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교는 일정교와 함께 신라 경덕왕 19년(760)에 가설된 다리이다. 일정교와 마찬가지로 왕궁을 출입하기 위한 다리였다.
○十九年, 春二月, 宮中穿大池. 又於宮南<蚊川>之上, 起<月淨><春陽>二橋.
19년 봄 2월, 대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또한 대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 춘양교의 두 다리를 놓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 19년조>
▲복원된 월정교, 월정교 위로 선도산 정상이 보인다.
월정교는 고려시대까지는 사용되었고 조선시대 17세기 말에는 무너져 유지만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日精橋 月精橋 舊在府西南蚊川上兩橋遺址 尙存
일정교와 월정교는 경주부의 동남쪽 문천 위에 있으며 두다리의 유지만 남아있다.
<동경잡기 고적조>
○半月城南兎嶺邊 虹橋倒影照蚊川 蜿蜓勝漢尾垂地 螮蝀飮河腰跨天 手斬蒼蚊周處勇身成白鶴令威仙 昔賢逸跡皆警俗 慙愧區區數往還
반월성의 남쪽 토끼고개 가에 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그림자를 거꾸로 문천에 비추었네. 용이 꿈틀거리며 은하수에 오르니 꼬리는 땅에 드리우고 무지개가 하수를 마시매 허리는 하늘에 걸치었네. 손으로 푸른 이무기를 베었으니 주처의 용맹이요, 몸이 백학으로 화하였으니 정령위는 신선이었다. 옛날 현인들의 높은 자취는 다 세속을 놀라게 하는데 구구하게 자주 왕래하는 나 부끄럽구나.
<동경잡기 고적조 金克己詩>
그런데 이 시 가운데 '虹橋倒影照蚊川(무지개 모양의 다리가 그림자를 거꾸로 문천(蚊川)에 비추었네)' 라는 표현은 구름다리의 형식이었음을 말하고 있어 현재 남아있는 유구의 모양과는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시는 때로 감상에 흐르는 경향도 있어 단어 선택에 다소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월성 서남쪽 남천 위에 4개의 교각자리가 남아 있다. 다리 전체길이 60.57m, 교각과 교각 사이의 중심간 거리 12.55m, 교대지와 교각지 사이 11.46m였던 것으로 발굴 당시 조사됐으며 4개의 교각과 그 위에는 목재평교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교각은 유수방향 양쪽에 수압을 분산시키기 위해 선수형 물가름돌을 놓고, 장대석을 잇대어 놓아 전체적으로 볼 때 배밑바닥 모양을 하고 있다. 물가름돌과 장대석 등의 연결부분에는 은장을 박아 석부재를 결구했다. 교대는 교대 양측면의 날개벽 석축보다 약간 돌출되게 하여 큰 기초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퇴물림하여 장대석을 쌓아 올렸다. 중간 중간에 돌못을 박아 석축을 견고히 했다. 월정교는 교각은 돌기둥으로 교각에 걸치는 보와 기타 부재는 석재와 목재를 혼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월정교는 복원 중에 있다. 2012년 정도면 완공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월정교의 복원은 향후 경주의 신라문화유산 복원의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월정교 복원 결과에 따라 신라 왕경의 복원이 탄력을 받을지 아니면 제동이 걸릴지가 결정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익산 미륵사 동탑의 복원처럼 실패한 복원이 될 경우에는 앞으로 신라 문화유산의 복원은 상당한 제동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반면 월정교 복원 결과가 기대 이상으로 좋게 나타날 경우에는 신라 왕경의 복원 작업은 추진력을 얻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황룡사의 복원 사업에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 원성왕 14년(798) 3월에 루교(樓橋)가 불에 탔다는 기록이 보인다.
○十四年 春三月 宮南樓橋災
14년 봄3월에 궁남쪽루교가 불에 탔다.
<삼국사기 원성왕 14년조>
이 기록에 따르면 이 다리는 목교로서 비를 맞지 않게 건물을 교각 위에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루교가 월정교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다리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