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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중일전쟁(中日戰爭, 1931~1945)
전후 처리
중일전쟁 관련 편견에 대한 고찰과 반박
기존의 평가는 장제스와 국민당의 무능함을 과장하여 일본군와 장제스의 병신력 배틀이란 황당한 표현이 나올 정도였지만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사관과 일본 사관의 무비판식 답습의 결과다. 딱 잘라 말해서 당시 중국군이 개판이었던 건 사실이다. 무기는 고사하고 군복도 통일하지 못한 오합지졸에 산적떼가 수백만명이 우글거렸다. 병기 숙련도와 참모진의 능력, 규율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를 순전히 장제스의 잘못이나 중국의 병크로 매도할 순 없다. 애초에 청조 몰락 이후 군웅할거의 오랜 전란을 겪고 겨우 형식적 통일을 이루어내서 막 공업화를 시작한 중국에서 메이지 유신 이래로 공업화를 해오고 상비군 위주의 군사제도를 체택한 일본군 급의 강병이 나오길 기대하는 건 소말리아가 경제대국이 되길 기대하는 것과 같은 도둑놈 심보다. 그리고 장제스가 이런 상황에서 앉아서 논 것도 아니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의 도움을 받고 막스 바우어,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의 군사고문들을 초빙하고 경제 건설과 공업화, 농업정책, 외교 교섭을 통해서 어떻게든 열세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며 1938년까지 이어지는 독일식 정예 중앙군 양성 프로젝트과 1942년까지의 중공업 개발을 추진 중이었다. 1930년대 국민당 정권은 최소한 난징과 상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직할령에선 꽤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제구실을 하기 전에 일본군이 칼들고 몰려왔고 그나마 발전시킨 중국 동부 해안을 먹어치우면서 완전히 새되고 말았다.
그나마 기존에 꾸린 병력으로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중국군은 강렬한 항일 의지를 가지고 일본군에 제법 타격을 주었다. 장쉐량이 만주와 화북의 지배권을 놓고 찌질대다가 만주를 통째로 날려먹은 전례에 비하면 엄청나게 양반이다. 전쟁 중 중국군은 거의 매 전투마다 엄청난 사상자를 냈는데 그 전의 중국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낼 정도로 싸우지도 못하는 병신 군대였다. 좀 두들기면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군대가 국민당의 노력과 항일 의지 덕분에 녹아내릴 때까지 버티고 싸우는 군대 수준으로 올라간 것이다. 하지만 숫자만 많지 기량이 엉망진창인 국민당군의 분투는 한계가 있었을 뿐더러 그나마 방어선을 꾸리면 자신의 기반에 집착하려는 군벌들이 적전도주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베이핑과 톈진의 손실만 해도 베이핑의 지배자인 쑹저위안이 베이핑 지배권에 집착하다가 망한 거고 이후 화북 지역의 싸움에서도 군벌들이 심심하면 적전도주를 하는 바람에 방어선이 무너져 잘 싸우던 전황을 말아먹은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이에 빡돈 장제스가 적전도주를 일삼은 군벌 30여명을 불러 모조리 총살해버리기도 했다. 거기에 일본군과 싸우라고 8로군에 넣어준 공산당은 평형관과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대개는 같은 국민당 유격대를 공격하는 등 세력확장에만 몰두하여 4만 5천명에 불과하던 세력을 전쟁 말에는 120만으로 불렸다. 마오쩌둥은 1956년 전 일본군 육군 중장인 엔도 사부로에게 일본이 침략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가 엔도에게 "전쟁으로 피해를 본 너희 중국인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도 안 드냐"라는 비난 섞인 말을 들었다. 마침내 2011년 1월에 그 발언이 공개되자 중국 공산당은 당연히 난리가 났고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이것은 마오쩌둥의 풍자 섞인 위트, 즉 블랙 유머라고 허겁지겁 변명했다.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가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거기에 밑에도 후술하겠지만 도움을 주기로 한 미국의 도움이 대단했던 것도 아니다. 기사회생한 영국, 소련에 비하면 중국이 받은 지원은 그야말로 병아리 모이급에 그나마도 제대로 분배도 안됐다. 승리자인 중국 공산당의 시각에서 바라본 기존의 혹평 일색은 21세기에 들어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장제스의 중일전쟁 초기 공훈을 높이 평가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깊게 들어가면 자기들은 일본에 맞서긴커녕 국민당 뒤통수나 친 흑역사가 있으니...
분명 장제스는 2차 상해 사변 등에서 무능한 면모를 드러냈지만 전쟁승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국민혁명군 장교 출신으로 국공내전 이후 미국에 와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중국사 교수를 지낸 레이 황(黄仁宇) 컬럼비아대 교수도 장제스의 무능을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청조 멸망후 반식민지 상태에 군벌시대로 헬게이트가 된 농업국가를 가지고 전쟁을 수행한 점, 화폐개혁으로 인한 은본위제 폐지 등을 업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재 중국도 과거의 마오쩌둥 찬양 일색이던 시절과는 달리 중국이 일본에게 승리할 수 있던 요인인 장제스를 재평가하고 있다. 다만 현재의 대만(대만 섬으로 도피한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립하며 일본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점이 아직 걸림돌이긴 하다.
장제스는 미국의 막대한 원조를 받고도 잘 싸우지 않았다?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중심으로 중국 공산당의 저런 악의적 선전이 한국의 넷을 중심으로 굉장히 유명하고(오프라인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본다) 구 리그베다 위키의 중일전쟁 문서도 그런 주장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었으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장제스는 미국의 원조를 거의 받지 못했으며 만성적인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중국군은 중일전쟁 초기에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왜냐? 원래도 중국은 가난한 농업국가였는데 그나마 개발해놓은 중국의 대부분의 산업지대가 일본군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상하이, 난징, 우한 등이 함락되면서 중국은 공장을 죄다 우랄 산맥 너머로 뜯어서 옮겨버린 소련관 대조적으로 자본가들의 비협조로 인해 상하이에 배치했던 공업력의 2.75%만을 건졌는데 그나마도 핵심 공업력은 다 날아간 상태였다. 중국은 1938년 10월 우한 점령의 시점에서 관세수입의 91%, 공업의 94%, 전력의 96%, 방직공업의 75%를 상실했다. 그리고 주요 항구들이 다 점령당하면서 물자 수입의 길까지 거의 끊겼고 얼마 후에 수입의 80%를 담당하던 광저우까지 함락되면서 남은 물자 수입통로는 오로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통하는 하노이 루트와 영국령 버마를 통한 버마 루트 뿐이었다. 한가지 재밌는 사실은 일본이 열강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조계지를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상하이의 조계지를 통해서 군수물자가 계속 수입되었다. 이 상황에서 물자를 제공하는 것은 소련, 독일과 유럽 식민지들 뿐이었다. 일본은 하이난 섬을 점령하고 영불을 압박하여 하노이 루트와 버마 루트를 끊으려 했지만 일본의 무리한 확장에 열받은 영불은 오히려 일본의 눈치를 봐서 두었던 무기 거래 제한을 풀어버렸다. 하지만 중국에게 남은 영토는 서쪽의 황량하고 척박한 땅들뿐이었고 충칭도 기껏해야 2선급 도시였기 때문에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거기에 엄청난 숫자의 피난민들이 몰려들어 충칭의 인구만 3배 이상으로 늘어난 시점이라 기근까지 겹쳤다. 당시 미국이 중국에 준 물자는 이 정도다.
M3 경전차 100대
트럭 2만 5천대
야포 2053문
소총 30만 5천정
기관총 10만정
철모 14만 6천개
폭격기 151대
전투기 679대
수송기 120대
훈련기 43대
식량 3만 3천톤
기타 지원금액 8억 4500만 달러
동시대 영국은 310억 달러, 소련은 110억 달러 받았다. 이걸 보면 장제스가 뭘 얼마나 많이 받았다고 무기를 쌓아놓고 안 싸웠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오히려 국공내전 직전에 미국에게 받은 게 40~60억 달러 어치였으니 중일전쟁과 넘사벽의 차이다. 흔히 이 무기들이 장제스 직계군에게 흘러갔니 장제스가 그걸 안줬니 하는데 이런 무기들은 스틸웰이 지휘하는 중국군에게 흘러갔으며 심지어 스틸웰은 미 공군에게도 이 물자들을 제대로 공유하지 않았다. 장제스가 굴릴 무기가 없는데 무기를 군벌들에게 줄 수가 있나. 이 중에서 장제스가 받은 무기는 곡사포 60문과 바주카포 506문, 대공포 몇대가 고작으로 그나마도 이치고 작전으로 난리가 난 상황에서 스틸웰이 마지못해 양도한 것이다. 그 전엔 스틸웰은 중국군에 총 한자루 주지 않았다. 중국으로 지원되었다는 물자의 대부분은 중국 주둔 미 공군용 물자이며 나머지 물량조차 인도로 파견된 중국군에게 거의 다 전용되었다. 실제로 일본군이 중국에서 국민당군을 탈탈 터는 동안에도 장제스는 스틸웰의 무리한 요구로 인하여 울며 겨자먹기로 버마에서 X군과 Y군을 돌리고 있었다. 버마전선에서 통제권은 연합군 장성에게 있었고, 열심히 싸웠다 한들 연합군은 그들을 소모품 취급할 뿐이었다. 장제스 군대에게 스튜어트가 충분했니 어쩌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데 장제스가 2차 대전때 받은 스튜어트 전차는 기껏해야 100대 정도였고 그나마도 위에도 적혀 있듯이 버마 주둔군에게 다 몰려 있었다.
장제스나 플라잉 타이거스 지휘관 셔놀트 준장 등의 중국 주둔 미군 사령관 조지프 스틸웰 때문에 지원이 형편없었다는 증언에 대해 국공내전의 사례를 들면서 어설프게 부정하려는 논리도 보이는데 스틸웰의 성향이 어쨌거니를 떠나서 중국은 연합국에서 찬밥 대우였고 위에 수치로 나와있지만 미국은 중일전쟁 때 중국에게 정말로 물자를 얼마 안줬다. 랜드리스에 중국 몫으로 책정된 물자는 고작 2%였고 그나마도 스틸웰이 쟁여놓질 않나 영국군이 중간에서 착복하질 않나 오히려 중일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새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60억 달러에 달하는 지원을 해줬다. 애초에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은 다른 전쟁인데 국공내전의 사례를 들먹이며 중일전쟁이 어떻게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물론 미국 정부라고 할 말이 없는건 아니다. 미국이 자선 단체도 아니고 무조건 장제스가 원하는대로 대규모 육군병력을 파견하고 최신식 무기도 펑펑 퍼주고 돈도 막 퍼줄 의무는 없다. 지원 규모는 오로지 전략적 중요성을 판단하는 미국 정부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미국의 자원과 인력도 무한정인 것이 아닌 이상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먼저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고 미국은 유럽에서 나치를 패배시키는 것을 더 중시했다. 스틸웰의 수많은 실책과는 별개로 중국 지원이 소홀했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사실 미국으로서는 중국에 대규모 물자를 보내주고 싶어도 그럴만한 사정이 못되었다. 영국이야 대서양만 건너면 되고, 소련은 북대서양 항로를 통해 무르만스크로 가는 루트와, 페르시아만(이란에서 아제르바이잔을 통한 루트)으로 건내주는 루트가 있었는데, 중국에는 물자를 보내줄만한 루트가 없었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태평양은 일본해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여기에 수송선단을 보내면 어떻게 될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중국의 해안도시와 대만은 모두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대규모 선단을 보내도 하역할만한 항구도 없었다. 유일한 루트는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까지 가서 거기서 육로를 통해 중국까지 보내는 방법 뿐이었는데, 인도양도 일본군의 공습을 받는데다가 독일 잠수함의 활동지였으니 결코 쉬운일은 아니었다. 거기다 버마를 통한 육로 수송도 남방작전으로 1942년에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하면서 차단되었다. 그 이후로 미국이 중국에게 물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인도에 물자를 보낸 다음 수송기로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게 어느 정도냐 하면 일부 항공기의 경우에는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추락한 비행기들의 잔해를 따라서 항로를 잡은 적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운반할 수 있는 물자의 양도 적은 데다가 항공기용 연료의 경우 운반하는 수송기가 운반 중 사용하는 양이 심하면 50%에 육박하는 등 낭비도 심했다. 물론 종전 때까지 항공기로만 나른 건 아니고 1944년에 인도의 레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레도 공로'를 건설해서 이용한 바 있다. 버마 루트도 버마 탈환 이후 재개통되긴 했는데 그땐 이미 전쟁 끝나가던 시점인지라...
하지만 근본적으로 미국은 중국에 대한 지원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미국은 중국의 능력 자체를 의심했기 때문에 중국이 원조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도 난색을 표했고 중국에 이미 할당된 물자를 영국이 횡령하는 문제도 모른 척 하는 등 매우 차별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거기에 미국의 대중 지원이 소홀했다는 팩트를 무시하고 미국이 준 막대한 물자 쌓아놓고 태업한 장제스~ 운운하는 프로파간다들 때문에 이 단락이 이렇게나 길어진 것이지만.
스틸웰은 유능한데 중국군이 무능해서 패한 것이다?
한국에서 스틸웰은 명장이고 무능한 중국군이 스틸웰의 지휘를 따르지 못해 진 것이며 장제스는 오만하여 미국인 고문들의 현명한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소리가 퍼져 있지만 이 또한 스틸웰의 일방적 주장을 답습한 오류에 불과하다.
우선 스틸웰의 성향에 대해 알아보자. 스틸웰은 누가 뭐래도 지독한 혐중론자였다. 중국에서 무관으로 복무한 경험과 출중한 중국어 실력 덕분에 중국통으로 알려져 장제스의 고문으로 결정되었는데 스틸웰은 전 중국군의 지휘권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버텼을 뿐더러 중국 파견 소식에 "쿨리들과 어울리라니 날 뭐라고 생각하는가?"라고 짜증을 냈던 양반이다. 애초에 장제스는 소련에서 보내준 바실리 블류헤르나 독일이 보내준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같은 고문을 원했지 자기 자신이 직접 지휘하려드는 장군을 원한게 아니었다. 이러니 둘의 사이는 처음부터 어긋났다. 그리고 스틸웰은 중국군이 일본군과의 오랜 전투를 통해 터득한 지구전과 소모전에 대해선 중국인들은 용병술도 모른다고 비웃다가 정작 자신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을 데리고 버마에서 일본군과 맞섰을 때는 장제스의 충고도 무시한 졸렬한 지휘 때문에 개발살났다. 이미 영국군은 버마 수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다 빠지고 있었고 철수하는 인도군과 영국군, 민간인을 보호한 건 스틸웰이 그렇게 폄하하던 중국군이었다. 그래놓고 '이게 다 무능한 중국군 탓이다!'를 시전하면서 중국군들을 모두 총살해 마땅하다는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정작 중국군과 같이 싸운 영국군의 슬림 중장은 중국군이 노련한 베테랑으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극찬했다. 자신의 최정예 부대를 말아먹은 스틸웰에 대해서 장제스는 엄청난 증오심을 품게 되었고 플라잉 타이거스의 셔놀트 준장 역시 만약 스틸웰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지휘관이며 만약 그가 미군이 아니라 중국군 소속이었다면 진작에 총살시켰을 것이라며 뼈저리게 혐오했다.
그리고 주는 것은 없이 요구는 많아서 버마 전투에서 중국군 3개군 뺏아오질 않나 다시 30만 대군을 버마 탈환을 위해 뺏어오질 않나 그래놓고도 중국이 무능하다는 소리만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스틸웰은 300개 사단, 400만에 달하는 중국군을 90개 사단으로 감축하고 소수 정예로 개편할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그러기 위한 물자는 하나도 제공할 생각이 없었다. 장제스가 이 상황에서 이 말을 들으면 그게 바보다. 미국은 장제스의 지상군 파병 요청도 지원 확대 요청도 다 씹었다. 애초에 미국은 태평양과는 달리 중국에선 그저 일본군을 묶어두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고 그때문에 아예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바랬던 장제스는 속이 터졌다. 장제스는 미국이 주는 것도 없이 내정간섭에 월권을 하려 든다고 이를 갈았다. 특히 장제스는 여러번 반란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스틸웰이 자신의 군의 지휘권을 가지고 군대를 축소하려 드는 것을 아예 미국인들의 반란 음모 정도로 받아들였다. 허나 오만한 스틸웰은 이런 중국인들의 분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고 중국인들이 하는 것도 없이 요구만 많다고 깠으며 국민당이 중일전쟁 개전 초기 수십만명의 피를 뿌려가며 처절히 맞선 사실도 다 국민당의 거짓말 정도로 치부했다.
스틸웰은 바이충시를 비롯한 일부를 빼곤 장제스 이하 대부분의 중국 장군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었지만 중일전쟁 당시 장제스는 상하이 전투에서 삽질을 벌이기도 했어도 그 이후엔 상하이 전투의 교훈을 바탕으로 화북 등지에서 안정적인 철수와 유격전, 소모전을 병행했고 일본이 우한을 점령한 이후 공세종말점에 다다르자 난닝, 난창, 우한 등지에서 여러차례 반격을 감행해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특히 진주만 직후의 3차 창사 방어전에서는 영국까지도 진주만 이후 연합국이 드디어 승리를 거뒀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지만 중일전쟁의 양상도 모르던 스틸웰은 장제스의 지구전이나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 유도 전략을 비웃으며 화력을 모아 정면승부를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까는 행보를 보였고 나중엔 이게 다 중국군 때문이다 시전으로 일관했다. 스틸웰이 무능하다고 까댄 두위밍 장군만 해도 일본군 상대로 여러번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스틸웰은 그를 매우 폄하하여 한국에도 그가 무능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이미 조금 설명한 바이지만 버마 전투도 무능한 중국군 때문에 스틸웰이 졌다고 스틸웰의 일방적 주장만 알려져 있는데 실상을 까보면 버마를 포기하기로 한 영국군이 지독할 정도로 비협조적으로 굴며 중국군 뒤통수를 치고 달아나버린 것과 스틸웰 본인이 일본군이 전차도 대포도 없다고 무작정 깔보고 무장도 제대로 안된 중국군을 무리하게 내세우는 졸렬한 지휘를 한 탓이었다. 정작 쑨리런 장군이 지휘하던 중국군은 영국군 7천명과 500명의 민간인, 17 인도사단을 구출하는 성공적인 전과를 올렸고 스틸웰 본인도 쑨리런을 동양의 롬멜이라고 칭찬했다. 그러곤 동양의 스탈린그라드라 불리는 창더 전투 직전엔 무리한 버마 탈환을 위해 장제스의 최정예 병력 30만명을 빼돌려놓곤 병력 파견 조건으로 약속했던 물자도 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창더 전투에서 중국군이 고전하자 중국군은 무능하다고 비웃었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한 건 둘째치고 상덕에서 중국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긴 했지만 치열한 저항과 축차적인 소모전으로 일본군에 적잖은 타격을 줘서 일본군 11군 사령관 요코야마 중장이 작전을 조기 종결하고 퇴각했는데도 말이다.
이치고 작전, 즉 대륙타통작전이 벌어질 무렵에는 장제스가 조만간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자 스틸웰은 형편없는 일본군 따위가 무슨 공세를 취하겠냐고 그의 말을 싹 다 무시하고 장제스의 유일한 전략예비대인 Y군을 장제스를 협박하여 빼앗아 버마로 보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치고 작전이 터져서 일본군 50만명이 뤄양, 난닝, 창사, 헝양을 잇달아 점령했다. 중국군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 미친듯이 싸워 일본군에게 무려 10만명의 피해를 안겨줘서 일본군이 우리가 상대하는 것이 중국군이 아니라 미군인가?하고 당황할 정도였지만 결국 중국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화중을 모두 잃고 중요한 곡창지대들을 상실했다. 스틸웰은 이런 상황에서도 장제스의 지원 요청을 모두 무시하고 오히려 자신이 중국군을 지휘해야 한다고 떠들었으며 일기에는 건방진 장제스는 골탕을 좀 먹어야 한다고 고소해하는, 동맹국에서 보낸 고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정신나간 행태를 보였다. 일찍이 그는 장제스 암살을 기도한 바도 있었다. 결국 장제스는 폭발하여 루스벨트에게 스틸웰을 자를 것을 요구했다. 얼마나 장제스가 초강수를 뒀는지 스틸웰을 자르지 않을 거면 걍 관계 끊자. 너네가 준 물자 다 가져가라!라고 루스벨트에게 직통으로 통첩을 날렸을 정도였다. 마침내 스틸웰은 1944년 10월 19일 앨버트 웨드마이어 장군으로 교체되었다. 중국에 부임한 웨드마이어가 한 첫번째 일이 허물어지는 중국군 방어선을 보강하기위해 스틸웰이 머저리같이 살윈강에 묶어둔 중국군 2개 사단을 다시 중국으로 돌려보낸 일이었다.
스틸웰은 자신의 동맹인 중국을 깔보는 것은 물론이고 일본군도 깔봤는데 상기했듯이 창더 전투, 이치고 작전에서 일본군 따위가 무슨 반격을 하냐고 계속 방심하다가 중국군만 엿먹였으며 1942년 버마 방어전을 맡았을 때도 일본군을 얕보다가 개발살나서 1백명의 일행과 함께 걸어서 버마를 탈출했다. 그리고 1944년의 버마 탈환전 때도 장제스가 버마의 일본군이 아직 녹록치 않다고 경고해줬음에도 장제스의 모든 조언을 간섭이자 멍청한 소리로 비난하며 씹고 X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하다 자신이 주장한 것보다 세배나 되는 일본군과 맞닥뜨려 또 고생했다. 애초에 그의 버마 탈환 계획만 해도 영국, 미국, 중국이 모두 불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개인적인 명예를 위해 악을 써서 관철시킨 것이고 영국과 미국이 반대하자 스틸웰은 미국, 영국의 협조 없이 중국군만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한 장제스를 비난했고 보다못한 셔놀트가 스틸웰이 설욕에 눈이 멀어 할짓 못할짓 못 가린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결국 그의 버마 탈환전은 무능한 하나야 타다시, 가와베 마사카즈등의 자폭으로 어느 정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무타구치 렌야의 전설적인 임팔 작전과 맞물렸고 결국 버마 탈환에 관심이 없던 영국까지 가세하여 랑군까지 밀어버렸다.
스틸웰은 결과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못했다. 애초에 그 사람이 중국 전선이라는 거대한 전선을 맡을 만한 경험이나 능력이라곤 전혀 없이 그저 중국어 실력 때문에 임명되었던 것은 둘쨰치고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매우 강했으며 거기에 정치적 능력은 매우 떨어졌다. 패튼과 비슷하거나 그 이하로 보통 취급되는데, 일례로 그는 중국에 부임한 이후 다짜고짜 장제스 휘하 직계군의 지휘권을 요구했다. 스스로도 말이 안된다고 판단하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중국군의 고위 미국인 장교의 그의 업무는 분명히 충칭과 워싱턴 사이의 갈등을 조율하고 장제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것이었지만 그는 개인적인 편견으로 중일관계를 멋대로 재단했으며 정말로 필요한 지원들은 자기 생각에 필요없단 이유로 끊어버리고 장제스의 비현실적인 요구는 장제스를 망신주기 위해서 가감없이 워싱턴에 전달하면서 중국인들은 너무 멍청하여 우리가 이걸 다 들어주리라고 생각한다는 개인적 소견을 첨부하는, 가히 적국 스파이나 할 법한 짓을 저질렀다. 이는 장제스의 북벌 시기에 중국에 왔던 소련 고문들이나 중일전쟁 개전 전후의 나치 고문들의 세련된 행보에 비하면 가히 눈물이 날 정도의 행각이다. 당장 다른 미국인 참모인 클레어 셔놀트의 행보만 봐도 스틸웰의 정치적 막장성은 두드러진다. 그리고 버마 전선 이후에 장제스와 투닥대다가 미 정부에 칭얼대자, 미 정부에서 스틸웰에게만 비밀 전문으로 '당신이 중국군 통수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오'라는 내용을 전달했는데 경솔하게도 스틸웰은 그걸 갖다가 장제스 방으로 쳐들어가서 장제스 얼굴에 들이미는 짓을 했다. 이러한 행각과 대륙타통작전에서의 자폭이 겹치면서 결국 장제스의 중국과 스틸웰 둘 중 하나를 택일하라는 강력한 반발로 미 정부는 이러다가 중국이 등돌릴까봐 스틸웰을 본국으로 소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스틸웰은 마지막까지 사고를 치니 후임인 웨드마이어 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멋대로 인도로 떠나버리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웨드마이어는 스틸웰의 이러한 행태를 회고록에서 비판했다.
게다가 장제스와 중국인들만 스틸웰을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스틸웰은 버마 탈환전 중에서는 영국군의 전과들을 자신의 전과인 것처럼 발표하고 봤다가 처칠과 루이스 마운트배튼의 격노를 사기도 했으며 버마 탈환 준비 과정에서도 무리한 생떼를 써서 런던과 워싱턴의 안좋은 시선을 동시에 받았다. 게다가 같은 미국인 셔놀트는 스틸웰하면 아예 이를 갈았고 스틸웰 휘하에 배속된 윙게이트 병단을 본따 창설된 메릴 부대도 스틸웰의 지휘권 행사에 대해서 크게 반발하곤 했다.
중국군은 일본군을 눈앞에 두고도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바빴다?
이는 만주사변, 러허사변 시기까지만 놓고 말한다면 사실이다. 하지만 중일전쟁을 놓고 본다면 이 역시 역사왜곡이다.
실제로 중일전쟁 초기 중국군의 최대 문제는 군벌들의 이기심이었다. 베이핑, 톈진의 중국군이 일본군에 압도적인데도 황당하게 패배한 것도 베이핑의 지배자였던 쑹저위안이 자신의 지배권이 약화될까봐 거의 직무태만에 가까운 행보를 일삼았고 장제스가 즉각적으로 지원해준 중앙군조차도 베이핑에 오지 못하게 막는 병크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닛뽄도 들고 몰려오는데도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고 거의 손을 놓고 있었던 쑹저위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전세가 일본군 쪽으로 완전히 기운 후였다. 더 거슬러올라가면 1931년의 만주사변도 화북의 지배권을 놓고 집착한 장쉐량이 전면전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거의 앉아서 1만 5천에 불과한 일본군에게 털린 탓이었다.
이후 화북 지역의 전투에서도 지역 군벌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탈영, 적전도주를 일삼았고 옌시산, 리쭝런 등은 꽤 그럴듯한 방어선을 갖추어 일본군을 상대로 선전하다가 군벌들의 도주에 방어선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화북을 황당하게 다 내주어야 했다. 그 와중에서도 평형관, 타이얼좡에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지만... 이후 광저우 전투에서도 광둥 군벌들이 직무유기를 일삼고 멋대로 철수해서 광저우가 날아갔고 결국 폭발한 장제스는 도주를 일삼던 군벌 30여명을 소환하여 모조리 총살했다. 하지만 광둥 군벌들의 위세는 너무 커서 화북 군벌들과는 다르게 목을 따진 못했다. 이건 충칭으로 천도한 후에도 문제가 되어서 장제스는 전쟁 중에도 자신들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려는 쓰촨 군벌들과 지역 행정권을 둘러싸고 쓸데없는 정치적 다툼이나 벌여야 했다. 원래 군벌 자체가 장제스와 심하면 적, 우호적이라도 동급 위치를 차지했던 사람들이라 서로 동지로 보는 의식이 눈꼽만치도 없었다. 반장전쟁만 보더라도 유력한 군벌치고 장제스의 위치를 노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산시성 군벌 옌시산은 자신의 얼마 남지 않은 영역에 틀어박혀 단독으로 베이핑의 일본군 사령부와 평화협상을 벌여 전쟁 내내 전투를 기피했고, 임시 수도인 충칭을 중심으로 쓰촨성과 윈난성 지역의 지방 군벌들과 장제스의 알력 다툼은 극심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일본에 편에 붙었을 때 왕징웨이를 따라서 일본에 붙은 군벌은 하나도 없었다. 장제스 하면 이를 갈던 룽윈이나 장파쿠이같은 반장 군벌들조차도 친일이라는 반역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고 기껏해야 한푸쥐의 적전도주나 옌시산이 궁지에 몰리자 단독강화를 한 정도지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여 동포에게 총부리를 돌린 자들은 없고 중일전쟁을 영도하던 장제스의 권위를 위협한 자들도 없었다. 반란을 두번이나 일으켰던 리쭝런, 바이충시도 장제스의 명령에 절대복종, 타이얼좡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항일이라는 대의 아래에 군벌들은 대체적으로 협조적이었다. 누구도 장제스를 일본제국보다 우선순위로 제거하려는 미친 짓은 저지르지 않았고 중국군은 일부 비겁한 적전도주(그나마도 전쟁 초반에 몰려 있다.)를 제외하면 내분이 없었다.[58] 장제스의 중앙군의 능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자 무능한 군벌군 운운하며 이게 다 군벌군 때문이다! 그러니 군벌군이 주력인 중국군은 망하는게 당연하다~ 란 논리가 새롭게 떠오르는데 39년 대공세나 창사 공방전, 상덕 전투 등 중일전쟁 대부분이 군벌군이 주력이었고 그들의 전과 역시 우수하다. 물론 주요 전투의 경우 그때마다 장제스가 중앙군을 파견해 보조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중국 현대사 편이나 한국 웹상에서 떠도는 장제스가 직속군을 후방에 놀려두며 군벌군, 공산군의 희생을 강요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반대로 전쟁 초기에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독일식 정예부대 4개 사단과 자신의 직속 정예부대인 5군과 6군 30만 대군을 전선에 투입했고, 오송 크리크 공방전이나 타이얼좡 전투에서도 직계군이 맹활약하였다. 즉 장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하지만 위의 단락에서 가루가 되도록 지탄받은 스틸웰이 장제스 직속군을 죄다 미얀마로 보내버리는 상병크를 터트리는 바람에 전쟁 후반에 상대적으로 활약을 못한 것 뿐이다.[59] 장제스 직속군대 10만이 1942년 스틸웰의 무능 때문에 버마에서 전멸당하는 사건이나 전략 예비대인 X군, Y군이 버마 전선으로 보내지지만 않았으면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의 향방이 매우 달라졌을 것이다. 장제스의 반격 작전은 빠르면 43년 말, 늦어도 44년 정도에는 실행될 예정이었는데 병력 여유만 생길라치면 스틸웰이 훼방을 놓는 통에 45년 말로 미뤄졌고 끝내 시행되지도 못했다. 21세기 들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에서도 기존의 이게 다 장제스 때문이다 사관을 탈피하여 중일전쟁 중에 일본군에 맞선 장제스의 노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편 공산당과의 갈등은 훨씬 심각해서 상호간에 교전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공산군은 중일전쟁 초기엔 국민당에 협력하여 평형관 전투 등에서 활약했지만 문제는 그게 다였다. 마오쩌둥은 지금이야말로 세력을 불릴 절호의 기회라고 유격대를 조직하여 일본 점령지 내부에서 해방구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여기까지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문제는 이미 활동중인 국민당 유격대를 공격해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해방구를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라 공산당의 할당된 구역을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영역을 확장하고 남의 구역 침범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펑더화이가 백단대전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자 마오쩌둥은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매우 성을 내기까지 했고 이런 기조에 반발하여 항일을 촉구하는 당내 반대파들을 대거 숙청해버렸다.
결국 국민당도 폭발하여 남의 영역에서 설치는 신사군을 철수시키지 않으면 일본이고 뭐고 공산당부터 조지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렸고 국민당이 열받은 걸 안 마오쩌둥은 신4군을 철수시켰는데 1941년 1월 창강에서 발생한 신사군 사건(환남사변)이 발생했다. 철수중이던 공산당 신4군이 국민당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아 괴멸당한 것. 누가 먼저 선빵을 때렸는지 또는 원인을 제공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에 대해 국민당측에서는 공산당이 먼저 국공합작을 깼다고 주장했고, 공산당은 장제스의 명령으로 철수하던 신4군이 팀킬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장제스의 공산당 견제라는 시각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공산군이 국민당군을 공격하고 해방구를 장악하는 등 통수를 친 사례가 재평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재조명되었는데 현지의 반공산당 국민당 장성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는 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7.4. 중국군은 오합지졸이고 국민당은 전쟁에 도움이 된 것이 없다?[편집]
전쟁중 중국군 장교단의 질은 군사교육의 열악함으로 인해 상당히 낮아서, 장제스가 군단장급 장군들에게 대놓고 "너희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사람이 없어서지 너희들 능력이 그 자리에 어울려서 앉은 것이 아니다. 군단장이라는 네놈들의 실제 실력은 일본군의 대대장급도 과분하다!"고 까댈 정도였다. 이는 중국군 80만 대군이 상하이에서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일본군에게 포위 섬멸당할 뻔 했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군의 기강도 엉망이어서 군대란 것이 주둔지역 민간인들의 식량이나 재산을 강제로 약탈하는 등의 범죄가 들끓었다. 게다가 강제징병을 위해 마을을 공격(!)하는 사태도 종종 벌어졌다. 이러한 탓에 각 마을주민들은 국민당군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고 자경단을 결성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실상을 까보면 마냥 매도할 수도 없는데 중국군이 일방적으로 졌다는 기존 관념과는 달리 2차 상하이 사변만 해도 중국이 우쑹, 다챵전 등에서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준 전과가 있으며 타이얼좡, 짜오양, 1~3차 창사 공방전를 비롯한 승전이 많았으며 4차 창사공방전이나 상더 전투처럼 일본이 이긴 전투에서도 일본군은 중국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인해 잇달아 수천~만단위의 피해를 입은 바가 있다. 대륙타통작전에서도 일본군이 입은 손실이 10만에 달했다. 즉 일방적으로 털린 군대가 아니었단 것이다. 흔히 중국이 버틴 원인을 무한에 가까운 인력과 넓은 영토로 지적하는 소리들이 많은데 중국의 인구가 문자 그대로의 무한이 아닌 이상 일본군이 압도적인 교환비로 중국군을 쉴새없이 격퇴하면 결국 중국 인력도 고갈되기 마련이고 무장과 규율이 더 좋았던 일본군이 계속 전진을 했어야 정상이다.
중국의 이러한 전과는 여러 단락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당시 중국이 사분오열된 농업국가였다는 점에서 더 두드러진다. 당장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보다 베트콩이 더 많이 죽었다고 베트콩이 무능하니 베트남 전쟁은 실질적으로 미국이 이긴 전쟁이니 이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중국군의 기강과 사기, 훈련도, 무장이 빈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는 당시 정권의 무능함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상황에 어쩔 수 없던 것에 해당한다. 애초에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제대로 된 중앙정부랄 것도 없는 중국에서[60] 대체 누가 양질의 군사적 엘리트를 양성하고 최신 무기를 수입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킨단 말인가? 게다가 위에서 설명했듯이 장제스의 공업화 정책 및 군 현대화 사업으로 과거에 비해선 매우 강력해진 상황이었다.
게다가 징병문제도 절박했던 당시 중국의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일본군에게 주요 요충지를 잃고 밀렸는데 징병을 안하면 일본에 앉아서 항복하란 말인가? 중국 서부의 농민들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은 안타까운 일이긴 했지만 안했다간 중국이 무너져버릴 고육지책이었다. 그렇게 강압적으로나마 항전수행을 지속할 여력을 마련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초인플레이션과 인적 고갈로 중국은 일본군 총칼 앞에 망했다. 게다가 장제스와 당시 중국정부의 징병제가 강압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장제스는 앞으로 중국을 영도할 학생들에게는 군면제를 해줌으로 앞으로 중국을 이끌어갈 학생 엘리트들을 보호했다. 40년대 말에 군면제 학생들을 상대로 모병제가 실시된 바가 있는데 이에 호응한 사람이 14만으로 목표인 10만을 가뿐히 넘었다. 미래를 이끌어 갈 지식인들을 비행기에 태워서 자폭시킨 일본군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다.
거기에 장제스가 자신들의 적인 쓰촨 군벌들과의 동거를 했음에도 장제스 정권이 약해지긴 커녕 오히려 장제스의 권위가 증대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 과거 대군벌 오페이푸, 장쭤린, 장쉐량 등은 자신들의 기반을 잃고 밀려났을 때 예외없이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런데도 장제스와 국민당 정권은 정적들 사이에서도 권위가 유지되었다. 노래처럼 불러지는 '부패되고 무능하기만 국민당 정권'이라면 이게 설명이 될 수 있을까?
즉 요약하자면 당시 중국군은 문제가 많긴 했지만 당시 중국이 처해있던 열악한 상황에 비해서는 대단히 선방한 편이며 불과 몇년전인 만주 사변, 러허 사변에 비해서도 매우 발전된 모습을 보였고 구 군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범국민적 지지를 확보한 상태였다.
8. 역사에서의 비중
중국의 대일 전쟁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항전을 계속해낸 인민, 정부의 업적이며, 이 전쟁에서 중국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던 세계 각국의 외교관과 언론인들이 틀렸음을 증명해냈다.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 중국은 4년 동안 사실상 홀로 일본과 맞서 싸웠고,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군대는세계적인 고도 산업국가의 80만 대병력을 저지했다. 연합군이 유럽과 아시아의 두 전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후 4년 동안에도 중국이 계속 전선을 유지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 라나 미터(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역사학 교수, 중국연구센터 주임)의 2013년도 저서 <중국, 잊혀진 동맹>(Forgotten Ally: China’s World War II, 1937-1945) 중에서
비슷한 시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져 유럽에서도 전쟁이 일어나고 태평양에서도 전쟁이 크게 일어난 탓, 그리고 전쟁기간의 거의 대부분을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탱커 샌드백 신세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중일전쟁은 상대적으로 역사에서 큰 비중을 갖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역사를 연구할 때도 잊혀질 수준인데, 1980년대에 나온 타임라이프사의 제2차 세계대전사의 경우는 중국 전선이 포함되어 있지만 중국 - 버마 - 인도 전역을 다루고 있고 대륙타통 작전을 제외하고는 버마 전선만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기본적인 사료가 그렇게 빈약하지는 않으나 객관성의 문제가 있어서 검증이 어려운 탓이 크다. 일단 일본군의 1차 자료는 부정확한데다가 자화자찬이 많고, 중국군의 경우에는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과장성으로 인해 사료에 기재된 전황의 정확성에 문제가 많으며 상당 부분 난징학살이나 기타 일본군의 만행 고발에 치중한다. 미국 등 기타 연합군의 자료는 당연한 일이지만 국민당 정권 비난 일색에다가 역시 제3자라 자료가 적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의외로 일본에서 전후에 발간된 자료들이 어느 정도 신빙성 있을 정도이다. 난징 부정론자들은 예외 게다가 전투가 크게 벌어지고 사상자도 많은데 실제 전쟁에 끼친 영향이 거의 없다는 인식 또한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치지 않았으면 태평양 전쟁은 아예 발발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중국을 이길 꿈에 가득 차 있었으나,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구와 크기를 자랑하는 중국은 끝까지 버티면서 일본에 맞섰고 일본은 결국 이 수렁에 빠져 피해가 커지자 더욱 군국주의를 밀어붙이고, 손해를 메꾸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치기로 결정, 본격적으로 미국과 마찰이 일어난다. 중일전쟁이 없었다면 이후 동아시아 역사는 매우 크게 달라졌을게 뻔하기에(특히 공산당은 중일전쟁의 국공합작으로 세력을 확보하여 중국 통일에 성공하였다) 아시아권에서는 매우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이다. 일단 중국은 1차 대전 때문에 일본을 엿먹이려고 독일이 보낸 주요 인물들이 들어와 있는 상태였던지라, 그냥 놔두면 친독이나 정치사상 문제로 내전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도 장제스는 독일과 협력한 옛 전과가 있어 다소 평가절하를 당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의 경과에도 아주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 육군이 개입된 전장의 경우 알게 모르게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일본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중일전쟁은 일본 육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전쟁이고, 태평양 전쟁은 일본 해군이 주도한 전쟁이다. 당연히 일본 육군의 주 관심은 중국, 만주 일대였지, 듣도 보도 못한 저~어기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초, 중반에 지상군 병력을 필요로 하는 전장에 대해 일본 육군은 그다지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고, 태평양 방면의 병력 파견 규모도 작전 구역의 면적을 생각해 보면 중국과 만주에 투입한 것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당장 과달카날 전투의 진행 경과만 봐도 이러한 점은 여실히 드러난다. 때문에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를 제외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맞붙은 전장에서 일본군의 지상병력이 연합군 지상병력을 능가한 적은 없었으며[61], 이로 인해 태평양 전쟁에서의 지상전 양상은 대부분 '밀어붙이는 연합군(사실상 미군) vs 밀리는 일본군'이라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상전의 패배는 그 일대의 제해권, 제공권 영구 상실[62]로 이어지면서 일본의 패망으로 이어지는데 한몫 하였다. 그리고 상술한 바와 같이 태평양 전쟁의 주요 전투들 중 일부는 중국 전역의 경과에 적게나마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을 폴란드 침공이 아닌 중일전쟁 발발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2000년대 들어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 개전 후 4년이 지나 1941년 일본이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기 전까지 2차대전과 중일전쟁은 별개의 전쟁이었으니 합쳐서 보기는 조금 어려운 측면이 있다.
참고로 이 중일전쟁 덕분에 일본은 1940년 동계(삿포로) 올림픽/ 1944년 하계(도쿄) 올림픽 개최권을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자업자득이지만. 두 곳 모두 나중에 다시 개최(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32년 뒤), 1964 도쿄 올림픽(20년 뒤))하기는 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중화민국은 주요 승전국이 되어 UN 상임이사국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전후 국공내전이 발발하여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끝나고,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며 이 상임이사국 자리는 1971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계승한다. 지금도 중화인민공화국은 이 전쟁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일본과 싸운 중국군이 대거 마오쩌둥 공산군으로 들어가 버리기도 하는 등, 일본과 전쟁을 치룬 수많은 중국인, 중국군들은 대다수가 2차대전 후 마오쩌둥을 택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 남았다. 비록 중화민국은 대만 섬으로 쫓겨났지만, 마지막까지 장제스와 함께한 중국군은 그렇게 많지 않고, 대륙에서 필사적으로 항일 전쟁을 벌이던 지금의 중국인들이 바로 그 중화민국 시절의 중국인들이다. 중국이 일본에게 승리하긴 했지만 일본이 저지른 마루타 생체실험, 난징대학살 등의 전쟁범죄로 인해 현재까지도 중국과 일본의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9. 여담[편집]
일본은 선전포고도 하지 않고 침공해왔는데 이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확대되어 교전이 발생했다는 일본측 시각에 의한 것으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중사변' 또는 '지나사변'으로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63] 이렇게 명칭을 낮춘 이유는 꽤 여러가지 추론이 있다. 당시 1차대전 이후로 전쟁이 국제법상 금지되었기에 "나 전쟁 안했소" 하여 국제적 추궁과 국내의 국민의 신뢰추락을 피하고 싶었던 것 등이 있다. 결국엔 눈가리고 아웅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버릇은 계속 유지되어 할힌골 전투를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했다.
여기서 일본이 나중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일단 선전포고 문제는 의외로 나라 간의 이해타산이 엮여들어간 문제였다. 전쟁내 중국은 선전포고를 안했다는 것으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초기에는 일본이 하더라도 선전포고로서 받아들이지 말아달라고 미국에 타진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문제가 되었던게 미국의 중립법이었는데, 국내 기업이 전쟁을 벌이는 쌍방과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법률이었다. 따라서 선전포고가 공식으로 받아들여져 공식전쟁이 되면 중국은 미국에게 물자원조를 전혀 받을 수 없고, 오히려 몰래하려다가 일본에게 나포당할 수도 있으며 미국이 이 나포문제와 한창 노리고 있던 중국과의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에 손해를 볼 것 같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가 우려되어 껄끄러워 했고 일본도 당시 경제의 태반을 미국에 의지하던 상황에서 미국과의 경제교류가 전쟁기간 동안 정지되던 상황이었다. 전후는 어쨌든 전쟁시작시에는 공식적 전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침공군 중 고참급 인사들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던 부류가 꽤 많아 비선전포고파와 아웅다웅했는데, 경제문제 따위가 뭔 상관이냐며 경시하는 시각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는 편이 전후 패전국에게서 영토와 물자를 더 뜯어내고 점령시의 절차가 간단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비선전포고파의 경우는 손해없이 이득을 끌어내자, 즉 어떤 방식으로 중국을 침략하는가에 대한 방법론 문제였다.
그러나 이런 일본의 변명을 100% 인정해주더라도 엄연하게 선전포고를 하지도 않고 기습적으로 개전한 것은 변명할 수 없는 만행이다. 특히 이 변명에서 중국이 선전포고에 관련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랍시고 대는데, 범죄자들이 흔히 하는 변명중 하나다. 피해자가 이론을 제기하던 안하건 간에 범죄로 엄연하게 성립되는 내용을 가지고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니 감안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 덤으로 일본은 앞서 언급했듯이 선전포고 안하고 기습을 해서 개전하는 것을 당연시여기는 녀석들인데다가 그렇게까지 선전포고를 하고 싶었다면 나중에라도 하면 되는데 끝까지 안했으니... 당장 선전포고가 정당하게 전쟁하니 타국은 교전국의 뒤통수를 치지마시오에 가깝기 때문에 선전포고를 안하면 다른 국가들도 이를 본받아서 똑같이 교전국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기만 해도 일본의 변명이 말같지도 않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5월에는 중국 공군이 일본 본토 공격을감행한 적이 있다. 중국 공군의 소련제 SB-2 폭격기 2대가 일본 큐슈의 구마모토 상공까지 온 것. 이 때 중국군 폭격기가 투하한 것은 폭탄이 아니라 일본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선전물(삐라)들이었다(...). 작전을 수행한 폭격기들은 아무런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작전으로 인한 실질적인 효과는 거의 없었고 이후에도 중국 공군은 더 이상의 일본 본토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행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대공 방어 체계가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는 이 사건을 단순 해프닝으로만 생각하고 대공 방어의 증강 등 대응책을 전혀 세우지 않았던 것. 그리고는 나중에 미국에게 신나게 얻어터졌지 나중에 중일 항공전에 관한 자세한 항목이 생길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