라도 오직 내게 좋은 점만 있다면 나는 그것은 좋은 일이라고 인식했다.
나는 이기심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 이기심은 마치 내 생명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그것을 다치면 마치 내 생명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파보니 원래 나의 사상 깊은 곳에 이런 일념이 있었다. ‘오직 이기적인 사람만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
이런 관념은 잘못된 것인데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가?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 에서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당신은 그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는 잘 먹지 못하고 잘 자지 못하며, 꿈을 꾸어도 그의 이익이 손실될까 봐 두려워한다. 개인 이익에서 그는 쇠뿔 끝으로 파고든다. 당신이 말해 보라. 그가 사는 것이 힘든가 힘들지 않은가. 그는 일생 동안 바로 이것을 위해 살고 있다. 우리는 모순 앞에서 한 걸음만 물러서면 더없이 넓은 세상이라고 말하는데, 보증코 다른 광경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이런 사람은 물러서지 않는데, 그가 산다는 것은 가장 힘든 것으로서, 당신은 그를 따라 배우지 말라.”
때문에 오직 무사무아(無私無我)한 사람만이 흉금이 넓고, 소탈하며 즐겁게 살 수 있다. 이 점을 자각하고 나니, 사(私)라는 글자가 내 공간에서 뿌리가 이미 없어진 것을 느꼈고, 남은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제거할 수 있었다.
‘참음(忍)’에 관하여
사부님께서는 ‘무엇이 참음인가’ 에 대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 주셨다.
“참음(忍)은 心性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서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일반사람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
‘참음’에서도 나는 매우 부족하게 했는데, 간혹 단단히 벼르면서 불평했으며 ‘참음’이란 글자를 일찍이 먼 곳으로 집어 던졌다. 진지하게 캐보니 원래 자신의 사상 중에 이런 관념이 있었다.
‘착한 사람은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착한 말은 사람을 태우고 다니게 된다. 내가 만약 처음에 참으면 다른 사람은 일 촌(寸)을 얻으면 또 다시 일 척(尺)을 얻으려고 하고 끊임없이 나를 업신여길 텐데 내가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이런 관념은 사부님께서 ‘장춘보도원 법회설법’중에서 하신 말씀과 아주 유사하다.
“내가 이 편을 쓴 목적은 어떤 수련생들이 이런 문제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法輪功을 수련하니 그는 좋다고 말하면서 사회인의 도덕이 되돌아 올라오게 할 수 있지만, 만약 모두 그렇게 선(善)하다면 외국인이 우리를 공격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쓴 것이다. 그 전쟁은 사람이 일으키고 싶다고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닌 즉 일체는 모두 하늘이 움직이게 하며 천상이 움직이게 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속에서 어떻게 계산하고 어떻게 고려하고 어떻게 하든지 어떤 때에는 성사하지 못한다. 어떤 때에는 성사할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이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고 여긴다.”
때문에 나의 ‘참음’에 관한 관념도 잘못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내게 업력이 있거나 혹은 내가 생전에 다른 사람을 나쁘게 대해 그가 빚을 받으러 온 것으로, 빚을 다 갚으면 괴롭히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특성이 일체를 제약하고 있기에 어떠한 일도 모두 아무런 원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후천적으로 생성된 관념이 이기적인 집착을 형성하며, 이 관념이 바로 집착심의 뿌리와 같으므로,
오직 뿌리에 해당하는 관념을 타파해야만 집착이 비로소 해체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출처:정견망)
발표시간: 2011년 9월 16일
5. 空無의 체득 - 이기적인 근원을 제거함.
작자 : 청람
【정견망】 인간세상의 일체, 사람과 사람, 생명과 생명 간의 각종 관계를 조용히 바라보면 왜 말법시기에 인간세상으로 전생한 우리가 정(情)이라는 요소를 닦아내야 하는가? 情이란 우주의 생명이 이기적이게 만든 제일 중요한 근원이다.
우주 중에는 남녀의 형체를 지닌 것이 있고, 또 기타 생명의 형체가 있다. 이처럼 배합된 반려자 혹은 동반관계가 있는데, 이들 두 생명의 관계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서로 구함이 없는 것이다. 마치 태극어(太極魚) 처럼 상호 분리할 수 있고, 합할 수 있는 것으로 깨끗하고 순정하여 서로 물들지 않는다.
그러나 情이란 요소가 있게 되자, 양자 간의 사상에 자성(磁性)과 같은 상호 흡인력이 생기고 상대방을 주의하기 시작한다. 욕망의 요소가 생기자 양자는 물질과 정신에서 혼합작용이 있게 되고, 情의 요소를 가중하고 공고히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욕망과 情의 포로가 되어 좌지우지되며 통제 당한다. 여자는 심리적인 의지를 얻고, 남자는 생리적인 만족을 얻어 상호 의존하게 되였다. 사람들이 볼 때는 일종의 행복이지만, 神이 볼 때는 마약 중독자가 갈증날때 마다 마약을 두어 모금 피우는 것과 같을 뿐이다.
情은 생명의 요소이자 또 삼계내 경지(境界)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속세의 거리에는 온통 남녀 간의 상호 매혹이 존재하는데, 이는 情이 그것의 힘을 펼쳐보인 것이다. 우리의 수련은 바로 그것을 초월하여 해탈하는 것이다.
역사상 석가모니 부처님은 ‘예쁜 여인이 해골로 변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법을 사용해 예쁜 여자를 보면 백년 후 한 무더기 해골로 변한 형상을 상상하게 했다. 이 방법은 아주 뛰어나 나는 전에 자주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밥도 먹기 싫어진다. 그러나 우리 大法은 집착을 제거하는 것이 더욱 빠르다. 때문에 나는 사부님의 설법에서 또 다른 뛰어난 방법을 깨달았다.
사부님께서 ‘진풍’에 관해 말씀하실 때 사람은 추위를 두려워하는데, 그에게 추위를 두려워하는 이 대뇌 부분을 막아주면, 그는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는 나로 하여금 이런 의식형태의 ‘나쁜’ 관념을 사상 중에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했다. 그러므로 내가 깨달은 것은 인간세상에서 알고 있는 모든 ‘욕망’의 관념을 잠가버리면 욕망에 관련된 모든 사상의식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와 욕망은 아무런 연계가 없어지며 남녀를 말해도 관련된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마치 내가 사과를 먹지 않으면 그 사과를 누가 먹든 비를 맞아 썩든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사과가 어떤가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나의 온몸의 매 세포마다 이렇게 하기를 요구했다. 나에게는 욕망의 관념이 없으니 욕망의 행위도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다. 누구와 어떤 인연이나 모순이 있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성에게 호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여자를 대할 때 어떤 경우에는 대답하기 조차 싫어졌다. 진상을 말하는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런 과정을 견지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의지력에 의해야 한다.
난잡한 기공책을 없애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과 관계되는 일체는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묻지 않고, 말하지 않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으로, 사람의 흥취를 벗어나는 것이다.
정말로 할 수 있으면 점차적으로 자신이 사람과 아주 큰 거리가 있음을 감촉할 수 있다. 인간세상의 환희, 오락, 이별과 상봉도 모두 情을 둘러싸고 돌고 있는 것 같다.
사상이 깨끗하고 순결하면 남녀간의 접촉도 ‘당승(唐僧 서유기의 삼장법사)이 여자를 만나면 긴장해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내심이 홀가분하고 관계도 분명해진다.
정말로 사람의 각도에서 자신과 사람들 간에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어떤 생명과도 관계가 깨끗해 물과 같이 평탄한 것이다. 욕망도 없고, 추구도 없고, 사심도 없어지며, 오직 살아서 수련만 하면 된다. 자신의 존재도 아주 간단해지고 물질에 대한 수요도 아주 적어졌다.
情이 없어지자 또 보다 큰 집착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놀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논다는 것은 흥취가 있는 것이고, 생명의 동태적인 표현이다. 나는 보다 많은 때 순진한 어린이의 심태가 되며 사상은 단일하고 지혜가 극히 커졌다.
그러나 내가 놀려는 마음까지 제거하고 나니, 자신의 생명이 존재하는 의미도 마치 단번에 없어져 텅비어버려(空無), 적응하기가 좀 어려웠다. 일체의 집착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명이 존재하는 특징을 포기한 것이고, 내가 존재하는 의의가 없어진 것이니, 생각이 아무것도 없는 중에서 진아(眞我)가 각성하기 시작했다.
선정(禪定) 중에서 마치 사람의 사유활동과 기억이 없어진 것과 같다. 사상은 이 우주의 일체 개념과의 연계에서 벗어났다.
다시 법리 공부를 통해 발견한 것은, 각성한 내가 여전히 옛 우주의 이기적인 요소를 닦아버려야 했다. 옛 우주의 사(私)는 우리의 언어표현에 관철되어 있다. 우리가 입만 열면 하는 말이란 모두 나는 어떠어떠하고, '나'는 무엇을 하려 하고, 나는 어떻다는 등이다.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강조하는 것은 모두 바로 '나'였다.
이는 新 우주의 이타적(爲他)인 표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해서 이 ‘나’를 제거해야만 생명이 공(空)과 무(無)의 상태에서 벗어나 전력을 다해 남을 위하는 방면으로 변할 수 있다.
생각을 움직이기만 하면 우선 생각하고 고려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어떤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이에 또 자신이 일체의 일을 행하는 것이 더욱 자비로워지기 시작했고, 내 생명이 존재하는 세부적인 부분을 수련했다. 이 부분이 수련되자 또 다시 空과 無의 경계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 공무(空無)의 심태와 지혜는 이전의 공무(空無)보다 더욱 원만하다.
중생의 의념을 건드리지 않는 정황 하에서 중생의 바르지 못한 사상을 바로잡지만, 나 자신의 이기심(私心)은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아직 인간세상에 존재하므로 정신과 사상이 모두 이 인류사회 형식에 적합한 자아(自我)를 사용한다. 情과 자비 중에서 나는 자유롭게 왔다갈 수 있는 데, 이런 대자재(大自在)와 자유에는 신통이 필요하지 않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마음 먹은 대로 사용할 수 있다. 만약 잘 파악하지 못할 때는 나는 독립적으로 공무(空無)의 경계 중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복구할 수 있다.
大法의 내포는 참으로 무궁무진하다. 法輪大法은 홍대(洪大)하고 정심(精深)하다.
사부님께 감격스런 마음을 보답할 길이 없다.
문장발표 : 2010년12월26일
석가모니불의 제자 라다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열반이란 정념(情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라다야, 그것은 열반에 확실히 자리를 잡아 올바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열반은 올바른 생활을 위한 목표이자, 목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