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5 (오 세브레이로)
久寧 이효범
오늘은 1330m 산을 넘어야 한다고 한다. 몇 번 망설였으나 내가 누군가. 재작년에는 코로나 중에도 고등학교 동기들과 알프스 트레킹을 갔다 왔고, 작년에는 캐나다 로키 트레킹을 무사히 마친 사람이 아닌가. 빨리는 못가도, 느리게 오래 갈 수는 있다. 오직 은근과 끈기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놈이다. 나이는 조금 먹었지만 못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정보를 잘못 알았다. 고개는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초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심이 되어서야 나타났다. 지금까지는 비록 차들이 쌩쌩 달리는 협곡의 도로 옆을 지나왔지만 평지였다. 그런데 이제 강원도 산골처럼 한적해지면서 고개에 접어들기 시작한다. 왼쪽으로 계곡을 끼고 계속 걷는데, 계곡물이 여름 무주구천동처럼 대단하다. 그 계곡을 끼고 조그만 마을들이 드문드문 이어졌다. 그러나 느리게 길게 이어지는 고갯길이어서, 발이 비록 아프기는 했지만, 나는 오히려 산천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가는 길에 우리나라 처녀를 만났다. 추운지 날이 맑은 데도 비옷을 입고 걷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인생의 버킷 리스트여서, 직업을 그만두게 되어 오긴 왔는데, 30일 가까이 되니 너무 외롭고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표정을 짓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나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대신 이 경험이 언젠가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30대 초반처럼 보이는 저 처녀에게 인생에 행운이 가득하길 빌어본다.
고개를 오르면 오를수록 풍경이 진경이 된다. 이런 경치 때문에 사람은 높은 산에 오르리라. 이 고개를 말을 타고 가는 사람도 있나 보다. 빈말 3마리를 끌고 내려오는 말몰이꾼을 만났다. 그런데 어린 말 한 마리가 한참 떨어져 혼자 딴짓하며 내려오는 모습이 재미있어 웃음이 나왔다. 한 9부 능선쯤 될까, 고갯길은 평지가 된다. 우리나라 임도처럼 평탄한 길을 한참 걸어가니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 이제 산에 오르는 것도 좋지만 임도를 걷는 것이 내게는 더 편안하고,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시간과 관련한 인생의 문제가 몇 번 떠올랐지만, 생각의 입구에서 맴돌 뿐 더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조바심하지 않기로 했다. 그 생각이 정말 생각이 있다면, 언젠가 다시 찾아와 나로 인해 깊어지겠지.
하루 종일 강원도 진부령 같은 큰 고개를 넘은 것 같다. 오 세브레이로는 그 고개 우에 위치한 조그만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큰 고개를 넘은 것을 축하해 주려는 듯, 한 악사가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나는 사진을 찍고 1유로를 적선했다.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마을은 아름다웠다. 입구의 성당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내가 예약한 숙소는 나오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로 붐비는 한 식당에 들어가 물어보니, 내가 너무 왔다고 말한다. 숙소는 고개 밑에 있다는 것이다. 어째 이런 일이. 어제 분명히 이 마을에 있는 숙소로 부킹했는데, 무엇에 홀렸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배낭이 그 호텔에 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택시를 타고 울면서, 다시 거꾸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202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