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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간(芳幹)은 같이 난을 일으켰던 동생 방원(芳遠)이 모든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자신은 별 볼일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불만에 차 있었다.
그러던 중 이방원이 방간(芳幹)을 치려한다는 박포의 말을 듣고 방원(芳遠)을 제거하러 나섰다.
같은 형제끼리 다시 피의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원래 방간(芳幹)은 무식하고 어리석은데다 다혈질이라 이성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모자랐다.(ㅋㅋ 저처럼?)
능력면에서도 방원(芳遠)이가 훨씬 웃길인데도, 형인 자기가 세제가 되지 못하고 동생인 방원이 세제가 되자 주제파악도 못하고 일을 꾸민것이다.
지중추원사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때 사병을 동원하여 방원(芳遠)을 도운 무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원(芳遠)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다고 믿고 있었는데 논공행상에서 2등이 되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박포는 불평을 늘어놓았고, 공신들의 분열을 우려한 방원(芳遠)은 박포를 잠깐 귀양보냈었다.
그런데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박포가 방간(芳幹)을 부추겨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밀정을 심어놓고 방간(芳幹)의 행동을 체크하던 방원(芳遠)은 재빨리 군사를 정비하여 방간과 맞섰고, 이숙번이 쏜 화살에 방간(芳幹)의 아들 이성기가 말에서 떨어지자 대세는 굳어졌다.
결국 패한 방간(芳幹)은 도망가다가 체포되어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그 일당은 모조리 처형되었다.
(그러니까 넘볼데를 넘봤어야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형제들을 주륙한 방원(芳遠)이 태종(3대)으로 즉위하면서 바야흐로 공신들의 풍년시대가 되었으니, 이는 태종이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 조사의(趙思義)의 난(亂)
태종 2년(1402)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난을 일으켰다.
조사의는 죽은 태조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제1차 왕자의 난때 제거된 이방석과 방번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반란군의 숫자가 겨우 6천~7천명 정도인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의미를 갖는것은 왕좌에서 쫒겨난 이성계가 그 배후에 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거봐요! 권력엔 부모 자식이 소용 없다니까~)
이성계는 찬밥이 된후 한양과 동북면을 왕래하면서 지냈는데, 이성계가 안변의 석왕사로 떠난 직후 '조사의(趙思義)의 난(亂)' 이 보고되었다.
당시 이성계가 반란지역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박순을 파견하여 지방 수령이 조사의를 따르지 않도록 무마하라 했으나, 박순은 조사의(趙思義)의 군대에게 피살되었다.
(함흥차사로 죽은게 아닐세..)
이로써 철령이북은 조사의(趙思義)반군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성계의 행방은 알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북면에서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들이었던 가별초(家別抄)들을 주도면밀히 모병한 흔적이 있었다.
모든 증거를 참작할때 이 난의 배후에는 이성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태종(太宗)은 조영무, 김영렬등의 장수로 하여금 4만 관군을 이끌게 하고 친정에 나섰다.
살수에서 관군과 대치하게 된 반란군은 관군의 숫자를 알자 사기가 크게 위축되었고, 원병을 보내리라 기대했던 여진족은 사태를 관망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살수의 얼음이 꺼져 수백명이 익사하면서 반군 진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사의(趙思義)는 아들 조홍과 함께 안변으로 퇴각했으나 생포되어 난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이성계는 조사의(趙思義)가 생포된 다음날 개경으로 돌아왔고, 조사의의 난으로 수십명이 처형되고 유배되었다.
(이성계는 오리발 내밀기 하고 있는겨?)
조사의(趙思義)의 난(亂)에는 동북면의 수많은 지역수령들이 연루되었으나 상당수가 관대히 처벌되었거나 복권되었고, 이 때문에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는 관련자에 대한 추궁이 끊이지 않았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버지 이성계에 대해 태종 이방원은 참회하는 마음에 아버지의 죄를 추궁하지 않은걸까? 궁금타! 😂
🎓 다음은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진 태종의 치적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