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여강길-6코스) 네이버 지도 >
< (여주여강길-7코스) 네이버 지도 >
< 트랭글로 본 11월10일 트레킹등로 >
트레킹코스 = 세종대왕릉입구-남한강-여주보
-상백2리마을회관-남한강-이포보-천서사거리
트레킹시간 = 5시간30분 (9:00~3:00) (휴식시간 30분별도)
트레킹거리 = 20.8k
오늘 내생일
트레킹 마치고 대중교통으로 집에 도착하니
8시30분 생일파티도 시간이 늦어 꽝이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릉입구=왕대2리) 도착 (9:00)
트레킹 시작~
이정목 코스따라서 갑니다~
(영릉로 고가도로)를 지나서~
남한강 가는길~
남한강 도착~
(세종대교)가 보인다~
(여주입암)
여주입암에 있는
쉼터~
남한강 따라서 쭉 갑니다~
억새밭에서 바라본
남한강~
이건 무슨건물이지?
이런쉼터가 2군데 있다~
날씨가 흐려서
일조량 부족으로 사진이 흐려요~
(포토존)
사진이 흐려 인증샷 pass~
가까이서 본
(여주보)
여주보를 지나갑니다
다음
(여강길 8~9코스) 할때
여주보로 넘어올꺼임~
여주보 수력발전소
(솅종엉졩 훈민졍흠)
(여주보 전망타워)는 다음에~
남한강에
꽤큰 섬들이 여러개 있다~
(뒤들천2교)
억새밭~
(내양교)
억새가 아직 살아있다~
이이정목에서 뚝방길로~
남한강 따라서 뚝방길로 갑니다~
(양화나루터) 비석
위치가 틀렸다
강가에 나루터 비석을 세워야지
뚝방길에 세우다니~
1,
(공적비)
이것도 뒷배경이 좋치않다~
2,
남한강 한번 쳐다보고~
(강변 칠우사건 현장)
(양화천교)를 건너갑니다~
양화천교에서 바라본
(양화천)
이건 뭐지?
조형물도 아니고 물통도 아니고~
(상백2리 마을회관) 도착
여기까지가
(여강길-6코스) 10.8k 왔다
계속해서
(여강길-7코스)로 갑니다~
농로 옆에
국화꽃 향기가 진동한다~
(찬우물 나루터)에서 바라본
남한강
여긴 낚시꾼이 많다~
제가 건너갈
상백교~
(상백교)를 건너갑니다~
상백교에서 바라본
(복하천)
(벚꽃축제의 고장 흥천면)
도로 따라서
철지난 벚꽃길로 갑니다~
계신리
좌측으로 갑니다~
(능북로)
아래를 지나서~
앞에
(남한강대교)를 지나갑니다~
남한강에서 바라본
백운봉-용문산(좌)-추읍산(중)-봉미산(우)
이포대교가 보이기 시작~
(장명교)를 건너가는데
여긴 다리가 주차장이다~
이게 무슨장치인가 궁금해서 살펴보니
(수질오염 항시감시 흥천측정소) 이다~
산길 입구~
산길로 올라갑니다~
삼신당 가는길~
중간에
쉼터와 체육시설이 있는데
관리를 안해서 엉망이다~
삼신당(좌)-천양루(우)
(삼신당의 유래와 전설)
(삼신당)
(천양루)
잘쓴 글씨이다~
천양루에서 30분간 휴식~
내려가자~
산길을 내려오니
국화꽃이 날 반긴다~
(이포나루터) 도착~
이포나루터에서 바라본
남한강~
이포대교 다왔다~
이포대교(전)-이포보(후)
(이포보 수력발전소) 입구도착
이포보 주변은 식당과 카페가 즐비하며
오늘 일요일
차량과 사람이 무지많다~
오늘 인증샷은
(이포보) 에서~
이포보를 건너갑니다~
이포보에서 바라본
(이포대교)
지나온 이포보~
(이포보 전망대)
올라가 보자~
전망대에서 바라본
(이포보)
이포보는
청춘남녀가 데이트하기 좋은곳이다~
이포보를 내려와서
이포대교를 지나갑니다~
언덕을 올라가면
이포보 입구~
(이포보와 초지경관)
(여강길 7-8-9코스 종합안내도)
이포보 입구에 있는
기념탑~
경기도 여주시
(천서리사거리 버스정거장) 도착 (3:00)
트레킹 종료~
여기도 버스가 잘 안다닌다
40분 기다린후
11-1번 버스타고 여주역으로 왔다~
첫댓글 ●여주여강길 6~7코스 (세종대왕릉입구-남한강-여주보–상백2리마을회관-남한강-이포보-천서사거리)
잘 봤습니다.
‘강변 칠우 역사적 사건’이 궁금해 찾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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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칠우(江邊七友)
▶조선 선조, 광해군 때 7인의 서자(庶子) 출신 서생들이다. 양반 자제들이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힘을 한탄하여 북한강가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계축화옥(癸丑禍獄: 계축옥사 癸丑獄事)을 일으키는 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들이다.
►박응서(朴淳의 庶子), 서양갑(牧使 徐益의 庶子), 심우영(沈鉉의 庶子), 이경준(兵使 李濟臣의 庶子), 박치인(商山君 朴忠侃의 庶子), 박치의(朴忠侃의 庶子), 김평손(金平孫) 등 고관들의 자제들이나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음을 한탄하며 세상을 증오했던 7인의 서생 모임이다.
►이들은 연명(連名)으로 서자에게도 관계에 진출할 수 기회를 주도록 허통 상소하였으나(1608 선조 41) 허락되지 않자, 소양강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세상을 냉소하였다. 때로는 생활이 궁핍해지면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초에는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결국 조령(조령/새재 鳥嶺)에서 큰 도적질을 하고 붙잡혔는데, 포도청에서 그들을 심문하는 중에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의 꾐에 빠져 계축화옥(癸丑禍獄 1613, 광해군 5)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실인즉,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였고,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실권파인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고, 계속하여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을 압박하였는데, 구실을 잡지 못하고 있던 차, 강변칠우 박응서 등이 은(銀)상인을 살해하고 은 수백 량을 강탈하였고, 이들은 살인죄로 포도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대북파 이이첨 일파는 이들을 꾀어, 살인강도의 목적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김제남이 시켜서 하였다는 허위 자백을 도적들의 목숨을 담보로 받아냈다(박응서의 옥).
결국, 김제남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폐서인 당하여 강화도로 유폐되었다.
(계축옥사 1613, 광해군 5).
역사적 사건 줄거리가 길어 건너뛰었더니
상세하게 기술하여 내용 이해했습니다
작은역사적 사건이지만
현장에 다녀온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