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눈이 멀어야 한다
빛이 보여주는
누구나 보는 시계만으로는
시가 되지 못하는 까닭에
눈멀어
캄캄한 어둠에서
캄캄한 어둠에서 혜광을 캐내어라
시인은 귀가 멀어야 한다
소리가 들려주는
누구나 듣는 소리만으로는
시가 되지 못하는 까닭에
귀멀어
괴괴한 침묵에서
괴괴한 침묵에서 뇌성를 캐내어라
시인은 입이 멀어야 한다
말로 할 수 있는
누구나 하는 언어만으로는
시가 되지 못하는 까닭에
입멀어
벙어리 가슴에서
벙어리 가슴에서 잠언을 캐내어라
차례
1. 소나기에 부침
2. 화개장터 가는 길
3. 줌마렐라
4. 월매네 배롱나무
5. 재첩국
6. 나그네길
7. 물의 사랑법
8. 바람
9. 길 위에서
10. 멀리 본 풍경처럼
11. 비가 좋은데
12. 그림자
13. 그날이 언제라도
14. 스커트 입은 그대
15. 흑판
16. 빗속으로 온 연서
17. 당신 몰래
18. 명아주와 자벌레
19. 버스 정류장
20. 무녀 삼대
21. 춘당지 왜가리
22. 사랑의 하트
23. 개망초
24. 꼬리치는 여자
25. 세상 거꾸로 보기
26. 뒤에서 걸으면
27. 동강
28. 허브차를 마시며
29. 취중진언
30. 생명과 사랑의 시
31. 수학여행 떠나는 아이들
32. 부처님 세상
33. 등꽃 그늘 아래서
34.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35. 그대의 향기
36. 천사들의 세상
37. 여자의 다른 이름
38. 새벽 명상
39. 주인 닮은 핸드폰
40. 대통령 주름
41. 봄 봄 봄
42. 가위 바위 보
43. 나의 열 가지 프로필
44. 통곡의 미루나무
45. 시산제
46. 당쟁이의 꿈
47. 당신님 오시는 길에 등꽃이 밝아옵니다
48. 일본은 만우절이 없다
49.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여자
50. 이별 연습
51. 멋진 사진사
52. 넥기 쪽바리놈들아
53. 그대 눈 속의 길
54. 봄노래 부르자
55. 벌교 꼬막
56. 사랑해도 되나요
57. 눈빛사랑
58. 나의 피그말리온
59. 빈 자리 하나
60. 부럼
61. 얼음칼
62. 문수와 보현 사이
63. 닭과 원숭이의 나이재기
64. 거꾸로 벗어놓은 슬리퍼
65. 봄의 서곡
66. 땅콩 주전부리
67. 졸업
68. 지율스님 원력에 부쳐
69. 술은 답을 안다
70. 산이 나에게
71. 빛과 그림자
72. 내 노래의 소망
73. 정안수
74. 나이테
75. 애기 갈매기의 비행
76. 곰소나루
77. 반달
78. 사랑체조
79. 까치집 마당
80. 주파수를 맞춰요
81. 북한산 마애불
82. 법설
83. 새 달력
84. 대문
85.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는가
86. 기로에 서서
87. 대답없는 메아리
88. 쓰나미 유훈
89. 우주복만 벗는 거라오
90. 진실게임
91. 겨울강
92. 집장
93. 두루말이의 삶
94. 산타님에게
95. 새알 옹심이
96. 목련 꽃눈
97. 빛과 빛이 손잡고
98. 할머니와 물레
99. 형님 잔 좀 돌립시다
1
소나기에 부침
과열한 욕망에 소나기야 내려라
불의와 부정
죄 많은 인간사
천둥과 벼락으로 장대못을 쳐라
버려진 양심일랑 다 씻어 버려라
너 한 번 지나가면
정의의 갈증을 다 해갈하라
초원은 더욱 푸르르고
새들의 노래는 더욱 명랑하고
창공의 산뜻을 폐부에 스미게 하라
망념 번뇌도 씻은 듯이 하고
붉덩물 흘러간 시냇물에
꾀벗은 개구쟁이들 물장구치는
눈부신 태양 빛나는 대지
소나기야!
삭막한 세상에 부활의 신이 되라
2
화개장터 가는 길
남도대교 무지개 아치
섬진강 물 흐름이 눈부시다
강 하나 사이 두고
전라도 광양
경상도 하동
하동 포구 팔십 리
거랭이로 물질하는 아낙들
엿장수 가위질에
조영남의 화개장터 구성지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화개장터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나를 반긴다
경상도 사투리
재첩국에 동동주 한 잔 하이소
전라도 사투리
산채비빕밥 겁나 맛있어라우
외로운 나그네 여수
객주집 아낙의 은근짜에
못이긴 체 바랑을 벗는다
3
줌마렐라
백마 타고 오는 왕자를 꿈꾸던 시절
아내는 내가 왕자로 보였던 것일까
캐비넷 하나로 시작한 신접살이
귀부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나의 다짐
이제도 아내는 믿고 있는 걸까
강산이 세 번이나 변했을 세월
등골이 화롯불처럼 뜨겁다며
얼굴에서 연신 땀방울을 훔쳐내며
열대야로 잠 못 이루어도
아침이면 주섬주섬 대문을 나서는
아내의 뒷모습에서 연민을 느낀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로
인세도 나오지 않는 졸시집을
귀부인 된 친구들에게 자랑으로 건네는
아내는 진정 나의 줌마렐라다
내 혼을 팔아서라도
더 늙기 전에 아내에게 꼭 바치리라
아내의 발에 딱 맞는 유리구두를......
4
월매네 배롱나무
광한루 월매네 집 뒤란에
한양간 이몽룡 장원급제하여 돌아오라
정한수 받쳐 놓고 기도하던
조앙단에 배롱나무 한 그루 서 있다
줄기 매끄럽기가 춘향 장딴지 같고
몽룡이 간지럽히면 춘향이 자지러지듯
광한루 온 나무들이 함께 끼들거렸으리라
한 번 피기 시작하면 백일이라지
어사시 옥중시 기념으로 새겨진
부용당 연못의 어리연
부처꽃 배롱나무에게 염화미소 띄운다
5
재첩국
하동 포구 팔십 리
거랭이로 훑고 훑터
물질 한 평생
뚝배기에 뜬 재첩
무명씨 백힌 눈알 같아라
젖은 몸빼 철썩 철썩
한양 간 자석놈
알성급제 빌고 빌던
뜨물 같은 재첩 국
자석놈 금의환향 하여라
고무다라에 재첩 가득
섬진강 재첩 사이소
이 골목 저 골목
희망을 이고 가는
다라 위로 놀이 붉고나
6
나그네길
걸음 따라
길이 일어선다
길은
한사코 하늘로 나 있다
인생은
하늘로 걸어가는
나그네길!
구천동 까마귀가
까~ 까~
저승처럼 맞장구친다
7
물의 사랑법
떠날 때는 뒤돌아보지 말자
생명을 얻어
처음으로 사랑을 알았고
사랑의 추억이
잊을 수 없도록 아름다워도
사랑의 추억까지도 담아가지 말자
생명이 있는 한
사랑은 끝없이 오는 것
지나간 사랑으로
마음이 맑지 못하면
새로 시작하는 사랑에게 못할 일이다
사랑은
언제나 첫사랑같이 하자
지난 사랑이 그랬던 것처럼
새 사랑의 물관을 타고 올라
꽃을 피우고
열음 맺도록까지
또 다른 사랑을 위해
떠날 때는 앞만 보고 가자
8
바람
발도 없는 것이
사뿐히 내게로 다가와
손도 없는 것이
내 옷깃을 팔랑거린다
얼굴도 없는 것이
천억 화신으로 나부끼며
향기도 없는 것이
꽃향을 후욱 풍긴다
빛도 아닌 것이
강물을 은별로 반짝이고
소리도 아닌 것이
솨아 솨아 노래 부르며
떠날 때는
그림자도 데불지 않는다
9
길 위에서
언제 오느냐 묻는가
길은 오나 가나 가는 길이라네
어디로 가느냐 묻는가
밑도 끝도 없이 가는 길이라네
다시 보자 인사하는가
인연의 실타래를 누가 아는가
다만 서두를 일 아닐세
길 위를 걷는 게 인생 아닌가
정처 없는 나그네 인생
사나흘 머문다고 뭐 대순가
선술집 아낙네 니나노 조오타!
10
멀리 본 풍경처럼
멀리 본 풍경이 아름답습니다
호수면 위로
가시광선 은빛으로 반짝이고
잘못 찾아든 백조처럼
당신이 호반을 거닐고 있습니다
나는 물푸레나무에 기대어
휘파람새처럼 행복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면은
당신은 훨훨
빈 하늘만 남길지 모르니까요
멀리 본 풍경처럼
당신을 오래 바라볼 수만 있다면
물푸레 나뭇잎 띄워
휘파람 휘이익 휘이익 불어
호심을 푸르게 물들이겠습니다
11
비가 좋은데
내 꿈결로 다가와
보릿대 타는 소리로 내리는
나는 비가 좋은데
내 유리창을 두드리며
하염없이 빗살 무늬를 수놓는
나는 비가 좋은데
하늘도 울고 싶을 때 있을 테지
세상이 다 잿빛으로 슬퍼 보이는
나는 비가 좋은데
검은 우산 받쳐 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 걸으면
나는 비가 좋은데
내 발걸음보다 앞서
아스팔트에 장대 못 치고 가는
나는 비가 좋은데......
12
그림자
빛이 나에게로 온 그 날부터
어느 때는 짧게
어느 때는 길게
나는 그림자와 함께 있어 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는 그림자와
나란히 걸으면서
내 운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말이 없으므로
표정을 짓지 않으므로
분신 같은 내 그림자를
나는 애정으로 안아주지 못했다
생의 어느 소실점에서
빛이 신화처럼 스러지는 날
나는 까맣게 어둠이 되고
그제야 그림자와 하나 되리라
13
그날이 언제라도
맑은 날 오시겠노라면
싸리비로 마당을 쓸어 두겠나이다
흐린 날 오시겠노라면
유리창을 호호 닦아 두겠나이다
바람부는 날 오시겠노라면
유리창을 하늘까지 열어 두겠나이다
비오는 날 오시겠노라면
커튼을 좌우로 젖혀 두겠나이다
눈오는 날 오시겠노라면
벽난로를 따스히 피워 두겠나이다
그날이 언제라도
찻물을 보글보글 끓여 두겠나이다
14
스커트 입은 그대
벤치에 다소곳이 다리 모으고 그대가 앉아 있다
나는 그대에게 다가가지 못해도
먼 발치서 내 눈이 부시다
비둘기가 그대 발 아래서 모이를 먹는다
아! 내가 비둘기였으면......
그대! 사색은 끝났는가
그대의 하이힐이 따닥따닥 못을 박는다
멍청한 비둘기가 푸득 날아간다
나는 구름처럼 조용하다
바람이 살랑살랑 그대 스커트를 따라간다
아! 내가 바람였으면 ......
백묵과 함께 너는 학교의 역사
언어 수리 탐구 예능 상식......
그 많은 정보를 어디에 내장하고 있는 것이냐
정보의 홍수로도 너는 다운되는 일이 없었지
네게서 얻어간 정보로
또 얼마나 많은 인재가 길러졌을 것이냐
오늘부터 기말고사
방학이 멀지 않았구나
이제 너도 백묵과 함께 망중한을 누리려무나!
16
빗속으로 온 연서
며칠째 비가 내렸다
라디오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라훈아의 데뷔곡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흘러 나왔다
나는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우중에도 우편배달부는 왔다
내게 하얀 편지를 건네 주고
배달부 아저씨는 빗속으로 패달을 밟았다
겉봉에 발신자가 없었다
나는 짚이는 게 있어
등 돌아 떨리는 손으로 봉인을 뜯었다
산꿩의 울음이 어찌나 찡하던지......
유행가처럼 끝난 사랑
라훈아도 구레나룻이 하얗게 쇠었구나
빗 속으로 온 연서
아! 나에게도 꿈같은 세월이 있었다
17
당신 몰래
당신 몰래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일에만 골몰하여
빠끔히 열리는 문도 몰랐습니다
불빛이 당신 목 선에서
하얗게 눈이 부셨습니다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콩닥해
그만 문 닫는 것도 잊었습니다
어둠 속의 빛길을 내다보고
바람이었나 생각하며
당신은 문고리를 걸었을 겁니다
18
명아주와 자벌레
마당귀에 명아주 한 그루
명아주 줄기에
얼른 보면 명아주 가지 같은
자벌레가 기어오르고 있다
얼마나 자랐니 명아주가 묻는다
한 치 자랐어
명아주가 생살 같은 잎을 내준다
지팡이가 되려면
어서어서 자라야 할 텐데
매미 울음 치열한 여름이 가고
소슬해진 가을 어느 날
명아주가 잎을 다 내어 주고
지팡이로 서게 되었을 때
자벌레 우화羽化하여
신선의 날개로 부채질한다
19
버스 정류장
버스 정류장에 줄을 서서
무료 일간지 너머로
힐끔 주위를 살피다가
신문지로 얼른 얼굴을 감춘다
내 눈으로 구름이 흐르고
나는 지금 무얼 기다리는가
모자이크 같은 보도블럭을
발바닥으로 문질러 보나
나는 기다림의 정체를 모른다
버스가 오면 휘둘러보고
다음 기착지를 향해
신문지를 접고 몸을 싣는다
그곳에 가면
다른 기다림이 또 있을 테지
기다림을 환승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바쁜 일정이다
20
무녀 삼대
산모롱이 돌아 외딴집에는
가끔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무녀와
애비 모를 딸이 살고 있었다
고라실 물이 냇물과 합수하는
모래밭에서 씻김굿이라도 하는 날은
쾌자 입고 작두날 위를
징소리에 둥둥 하늘까지 뛰었다
그런 어미가 부끄러워
동산 늙은 소나무 뒤에 숨어서
무녀 딸은 달을 보고 밤새 울었다
달이 들어와 아기가 되었을까
동산만큼 불러오는 딸년 배를
무녀는 거품 무는 일이 더 잦아졌다
무녀가 거적때기에 산으로 가던 날
지게 발 뒤로 어미 손 잡고
갈래 땋은 어린것이 쫄래쫄래
개망초꽃이 하얗게 눈이 부시었다
21
춘당지 왜가리
회색 줄무늬 부라우스 입고
하얀 스카프에 검은 댕기하고
분홍 스타킹 신은 왜가리 한 마리가
춘당춘색고금동이라는
창경궁 춘당지 섬돌에 앉아
연못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사람들은 네가
연못의 물고기를 고누고 있다 하나
나는 네가
너의 쓸쓸한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하늘과 구름과 나무가 어우러진
네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안다
너의 잃어버린 짝을 찾아서
어찌 어찌 먼길을 날아와
천연기념물로 이곳에 앉아 있다만
이 여름이 가고 나면
너는 다시 S자 목을 하고
납의 입고 훌훌 오던 길을 날아가리라
22
사랑의 하트
마음이 괴롭다 하니
선사는 마음을 보이라 하였다더라
없다가도 있고
있다가도 없는
거참 마음이란 묘한 것 아니냐
물방울처럼
둥글고 부드럽고 투명한 것인지
돌처럼
모나고 거칠고 투박한 것인지
내 마음 나도 알 수 없구나
사랑이 마음에서 싹튼다면
사랑 또한 알 수 없겠구나
누군가 사랑을 하트 문양으로
심장을 본뜬 거라 하니
생명 있는 곳이면 사랑이 있겠구나
너의 입술이
참 많이 하트를 닮았구나
너는 지금 연애 중인가
데일 것 같은 나의 심장
나 네 하트에 입맞추고 싶구나
23
개망초
너무 흔해서 있는지조차 모르는 꽃
지난 겨울이 얼마나 서러웠을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꽃
바람에 쓰러져서
쓰러진 채로 꽃을 피워도
누구에게도 대수로운 일이 아닌 꽃
오늘은 개망초가
신부화장을 하고 면사포까지 썼다
바람 타고 올 신랑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다소곳이 자랑처럼 고개를 들었다
축복해 주는 하객 하나 없어도
별들의 축복 속에
개망초는 가난한 신방을 꾸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천한 자식들처럼
척박한 땅 곳곳에
발길에 툭툭 채이는 새끼를 치리라
흔하디 흔한 개망초들을......
24
꼬리치는 여자
눈웃음 씽긋
아리숭한 그대
말은 안해도 나의 관심을 끄는
내 마음 싱숭생숭
나는 꼬리치는 여자가 좋더라
나를 스쳐 지나가면서
힐끗 훔쳐보고
히프 요리조리 흔들며
내 몸매 어떼 보라는 듯이
나는 꼬리치는 여자가 좋더라
내가 다가가면은
언제 그랬냔 듯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가며
나 잡어 봐라 신파조 주인공 같은
나는 꼬리치는 여자가 좋더라
25
세상 거꾸로 보기
사는 게 시들할 때
일상이 권태로울 때
세상이 골머리 아플 때
개구쟁이 동심으로 돌아가
가랑이 사이로 세상을 보아
날마다 걷는 가로수길이
하늘로 나 있음이야
내 사는 산동네 마을이
예쁜 하늘나라 성곽이야
남루한 저 사람들이
하늘나라 천사님들이야
뭘 더 가지려고 해
어딜 더 오르려고 해
여기가 바로 하늘나란 걸
내가 바로 하늘나라 시민인 걸
삶이 고달플 때
마음이 괴로울 때
인생이 서러울 때
물구나무서서 세상을 보아
발이 하늘을 딛고 있음이야
26
뒤에서 걸으면
앞에 걸으면
멋진 경치 먼저 볼 수는 있어도
뒤에 오는 사람은 보지 못하네
뒤에서 걸으면
남보다 풍경은 늦게 보아도
앞서가는 사람들 다 볼 수 있네
사람보다 예쁜 꽃 있을까
조급함으로 멋진 풍경 놓칠세라
사람과 자연이 어울은 장관
뒤에서 걸으면 나는 즐겁네
풍경도 보고
사람도 보고
27
동강東江
영월에 가면
그 곳에 동강이란 강이 있다
동강이 서강을 만나
영월 제천으로 남한강이 되어도
동강은 동강으로 남아 있다
하늘을
구름을
나무와 꽃과 새를 안고 흘러도
동강의 풍경은 그대로 있다
거꾸로 걸린 수채화처럼
동강은 흘러도 흐르지 않는다
단종의 슬픈 애화
삿갓 시인의 떠도는 혼
청령포 의림지 휘돌아 흘러도
동강은 하냥 그 곳에 있다
동강은 흘러도 흐르지 않는다
28
허브차를 마시며
너도 내 마음 같은 줄 알았는데
바라만 봐도
스쳐만 가도
네가 내 안으로 빨려 들어오듯이
나도 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줄
그런 너를 오래 보지 못하다
오늘 아침 우연히 너를 보았는데
너는 왜 나를 못본 체 했을까
내 경이로운 눈빛을 왜 피했을까
너는 그냥
나 혼자 즐기는 허브향인가
오늘 따라 허브차가 이리 쓰구나
29
취중 진언
어젯밤은 내가 참 많이 취했나 봅니다
내가 당신을 꽃이라 했다면
당신에게서 향기가 난다 했다면
내가 당신의 향기에 취한 나비라 했다면
당신더러 영원히 꽃으로 살라 했다면
그 꽃을 차마 꺾을 수 없다 했다면
당신 있음에 내가 있다 했다면
이 모든 말은
취하지 않고서는 말로 못할 진실입니다
30
생명과 사랑의 시
- 생명과 사랑의 시 카페 정모 축시 -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 있을까
돌고 도는 세상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게 없다는 그 원리뿐
사람들은 이를 진리라 부르네
진리의 다른 이름은
생명과 사랑이라네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생명과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를 시인이라 부르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시인의 육신은 티끌이 되어도
시인의 혼은 가시광선의 빛이 되어
영원히 진리와 함께 한다네
이것이 죽어도 죽지 않는 이치일세
어둠에서 더욱 영롱한
저 밤하늘의 별들을 보아
저렇게나 많은 시혼들이
반짝반짝 윙크하고 있지 않은가
생명과 사랑의 시가 저와 같다네
31
수학여행 떠나는 아이들
관광 버스가 꽃가마처럼 줄서 있고
운동장이 청춘의 꽃밭이로다
그렇게 입고 싶던 사복차림
그렇게 뽐내고 싶던 젊음
그래 너희보다 예쁜 꽃 있으랴
넘치는 청춘의 활기를 싣고
광광 버스도 신이 나서
뒤뚱뒤뚱 운동장을 달아나는구나
손사래 인사하는 아이들아
울 없는 자연 학교 잘 다녀오너라
시험이다 입시다 하는 것들
딱딱한 책걸상에서 벗어나
청보리밭 종달이처럼 날아 보거라
풀과 꽃과 나비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유적지마다 어린 조상의 숨결
유레카 유레카 외쳐 보거라
수학여행은 학창시절의 꽃 아니냐
산과 바다와 역사가 너희를 부른다
32
부처님 세상
- 영동교당 법호 수여식 축시 -
예쁘다 밉다 보지 않는
당신의 눈이 부처로세
새소리 물소리 그대로 듣는
당신의 귀가 부처로세
향기나 악취나 그대로 맡는
당신의 코가 부처로세
그르다 옳다 말하지 않는
당신의 혀가 부처로세
잘나고 못나고 얽매지 않는
당신의 몸이 부처로세
나쁘다 좋다 하지 않는
당신의 뜻이 부처로세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땅이 그대로 부처로세
소가 마시면 우유 되고
뱀이 마시면 독이 되는
물이 그대로 부처로세
가슴에 품으면 사랑되고
검불에 붙으면 화마되는
불이 그대로 부처로세
봄날 산들산들 훈풍 되고
여름날 사나운 태풍 되는
바람이 그대로 부처로세
하늘과 땅 사이가
화엄으로 장엄일세
너도 부처
나도 부처
천억화신 부처님 세상이로세
33
등꽃 그늘에서
홀로 서지 못한다 하여
너를 소인배에 빗대더라만
너의 의지는
낭인浪人에게 그늘을 주는 것
오늘은 주렁주렁 등꽃을 밝혔구나
꽃이란 꽃들이
하늘을 향해 오연하건만
너는 땅을 향하여
연보라 수줍음으로
총상화서를 드리우고 있구나
너의 용틀임은
승천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허공에 지붕을 짓고
긴 벤치를 놓아 두고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 듣는 것
생활에 지친 자
추억이 그리운 자
혼자 있고 싶은 자
다정히 사랑을 속삭이는 자
너는 참 모르는 비밀이 없겠구나
34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
수수한 차림에 항상 웃으시며
외모로 보아 선생님 같지 않은
그런 선생님이 나는 좋더라
학창 시절 공부 잘했다고 뽐내지 않고
눈높이에 맞추어 자상히 가르쳐 주시는
그런 선생님이 나는 좋더라
공부가 인생의 다가 아니야 하시며
인간성을 더 높이 사주시고
너도 잘하는 게 있잖아 칭찬해 주시는
그런 선생님이 나는 좋더라
삐딱선 타고 탈선한 나에게
부모님께는 비밀에 붙이고
손 내밀어 악수로 용서해 주시는
그런 선생님이 나는 좋더라
성적표 주실 때 등 토닥이며
다음엔 더 잘하라 격려해 주시는
그런 선생님이 나는 좋더라
내 앙탈도 고민도 다 들어 주시며
친구처럼 대해 주시는
그런 선생님이 나는 좋더라
사람은 열 번도 더 변하는 거야 하시며
끝까지 나를 믿어 주시는
그런 선생님이 나는 좋더라
35
그대의 향기
백만 송이 장미도
꼼꼼이 들여다보면 다르다
빛깔도 향기도......
같아 보이나
다른 사람들
그대도 한떨기 꽃이다
나는 그대의 향기에 취한
한 마리 나비!
36
천사들의 세상
- 어린이날 축시 -
요리 보고
저리 보아도
오!
하늘에서 오신 천사여!
하늘이 내리신 축복이어라
여리디 여린
연록의 풀잎마다
머리핀 곱게 꽂은 갈래 머리
이쁘디 이쁜
한 떨기 꽃초롱 아닌가
순백의 넋이여!
우리로 하여 때묻을세라
배울 것이 없고
가르칠 것이 없나니
그대로 완성된 영혼이어라
저 푸른 들로
저 높은 하늘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순수로 날게 하는 것뿐
세상이 온통 천사들 아닌가
37
여자의 다른 이름
한 때는 꽃보다 예쁜 꽃이었다
화사하기 오월이었다
요염하기 양귀비였다
한 때는 질투의 화신이었다
요동치는 격랑의 강을 건너서
모정의 세월!
이제는 한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
헌신과 사랑으로
촛불처럼 애지게 닳아 가면서
하느님 일을 대신하는
여자의 다른 이름
어머니!
38
새벽 명상
괴괴한 새벽의 고요
별들이 자리를 걷는 시간
텅 빈 허공
소리 없이 시나브로 열리는 하늘
어둠을 털고
갸웃이 귀 기울이는 새
천길 땅 밑의 발자국 소리
39
주인 닮은 핸드폰
내 핸드폰이 하도나 구닥다리라
딸이 새 핸드폰을 선물하였다
카메라 폰도 되는 다기능이라는데
아무데서나 전화 걸 수 있고
받을 수 있으면 됐지
번거로운 거 나는 딱 질색이다
어쨌거나 비싼 핸드폰이라는데
도무지 전화 오는 데가 있어야 말이지
어쩌다 '날좀 보소' 시그널이 울려
얼른 '여보세요' 하고 받아보면
정말 '여보' 목소리가 들린다
전화 올 데 없을 것 같아 걸어 봤다나
딱히 노닥거릴 상대도 없고 하여
주인 따라 종일 침묵하는 핸드폰
심심파적 어디 전화 걸 데 없나
하여 번호 하나 눌러 '여보세요' 하니
대체나 아까 그 '여보'가 또 나온다
거참! 싱거운 일이로고......
40
대통령의 주름
- 대통령 탄핵 소추에 즈음하여 -
나는 선이 굵은 주름을 좋아합니다
삶의 관록 같고
강인한 의지 같고
소박한 서민 같고
인생의 계급장 같기 때문입니다
선이 굵은 주름을 가진 사람은
나약하지 않습니다
비겁하지 않습니다
거짓되지 않습니다
탐욕하지 않습니다
백성을 깊이 사랑하여
나라를 깊이 걱정하여
통일을 깊이 염원하여
역사를 깊이 생각하여
대통령의 주름이 깊어 갈수록
우리의 정치판이 바뀔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가 살아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가 맑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통일이 빨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진화할 것입니다
대통령의 주름엔 겸양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주름엔 정감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주름엔 진실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주름엔 청빈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주름엔 비전이 있습니다
대통령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주름 사이로 맑은 물이 흐릅니다
부정과 부패의 고리가 끊어졌습니다
돈 안 쓰는 정치가 자리 잡혔습니다
지역감정의 골도 펴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년 사이에 천년을 살았습니다
나는 선이 굵은 주름을 사랑합니다
41
봄 봄 봄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산내들 이 강산에 봄이 왔어요
노랗게 길을 내는 개나리
점점이 윙크하는 산수유
돌아앉아 거울 보는 진달래
다람쥐 청설모 곡예를 하고
졸졸졸 시냇물 하산길에
산까치 넘나들며 반갑다 짖네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봄처녀 가슴앓이 봄이 왔어요
능수버들 머리채 흐늘흐늘
논병아리 좌르르 물살 가르고
왕벚꽃 선녀님 화사한 자태
제비꽃밭 나비들 춤사위로
꾸르꾸르 짝을 찾는 산비둘기
나물캐는 아가씨 정분이 났네
봄 봄 봄
봄이 왔어요
아지랑이 타오르는 봄이 왔어요
42
가위 바위 보
가위 없는 세상은
바위와 보뿐
이기는 자는 항상 이기고
지는 자는 항상 지고
그래 지는 자들이
뭉쳐야 산다는 해법을 찾았을 테지요
가위가 보를 이기고
바위가 가위를 이기고
보가 바위를 이기는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는 세상은 없을는지요
당신이 가위를 내시면
나는 보를 내리다
당신이 바위를 내시면
나는 가위를 내리다
당신이 보를 내시면
나는 바위를 내리다
당신과 나 사이에 삼 세판은 없습니다
가위 바위 보로 편 먹기를 한다면
나는 당신을 따라 내리다
43
나의 열 가지 프로필
하나: 나는 천지 기운 천지 마음이다
둘: 나는 날마다 생일날이다
셋: 내 나이는 사십 육억 살이다
넷: 나는 지금 지구별 여행 중이다
다섯: 나는 짐이 없어 무거운 짐꾼이다
여섯: 술과 담배는 내 오랜 친구이다
일곱: 나는 날마다 눈빛 사랑을 한다
여덟: 나는 이후로도 집이 없는 천사다
아홉: 나는 이름 있는 무명 시인이다
열: 나는 우주를 안고 사는 소우주이다
44
통곡의 미루나무
고향의 동구밖 둑길에나 서 있을
외로워서 키가 큰 미루나무가
하필 교수형 형장 입구에 있었드라냐
살고자 하는 자 죽고
죽고자 하는 자 산다는
역리도 통하지 않는 살벌한 시대에
마지막 가시는 길
고향의 하늘은 얼마나 서러웠을 거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산천
다시는 볼 길 없는 부모 형제
목숨이 파리목숨보다 하찮은 시절
북망산이 뭐 그리 대수일까마는
겨레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조국의 광복을 맞지 못하고
다만 형장의 이슬이 되어 가시는 길에
너를 안고 통곡하심은
나라가 망해도 봄은 오더라는 것이다
아, 그날의 상징으로 남아
예순 번도 더 너에게 봄이 오는구나!
45
시산제始山祭
유세차 단기 4338년 음 삼월 초하루
앞에 가는 이 뉘기시며
뒤에 오는 이 뉘기신가
오호라 산 사랑 하늘 사랑
백두산족 긔 아니신가
어서 오라 신령님께서
산수유 노랗게 길 밝혀 놓으셨네
엣쉬 부정 탈라 누가 잡신을 부르는가
돈도 명예도 지위도
야호! 산메아리로 날려 버려라
산의 정기와 서기
나무처럼 다정한 우정
바위 틈에 샘솟는 생명수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호연지기 아니면 무얼 더 바라랴
진달래 다홍치마 산뜻도 하여라
오는 길은 저마다 달라도
타박타박 나그네길
마지막 가는 인생길은 산 아니더냐
나무산신령 나무산신령
비나이다 비나이다
을유년 한해도 무사 산행을 비나이다
46
담쟁이의 꿈
학교 건물 벽을 암벽인 양 붙안은
건초처럼 메마른 담쟁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해 사월 파릇파릇
거웃이 돋아
순식간에 열 다섯 소녀가 되었다
담쟁아! 올해는 얼마나 클 건데?
하늘까지 클 거예요
나는 은근짜 윙크를 해 주었다
그 해 가을
담쟁이는 정말 옥상에 올라
나풀나풀 내게 하늘을 흔들어 보였다
47
당신님 오시는 길에 꽃등이 밝아옵니다
- 서대문 형무소 합동 위령재 추도시 -
기다림의 시간이 참으로 길었습니다
불면과 굶주림과 주리와 형문을 당하시며
으깨지고 찢기우는 아우성으로
겨레의 해방과 조국의 광복을 위해
형장의 이슬이 되시는 순간까지
목놓아 만세 부르시던
당신님이 지금 어드메쯤 오고 계시옵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
손에손에 태극기 들고
환호와 눈물과 함성으로 얼싸안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쳐 부르던
그날의 감격을 어이 잊으리오
백목련 꼬마등에 불이 켜졌습니다
당신님이 어디메쯤 오고 계심이옵니다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 만들어
꽃덤불 속에 하나 되어
자유와 평화의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라시던
당신님 유훈이
우리의 우매함으로 빛이 바래고
당신님께서 일찍이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분단의 치욕사가 갑년이나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신님께서 몸바쳐 싸우신
그 날의 원수들은 사과 보상은커녕
식민지 강탈을 정당화하고
침탈자로의 야욕을 노골로 드러내며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는가 하면
역사 왜곡의 망언도 서슴지 않고
패권주의 망령이 야차처럼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남과 북 동과 서 신과 구
갈등과 분열을 일삼는
우리의 자화상이 차마 부끄럽습니다
흐트러진 민족 정기를 다시 세우시려
자유와 평화와 사랑의 귀감을 다시 보이시려
지금 어드메쯤 당신님이 오고 계십니다
당신님 오시는 길에 점점이 꽃등이 밝아옵니다
48
일본은 만우절이 없다
4월 1일은 만우절!
1년에 하루 가벼운 유머와 조크로
속이고 속으며 사월의 바보가 되는 날
지구상에 오직 한 나라
일본만은 만우절이 없다
요사스런 실눈으로 뱀 혓바닥 날름날름
월요일은 월(원)래 거짓말하는 날
화요일은 화끈하게 거짓말하는 날
수요일은 수시로 거짓말하는 날
목요일은 목터져라 거짓말하는 날
금요일은 금방하고 또 거짓말하는 날
토요일은 토악질할 때까지 거짓말하는 날
일요일은 일마다 거짓말하는 날
영토 문제로 한국 중국 러시아와
역사 왜곡으로 삼한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
일년 삼백 육십 오일
거짓말 안하는 날이 하루도 없는 나라
일본은 만우절이 없다
일본은 날마다 만우절이다
49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여자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그대는
부드러운 여자
입안에 살살 녹을 듯한
내 입안까지 군침이 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그대는
달콤한 여자
몽상을 꿈꾸는 듯한
나도 사르르 눈을 감는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그대는
시원한 여자
입술 적시는 얼음같은
내 입술 촉촉히 젖는다
50
이별 연습
단지 내 놀이터 다섯 살 여자 아이가
미끄럼틀에 올라서
아래 있는 엄마에게 고사리손 흔들어
빠이빠이 이별 연습을 하고 있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돌아오는
아이는 아빠와의
하루만의 이별만 알고 있으리라
엄마의 빠이빠이 손사래에
아이의 눈과 입에 반가움이 묻어난다
나이 들어가면서
오래 헤어져 살아야 하기도 한다는 거
헤어져 다시 못 만나기도 한다는 거
이별이 아픔이 되기도 한다는 거
그 아픔으로 성숙해 간다는 거
만남 뒤에 이별이 있다는 거
언젠가는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이별도 있다는 거
그런 이별은 상상도 못하면서
아이는 지금 이별 연습을 하고 있다
햇살이 아이의 얼굴을 환하게 웃는다
51
멋진 사진사!
1분에도 수십 컷
하루만도 수만 컷
눈 깜작할 새 사진 한 장 찍어내는
나는야 멋진 사진사
인화지도 암실도 내게는 필요 없지
내 추억 창고에
눈감으면 펼쳐지는 앨범들
흑백 사진 칼라 사진 많기도 해라
아! 아름다운 세상
내 사진기 셔터는 오늘도 바쁘다
깜박 깜박 깜박
디지털 사진기도 내게는 필요 없지
어여쁜 당신에겐 한 눈만으로
지그시 깜박
나는야 멋진 사진사
52
넥기 쪽바리놈들아!
- 독도 영토권 주장에 대해 -
구석기 어느 때쯤였으리라
백두대간 소나무 베어 뗏목 띄워
형님이 아우 살림내듯
현해탄 건너 대마도로
대마도에서 열도로 노저어 보냈더니라
형 만한 아우 없다더니
그릇 굽는 법부터
문자도 가르쳐 주고
부처님 자비도 심어 주었더니라
그래그래 살만해지니까
배은망덕한 아우놈
마침내 형을 부정하고
형님네 곡간 넘보기를 수차례
종내는 형님네 집마저 노략질했더니라
하늘이 어찌 무심하랴
지놈들 열도가 해마다 침수되자
이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우겨대며
형님 부아를 슬슬 긁어대니
괘씸한 아우놈 버르장머리 한 번
요참에 단단히 가르쳐야 하리라
형님 잘못했소
다시는 안 그럴라요
제발 목숨만 살려줍소
손이 발되게 싹싹 빌게 해야 하리라
안 그랬다간
물귀신 될 팔자에 이판사판으로 나올 터
넥기 쪽바리놈들아!
쪽박 차기 전에 어서 자비를 빌거라
냉큼 형님 전에 사죄하지 못할까~
53
그대 눈 속의 길
어제도 걸었던 이 길
오늘도 다시 걷네
내 눈 속의 길을 걸어오는 그대
나도
그대 눈 속의 길을 걷고 싶구려
줌 인
줌 아웃
내 렌즈의 떨림 현상은
그대 날마다 내 눈 속을 걷는 까닭
언젠가는
나도 그대 눈 속을 걷고 싶다네
54
봄노래 부르자
실오리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나물 캐는 처녀
대소쿠리 옆에 끼고 한들한들
오메 봄이 왔다야
자운영밭 염소야 봄노래 부르자
고샅길 개울 걸음이 빠르고
쟁기 진 농군
이랴 워워 누렁소 모는 소리
오메 봄이 왔다야
버들피리 삘리리 봄노래 부르자
산 넘고 들 건너 불어오는
살랑 바람에
꽃가루 터트리는 푸라타나스
오매 봄이 왔다야
엿장수 산까치야 봄노래 부르자
55
벌교 꼬막
떼다리 건너 여그가 어디란가
여자만汝自灣 갯벌이 허벌난다
아침 햇살에 뻘배가 좌르르르
목장화 신은 아낙들
심이 남정네 허리라도 분질겄다
줏어담고 쓸어담고 퍼담고
워매 고것이 다 뭐시다요
요것이 벌교 흑진주 꼬막이랑께
밤에 기운 못 쓰는
쩌그 저 서울 양반 욜로 잠 와보씨요
삶고 까고 끓이고 부치고 무치고
엽렵허고 애지게 고운 곱태
인물 좋고 돈 많은 양반들
맛깔시럽고 매시라운 손맛에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것이요
벌교 와서 주먹 자랑말고
꼬막에 탁배기 쭉 한 잔
육자배기나 뽑아들고
땅이 널배로 지뚱지뚱
하늘이 덩실덩실 징허게 조오타!
56
사랑해도 되나요
- 화이트데이 사랑 고백 -
백마 탄 왕자도 아닌데
나 그대를 사랑해도 되나요
봄날의 꽃수술 찾아드는
먹그늘 나비처럼
나 그대를 사랑해도 되나요
여름날 무지개 되어
나의 하늘에 아치를 놓는
아스라이 높아만 보이는
나 그대를 사랑해도 되나요
가을날 노오란 우산 쓴
은행나무 잎처럼 정갈한
나 그대를 사랑해도 되나요
겨울의 눈꽃보다 눈부신
은빛 보로치한 백설공주님
나 그대를 사랑해도 되나요
가진 거라고는
가난한 마음뿐인데
나 그대를 사랑해도 되나요
57
눈빛 사랑
모르는 사람과 비켜가면서
섬광처럼 번쩍 눈을 맞춥니다
부끄러워 얼른 시선을 피합니다
다시는 못 볼 줄 알면서
가슴이 두근 반 서근 반입니다
참 알 수 없는 내마음입니다
뒤돌아 보고 싶어집니다
어허 점잖지 못하게 꾸짖어 봅니다
나는 끼가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눈빛 사랑만으로도
나는 날마다 연애 중에 있습니다
눈빛 사랑도 바람이라면
나는 그냥 바람둥이로 살렵니다
58
나의 피그말리온
- 2005 현대고등학교 신입생을 맞으며 -
홍조 띤 고운 얼굴
나의 피그말리온
불안해하지 마라
여직껏도 잘 했지 않니
잘할 수 있어
열정의 혼을 가진
나의 피그말리온
초조해하지 마라
마법의 조각칼로
너의 여인을 새기어라
아프로디테가 혼을 넣어 주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의 여인상이 생명을 얻으리라
우리 모두 숨을 죽이고
너를 지켜보고 있어
각오도 다짐도 새롭게 해봐
나의 피그말리온
해 낼 수 있어
불가능은 없어
시작은 언제라도 늦지 않아
자! 이제부터야
*피그말리온 :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하고,
그 여인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여신(女神)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는
그의 사랑에 감동하여 여인상에게 생명을 주었다.
이처럼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피그말리온 효과라 말한다.
물이 빙점에서 얼어
액체가 고체 되는 것도 신기인데
물이 칼이 될 수 있다니
얼마나 혹독한 담금질였을까
얼음칼은 어둠에서도 섬광을 발한다
내 몸의 수은주를 땅끝까지 내려보자
언젠가 쩡하고 금이 갈지라도
육각 문양 얼음칼로 무장하여
번뇌의 산발 싹둑 날려 버리자
살벌한 벌판에서 방랑의 검투사 만나면
혹한으로 담금질한 얼음칼을 보여 주자
두 검투사의 진검 승부
서로의 적적성성寂寂惺惺을 스윽 버히면
수정같은 맑은 피가 주루룩 흐르리라
화장실에 들어갈 때
거꾸로 벗어 놓은 슬리퍼를 볼 때
아들아!
네가 사용하였음을 안다
들어오는 이 편리하라고
그래 그런 마음이야
작은 것 하나부터 배려하는 것
남들도 가족처럼 배려하는
그 마음 길이 간직하려마!
65
봄의 서곡
산에 들에
하얀 비단 거두어 가네
나무는
기지개 켜고 꽃눈 비비네
바람이 가만
풍경을 울리네
처마에 고드름
말간 눈물 훔치네
동안거 스님
문 열어 보시네
먼 산 그리메
자오록이 안개 빛이네
66
땅콩 주전부리
볶은 땅콩 한 봉지
화형火刑으로 더는 싹을 틔울 순 없겠지
내 주전부리로 너희 황토 빛 속껍질을 비비면
두 쪽이 하나 된 알갱이가 미끄러져 나온다
빛과 물과 흙과 바람이 이리 고숩더냐
너희 비록 땅콩으로의 생명은 끝이 났어도
이제 내 안에서 피가 되고 살이 될지니
땅콩아! 이 또한 지중한 인연 아니냐
너희가 굳이 땅콩을 고집할 필요 없듯이
나 또한 굳이 나를 고집할 필요는 없는 거고
니들이 내 안에서 전생하는 동안
내 육신이 썩어져 너희 육질이 되기도 하는 거고
그때는 누가 또 고놈 참 고숩다 하지 않겠니?
67
졸업
- 현대고등학교 18회 졸업식에 부쳐 -
계절의 여울에서 너를 보낸다
지난 시절은 우리의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꽃보다 붉은 피
진주보다 고운 눈물
소금보다 진한 땀
고추보다 매운 인내
꿀보다 달콤한 결실
그래 우린 하나였었지
책가방 벗은 넌 홀가분도 할거야
그래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일 줄 안다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라
꽃다발 한아름 네 가슴에 안겨
눈시울 뜨겁게 너를 보낸다
아름다운 향기로 꽃보다 예쁜 꽃이 되라
넓은 그늘 드리우는 튼실한 나무가 되라
다가오는 계절의 영광을 위해
봄이 오는 길목에서 너를 보낸다
노고지리 높이 나는 봄의 들녘으로 너를 보낸다
68
지율스님 원력에 부쳐!
섭생을 끊으신 지 일백 일째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에서
이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신이神異
티끌처럼 낮아지고 가벼워져야
원력이 끝이 나리라는
님의 원력 앞에 세상이 고개 숙입니다
한 때는 공룡이 지배했다는 지구
그 공룡의 자리를 인간이 꿰차고
사소한 미물은 살고 거대한 공룡은 죽은
화석의 역사를 외면하고
다이나마이트로 지축을 흔들고
포클레인으로 지심을 헤집고 있나이다
살고자 하는 이는 죽고
죽고자 하는 이는 사는 이치 있습니다
죽음을 자청하신 스님이시여!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시오소서
저기 천성산 바위에서
당신에게 손 흔드는 도롱뇽이 보입니다
이제 곧 공룡의 운명으로 자멸할
인간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개발과 성장 논리로 곪을 대로 곪은
물질 중병에 걸린 세상을 제도하소서
건져주 살려주 아우성치는
가련한 중생들을 눈감지 마시옵소서
69
술은 답을 안다
- 여자만 개업을 축하하며 -
얽히고 설킨 실타래
실마리를 아무래도 찾을 수 없어
여러 날 혼자 생각을 불태울 때
술에게 한 번 답을 물어 보라
인생의 길이 어디 지도에 있던가
마음의 길이 안내 책자라도 있던가
네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그때도 한 번 술에게 물어 보라
친구와의 오해로
우정에 금가는 소리 들릴 때
왜 술잔을 부딪치며
술에게 답을 구할 생각을 않는가
사랑하는 애인과 싸웠을 때
사업에 낭패를 보았을 때
네 운명이 서글퍼질 때
술에게 한 번 답을 물어 보라
네가 청하기만 하면
공원의 벤치에서든
선술집 통나무에서든
술은 답을 들고 너에게 오리라
70
산이 나에게
산이 나에게
무리 지어 오지 마라 하네
산의 정령들 숨결에
고요히 나만의 시간이 되라 하네
산이 나에게
가슴을 내어 주라 하네
바위에게 나무에게
이름 모를 풀들에게도
산이 나에게
훨훨 벗으라 하네
바람처럼 가벼워지라 하네
새처럼 노래하라 하네
산이 나에게
뒤돌아보지 마라 하네
하산하는 물처럼
앞만 보고 낮은 데로 가라 하네
71
빛과 그림자
니 빛을 봤노
니 날 맹인으로 아나 사방 천지가 빛 아이가
그라먼 니 빛 그림재도 봤나
저 거문기 다 빛 그림재 아이가
문딩이 자석아 빛은 그림재가 업능기라
그라먼 저 집채만한 그림재는 뭐꼬
문딩이 자석 저건 집그림재 아이가
그라먼 저 검은 나무 모냥새는 또 뭐꼬
문딩이 자석 저건 오동나무 그림재 아이가
그라먼 빛 그림자는 업능긴가
그라제 빛은 그림재가 업제
와 그라노
스스로 밝으먼 지 그림재는 없는 기다
그라먼 우리 따라 댕기는 이는 뭐꼬
문딩이 자석아 우리가 빛이가
그라먼 그림잰가
맞다 우린 그림잰기라
그라먼 그림재를 지울라카먼 빛이 돼야 쓰겄네
아따 그자석 똑똑타!
72
내 노래의 소망
어렵고 힘든 세상
팍팍한 인생길
길동무 되었음 좋겠네
모내기 김매기
농사철 농번기
돌림노래 되었음 좋겠네
무더운 여름날
콩밭 매는 아낙네
콧노래 되었음 좋겠네
타박걸음 농사꾼
지게 다리 두드리는
육자배기 되었음 좋겠네
만선으로 돌아오는
어기영차 어영차
뱃노래 되었음 좋겠네
선술집 술판에
젓가락 장단
니나노 되었음 좋겠네
삼 년 묵은 체증
쓸어 내리는
회심가 되었음 좋겠네
북망산 찾아갈 제
설움 씻어주는
상두가 되었음 좋겠네
73
정안수
우리집 입식 주방에는
배부른 항아리가 하나 없다
짚불 지피울 아궁이도 없고
까맣게 그을린 서까래도 없고
정안수 떠 놓을 조앙단도 없다
아내는 밥물로 쓸 물을
스텐 찜통에 넘실 받아 놓는다
뒤란으로 옹기종기 장독대도 없고
달도 뜨지 않는 부엌이건만
어머니의 어머니
할머니의 할머니
어쩌면 곰할머니 때부터
가족의 건강과 복을 빌어 온
조앙신이 여태 아내의 가슴에 산다
정안수 퍼올리듯
아내는 스텐 옹달샘 물을 퍼서
압력 솥 눈금에다 맞춘다
열화같은 밭은숨 푹푹 내쉬다가
마침내 압력 솥이 휘파람 분다
세상의 아침은 아직 괴괴하다
74
나이테
내가 나이를 몸으로 먹는다면
나는 노인이 되어 갈 것이다
내가 나이를 머리로 먹는다면
나는 철인哲人이 되어 갈 것이다
내가 나이를 가슴으로 먹는다면
나는 시인이 되어 갈 것이다
시의 율려律呂 속에서 시인은
청춘의 끓는 피로 살아갈 것이다
*律呂: 음악 또는 그 가락
우주적 조화 곧 詩心
75
애기 갈매기의 비행
회진포 포구에
애기 갈매기 울음 들렸다
갈매기 예닐곱 마리
무리 속에 어리고 앙증맞은
애기 갈매기 끼이끼~
어른 갈매기들 따라
비행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애야 바람 부는 날에는
파도를 탈 줄 알아야 해!'
애기 갈매기 파도의 자맥질에
둥둥 몸을 맡겨 본다
'그래 이제 날아올라 봐!'
애기 갈매기 일가족이
포구를 하얗게 수놓고 있었다
76
곰소 나루
횟칼이 번쩍
곰소 어시장 좌판에 앉아
소주를 마시는데
겨울 바다에 누가
눈소금을 뿌려 두었나
또 누가
모항母港을 흔드는 것이냐
나그네 설움도 때로는
아름답구나
칠산 앞바다로 해가 저물고
곰소 나루로
펄럭이는 나그네......
77
반달
얼음 같이 매서운
겨울 밤하늘
오늘밤은 반달의 모노드라마
조연 배우 별들은
은막에 숨었나
삭도로 깎은 밤톨같은 얼굴 하나가
중학시절 친구처럼
나를 따른다
너 참 곱다 돌아보면은
내 머리 위에
상긔도 씩씩한 너의 얼굴......
78
사랑 체조
왼발 앞으로 오른발 뒤로
허리 굽혀 자세 낮추고
두 손 펴서 발목까지
사랑 주고
오른 발 앞으로 왼발 뒤로
허리 굽혀 자세 낮추고
두 손 모아 가슴까지
사랑 받고
사랑 주고 못 받아도
나는 행복해
사랑 받고 못 주면은
나는 속상해
사랑 주고 사랑 받고
사랑 받고 사랑 주고
둥게 띄워라
내 사~아~라~아~앙~아~
79
까치집 마당
교회 첨탑보다 높은
우듬지 까치집
까치집 마당은 하늘이라네
길이 없어
어디나 길이 되는
제 집 마당을 서성이는 나에게
외롭고 고달프면
쉬었다 가라 하네
제 집 아래
벤치 하나 놓아두고
엿장수 가윗소리로
나를 부르네......
80
주파수를 맞춰요
라디오 사이클이 맞지 않아
지지직 소음만 난다
텔레비전 채널이 맞지 않아
화면에 비가 내린다
아름다운 선율을 위해
주파수를 맞춰 봐요
꿈같은 영상을 위해
채널을 맞춰 봐요
세상이 너무 시끄럽지 않나요
사랑하는 사람 그리워
핸드폰 번호 누르면
신호음 폐부까지 파장 치듯
주파수를 맞춰 봐요
81
북한산 마애불
북한산 비봉에서 승가사 길
잘 생긴 암벽에
어느 이름없는 석공의
석가모니불 마애불상이 거룩하다
가까이 보면 자비상이
멀리 보면 울상이 되는 것은 무슨 조화냐
연좌蓮座 밑에 음각 낙서
이름 석자도 얼마나 조심할 일인가
허화의 불바다 바라보며
하산하는 길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유마힐이 그랬다지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고......
82
법설
책 읽지 말라시는
성철 스님
무소유로 살라시는
법정 스님
야망이 부질없다신
나옹 스님
지식 없으니 맑고 밝고
재물 없으니 허허롭고
야망 없으니 가볍나이다
83
새 달력
작년 그 자리에
새 달력이
목매어 있다
또 한 해
다가 올 삼백 예순 날
한 장
한 장
떨어져 나가는
낱장처럼
날마다
가벼워나 지자
84
대문
당신밖에 올 이 없는 빈집
빗장 풀린 대문이 바람에
열렸다
닫혔다
85
나는 오늘 무엇을 보았는가
북한산에 올라
서울 반대편 하늘에서
에머랄드 드높은 하늘 호수를 보았다
혹한의 날씨라 일찍 하산하여
목포 세발낙지로 뒤풀이하면서
젖가락에 달라붙어
낙지 발톱의 춤추는 절규를 보았다
경복궁역 지하철 입구에서
세멘 바닥에 고개 묻고 기도하는
덜덜 떠는 빈손을 보았다
환승역에서 교회 믿어 천당 가라는
재림 예수를 보았다
지하철 객실에서
퇴직한 노익장들의 술주정을 보았다
미녀스커트의 섹시한 다리를 보았다
군중 속에서 천의 얼굴을 가진
내 자화상을 보았다
86
기로에 서서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기우는 마음과
당신을 멀리하려는 마음
가까이도
멀리도 못하면서
나는 당신을 바라만 보고 살았습니다
세월도 용납하지 않은
낡은 몸으로
이제 차마 당신에게로 갈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87
대답없는 메아리
당신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나는 오늘 산으로 갔습니다
백양나무 숲을 향하여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메아리가 없는 겁니다
그래 덜컥 겁이 났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없는 건 아닌가
아니면 대답 못할 사연 있는가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언젠가는 당신이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라도
반드시 내게로 올 거라고
내가 당신을 목놓아 부르지 않는 것이
당신이 내게로 오게 하는 길이라고
그래서 조용조용
발걸음을 죽여가며 돌아왔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먼저
집에 와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슴에 안고서.......
88
쓰나미 유훈
쓰나미 너는 누구의 사도더냐
서남아시아 일대를 휩쓸어 버린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가 버린
너는 정녕 신의 사도더냐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애인을 잃고
생명의 존엄성도 잃어 버렸다
평화롭기만 했던 관광지는
전쟁터보다 참혹했고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장티부스 콜레라 말라리아가 창궐하고
대자연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더냐
쓰나미 너는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거냐
이래도 너희끼리 싸우려느냐
인도네시아 쓰나미가
아프리카 케냐까지 뒤흔드는 판에
국경 가지고 이래도 싸우려느냐
집도 땅도 다 수장되는 판에
종이쪽 한 장 남지 않는 판에
인종이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
그래도 너희끼리 싸우려느냐
이런 것을 말하려 함이더냐
이제는 그만 화목하라고
이제는 그만 화평하라고
너희는 결국 한 배를 탄 운명이라고
그런 걸 말하려 함이더냐
야생동물이 먼저 알았다는
네 증후도 알지 못한 족속들이
아직도 전쟁을 계속하고
분쟁은 끝이질 않는구나!
*쓰나미 : 지진에 의한 해일이 잦았던 관계로
해일에 해당하는 일본어가 영어로 수용된 단어
89
우주복만 벗는 거라오
내 영성이 어찌 어찌하여
이 지구별에 오던 날
부모님 살과 뼈로 지으신
내 우주복 한 벌!
마르고 닳도록 잘 입었네
내 우주복 벗는 날
하늘나라에서 온 영성은
다시 하늘나라로 가고
내 우주복은 흙으로 돌아가
새 우주복으로 직조된다네
그대여 설워 마오
옷 한 번 갈아입는 건대
본성 자리에서 우리 만나면
지구별 우리의 사랑이
어찌 여기서 끝났다 하리오
90
진실 게임
하나의 진실한 웃음을 위해
아흔 아홉의 거짓 웃음을 웃습니다
하나의 진실한 눈물을 위해
아흔 아홉의 거짓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의 진실한 말을 위해
아흔 아홉의 거짓말을 합니다
하나의 진실한 사랑을 위해
아흔 아홉의 거짓 사랑을 합니다
하나의 진실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아흔 아홉의 거짓 사람을 만납니다
하나의 진실을 위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헤맵니다
하루
한해
한평생을......
91
겨울강
겨울강은 유난히 눈물이 많다
춥고 배고픈
다리 밑 토막을 감고 흐르며
겨울강은 자꾸만 뒤돌아다 본다
뒤돌아 본 죄로
얼음 공주 화석이 된다
봄의 정령이 사뿐사뿐
아지랑이 데리고 돌아올 때까지
죽어라 서로가 서로를 붙안고
눈물만 글썽이며
겨울강은 옷고름을 풀지 않는다
아지랑이 춤사위에
싹눈들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누운 풀들 부시시 기지개 켤 제
겨울강 터널 살얼음 틈새로
물고기 곁눈질로 뻐끔담배 피운다
92
집장(―醬)
올해도 큰누님이 집장을 담궜다 한다
해마다 나를 위한 큰누님의 사랑
서울 생활 사십여 년
강산이 다 변했어도 변하지 않는
그때 그 시절 고향의 맛
집장이란 말뜻도 모르는 천리 타향에서
고향의 맛을 옹기에 담아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잰걸음이다
집장이 있는 한
나의 식탁은 당분간 잔칫상이리라
시큼 달콤 곰삭은 맛
집장 생각만 해도 고향이 입안에 가득
밥도둑 집장에 밥 한 그릇 뚝딱
나는 끼니마다 곰삭은 향수를
젓가락으로 건져 밥숟가락에 얹는다
*집장: [명사] 메주를 띄워 말린 뒤
곱게 빻아서 고춧가루와 함께 찰밥에 버무린 다음,
가지·무·풋고추 따위를 소금에 절여 넣고 띄운,
고추장 비슷한 전라도 토종 음식. 즙장.
93
두루말이의 삶
넉넉하고 포근하던 두루말이가
한 겹
두 겹
겹겹이 벗어주고
백골로 남아 부끄러워하고 있네
입도 씻어주고
코도 훔쳐주고
밑도 닦아주던
부드러운 살점 다 뜯기어 나가고
이제 그만 내려 달라고
걸음쇠에 허랑하게 헛돌고 있네
산다는 게 그런 거라고
아낌없이 다 주고도
더 줄 것이 없으면 부끄러운 거라고
그때는
슬며시 자리를 뜨고 싶은 거라고......
94
산타님에게
산타님이여!
님은 와 구리스마스 전날만 오시능교
우리 아그들이 월매나 착한지 모르시능교
저 아그들 해맑은 눈망울 좀 보소
두 손 모아 기도허는 저 고사리 손 좀 보소
하늘나라 천사 아닝교
산타님이여!
님은 와 가난한 사람들은 외면허시능교
저 다리밑 토막
비닐하우스 판잣집 달동네는 안댕기시능교
굴뚝 없은께 몬오시능교
하늘나라에 거지는 몬 들어가는능교
산타님이여!
선물 줄 때 양말짝 속에다 한 말씀 하이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십자가 세워 놓고 쌈질허는 자
하느님 팔아 장사해 먹는 자
하늘 무서운지도 좀 알라코
와 따끔허게 한 말씀 못허시는교
산타님이여!
을유년 새해는 지발
교회 짓는 일 좀 고마 하게 허시고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총칼로 일어선 자 총칼로 망허고
가난헌 자들이 참말로 천국의 주인 되도록
하늘나라 가서 힘 좀 써 주이소 예~
95
새알 옹심이
팥죽을 쑤자
팥죽을 쒀
동짓날 기나긴 밤 지나면
내일은 해가 새로 뜨는 날
옹심이를 만들자
새알 옹심이
손바닥에 동글동글 제 나이만큼
오늘은 작은 설날이다
팥죽에 새알 옹심이
귀신님 오시면 퍼서 드리자
마른 것은 싸 가시고
젖은 것은 잡숫고 가시오라
동네방네 팥죽 나눠 먹으며
메리 동지 인사하자
새알 옹심이 먹고
님에게로 나이 자랑하러 가자
96
목련 꽃눈
대설大雪에 눈은 아니 오고
비가 내리더니
날이 차가워졌다
무심코 교정을 바라보는데
목련이 추리용 꼬마등을 달고 있지 않은가
너는 벌써 봄을 예비하고 있는 것을
슬리퍼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가
네 눈자위를 만져보니
갯솜처럼 보드랍구나
이렇게 삭풍을 다 거르고
봄의 전령으로 피어나는 것을
사람들은 봄이 되어 네가 피었노라고
너의 겨울은 까맣게 잊으리라
97
빛과 빛이 손잡고
- 현대고등학교 20년사 권두시 -
기대일 언덕 하나 없는 척박한
강원도 두메 산골
그래도 밤하늘은 별밭이었네
꿈 따라
길 따라
소걸음으로 걸어 온 역정
압구정 둔치에 별들의 텃밭 일우시고
단군 성조 때부터
흘러온 강물처럼
담담히 쉼 없이 흐르라시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하시었네
빛과 빛이 손잡고
조국의 번영과
평화 통일 이루라시며
소떼 몰고 북으로 향하시었네
민족의 존영과
인류 행복
세계 평화를 위해
너희는 세계의 빛이 되라 하시었네
스무 개 성상을 가꿔 온 꿈
빛과 빛이 손잡고 나아가 보세
밖으로
세계로
미래로......
*현대고등학교는 고 정주영 회장이 세운
인문계 고등학교로 압구정에 자리잡고 있음
98
할머니와 물레
마실 가는 발소리
고샅길에 수런수런
안방에서는 할머니의 물레가 돌아간다
역사의 뒤안길처럼
호롱불 밝힌 창호에 물레가 돌아간다
물레는 미친 듯이
죽기 살기로 돌지 않는다
세월을 낚듯
붓대에 숨겨온 무명씨 전설처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 얘기처럼
배시시 졸음을 머금고
창호의 그림자는 흡사 한 편의 무성영화다
그렇게는 살 수 없어
밤봇짐 싼 시골 큰애기도 있다
방적공장은 역사의 하나의 획이다
잘 살아 보자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고
그렇게 물레도 고향도 다 버렸다
시골 큰애기 할머니 되어
영화 필름처럼
되감지도 못하고
이제는 돌아갈 고향이 없다
옛날 얘기 솔솔히 잣던 물레가 없다
불야성의 거리는
고요하지도 쓸쓸하지도 않다
흑백영화 속의 할머니와 물레가 없다
99
형님! 잔 좀 돌립시다
우린 눈빛만 보아도 알았지요
형님!
전두환 국보위 때 짤려 가지고
선생하겠다고
삼선교 통술집에서 만났을 때
형님은 맥주컵에 소맥으로 마셨지요
소주 딱 한 잔이야
말은 늘 그렇게 시작했지요
한 잔이 열 잔 되고
소주병들도 취해 나뒹굴 때까지
형님!
우리는 술권하는 세상을 살지 않았소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습니다
형님!
이제 말조심 할 시대도 아니고
대통령도 몰아낼 수 있는 시대 아니요
근데 왜 잔을 돌리지 말자는 게요
갑자기 문화 시민이라도 된 겁니까
술잔에 알콜만 담긴 답디까
정情도 담긴다는 걸 모른단 말씀이요
형님!
그 험한 시대에 우릴 살린 건 술 아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