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임브라 대학교가 보여주는 보편적 가치
코임브라는 리스보아, 포르투, 브라가에 이어 포르투갈에서 네 번째 큰 도시로 14만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포르투갈 중부지방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리스보아까지 거리는 197㎞쯤 된다. 코임브라는 1139년 알퐁수 엔히케 왕자가 포르투갈 왕국의 초대왕이 되면서 수도로 정해졌고, 1256년 수도를 리스보아로 옮기면서 대학도시로 남게 되었다. 1290년에는 리스보아에 최초로 대학교가 생겼다. 1308년 정치와 종교의 갈등으로 인해 대학 시설이 코임브라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1537년 시설 이전이 완료되어 포르투갈 최고의 명문대학이 되었다.
코임브라 대학교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것은 대학의 역사와 문화, 건축과 문화유산이 두드러진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코임브라 대학교는 과학, 법학, 예술, 건축, 도시계획 등에서 포르투갈 왕국의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둘째 대학교가 코임브라 도시의 핵심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코임브라는 대학과 도시의 유기적 결합을 보여준다. 셋째 포르투갈어와 포르투갈 문화를 생산하고 전파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해왔다.
코임브라 대학교는 도시와 강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131m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 도심의 언덕에 알카소바(Alcáçova) 왕궁, 주아니나(Joanina) 도서관, 대학병원, 법대, 과학기술대 등 8개 단과대학이 있고, 그곳에서 28,000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언덕에서 보면 몬데구(Mondego) 강이 도심의 남쪽과 서쪽을 끼고 북서쪽으로 흘러간다. 그러므로 코임브라 대학교는 몬데구 강의 동북쪽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대학 캠퍼스 남쪽으로 대학 식물원이 펼쳐져 있다.
코임브라 대학교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다.
코임브라의 고등교육은 산타 크루즈(Santa Cruz)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산타 크루즈 수도원은 1131년 건설을 시작해 1223년 교회와 학교를 갖춘 종교시설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1200년 전후 이미 코임브라 최고 교육기관이 되었고, 1308년 리스본의 대학이 코임브라로 옮겨오면서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코임브라 대학교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오래된 학문의 전당(Estudos Velhos: Old Studies)으로 불렸다. 그러나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대학이 리스보아와 코임브라를 왔다 갔다 한다.
주앙 3세 때인 1537년에 이르러 대학교가 코임브라로 이전했고, 1597년 알카소바(Alcaçova) 궁전을 비롯한 궁전 건물이 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새로운 대학(학부)가 개설되었다. 주세 1세 때인 1770년에는 퐁발 후작의 주도하에 학교의 개편이 이루어진다. 제수이트 대학을 없애고, 의과대학, 수학 대학, 자연철학 대학을 개설한다. 교과과정에 있어서도 종교적인 내용보다는 계몽주의 정신이 강조되었다. 그후 코임브라 대학교는 교육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적으로 가장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는 포르투갈 최고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코임브라 대학교 캠퍼스에는 두 개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디니스 1세 석상이고, 다른 하나는 주앙 3세 석상이다. 디니스 1세는 리스보아에 있던 대학을 코임브라로 이전한 사람이다. 주앙 3세는 코임브라 대학교의 이전과 개혁을 완수하고, 포르투갈 최고의 교육 연구기관으로 만든 사람이다. 그래서 디니스 1세 석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주앙 3세 석상까지 따라가며 대학교 캠퍼스를 살펴본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디니스 1세 석상 앞으로 디니스 광장이 있고, 그 좌우에 수학부, 건축학부, 사회학부 건물이 있다.
석상 서쪽으로 대학로가 이어지고, 좌우에 의과대학과 과학기술대학이 위치한다. 의과대학 건물 벽에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코임브라 대학교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의 부조상이 새겨져 있다. 15세기 의사이자 자연 의학자인 루시타노(Amato Lusitano)가 보인다. 유대인이었던 루시타노는 살라망카대학교를 졸업하고 고국 포르투갈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종교재판에 회부될까 두려워 귀국을 포기했다. 그는 네덜란드,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의사와 교수로 활동했고, 오스만 투르크 테살로니키에서 생을 마감했다. 18세기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정치가 퐁발 후작의 얼굴도 보인다.
이들 서쪽으로는 포르타 페레아 광장이 있고, 남쪽에 중앙도서관이 북쪽에 인문대학이 있다. 인문대학 앞에는 인문학을 대표하는 두 명의 동상이 서 있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보인다. 이들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대학 본부를 비롯한 ㄷ자형의 건물을 만난다. 이들 건물 앞으로 대학 광장이 있고 그 가운데 주앙 3세 석상이 대학을 바라보고 있다. 대학 본부는 알카소바 궁전 건물로, 정면에 그리스 건축을 모방한 르네상스 양식의 파사드가 인상적이다. 광장의 서쪽 건물은 법과대학이고, 서북쪽 모서리에 시계탑이 서 있다. 그리고 법대 건물 남쪽에 상 미구엘 경당이 있다.
경당 남쪽으로는 계몽주의 시대인 1717~1728년 세워진 바로크 양식의 주아니나 도서관이 있다. 이곳에는 20만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고, 그중 7만 권 정도가 가치 있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도서관 앞 광장에는 미네르바 계단이 있어 이곳에서 몬데구 강을 내려다 볼 수 있다. 강에는 산타 클라라 다리가 놓여 있는데, 구시가지 답사를 끝내고 다리 건너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다. 이제 언덕에서 법대의 부속건물로 사용되는 멜로(Melo) 저택을 지나 아래쪽 도심으로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에 구 성모 마리아 성당, 구 대성당을 만날 수 있다.
코임브라 도심를 쏘다니다.
구 산타 마리아 대성당은 로마네스 양식으로 지어진 3층의 성당이다. 후에 문과 창의 일부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구 대성당은 12세기 전반 코임브라가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1185년에는 포르투갈 왕국의 두 번째 왕 산초 1세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문과 기둥 그리고 벽이 리모델링 되었고, 경당이 추가되기도 했다. 퐁발 후작이 제수이트 교단을 탄압하면서 기능이 약해졌고, 1772년 새로운 대성당이 지어지면서 주교좌 성당의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들 성당을 내려오면 빨래하는 여인과 파두를 부르는 여인 동상을 만날 수 있다. 빨래하는 여인은 코임브라 대학생들에게 순정을 바치는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트 대학생들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도록 빨래해 주고 밥해 주고 마음까지 주었으나, 졸업과 동시에 그들은 떠나고 홀로 남는 비련의 여인들을 대표한다. 동상 옆에는 이들의 일편단심을 보여주려는지 분홍색 꽃들이 화사하게 피었다. 다시 길을 내려가면 아치형의 알메이다 문을 지난다. 이 문은 코임브라 성곽의 서문으로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빈번하다. 그것은 도심과 성곽 안쪽 언덕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파두를 부르는 여인은 성문 밖에 위치한다. 파두 공연에 꼭 필요한 악기인 기타 위에 여인의 상체를 앉혀 놓은 예술성이 뛰어난 조각상이다. 코임브라 파두는 일반적으로 대학생들이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는 합창곡이 많은데, 이 동상은 파두를 부르는 솔로 여성 가수를 표현했다. 여기서 다시 바비칸 문을 지나면 페레이하 보르게스 거리에 이르게 된다. 보르게스 거리는 구 시가지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보행자 도로다. 북쪽 산타 크루즈 수도원에서부터 남쪽 주세 광장(Largo da Portagem)까지 걸으며 코임브라 도심 풍경을 살펴본다.
산타 크루즈 수도원은 우리말로 하면 성 십자가 수도원이다. 포르투갈 왕국의 초대와 2대 왕이 이곳에 묻혔기 때문에 더 신성하게 여겨진다. 수도원이기 때문에 성당, 학교, 강당, 도서관 등이 골고루 갖춰져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마누엘 1세 때인 1500년대 초반 마누엘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1522년부터 1525년 사이 정문과 회랑이 마누엘 양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1530년에는 두 왕의 무덤이 성당 중앙으로 옮겨졌다. 16세기에는 르네상스 양식이 더해졌고, 내부에 아줄레주 벽화가 그려지게 되었다. 17세기에 성구실이 만들어지고, 18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산타 크루즈 수도원 옆에는 코임브라 시청이 있다. 도심의 보르게스 거리에는 호텔과 식당 기념품점이 즐비하다. 토끼라는 한글 간판도 보인다. 도로의 남쪽 끝 주세 광장 한 가운데 주아킹 안토니우(Joaquim António de Aguiar)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코임브라 출신의 정치가로 법무장관이던 1834년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수도원, 대학, 호스피스 병동 등 모든 종교시설의 폐쇄를 명령한 반종교법을 공표했다. 그 때문에 수도사를 말살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1/42, 1860, 1865~1868년 세 번이나 수상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