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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심즉불(卽心卽佛)이란
「(본래) 이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다」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내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은 세간 사람들이
절간 문 앞만 다녀와도 안다고 자랑하는 소리입니다.
심지어 매스컴의 등장으로 지식이 우후죽순처럼 뻗어가니
이제는 초등학생들도 읊을 수 있을 정도의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 말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귀동냥으로 읊어대는 알맹이 없는 소리나
세간의 허망한 지식에 불과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이란 깨달은 마음을 말합니다.
언어 문자나 사량(思量) 분별(分別)로는 알 수 없는
구경각(究竟覺)인 원만한 깨침(圓覺)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깨달음 각(覺)이라 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의 지혜를 반야(般若)라고 말합니다.
구경(究竟)의 지혜를 깨달은 이가 부처님임으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그 마음을 보리심(菩提心)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은 “박학다식(博學多識)”이 최고라는 말을 합니다.
널리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야 한다는 밀입니다.
그래야 유명인 되고, 출세도 하게 되고,
경쟁에서 일등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다문(多聞) 다식(多識)”하고자 합니다.
많이 들어야 여러 가지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고,
이름난 이곳저곳을 들랑날랑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은 불교의 수행에는 도리어 장애가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지식(善知識)의 의미와는 전혀 다름입니다.
불교의 선지식이라 함은
이런 박학다식(博學多識)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智識)은 그 마음을 알고 그 형상(形相)을 안다는 뜻입니다.
知人이란 붕우(朋友)의 뜻이며,
박지(博知)와 박식(博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식이 선도할 경우 선(善)은 나에게 이익됨을 말하고
도(導)는 나를 불법으로 선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法華文句4>에 <이름을 듣는 것이 知가 되고,
形相을 보는 것이 識이 된다.
이 사람이 나의 보리의 도를
유익하게 사람을 善知識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세속의 지식은 세속의 삶에서는 분명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또한 철학적인 지식은 마치 진통제와 같이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마음공부는 사랑분별을 떠난 살아 있는 공부가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지식이란 과거의 산물입니다.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지식이 됩니다.
우리가 시간을 말할 때 현재, 과거, 미래라고 분석합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라는 것은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지나가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지식이란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분리되었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거울에 비친 자기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거울과 붙어 있으면 자기를 비추어 볼 수 없습니다.
거울과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가 나의 실상(實相)도 아닙니다.
그림자의 일뿐입니다.
다시 말해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었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 지식입니다.
그것은 참지식이 아닙니다.
주관과 객관이 결합하였을 때 즉 증득(證得)되었을 때만이
그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실상 즉 본래면목을 찾는 <시심마(是甚麽)> 란
<이 뭐꼬?>의 화두를 선가의 수행자들이
그렇게 생명을 걸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天地與我同根 萬物與我同體」라는 말도
실상에 대한 것을 증득했을 때 하는 말입니다.
거울에 비친 이러한 지식으로는 우리의 참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전통과 습관적으로 얻은 지식은 궁극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불교는 오로지 마음공부 즉 수행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유명 지식인을 찾아가 많은 것을 듣고 얻은들,
조사 어록이나 경전을 수렴한들
스스로 직접 수행하지 않는다면
알 수 없는 것이 나의 참 마음입니다.
비유하자면 아무리 진수성찬이 눈앞에 차려놓아도
먹지 않으면 허기를 면할 수 없습니다.
선가(禪家)에서 “달은 안 보고 왜 손가락만 보느냐?”하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전이나 조사 어록,
심지어 부처님 말씀이라도 스스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치 메뉴판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메뉴판을 읽는다고 해도
허기가 해결되고, 배가 불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는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는 knowledge라고 합니다.
시공간 안에서 나이에 불문하고
머리만 좋으면 습득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둘은 wisdom이라고 합니다.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날씨를 보고
올해 농사가 잘될 것이라고 농부들이 추측하는 것과 같이
경험이나 세월의 경륜이 쌓인 사람들이 아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앞의 지식과 비교할 때 공간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라고 하지 않고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는 공간은 초월할 수 있지만 시간은 필요합니다.
셋은 범어로 프라즈냐(prajnã)라고 합니다.
프라즈나는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를 말합니다.
이를 번역할 적당한 말이 없어 반야라고 하는
지혜라는 말로 번역한 것입니다.
사전적으로 프라즈나(prajnã)는
혜(慧), 명(明), 지혜(智慧)라고 번역하며
법의 실다운 이치에 계합하는 최상의 지혜를 말합니다.
경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합니다.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는 말입니다.
무분별지(無分別智), 불모(佛母) 등으로도 불립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통해 증득한 이 지혜를
또 보리심(菩提心)이라고 합니다.
보리(bodhi)는 범어로 구역(舊譯)에서는 도(道)라 했고
신역(新譯)에서는 각(覺)이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는 일체지를 말합니다.
《지도론》에서는 <무상지혜(無上智慧)>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를 통상적으로 말하는 지식과
지혜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반야의 지혜는 시공간(視空間)을 초월한 지혜입니다.
경에는 삼세(三世)를 초월했다고 표현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은 구경의 지혜는 반야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는 보리심이라고 말합니다.
경전은 부처님이 깨달은 보리(菩提)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보리(菩提)란 다만 명자(名子)일 뿐이어서
세속 때문에 말하는 것일 뿐, 어떤 형체도 없고,
빛깔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고 모양도 없고,
나아가는 것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없고 길도 없는가 하면
모든 언설(言說)을 벗어나 삼계(三界)를 뛰어넘어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깨닫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희론(戱論)도 없고 물음도 없고,
보임도 없고 문자(文字)도 없고 언어의 길도 없다. 」
《신심명(信心銘)》의 말을 빌리자면
“언어도단(言語道斷) 비거래금(非去來今)” 이라고 했습니다.
언어와 문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입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자를 통하지 않고는 상대와 소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은 그 구경의 지혜를
중생들에게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방편으로 이를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방편과 부처님이 깨달은 구경의 그 지혜가
무엇이 다른지 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을 보면
방편과 지혜에 대한 월정광덕(月淨光德)이라는
천자의 질문에 문수사리가 이렇게 말합니다.
「“천자여, 보살마하살의 간략한 도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 간략한 도로써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두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는 방편(方便)이고, 둘째는 지혜(智慧)이니,
선한 법을 포섭하는 것을 방편이라 하고,
모든 법을 분산하는 것을 지혜라 합니다.”
그리고 또 방편이라 함은 중생들의 행(行)에 따르는 것이고,
지혜라 함은 일체 법상(法相)에 퇴전하지 않는 것이며,
방편이라 함은 중생들의 마음을 기다려 그대로 응(應)하는 것이고,
지혜(智慧)라 함은 일체의 법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며,
방편이라 함은 모든 법을 화합하는 것이고,
지혜라 함은 모든 법을 여의는 것이며,
방편이라 함은 인연을 일으키는 것이고,
지혜라 함은 인연을 없애는 것이며,
방편이라 함은 모든 법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고,
지혜라 함은 법성(法性)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며,
방편이라 함은 불토(佛土)를 장엄하는 것이고,
지혜라 함은 불토를 장엄하되 분별함이 없는 것이며,
방편이라 함은 중생들의 영리한 근기와 우둔한 근기를 아는 것이고,
지혜라 함은 중생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며,
방편이라 함은 능히 도량에 이르는 것이고,
지혜라 함은 능히 일체 불법을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은 불가사의한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도를 닦는 데 있어서 언어와 문자에 의한
경론을 익히고 외우는 것만큼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의 방법론 측면에서는 방편을 쓰지만
그 차이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경(經)은 이어서 설명합니다.
「천자여, 알아 두오. 보살마하살은 또 두 가지 도가 있어
이 두 가지 도로써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나니,
두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는 돕는 도이고, 둘째 끊는 도인데,
돕는 도란 5 바라밀이 그것이고,
끊는 도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그것이며,
또 두 가지 도가 있으니, 두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는 얽매임이 있는 도(道)이고,
둘째는 얽매임이 없는 도(道)인데,
얽매임이 있는 도란 5 바라밀이고,
얽매임이 없는 도란 반야바라밀이며,
또 두 가지 도가 있으니,
첫째는 한량이 있는 도이고, 둘째는 한량이 없는 도인데,
한량이 있는 도란 상(相)의 분별을 갖는 것이고,
한량이 없는 도란 상의 분별을 갖지 않는 것이며,
두 가지 도가 있으니,
첫째는 지혜의 도이고, 둘째는 끊는 도인데,
지혜의 도란 초지(初地)로부터 7지까지이고,
끊는 도란 8 지로부터 내지 10 지까지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광고를 통해서 어떤 기계를 알고 돈을 주고 샀다면
기계를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계의 기능까지도
알아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심히 공부하면 불법이 무엇인지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법에서는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마음공부는 보았다는 그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그 작용의 의미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은 그 보리심의 이치와 그 깨달음을 전하는 지혜는
그 작용면에서 무엇이 다른가를 위의 경에서는
문수사리보살이 수지용행(隨智勇行)이란 보살에게
보살의 이치와 보살의 지혜로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수지용행 보살이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었다.
“어떤 것을 보살의 이치라 하며, 어떤 것을 보살의 지혜라 합니까?”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이치란 아무런 작용이 없는 것이고,
지혜란 작용이 있는 것입니다.
왜 이치를 작용이 없는 것이라 하는가 하면,
이치란 바로 무위(無爲)로서 무위법(無爲法)은 법에 있어서
작용과 작용 아님이 없기 때문이며,
또 이치란 물든 상(相)이 아니고 상을 여읜 것도 아니니,
이 이치가 법에 있어서 작용과 작용 아님이 없기 때문이며,
또 이치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나니,
법에 있어서 작용과 작용 아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자여, 지혜란 어떤 것이냐 하면, 지혜는 곧 인욕의 길입니다.
이 마음의 소용은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지혜는 작용이 있는 것이지,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며,
또 지혜의 공(功)은 끊는 데에 귀착하나니,
이 때문에 지혜는 작용이 있는 것이지,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며,
또 지혜는 5음(陰)과 12입(入)과 18계(界)와 12인연의 그럴 수 있고,
그럴 수 없음을 잘 아나니, 이 때문에 지혜는 작용이 있는 것이지,
작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구경의 지혜는 불가사의합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진일보(進一步)하는 마음으로
끊임없는 정진으로 닦아나가야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얼음이 녹아야 강물로 흘러가고 바다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부처라는 말을 이해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큰 지혜의 바다요, 원만하고
청정히 깨달은 높은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도
「마땅히 깊은 법을 수행하고 배워야 할지니
그 법의 이치가 매우 깊으니만큼
매우 깊은 지혜라야 깨달을 수 있다.
이같이 이 법을 말하긴 하지만 말도 또 얻을 수 없거든
중생들의 소견이 뒤바뀌었으니 이것은 그의 경계가 아니다.
삼매를 닦는 것만으로 이 이치를 아는 것이 아니니
삼매도 삼매가 아니고 공중에도 역시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지혜의 경계가 아닌가 하면
지혜의 경계가 아닌 것도 아니므로
마땅히 이 실제의 경계는
지혜의 경계도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옛날에 이 법을 듣고
매우 깊은 곳을 행하였지만
중생들은 좋아함이 달라서
믿어 받는 이가 드물었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대승정왕경(大乘正王經)》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를 이렇게 찬탄 합니다.
「큰 자비에 상응하는 반야바라밀을 말미암아서
무위(無爲)의 험난한 언덕을 불자(佛子)는 능히 넘을 수 있어서
무등(無等)의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어 모든 중생을 이롭게 포섭하고
지도(智度)*를 어머니로 삼기 때문에 대인(大人)은 능히 이와 같으며
지도(智度)의 획득을 말미암기 때문에
비로소 부처님의 본체[佛體]를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수승한 선인[勝仙: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다.」
*지도(智度)는 완전한 지혜.
지혜에 의하여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이 부처라는 말을 바로 알고 방편과
지혜를 통해서 정진 수행하여 성불하시길 합장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