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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태양계를 중심으로
하나의 은하계에 속한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발견된 은하계만 하더라도 28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 은하계를 형성하는 별들은
무려 2,000~4,000억 개가 넘는다고 한다.
어떤 학술지에서는 그 수가 2조가 넘는다고도 한다.
이 광대한 은하계에 어느 별에 어떤 생물이
존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주가 아무리 광대해도
시간적으로 보면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광대한 우주도
어느 별 하나 불변 고정된 것은 없다는 의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유정 세계는 공간적으로
삼계(三界)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공간이란 유정(有情)이 머무는 공간을 뜻한다.
그 공간을 유정의 심식(心識)의 경중에 따라
3가지 세계로 분리했기 때문에 삼계라 한 것이다.
고대 인도의 브라만 종교에서도
물리적인 천체설을 주안점으로 삼았지만,
불교가 설립되면서부터 이를 마음의 수양에 의한
마음의 정도에 따라 구분했기 때문이다.
종교, 철학, 과학 등 모든 학문은
인간을 중심으로 만들어 지기 때문이다.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 물리학자들도
동양사상에 심취하는 것도 이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불교에서는 중생들이 사는 세계를 세간(世間)이라고 한다.
세간은 유정세간(有情世間)과 기세간(器世間)으로 구분된다.
유정세간(有情世間)은 중생 세계를 말하고,
기세계(器世界)는 중생이 의지하는 국토, 산하, 집 등을 말한다.
유정(有情)이란 말은 범어(梵語) sattva에서 나온 말로
음역으로는 살타(薩埵)라 하고,
이를 구역(舊譯)에서는 衆生,
신역(新譯)에서는 有情이라고 번역하였다.
<유식술기일본>에는 「범어인 살타는 번역하여 有情이라고 한다.
정식(情識)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정식(情識)이란 말은 범부의 미망심(迷妄心)의 견해를 의미한다.
<대일경소17>에서는 「有情은 집착(着)의 뜻이다.」라고 했다.
착(着)이란 집착한다, 애착을 갖는다는 의미다.
세간(世間)의 세(世) 천류(遷流) 한다는 뜻이다.
강물처럼 흘러간다는 의미다. 파괴한다는 뜻.
진(眞)을 덮는다는 뜻도 있다. 변하여 파괴되고 없어지며,
바른 것을 덮고 가린다는 의미다.
미망(迷妄)을 의미하는 것이다.
간(間)은 중(中)의 뜻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세중(世中)의 사물에 떨어지는 것을 세간이라고 한 것이다.
<유식술기일본(唯識述記一本)> 에서는
「세간은 훼괴(毁壞)하기 때문이며, 대치(對治)하기 때문이며,
진리가 숨어 있어서 世가 된다.
世中에 떨어지므로 세간이 된다.」라고 했다.
세간(世間)이란 말은
단순한 명자(名字)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말 속에 일체의 법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세간의 의미가 천류(遷流)하고 파괴된다는 것은
큰 강물이 멈추지 아니하고 흘러가듯
유정(有情)은 끊임없이 생멸(生滅)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파괴된다는 것은 변하여 없어진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이는 시간적인 변천과
공간적인 변천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적인 변천은 유위(有爲)를 말하고,
공간적인 변천은 유루(有漏)을 말하는 것이다.
생사를 왕복함으로 세간을 유위법(有爲法)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 유위법에 사는 중생은 생(生)과 사(死)를 왕래 하는데
이는 중생이 지은 업(業)의 경중(輕重)에따라
가는 곳이 달라진다. 이를 삼계(三界)라 한다.
삼계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말한다.
욕계의 마음이란 욕망이 가장 왕성한 경지이고,
색계는 욕망이 성(盛)하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물질적인 애착과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고
무색계는 정신적인 번뇌는 남아 있지만,
물질적인 욕망과 구애 등 큰 속박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자유자재한 정신의 독립생활을 한다는 세계다.
업(業)의 경중에 의한다는 것은 유정인 인간은
사대가 인연화합으로 육근(眼耳鼻舌身意)이 생기고
육경(色聲香味觸法)을 대상으로 육식(六識)이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나(我>라고 하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나>라고 여기는 이 마음 때문에 삼독(三毒: 탐진치) 바람이 일고,
업(業)을 짓게 되고 번뇌 망상에 괴로움을 받는 것이다.
이 지은 업(業)의 경중(輕重)에 따라서
그 과보(果報)로 生死를 오가는 세계가
달라지는 것이 육도(六道)이다.
육도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을 말한다.
욕계(欲界)에 머무는 중생의 인식 세계를 살펴보자.
꽃의 향기를 사람들은 좋아한다.
그런데 그 향기는 어디서 만들어져 생긴 것일까?
그 향기는 뿌리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잎도 아니고,
꽃잎도 아니고 줄기도 아니다.
어느 지정된 곳에서 향기가 만들어진 것이 없는데
향기는 나고 우리는 그 향기를 맡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인식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향기에 대한
나의 好, 不好만 문제가 될 뿐이다.
뱀은 징그럽고 사악하여 대개의 사람은 무서워하고 싫어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반려동물로 집에서 키우기도 한다.
욕계의 세계에서는 이와같이 모든 대상에 대한 인식은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한 好, 不好만 문제가 될 뿐이다.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보라.
그런데 오로지 호(好), 불호(不好)만 문제가 된다.
옳다, 그르다 하는 사고 관념은 없다.
오로지 대상에 대한 내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서 욕망의 세계라 말한다.
불교는 그래서 식욕(食欲)과 음욕(淫欲)을
가장 큰 욕망으로 여긴다.
욕망의 세계에서는 옳다, 그르다.
진짜냐 가짜냐 하는 시비(是非),
진위(眞僞)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이런 세계를 불교는 욕계라 하고,
서양철학에서는 상상(想像)의 세계라 한다.
마음이 그려낸 세계라는 의미다.
마치 스케치북에 산의 색을 칠할 때
어떤 이는 붉게 칠하고,
어떤 이는 푸르게 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 번째 색계에 머무는 중생의 인식을 살펴보자.
물질을 불교에서는 色이라고 말한다.
色은 변괴(變壞), 변애(變礙), 질애(質礙)를 의미한다.
변괴(變壞)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하며 파괴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전변파괴(轉變破壞)라고 한다.
변애(變礙)는 변해가면서 서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변괴질애(變壞質礙)이라고 한다.
질애(質礙)는 형질(形質)이 있어 서로 장애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동일 공간에 두 물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성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물과 불은 변하고 파괴되지만,
그 형질은 공존할 수도 없기에 질애(質礙)라고 한 것이다.
경전에서는 단순히 색계란
시현(示現)과 질애(質礙)라고 말한다.
쉽게 풀이하면 물질은 형상을 지니고 있어 드러나 있지만,
머물지 않고 변하고 파괴되어 간다.
그러나 그 형질은 물질 상호 간에 경계가 있다는 의미이다.
물질과 물질은 서로 작용은 하지만
그 성질은 각자 고유의 성질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식이란 물질을 대상으로 형성된 의식일 뿐이다.
육감(六感)이란 대상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색욕이라고 하는 것이다.
색계는 본능적인 식욕과 음욕을 여읜 세계임으로
욕망의 세계보다 위에 있다.
욕망은 줄어들었지만, 물질은 여전히 마음을 이끄는 힘이 있다.
물질은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다.
시(是)도 아니고 비(非)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식 곧 분별에 따라 끌려가면 시(是)가 되고,
끌려가지 않으면 비(非)가 된다.
그래서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이지 하는
진위(眞僞), 시비(是非)의 인식이 생기고,
옳다고 여기는 것은 믿고 따르게 되고,
그릇된 것은 배척하고 혐오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물질 자체는 신(信)과 불신(不信)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믿음(信)과 불신(不信)이라는 것이 생긴다.
우리가 말하는 순리(順理)라는 말은 엄밀히 보면
사물의 변화에 순응해 간다는 의미이지만,
사람의 인식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일정치 않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를 상징의 세계라고 말한다.
대상이나 개념 등 상징으로 일어난 세계라는 의미다.
명자상에 끌려다닌다는 의미도 된다.
명자상은 색(色) 곧 물질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이나 자연에 대한 믿음,
선악에 대한 신에 대한 믿음, 천당과 지옥 등등
형상이 없는 것들도 형상을 띄게 되어
이를 실체라는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욕계의 세계는 好, 不好가 주된 문제가 되지만
색계의 세계는 이런 호(好), 불호(不好)와는 상관없다,
오로지 是와 非, 신(信)과 불신(不信)이 문제가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욕계(欲界)는 우리가 대상을 선택하지만,
색계는 대상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기 때문에
선택만 문제가 된다는 의미다.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인식, 자연의 법칙은 불변이라 진리,
윤리도덕은 절대 양심임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선악의 문제 등은 상징이 되어 인간이 이를 믿고 따르게 되면
불편하고 괴롭게 되지만 상징의 비난은 받지 않지만,
반대로 불신하고 거부하면 상징은 인간을 비난하지만
인간은 자유롭게 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무색계(無色界)의 의식을 살펴보자.
無色界는 한 가지도 색법의 물질이 없다.
또한 신체도 집, 소유물이 없고
다만 식(識)과 심(心)만 있어서
신묘(神妙)한 선정(禪定)에 머묾으로 무색계라 한다.
이는 물질이 없는 세계로 비록
그 방처(方處:위치)를 정하지 못했으나
과보(果報)에 대하여 승(勝)하다는 뜻이 되며
색계 상에 있는 것이다. 무색계는 식무변처(識無邊處),
공무변처(空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4가지로 분별하지만,
이는 모두 생(生)을 연유(緣由)함으로
승(勝)과 열(劣)이 있을 뿐이란 것을 말하고 있다.
무색계의 세계는 물질을 여의었으므로
好, 不好, 是와 非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양철학에서는 이런 세계를 실재의 세계라고 부르지만,
무색계와는 다소 다르다.
무색계는 생(生) 문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는 관념에 대한 사고 임으로 호(好), 불호(不好).
시(是)와 비(非)는 문제 삼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영원한 그 무엇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의 본말(本末)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무색정은 유한성을 벗어나고
식(識)과] 공(空)을 벗어나 무한성까지 벗어난 듯 하지만
<유정>이라는 꼬리의 줄에 메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서양철학의 사조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유한성은 물론
무한성까지도 파괴해버렸다는 것이다.
무색계는 선정을 통하는 것이지만 생(生)의 문제를
식(識)과 심(心)에 의존함으로
<나>라는 실체 관념을 문제 삼지 않는다.
식(識)과 심(心)에 의존한다는 것은
생(生)을 연유한다는 의미다.
물질과 욕망에서 벗어난 것이지
무아(無我)로서의 경지,
만법과 일여(一如)라는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다.
다만 욕망과 물질의 유무(有無)와 시비(是非),
물(物)에 대한 호(好), 불호(不好), 진위(眞僞)를 초월하여
자유로워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정으로서의
유위법에서 일어나는 번뇌 망상에서 해탈되었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아공(我空)을 벗어났지만,
법공(法空)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말한다.
법공(法空)이란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체증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삼계의 세계를 유루법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욕계(欲界)는 호(好)불호(不好)가 지배하고,
색계(色界)는 시비가 주안점이고,
무색계(無色界)는 이를 벗어나 자유롭지만,
생의 문제에서 바라본 것이지
제법 실상의 의(義)를 체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념이 남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벗어난다면 무위(無爲)의 세계가 들어가게 된다.
무위의 세계란 곧 해탈이라는 구경각(究竟覺)에 이른 세계다.
이 세계는 형상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인위적인 지음도 없고 애착하는 것도 없기에
무상(無相), 무주(無住), 무작(無作),
무원(無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다.
경(經)에서는 이를 보살의 세계요
여래의 세계, 열반의 세계라고 한다.
이 세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삼계와 더불어 바로 내 마음에 있다.
선택은 나에게 달린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기에는 찰나일 수도 있고,
무한한 겁(劫)이 걸릴 수도 있다.
@중생이 사는 세간법에서 짓는 것은 유위(有爲)다.
유위(有爲)로 지어진 것은 그 형상을 볼 수도 있고
그 공덕도 경험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지 일만 얻어도 희귀하다고 감탄한다.
그래서 중생은 유위의 세계를 쉽게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본래 무루(無漏)인 나의 이 마음은
그 형상이 없어 볼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식(識)과 심(心)으로는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심(心)이란 사량 분별하는 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천마와 외도들이 훼방하려 해도 길이 없고
제석천과 범천의 모든 하늘이 칭찬하려 해도
미치지 못하는데 하물며 얄팍한 범부의 무리가
어찌 무엇과 같다고 느낄 수나 있겠는가? 라고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말한 것이다.
삶의 진리란 이 세계의 기원(起源)이나,
신의 본성, 혹은 이와 유사한 문제에 관한
인간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라면 의미가 없다.
오로지 인간 존재의 고뇌와 좌절(挫折) 등
인간적 상황에 관심을 기우릴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요법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자. 당신의 삶은 호(好), 불호(不好)를 찾아가는 삶인가,
아니면 물질의 순리를 쫓아가는 시비(是非)를 따지는 삶인가?
아니면 오로지 수승한 생에 집착하여
관념의 세계를 추구하는 삶을 살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일체를 벗어버린
무위(無爲)의 삶을 살 것인가?
당신은 지금 어느 세계에 살고 있는가?
@사진: 박달재 목불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