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30일
아기가 환경을 받아들이다.
문 은희 한국알트루사 여성상담소장
요즘 새로 된 법무장관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꼭 그 사람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그의 아내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회가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고, 온 백성이 뉴스에서 끝없이 (지겹게) 접하게 된 중요 안건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삼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아니 온 국민이 다 그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여의도에서 정치하는 사람도 큰 소리 내고 있고, 그 집 아들, 딸과 비슷하게 양육되어 같은 학교에 간 학생들도 촛불 들고 일어섰습니다. 그들과 같은 학교 교육 과정을 거쳐 직업전선에 들어선 언론인들도 필봉을 휘두릅니다. “공평하지 않다”고 정의를 외칩니다.
그 집 아들과 딸만 나쁜 짓을 했을까요? 연구하는 많은 이들이 사회계층과 그들 자녀들의 교육 기회, 그리고 앞날의 삶의 진전을 연구해냅니다. 상류층 자녀들이 더 좋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고, 계속 상류층에서 살게 되는 기회가 훨씬 많다고 보고합니다. 내가 보는 일간지 첫 쪽부터 <환승 어려워진 ‘계층 순환 버스’>라는 멋진 제목으로 계속 2, 3 쪽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큰 활자로 "자산축적의 격차, 교육 불평등의 고리로 자녀 세대 ‘대물림’"이라며 큰 소리로 고발합니다. 또 다음 장에는 “부모 소득, 학력 따라 어떤 ‘계층 버스’에 올라탈지 결정돼”라며 고발 항의합니다.
그런데 든든한 기초신뢰감이 길러진 아이였다면 사교육 방식이나 올바르지 않은 ‘표창장’을 받아 스펙을 쌓으려는 부모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건강한 덕목을 가진 아이를 어디서도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부모가 ‘현실’이라 하는 상황에 아이들이 꾸역꾸역 적응해 가는 데만 급급합니다. 아이 자신이 자기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내려는 결단을 볼 수 없어 슬픕니다. 아이의 특징을 보려하지 않는 부모가 눈 먼 사람들이라면, 눈 뜬 아이 자신이라도 자기답게 살 길을 주장하여 부모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모의 자산과 학력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이라 믿어 의존하는 아이들로 길러냈기에 아이들이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똑똑한 아이로 길러내는 것은 ‘고 3’이 되어 갑자기 두드러지게 들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태어난 첫해부터 젖을 물린 엄마와의 사이에서 싹 트고 자라나야 하는 덕목입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의식주의 요인을 제공하고 아이의 욕구를 알아 사랑으로 채워주는 양육자가 아이에게 필요합니다. 아이는 그 양육자의 보살핌을 알아보고 혼자가 아님을 감사합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보는 눈이 얼마나 간절한지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 아이를 보는 엄마의 시선이 어떤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이렇게 서로 알아보며 아이는 아이대로 자신에 대해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는 존재야!” 하는 신뢰감이 생깁니다. 엄마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엄마가 자신을 돌봐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을 압니다. 엄마에 대한 기대가 든든합니다.
엄마에 대한 기대가 흔들리면 아이는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불신이 마음 밑바닥에 똬리를 틀게 됩니다.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신을 잃게 됩니다. 자신만의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신뢰가 사라집니다. 바깥에서 요구하는 항목들을 메워가려 애쓰게 됩니다. “예뻐야 합니다.” (자기다운 아름다움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성공해야 합니다.” (자신의 길을 찾아 모험도 하며 뜻있게 살면 됩니다.)
‘포함’ 단위 때문에 우리가 각기 따로 존재하지 못해봐서 서로 자신의 관계를 분명하게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 어려움을 덮어씌워 무게를 가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법무장관도 청문회에서 쿨하게 답변하다가 아들 이야기가 나올 때 비로소 눈물을 찍어냅니다. 그것이 우리네 아킬레스 건입니다. “자식이 원수라”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