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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선물(마 2:1-12)
-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뜻 -
동방 박사의 예물은 이사야 60장 1-6절에 예언된 말씀이다. 아기 예수가 탄생하시던 날 동방의 세 사람 박사들은 각각 그 예물을 가지고 와서 경배했다. 그것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다. 동방 박사의 드린 예물은 성경에 합당한 예물을 드린 것이다. 그러나 서기관들은 성경의 예언을 알았고 헤롯 앞에서도 증거를 했다. 그들은 메시야의 탄생 앞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소문에 소문을 물고 오면서 메시야의 탄생에 떠들썩했어나 한 사람도 주님이 계신 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베들레헴 촌민들은 다윗의 동네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잘 알았고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오는 동방 박사의 소문이 요동침에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가 있는 마구간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동방 박사는 성경의 예언을 깊이 새기며 살아왔고 깨달은 것을 실천했으며 모범적인 예물을 바치며 분별 있는 경배를 했다. 그리고는 왕권보다 신권을 우위 하는 신앙으로 천사의 말을 듣고 헤롯을 피하여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아기 예수에게 드린 동방 박사의 예물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1. 황금(왕 / 믿음)
황금은 구약시대 제단을 꾸미고 제사 도구들은 만드는 데 사용되었으며 불변과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황금을 예물로 드린 것은 예수님의 영원한 왕권, 즉 만왕의 왕 되심을 상징한 것이다. 이는 왕에게 드리는 예물로써 “믿음”을 상징하며 주님을 만 왕의 왕으로 경배한 것이다. 본문의 크뤼소스는 세상 임금의 금으로써 왕에게 적합한 예물이다. 크뤼소스의 어근을 보면 그 뜻은 “쓰다”이다. 세상의 금은 소모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아낌없이 써야 한다. 영적 의미는 금은 변하지 않는 물질이다. 그래서 그 금은 믿음을 상징한다. 오늘날 우리가 황금이 없어서 드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금보다 귀한 믿음” 보여 드려야 한다.
2. 유향(제사장 / 기도)
유향수를 잘랐을 때 나오는 부드러운 분비액으로 만드는 향기로운 수지(樹脂)이다. 주로 금속을 보호하고 도장(塗裝)하는 데 쓰는 연한 색의 니스를 만드는 데 이용된다. 열처리로 두꺼워진 아마인유(油)에 유향을 뿌려 만든 메길프는 유화의 물감을 풀어주는 전색제(展色劑)로 쓰인다. 유향은 또한 치과용 점착제로도 쓰고 있다.
유향은 당시 일반 백성은 사용할 수 없는 향료였다. 출애굽기 30:37을 보면 하나님께 드릴 거룩한 향을 만들 때 사용했다. 이러한 유향을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신성, 즉 하나님 되심을 상징한 것이다. 이는 제사장에게 드리는 예물로써 이는 “기도”를 상징하며 주님을 대제사장으로 경배한 것이다. 동방 박사들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유향으로 예물을 삼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가지고 왔다. 이에 대한 영적 의미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할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3. 몰약(선지자 / 희생)
아랍어로'맛이 쓰다'라는 뜻의 'murr'에서 유래한다. 쓴맛이 나며 향기가 좋고 노란색을 띤 적갈색의 함유수지(含油樹脂) 고무이다. 콤미포라속(─屬 Commiphora)의 작고 가시가 있는 꽃피는 교목에서 혹은 콤미포라 미르라(C. myrrah)나 콤미포라 아비시니카(C. abyssinica) 같은 감람과(橄欖科 Burseraceae) 식물에서 얻어진다. 몰약은 고대 근동(近東) 지방이나 중동지역에서는 매우 귀하게 여겼다. 값비싼 향료·향수·화장품의 성분이었으며, 약으로는 국소도포제 및 미라를 만들 때 방부제로 사용했다.
몰약은 마취제, 방부제로 사용했는데 그리스도이신 주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 것이었다. 이는 선지자에게 드리는 예물로써 이는 “희생”을 상징하며 주님을 선지자로 경배한 것이다. 선지자의 삶은 몰약(쓴 약)과 같아서 시련과 고통 속에 하나님을 바라보며 교통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장사를 위한 향유이기도 하다(마 26:7; 막 14:3-4; 눅 7:37; 요 12:3). 우리는 선지자께 드리는 예물인 몰약을 아기 예수께 드려야 한다. 이는 주를 위한 희생을 의미한다.
결론
이제 우리도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반석 같은 믿음을 보여 드리고,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마땅히 드릴 하나님의 것으로서 기도하며 선지자처럼 고난의 떡을 먹고 슬픔의 잔을 마실지라도 묵묵히 십자가만 바라보며 오늘의 희생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4 번째 동방박사
알타반이라고 이름하는 이 박사는 4 번째 동방박사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은 황금과 몰약과 유황을 가져간 3 명의 동방 박사가 아니라 이 제4의 동방 박사야 말로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서 경배한 사람이라는 전설이 생겼습니다.
제일 첫번째 박사는 아라비아의 멜카이라는 박사로서 주님께 황금을 드렸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온 발타산이란 박사는 주님께 몰약을 드렸습니다. 팔사소에서 온 케스팔이라는 제3의 박사는 유황을 드렸습니다. 이 알타반은 파사에서 청옥과 루비와 진주를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40세에 파사에 조르아스트 교회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알타반은 구약의 예언을 듣고 구약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별을 보고 친구들의 수많은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청옥과 루비와 진주를 들고 2천 리 길을 떠나게 됩니다.
오른테스의 산기슭을 지나고 니키아의 광야를 지나서 유브라데스 강을 건너 10일째 되는 날... 3명의 동방 박사와 만나기로 약속한 자리에 도착했지만 그는 3시간이 늦어서 3명의 박사들이 떠난 빈터에 도착을 했습니다. 만약에 그곳에서 만나지 못하면 7일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한 장소로 3 명의 박사를 뒤쫓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하던 어느 날 황혼... 종려나무 가지 밑에서 한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히브리인을 만납니다.
빨리 달리지 않으면 다른 박사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빨리 달려야 할지... 나를 살려 달라고 하는 신음 소리에 병자를 돌보야 하는 것인지 잠시 갈등합니다. 그는 그 병자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그 병자를 돌보아 주고 떠납니다. 이 병자가 당신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나는 알타반이라고 파사의 사람으로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새 왕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소개를 하고 그 환자에게 병과 모든 약을 주고 이 알타반은 떠납니다. 그때 이 히브리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고 축복하며 새 왕이 나신 곳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환자를 돌보는 바람에 두번째 장소에 도착을 했지만 그 장소 역시 텅 비어있었습니다. 배고픔과 먼 여행길의 피곤과 좌절로 그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는 홀로 베들레헴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들레헴도 도착한 그는 3명의 박사가 3일 전에 이미 경배를 마치고 떠났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한 없이 고요한 베들레헴... 그는 한 여인을 만납니다. 애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 여인에게 묻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신 새 아기 왕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여인은 새 아기 왕은 애굽으로 떠났나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자기 품에서 아기를 재우기 시작합니다. 이 아기가 알타반의 가슴에 있는 옷고름, 페르시아의 장식이 있는 옷고름을 만지면서 방실 방실 웃습니다.
그 때 조용하던 방문이 와자짝 하면서 문이 열리면서 헤롯의 군인 장교 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 장교는 들어오면서 아기를 뺏았으려고 합니다. 다급해진 알타반이 청옥 자기의 보물인 청옥을 주면서 이 아기를 살려 달라고 사정합니다. 그 눈부시게 빛나는 청옥을 움켜쥔 장교는 "이 집에는 아무도 없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집을 나갔습니다.
알타반은 당신을 위해 드려야 될 청옥을 이 아기를 위해서 썼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또 홀로 애굽으로 내려 갑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그는 방방 곡곡, 빈민촌, 노예시장, 피난민 촌을 이 잡듯이 뒤집으면서 베들레헴에서 내려온 새 아기 왕을 찾습니다. 그가 노예 시장을 지날 때, 젖 먹이는 아이와 떨어지는 한 젊은 여인의 절규를 듣습니다.
이 여인은 노예인데 병이 들어서 더 이상 쓸 수가 없으니까 그 젖먹이 아기를 그 품에서 떼어 내어서 팔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의 절규를 들으면서 알타반은 루비를 주고 그 여인과 아기를 삽니다.
여인에게 당신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 여인은 애굽의 저 남쪽 구스 땅에 있는 내 고향에 아직도 내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내 고향에 다시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알타반은 그 여인을 태우고 머나먼 구스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구스땅에 그 가족과 친지들에게 그 여인을 데려다주고 알타반은 돌아옵니다. 그 사이에 33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의 품에는 단 하나 밖에 남자 않은 진주가 깊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이 마지막 선물 만큼은 새 왕에게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는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왔습니다. 40 세에 집을 떠난 그의 나이는 어느덧 70 중반이 되어서 연약한 육체가 되어있습니다. 힘없는 몸으로 예루살렘에 모인 유월절 인파를 헤치면서 알타반이 거리에 들어섭니다. 사람들이 술렁 거리고 뛰는 발자국 소리들이 들리고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가 들리며 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알타반이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사람들이 반박을 합니다.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이 있는 것도 모르오?" 지금 두 강도가 십자가에 사형을 당하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의 혁명 지도자 바나바라오! 그런데 그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히는 사람은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광야에세 이적을 행하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고, 문둥병자를 낫게하고,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이 사람이 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소!!
알타반은 희미한 가슴속에 이 분이 새 왕이었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진주를 손에 만져 봅니다. 그가 새 왕이라면 이 보물로 이 사람을 속량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갑니다.
성문을 들어서기 직전에 성문 앞에서 한 소녀가 죽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끌려가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나를 살려 달라고...
알타반 박사는 어쩌면 새 왕일지도 모르는 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나사렛 예수와 죽은 아버지의 빚 때문에 유곽으로 끌려가야 되는 이 소녀와의 사이에 잠깐 갈등합니다. 그러나 그 소녀의 부르짓음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진주를 주고 그 소녀를 속량 합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알타반... 처음으로 이상한 평화가 자기의 심령 깊숙한 곳에 찾아온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면 평화가 올 줄 압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은 소유는 누릴 수 있지만 평강은 빈 마음이 갖는 특권입니다.
그 순간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알타반은 서둘러 골고다를 향해서 걸어갑니다. 온 땅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그의 눈에 보였습니다. 그 아래에는 십자가의 죽음 아래서도 공포하나 없는 주님의 얼굴이 이제 숨을 헐떡이며 그 골고다 바위에 자기의 몸을 겨우 의탁하는 알타반의 얼굴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눈과 알타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알타반은 이 분이 바로 그 베들레헴에 나셨던 새 왕이라는 사실을 그는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는 십자가의 주님 앞에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당신에게 드려야 될 것을 나는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빈 손, 이제 죽어가는 몸뚱이 하나로 당신에게 왔습니다.
그때 알타반의 심령 속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는 찾아 주었고 영접해 주었고 내가 벗었을 때 너는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 주었으며,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너는 나를 찾아 주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는 심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알타반은 새 왕을 찾아 헤매며 그 수많은 좌절에 평생에 너무나도 신비하고 이상한 평화가 그의 온몸을 감싸면서 이제는 안식할 수 있다는 아주 담대한 마음이 그의 전신을 사로잡을 때, 그는 십자가 아래 평화롭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픔에 동참하는 순간이 하나님과 성경에 나타나시는 하나님... 우리가 이성과 지식과 지혜로 만들어 낸 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의 하나님은 아픔에 동참하는 순간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순간입니다.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드려진 보물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보물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진정한 경배는 세 명의 동방박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4 번째 동방박사에 의해서 드려졌다는 전설입니다.
첫댓글 아멘 !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