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가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이 된 이유
스리랑카는 헌법 제9조에 따라 불교국가이며, 현재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이다. 상좌부불교는 기원전 4세기 근본 분열로 인해 생겨났다. 석가모니 부처 입멸 후 100년쯤 지나며 계율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개혁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나, 불교계의 장로들은 젊은 개혁파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장로 중심의 보수파는 상좌부가 되었고, 젊은 승려 중심의 진보파는 대중부가 되었다. 상좌부불교는 스리랑카를 거쳐 동남아시아로 전해졌고, 대중부불교는 파키스탄 지역을 거쳐 티벳과 중국으로 전해졌다.
스리랑카가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이 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인도에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밀려 불교가 쇠퇴했기 때문이다. 종교는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4세기에서 6세기까지 인도를 지배했던 굽타왕조에서 힌두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이다. 7세기경 힌두교가 황금시대를 맞이했고, 불교가 쇠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7세기 후반 바닷길로 인도에 가서 10년, 동남아시아에서 15년을 살고 돌아와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을 쓴 의정(義淨: 635~713) 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곳(인도)을 찾아가는 사람은 반백 명에 가까웠으나 정작 거기 머물러 있는 사람은 고작 몇 사람뿐이다. 간혹 서쪽 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당나라처럼 사찰이 없기에 마음 놓고 머물며 손님이 되어 수행할 만한 곳이 없었던 까닭에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옮겨다녀야 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기가 힘들어 몸이 편안하지 못하니 어찌 수행에 열중할 수 있으리오.”
1197년부터 1206년 사이 인도불교의 상징과도 같던 나란다 사원이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가즈나비 왕국의 군대에 의해 파괴된다. 그리고 1526년 무굴제국이 등장하면서 이슬람교가 점진적으로 힌두교에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불교는 아주 소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스리랑카로 간 상좌부불교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국교가 되어 번성할 수 있었다. 기원전 88년에는 알루비하라 석굴사원에서 부처님 말씀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이 팔리어로 기록돼 패엽경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스리랑카가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 된 두 번째 이유다. 패엽경은 경율론 삼장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경장이 아함경으로 번역되고, 다섯 개 니까야로 구별되었다. 디가(장아함), 맛지마(중아함), 상유타(잡아함), 앙굿따라(증일아함), 쿠다카(잡아함). 이 팔리어 경전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로 전해져 불교 신앙의 토대가 되었다. 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팔리어 경전이 미얀마 이라와디강 중상류에 있던 퓨(Pyu)왕국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스리랑카 불교사의 중요 사건과 불교 문화유산
스리랑카의 불교 문화유산을 찾아 6일 동안 돌아보면서 스리랑카 상좌부불교의 역사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스리랑카 불교사의 중요 사건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불법을 전하기 위해 스리랑카를 세 번 방문했다고 한다. 그 흔적이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산인 스리 파다(Sri Pada)에 발자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켈라니야 사원의 탑이 있는 곳에서 부처님이 설교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스리랑카의 고대사를 팔리어로 기록한 역사서 『마하반사(මහාවංස)』에 나온다. 그러나 이들 이야기는 전설 수준이어서 믿기 어렵다.
공식적으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247년이다.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 아라한이 미힌탈레에서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데바남피야 팃사 왕을 만나 설교를 하고 불법을 전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불교가 왕족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져 전체 사회로 전파되었다. 이때 세워진 절이 아누라다푸라의 마하비하라 사원이다. 또 마힌다 아라한을 통해 스리랑카에 보낸 부처님 쇄골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탑이 투파라마다. 그리고 아쇼카왕의 딸 상가미타 비구니가 보리수나무 묘목을 스리랑카로 가지고 온다. 이 나무를 심은 절이 스리 마하보디 사원이다.
기원후 4세기 초에는 칼링가 왕국에 있던 부처님 치아사리가 아누라다푸라 이운된다. 칼링가의 구하시바 왕이 공주 헤마말라와 사위 단타로 하여금 치아사리를 아누라다푸라 왕국의 마하세나 왕에게 전해주도록 한다. 그래서 부처님 치아사리가 왕궁 가까운 담마차카(Dhammachakka) 사원에 모셔진다. 지금의 이수르무니야 사원으로 여겨진다. 5세기 초 중국의 법현 스님이 스리랑카를 방문했을 때 아누라다푸라 아바야기리 사원에는 5,000명, 마하비하라 사원에는 3,000명, 미힌탈레 세티야기리 사원에는 2,000명의 승려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1017년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무너지고, 1070년 비자야바후에 의해 폴론나루와 왕국이 건설되었다. 그는 스리랑카가 남인도 왕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약해진 불교를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왕궁 인근에 아타다게라는 사원을 짓고 아누라다푸라에 있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옮겨오게 했다. 이후 왕이 바뀌면서 치아사리는 새로 만들어진 바타다게, 하타다게 사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담바데니야(Dambadeniya) 왕조(1220–1345)시대 부처님 치아사리는 수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여러 번 옮겨 다녔다. 감폴라(Gampola) 왕조(1341~1408) 시대에는 부처님 치아사리가 14세기 후반 감폴라의 니얌감파야(Niyamgampaya) 사원으로 옮겨졌다.
1412년부터 1597년까지 지속된 코테(Kotte) 왕조에서는 1550년대 부처님 치아사리가 라트나푸라(Ratnapura)의 델가무와(Delgamuwa) 사원으로 옮겨졌다. 1590년대부터 스리랑카를 통치한 칸디 왕국은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같은 외세와 싸우며 불교를 지켜냈다. 그리고 1595년 비말라다르마수리야 왕때 부처님 치아사리가 칸디로 옮겨졌다. 불치사 건물은 1600년경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3년 포르투갈 군대의 침입으로 치아사리가 잠깐 둠바라로 옮겨졌다가 라자싱아 2세(1635~1687)때 칸디로 돌아왔다. 그리고 1700년대 초 나렌드라 싱아왕에 의해 현재의 불치사가 새로 지어지게 되었다.
현대 스리랑카 불교의 위상과 역할
19세기 중반 스리랑카에서 기독교가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불교중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운동이고, 불교의 혁신을 강조하는 신 불교운동이었다. 그것은 20세기 들어 현대 불교운동으로 발전했는데, 정치 참여, 사회 개혁, 문학을 통한 교화, 불교의 생활화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운동은 합리성, 과학성, 공존 같은 현대적인 개념의 도입을 의미했다. 그리고 불경과 불교문학을 서방에 소개했고, 서양사람들에게 장학금을 줘 불교를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영국과 독일에 불교공동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 결과 서방에서 스리랑카로 와서 불교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승려가 독일 태생의 냐나틸로카(Nyanatiloka: 1878~1957)와 냐나포니카(Nyanaponika), 영국 태생의 냐나몰리(Nyanamoli)다. 이들은 스리랑카 불교를 서방에 전하고 불교를 세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냐나틸로카는 1903년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독일에서 스리랑카에 왔고, 1904년 미얀마에서 비구가 되었다. 1906년에는 『부처의 말씀』 독일어본을, 1907년에는 영어본을 출간했다. 1907년 팔리어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앙굿따라 니카야》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910년에는 유럽에서 강의와 세미나를 통해 불교를 알렸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그는 콜롬보 인근 섬에 암자(Island Hermitage)를 짓고 서양인을 중심으로 제자를 양성했다. 1915년부터 1926년까지는 호주, 중국, 독일, 일본에 머물며 테라와다 불교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1926년 스리랑카 섬 암자로 돌아온 냐나틸로카는 1939년까지 불교경전 연구와 번역, 제자 양성에 진력했다. 1949년에는 출판사를 설립해 『불교사전』『해탈에 이르는 길』을 출판했다. 부처님 열반 2,500주년이 되는 1954년 베삭데이(부처님탄신일: Vesak)에는 미얀마 양곤에서 제6차 불전결집이 시작되었다. 이때 냐나틸로카 스님이 스리랑카 대표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는 6차 결집과 같이 불교의 매우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 결집에는 깨달은 분인 부처의 말씀이 담긴 전통 경전의 순수성을 보존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 전통 문헌의 신뢰성이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 그 문헌의 왜곡 추가 오해의 여지를 주지 않도록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러므로 6차 결집의 중요한 임무가 성공적으로 완료되고,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나는 이 결집이 서양 비구들이 참여하는 최초의 결집이라는 것에 의미와 중요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결과 1956년 5월 24일(베삭데이)에 경율론 삼장으로 이루어진 40권짜리 불경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88년 스리랑카 알루비하라에서 팔리어로 기록된 불경이 2,000년 이상이 지나 서양의 비구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제 테라와다 불교는 서양에까지 전파되어 부처님의 가르침과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테라와다 불교는 또한 위파사나로 불리는 명상을 통해 현대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안식을 주고 있다.
의정의 글은 다정 김규현 역주: 대당서역 구법고승전. 글로벌콘텐츠 2013, 57쪽을,
냐나틸로카의 연설문은 김재성: 냐나틸로카. 유럽 테라와다 불교 개척자. In: 《불교평론》99호(2024년 가을), 323~324쪽을 인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