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간 월요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35,1-10
1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2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3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4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5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6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7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며
승냥이들이 살던 곳에는 풀 대신 갈대와 왕골이 자라리라.
8 그곳에 큰길이 생겨 ‘거룩한 길’이라 불리리니
부정한 자는 그곳을 지나지 못하리라.
그분께서 그들을 위해 앞장서 가시니 바보들도 길을 잃지 않으리라.
9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10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26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보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분이신 하느님은 친근하신 분이 아니라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이름 ‘야훼 ywhw’를 주님이라는 뜻인 ‘아도나이 adonai’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중에 하느님의 이름에 대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탈출 20,7)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의미가 더 강하게 작용을 해서 후대에서는
‘야훼’라는 발음까지 잊어버릴 정도로 친근하신 아버지 하느님이 아니라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엄위하신 하느님과 하느님의 이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아무리 불치의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다하더라도
하느님의 고유 권한인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는 말씀을 그들의 한계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더더군다나 그들의 전통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께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정경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그곳에 모인 이들이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두 가지가 다 문제인 것입니다.
중풍환자를 치유할 수 없다는 것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는 어쩔 수 없이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의 소식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느냐?”인 것입니다.
중풍병자가 주님의 한 마디 말씀에 나아서 들것을 들고 가는 모습을 보고 한편에서는
놀라움을 표시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하고 말하였다.” (26절)
구약에서 엄위하신 하느님을 이제는 주님을 통하여 찬미를 받으시는 하느님이 되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비록 이스라엘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지만 곧 오실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질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이사 35,5-6)
루카 복음사가는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예수님께서 바로 메시아의
모습이심을, 그래서 이사야가 예언한 사실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메시아신 그리스도께서는 엄위하신 하느님이 아니시라 소외된 이들을 사랑으로 살피시는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들고 사람들은 군중이 많아 예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의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걷어내고서라도 병자를 주님께로 내려 보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하시며 그 병자를 치유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구원은 각자의 자유와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내려 보낸 사람들의 노력은 주님께 감동을 주었습니다.
때로 거칠고 어려운 이 세상을 살면서 비록 부족하고 용서를 받아야 우리의 처지이기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열정과 사랑을 보시고 당신 구원으로 우리도 초대하십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