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옥동서원"
옥동서원(玉洞書院) 전경
[2023년 12월 18일(음: 11월 6일)일출 7시 41분.일몰17시15분]
월요일인 오늘(18)일 은
중부지방과 전북 일부, 경북 내륙의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까지
떨어져 매우 춥겠으며.
경기 북부와
강원내륙·산지는 -15도 아래로 내려가겠고,
그 밖의 남부지방도
-5도 이하로 내려가 춥겠습니다.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18도 ~ 영하3도,
낮 최고기온은 영하 4도~4도로
어제보다 아주 낮겠습니다.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 호국의 명산 백화산 아래 과수원 옆길을 따라 들어가면 조선의 명재상 방촌 황희((尨村 黃喜)를 모신 옥동서원(玉洞書院·경상북도 기념물 제52호)을 만나게 된다.
서원이 자리 잡은 수봉리에는 조선 시대 이래 장수 황 씨들이 대대로 터를 잡아 살고 있다. 석천이 북에서 남으로 마을을 향해 흘러와 입구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백화산과 만경산 사이를 흐른다.
수봉리에는 여러 자연부락이 있는데 학문에 일관해 도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 등이 담긴 오도(吾道)와 일관(一貫), 신덕(新德), 동산(東山) 등 정주학에서 연유한 땅 이름으로 모두 합해 천하촌(川下村)이라고 일컬었다 한다.
원래 옥동서원의 전신인 ‘백화서당’은 백화산 입구인 수봉리 신덕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서원 주변 집들 감나무에 달린 붉은 빛 감들이 고운 자태를 뽐내며 서원에서는 옛 선비들의 삶의 향기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서원은 조선 중기 이후 선현을 제향하고 학문을 연구해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워진 사설 교육기관인데 지금은 전국에 700여 개의 서원만 남아 있고 상주에도 많은 서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두 곳의 서원만 남고 모두 훼철됐다.
현재 15개 서원 정도가 복원됐으며 옥동서원은 전국 47개 미 훼철 서원 가운데 하나이자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 서원이다.
옥동서원은 조선 전기 문신인 황희(1363~1452)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1984년 12월 19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52호로 지정됐다가 2015년 11월 10일 사적 제532호로 승격 지정됐다.
황희는 태종(재위 1400~1418)과 세종(재위 1418~1450)대에 걸쳐 육조 판서 등을 두루 역임했고 20여 년 동안 의정부 최고 관직인 영의정 부사로서 왕을 보좌했다. 학문이 깊고 성품이 어질며 청렴한 분으로서 조선 왕조를 통해 가장 이름 높은 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518(중종 13) 축옹 황효헌과 유촌 황여헌 두 형제가 방촌 황희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일명 ‘횡당’을 창건했으며 ‘백화서당’이라는 이름을 짓고 그 뜻을 유지했다.
백화서당은 말 그대로 방촌 황희 정승의 영정을 모신 영당(影堂)이었던 것이다.
1580년(선조 13) 새로이 영당을 건립해 춘추향사를 지내는 등 서원의 면모를 갖추고 백옥동 영당이라 일컬었다.
1714년(숙종 40) 사림들의 중론에 의해 사서 전식(全湜·1563~1642)을 배향하고 백옥동 서원으로 승격했으며 1715년(숙종 41)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783년(정조 7) 축옹 황효헌(黃孝獻·1491~1532)과 반간 황뉴(黃紐·1578~1626)를 추가 배향했으며 1789(정조 년13) 영남 사림들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옥동서원’이라 사액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조치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1987년 청월루(淸越樓), 1991년 경덕사(景德祠)와 온휘당(蘊輝堂)을 보수하였다.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경덕사, 학문 강론이나 유림의 모임과 행사장소인 강당, 향사 때 제수를 장만해두는 전사청(典祀廳), 서원을 관리하는 고직(雇直)과 화직(火直), 묘직(廟直)이 거처하는 고사, 화직사, 묘직사, 누각인 팔각정 등이 있다.
황희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고 《갈천문집(葛川文集)》 등의 귀중한 필사본과 목판본을 소장하고 있다. 해마다 3월과 9월 상정(上丁:첫째번 정일)에 향사를 지낸다. 2015년 11월 10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회보문 옆의 하마비
청월루 -‘회보문’이러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옥동서원의 문루.
앞면 5칸의 2층건물이다.
1층은 출입문으로, 2층은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동재와 서재 역할을 했던
2층온돌방의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전면에 입식으로
불을 땔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굴뚝은 측면에 위치하고 있고
기둥과 흙 벽사이에는
약간의 공간을 두어 아궁이와
굴뚝의 화기를 피하고 있다
청월로 1층 외삼문 좌·우
온돌방의 아궁이가 전면에 있고
굴뚝은측면에 있다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회보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위층은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는 마루를 두었다.
남쪽은 ‘진밀료’, 북쪽은 ‘윤택료’,
마루에는 ‘청월루’라는
현판이 각각 걸려 있어 특이하다.
루문인 청월루(淸越樓)
청월루에는 '청원루(淸越樓)' 현판과
'회보문(懷寶門)'의 현판이 걸려있다
강당인 온휘당에서 본 문루인
청월루(淸越樓) 안쪽 모습.
강당 앞 마당을 축대를 쌓아 조성하여
문루 2층과 같은 높이를 만들고 있다.
청월루(淸越樓)의 왼쪽에서 본 모습.
아궁이는 전면인데 굴뚝을 측면으로 냈다
청월루(淸越樓)의 오른쪽에서 본 모습 -
왼쪽과달리 툇마루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옆면 3칸으로 앞쪽에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1층은 난방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청월루(淸越樓)의 2층 누마루
청월루(淸越樓) 이층의
대청 향좌측 온돌방인 '진밀료(縝密寮)'
루문인 청월루 2층 좌우에
온돌방을 두는 특이한 구조로,
원생의 숙사로 쓰여 마치 양재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청월루(淸越樓) 2층의 대청
향우측 온돌방인 '윤택료(潤澤寮)'
동재와 서재에 해당하는
'윤택료(潤澤寮)'와 '진밀료(縝密寮)'를
드나드는 문설주를 지탱해 주는
기둥의 윗부분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머리를 깎아두었는데
여의주 따로, 용머리 따로 만들어
하나로 합체한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의 나무를 정교하게
다듬어 분해와 조립의 형태가
아닌 기법으로 만들었다.
청월루 온돌방의
굴뚝이 측면에 있다
외삼문의 역할을 하는 누각을
지탱해 주는 기둥과 벽의 사이에는
일정한 공간을 두고 있다.
이는 외삼문의 역할과 함께
누각과 동재와 서재의 역할을 하는
온돌방에 군불을 지피기 위한
아궁이와 굴뚝의 열기를
피하기 위함이라한다.
청월루(淸越樓) 앞쪽
툇마루와 난간을두고 있다
청월루(淸越樓) 앞쪽
툇마루와 원기둥과 주두
청월루(淸越樓) 향좌측 측면
툇마루와 난간 - 온돌방의 굴뚝이
청월루(淸越樓)의 안쪽 툇마루와 난간
회보문을 들어서 계단을 올라
2층 누마루와 비슷한 높이의
온휘당 앞 마당에 이른다.
청원루(淸越樓) 처마와 주두
온휘당 향오른쪽 담장 -
뒷편에 사당인 '경덕사'와
'전사청'이 보인다
온휘당 향 오른쪽 담장의 협문 -
밖으로 왼쪽에 '관리사'가
오른쪽에 화장실이 보인다
온휘당 향 오른쪽 담장의
협문을 나서면 재래식
온휘당의 측면과 뒷면 - 화장실 협문
그리고 멀리 청월루가 보인다
강당인 온휘당(蘊輝堂)
강당은 앞면 5칸의 전형적인
서원 강당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온휘당'이라 현판이 걸린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양쪽에 1칸씩의 온돌방인
'탁장재'와 '착로재' 가 있다.
기단부에 아궁이를 두고
전면과 측면에는
좁은 툇마루가 있다
온휘당(蘊輝堂) 전면
온휘당의 향우측 -
좌우측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두고 있다
온휘당의 뒷면
뒷편에서 본 강당.
양쪽 온돌방에는 아궁이가 있고
그 위로 서적들을
보관하는 책장이 있다.
온휘당 천정 가구
온휘당(蘊輝堂) 처마
온휘당 전면 창호 / 측면 창호
온휘당(蘊輝堂) 뒷면의 굴뚝
강당 온휘당(蘊輝堂)
옥동서원(玉洞書院) 현판
‘옥동서원’이라 적힌 현판.
조선후기 정조때 국왕이
현판을 하사한 사액서원이다.
온휘당 현판
강당 대청마루.
정면에' 옥동서원'과 ‘온휘당’ 현판이
오른쪽 온돌방에는 '척로재(斲露齋)'
왼쪽 온돌방에 '탁장재' 현판이 걸려있다
온휘당의 향우측 온돌방
'탁정재(琢章齋)'라는 현판이 있고
맞은편 방에는 ‘착로재(斲露齋)’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 온돌방에는 들어 올릴 수 있는
들문인 분합문으로 되어있어
행사시 넓게 쓸수 있게 되어있다
탁장재(琢章齋)
탁장재 온돌 아궁이.
온돌방 바깥쪽에는 난간이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착로재(斲露齋)
경내에는 경덕사(사당)와 온휘당(강당),
청월루(문루), 전사청, 내삼문 등이 있다.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없고
시설들도 비교적 적지만
조선 후기 서원 건축에서 나타나는
강학 쇠퇴와 향사 강화의 배치와
특징이 잘 남아 있어 주목받고 있다.
경덕사 전사청(典祀廳) 전면
세칸 측면 한칸의 맞배지붕 건물
강당 뒷편 마당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 건물이 있다.
제사를 올리는 기능을 중시했던
18~19세기 서원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덕사(景德祠) 내삼문
경덕사(景德祠) 내삼문 안쪽
보호수인 440년된 배롱나무
사우인 경덕사(景德祠) -
앞면 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형적인 사당건물이다.
경덕사(景德祠) 현판
경덕사(景德祠) 주벽의 방촌 황희의 영정
황희의 둘째 아들인 황보신이
상주로 내려와 정착할 때
모사해 온 영정이 걸려 있다.
사당인 경덕사에는 황희를 중심으로
좌우에 전식, 황효헌,
황뉴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방촌 황희 초상화
조선 세종 때의 재상인 황희의 초상화이다.
옥동서원 소장 자료에 따르면
황희 생전인 62세(1424)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비단에 채색된 형태이며,
초상화의 표현이나 묘사 등을 고려했을 때
전체적으로 고식을 따르고 있다.
방촌 황희의 둘째 아들인 황보신이
상주로 내려와 정착할 때 모사해 온
영정 원본이 보관돼 있었으며
1752년(영조 28)의 사본과
1844년(헌종 10) 모사본,
1857년(철종 8) 모사본 등이 보전돼 있다.
옥동서원은 서원의 기본적인
역할인 제향과 교육 기능 이외에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서원에는
방촌 황희 영정을 비롯해
‘방촌선생실기’와 ‘반간집’,
‘황씨세보’, ‘장계이고’ 등의
책판을 비롯해 각종 고문서 300여 건,
현판 11개 등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남아 있다.
방촌 실기 목판
책판의 판각은 보통 지역 유림 또는
후손들의 공의에 의해 결정됐고
각 지역 기관의 협조를
얻어 시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렇게 완성된 책판은 책으로 간행돼
해당 서원에 보관되거나 각 지역에 배포됐다.
책판은 출판 및 도서관으로 향촌사회에서
중요한 서원의 역할 중 하나다.
옥동서원 유교체험(학생들)
옥동서원 유교체험(어른들)
현재 남아 있는 다른 서원의 역할이 많이
쇠퇴한 것처럼 옥동서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매년 3월과 9월에 향사,
2년마다 개최하는 난국계 등의
제례는 비교적 잘 계승하고 있다.
옥동서원 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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