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철은 과연 영혼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다.
낮에는 서울에서 공연을 하고
저녁에는 담양으로 이동을 해서 연주를 한 후
밤 11시가 다 되어 서야 신세계 동산에 도착한 그는
아쉬운 대로 몇 모금의 물로 시장 끼를 달랜 후 피아노 앞에 앉았다.
우리 집에 있던 피아노는 아내가 시집 올 때 해온 혼수 품이라
낡고 음이 맞지 않은 것은 물론 몇 개의 건반은 아예 내려앉아 있어서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연주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벽 한 시가 넘도록 피아노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듣는 그의 연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특히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즉석에서 작곡을 해서 들려주는
<승리의 노래>였다.
영화 십계에서 히브리 인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홍해 바다를 가르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내용을 표현한 곡인데
그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영화보다 더 생생한 환상으로 우리들을 그 장면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더 이상 우리는 음악을 감상하는 관객이나
영화를 보고 있는 관람객에 머무를 수 만은 없었다.
우리도 히브리 인들과 섞여서
고단한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탈출 길에 나섰다.
수많은 무리들이 애굽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환희로 소란스럽다.
밤에는 불 기둥으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신이 인도를 하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들이 추격을 한다
긴박한 추격 전이 이어지다가
눈앞에 긴 홍해 바다가 나타난다.
더 이상 도망갈 길이 막히고 만 것이었다.
응접실에 모인 사람들이 절망적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단지 피아노 연주일 뿐인데도 심한 정신의 고통을 느꼈다.
나는 꼭 쥔 주먹에 땀이 베이는 것을 느끼며 신음을 했다.
다음 순간.
모세가 홀연히 일어나 지팡이를 하늘 높이 치켜 들더니
홍해 바다를 쳐서 물을 갈랐다.
바닷물이 두 갈래로 갈라져 우뚝 섰다.
그 속으로 우리는 도망을 쳤고
모든 무리가 무사히 건너고 난 다음
뒤쫓아오던 애굽 군대들 위에 우뚝 섰던 물 기둥이 무너지면서
아수라장이 된다.
낮은 음계를 두드리는 지성철의 손놀림에 따라
뽀골뽀골 물방울이 올라가고 태산 같은 물 벼락이 몰아 치고
분노한 자연이 포악한 애굽 군대를 한 순간에 집어삼키고 만다.
나도 모르게 친 박수.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터지는 함성.
감격의 눈물을 훔치며 지르는 환호 속에 고적한 시골 집에서 열린
작은 음악회는 끝이 났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가 넘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지토벤은 오랫동안 장엄하고도 웅장하게 끝을 낸
마지막 건반에서 손을 때지 않고 앉아 있었다.
휘엉청 밝은 달빛이 눈 먼 소녀에게 피아노를 쳐주던
베토벤의 그 날을 추억 하게 했다.
무려 두 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영혼을 태워서 들려준 그 날의 연주는
실로 월광곡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감동적이고도 여운이 긴 음악회였다.
그는 과연 지토벤이었다.
첫댓글 지토벤 지성철님~~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요
스승님과 연락이 닿아서
우리에게도 귀한 연주를 들려주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