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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 > 세종실록 > 세종 29년 정묘 > 7월 27일 > 최종정보세종 29년 정묘(1447) 7월 27일(정사)29-07-27[01] 사졸 훈련과 징병에 대하여 대신들과 의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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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우찬성(右贊成) 김종서(金宗瑞)가 상서하기를,
“우리 국가는 정치와 교화가 바르고 밝아 다스림에 필요한 일이 모두 잘 베풀어졌사오매 가히 말씀 드릴 것이 없사오나, 오직 병사(兵事)의 한 가지 일뿐이옵니다. 병가(兵家)에서 말하기를,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전쟁을 하면, 이는 민중을 적에게 주는 것이라.’ 하였삽고, 유가(儒家)에서도 역시 말하기를, ‘군병(軍兵)은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정예(精銳)해야 좋은 것이라.’ 하였사온데, 이제의 갑옷과 병장기(兵仗器)가 과연 견고하고 예리한지, 사졸(士卒)들이 과연 훈련되어 있는지, 신의 보는 바로서는 아마도 정예(精銳)하지 못하였다 싶사옵니다.
하삼도(下三道)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으니, 마땅히 군사와 말이 정예하고 강장할 것이온데, 건장한 말이 항상 적고, 갑주(甲胄)가 견고하지 못하고, 활과 화살이 튼튼하고 편리하지 못하여, 나무활[木弓]을 가진 자가 10에 여덟 아홉이나 되는 것을 신이 눈으로 본 바이오며, 이 같은 군졸이나마도 훈련을 하지 않아서 앉고 일어서고 나아가고 물러[坐作進退]가고 하는 법을 아는 자가 거의 드무옵고, 더구나 평안ㆍ황해 두 도(道)는 농사가 흉년들어서 죽은 것을 구제하기에도 넉넉지 못하온데 어느 겨를에 사졸을 훈련하고 갑주와 병기를 수선하겠습니까. 평안도는 부역 나가[征役]는 노고와 사신을 호송하는 번거로움이 더하온데, 비록 변경의 각 보루(堡壘)에 제방(堤防)은 조심스레 갖추어 있으나 안에서 응원해 줄 뒷바침이 없사와, 좀도적 같은 것은 가히 제지할 수 있으나, 만일 큰 도적이 있을 때는 장차 어떻게 막을 것이온지, 신이 매양 이 일을 생각하오면 음식이 목구멍을 내려가지 아니하옵니다.
옛적에 요(遼)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여진(女眞)의 군사가 만 명이 차면 천하에 적대할 이가 없다.’ 하더니, 요(遼)나라가 과연 만 명이 차고 남은 것에 패하였삽고, 고려 때에는 사적(沙賊)이 망한 원(元) 나라의 남은 졸병들로써 갑자기 서쪽 지방을 침범할 제, 변방이 막아내지 못하매, 드디어 거침없이 사뭇 밀어 무인지경을 들어오듯 하였으니, 이런 것이 곧 은감(殷鑑)이 되옵니다. 其在前朝, 沙賊以亡元之餘燼, 卒犯西鄙, 邊方失馭, 遂長驅不止, 如入無人之境, 是謂殷鑑。
국가가 안으로 군사의 훈련을 설시하고 밖으로 단련(團鍊)을 두는 것은 진실로 갑주와 병기를 수선하고 사졸들을 훈련하여 뜻밖의 근심을 방비하려 함이온데, 이제는 그렇지 못하와 혹은 흉년이 들었다느니, 혹은 걱정될 일이 없다느니, 혹은 백성의 괴로움이 된다느니 하여, 아무쪼록 우선 편하기만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매만지지 아니하고 갑옷과 투구를 수선하지 아니하며, 활 쏘고 말 타기를 익히지 아니하고, 진법(陣法)을 연습하지 아니하여 점점 이에 이르러서 백성이 병사를 알지 못하게 되오니 진실로 작은 일이 아니옵니다. 신은 듣자오니, 중국의 금위(禁衛) 군사는 날마다 진법(陣法)을 익히고, 제로(諸路)의 진장(鎭將)들이 한가히 식사할 틈이 없다 하오니 따라서 가히 알 수 있나이다. 나라의 큼과 군사의 많음과 반석같이 굳음으로써도 이와 같이 급급(汲汲)하게 깊이 계획하고 멀리 걱정하기를 쉬지 아니하는데, 우리 나라는 서북(西北)으로 산융(山戎)과 지경이 연접되고, 동남(東南)으로는 섬 오랑캐가 바짝 가까이 있어 사방으로 적(敵)을 받게 되었사오니, 어찌 가히 하루라도 방비할 일을 잊을 수 있사오리까. 이제 교습(敎習)하려 하면,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려서 시킬 수 없다.’ 하고, 갑주와 병기를 수리하려 하면, 말하기를, ‘백성이 가난하여 이바지하지 못한다.’ 하고, 점검(點檢)을 하려 하면, 말하기를, ‘민간이 소동(搔動)한다.’ 하고, 군사를 움직이려 하면 ‘국고(國庫)가 비어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외환(外患)은 우리 백성이 굶주린다 하여 생기지 아니할 것이며, 외구(外寇)가 우리 창고가 비었다 하여 오지 않사오리까. 예로부터 환란(患亂)은 혹 간구(艱苟)하고 곤란한 때에 발생하기도 하오니,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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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5년 계축(1433) 2월 6일(경인)15-02-06[04] 원묘 악장을 새로 찬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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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묘 악장(原廟樂章)을 새로 찬정(撰定)하였다. 초헌(初獻)에는,
“씩씩한 성조(聖祖)여, 명을 받음이 넓고 크시니, 공은 예[古]보다 빛나고 부(符)는 아름다운 상서에 응하였네. 하늘과 사람이 합하고 순함이 문득 동방을 맡았네. 계책을 주어 후손을 넉넉히 하사, 우리에게 은혜로우심이 가이 없네. 부지런하신 태종이여, 하늘이 실로 내시었네. 성조(聖祖)를 붙들어 큰 업(業)을 이룩하였네. 이미 무위(武威)를 드날리고 크게 문명을 밝혔으니, 신성한 공덕 길이 태평을 열었네.”
하고, 아헌(亞獻)에는,
“황천(皇天)이 사방을 보살피고 동방을 돌보사, 덕이 있는 이를 도와 열으시어 신(神)과 사람의 임금으로 명하셨네. 밝으신 황조(皇祖)께서 신무성문(神武聖文)하사, 용잠(龍潛)의 성한 덕이 일찍이 드러났네. 고려의 운수가 끝나려 할 제 백성들이 앙화(殃禍)에 걸렸는데, 동쪽으로 치고 서쪽으로 쳐서 사방을 편케 하시고, 사적(沙賊)ㆍ납호(納胡)ㆍ왜구(倭寇) 모두 달아났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백성을 편히 하고, 꿈이 상서에 합하여 공(功)이 한때에 덮었네. 크디큰 하늘의 명을 마침내 사양하기 어려웠도다. 창업(創業)한 큰 규모는 예전에 없었으니, 밝히 후세에 길이 전하리로다. 비로소 종묘를 닦아 마침내 이룩됨이 있었으니, 천만년 이르도록 태평 시대 되리로다. 천심(天心)이 덕 있는 이를 돌보아 창성한 시대를 열고, 반드시 성철(聖哲)을 내시어 대를 이어 큰 터전을 융성하게 하네. 크옵신 태종이시여, 용지영명(勇智英明)하사 천 년의 운(運)에 응하여 빼어나셨네. 성조를 추대하여 나라를 열고 임금을 일으켜서, 백성을 편케 하고 세상을 구제하여 공이 더욱 빛났네. 제일 먼저 중국에 문안하여 황은(皇恩)을 많이 입었고, 황제의 복(福)을 받아 자손에게 베풀었네. 적사(嫡嗣)를 존숭하여 거듭 화기(禍機)를 안정시키니, 인신과 천의(天意)가 마침내 돌아감이 있었네. 은혜는 백성에게 흡족하고 위엄은 오랑캐에 떨치니, 이에 예악(禮樂)을 일으켜서 무궁토록 드리웠네. 밝게 위에 계시어 보호해 주심이 끝이 없으니, 종사(宗祀)는 하늘과 더불어 길이길이 이으리로다.”
하였다.首覲天庭, 優荷皇恩, 旣受帝祉施子孫。
【원전】 3 집 442 면
【분류】 출판-서책(書冊) / 예술-음악(音樂) / 어문학-문학(文學)
[주-D001] 용잠(龍潛) :
임금 되기전.
동문선 제126권 / 묘지(墓誌)
한문경공 묘지명 병서 (韓文敬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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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내 나이 16ㆍ7세에 시승(詩僧)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여, 한 번은 묘련사(妙蓮寺)에 이르러서 선비와 중들이 섞여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연구(聯句)의 시를 지었는데, 그때에 문경공(文敬公)이 아직 12ㆍ3세의 동자로서 매양 척척 대구(對句)가 되는 연구시를 불러서 좌중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으며, 비록 문묵(文墨)에 늙은 자라도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감히 같은 서열에 낄 생각을 못하므로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보통 사람과는 달리 알고 있었다. 정해년에 나의 선군(先君)이 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문경공(文敬公)이 과연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였으니, 그때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낙제한 자들도 그의 재주에 굴복하여 이르기를, “한생(韓生)은 요행으로 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문벌에 의한 음직(蔭職)으로 두 번이나 진전직(眞殿直)과 별장이 되었기 때문에 벼슬을 구하지 않고, 고서(古書)의 토론을 좋아하였고 또 익재선생(益齋先生)에게 가서 《좌전(左傳)》과 《사기(史記)》ㆍ《한서(漢書)》 등을 읽었으며, 글씨 쓰기를 익혀서 진서(眞書)와 초서(草書)가 다 정묘한 경지에 이르렀었다. 충정왕(忠定王)이 즉위하고 공을 덕녕부 주부(德寧府注簿)에 보직하고, 정방(政房)에 불러다 두고서 비도적(秘闍赤)으로 삼았다. 신묘년에 왕이 왕위를 내놓고 강화도로 가서 공이 따라가 있었는데, 공민왕이 불러서 돌아왔으나 즉시 쓰지 않았다. 계사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전의 주부(典儀注簿)에 제수되고 또 비도적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전리좌랑 지제교가 되고, 또 다음해에 두 번 계급을 올려서 통직랑 성균직강 봉선대부 성균사예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예문응교를 겸임하게 하였다. 병신년에 관제(官制)를 고쳐서 중산대부 비서소감 지제고가 되고, 다음해에 병부시랑 한림대제로 옮겼으며, 가을에는 직학사(直學士)에 승진하였고, 또 그 다음해에 중정대부 국자좨주 지제고에 올랐다. 신축년에 왕이 사적(沙賊)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니 따라가서 전의령과 전교령에 두 번 전직되었는데, 다 중정의 품계였으며, 다음해 가을에 서울로 돌아와서 봉순대부 판사복시사 우문관직제학에 승진되었다. 겨울에 밀직사좌부대언 보문각직제학 지공부사에 임명하니, 이는 대개 공을 등용하여 인사의 전선(銓選)을 맡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음해에 우부대언에 오르고, 또 좌대언에 올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 / 경기(京畿)풍덕군(豐德郡
○ 이색의 기에, “왕성(王城) 남쪽 백마산 북쪽에 큰 절이 있는데, 태조 비 유씨(柳氏)가 희사한 집으로서 그 시주한 토지와 백성이 지금까지 있다. 중간에 없어진 지 오래 되었는데, 시중(侍中)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이 선원법온화상(禪源法蘊和尙)과 더불어 함께 고쳐 짓기로 약속하고, 지정(至正) 계미년(1343)에 시작하여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에 또 상의하기를, ‘대장경(大藏經)은 비치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강절(江浙 중국 절강성)에 가서 가져 왔으니 무자년(1348) 일이요, 그 집 서당(西堂)을 치우고 대장경을 보관했으니 임진년(1352) 일이요, 불당(佛堂)을 이미 짓고 범패(梵唄)의 도구와 날마다 사용하는 물건은 하나도 빠진 것이 없으므로, 낙성 예회(落成禮會)를 차렸으니 계사년 일이다. 신축년(1361)에 낙성 중회(落成中會)를 차렸는데, 겨울에 사적(沙賊)에게 유린당하여 불당ㆍ기명ㆍ불경ㆍ불상이 보존된 것이 거의 드물었다. 나라에서 경성(京城)을 수복한 뒤에 대강 보수하고, 조계선사(曹溪禪師)를 맞아 행재주석(行齋主席)을 시켰으니 갑진년(1364) 일이다. 흥왕사(興王寺) 옛터는 덕적산(德積山) 남쪽에 있다.
고전번역서 > 목은집 > 목은문고 제15권 > 비명 > 최종정보
목은문고 제15권 / 비명(碑銘)유원(有元) 봉의대부(奉議大夫)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 고려국(高麗國)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事) 시(諡) 문충공(文忠公) 초은(樵隱) 선생 이공(李公)의 묘지명(墓誌銘) 병서(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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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나라가 일어난 지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진사과(進士科 회시(會試))에 급제해서 재상(宰相)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은 극히 드물다. 더군다나 우리 고려(高麗)의 경우는 회시(會試)에 응시할 수 있는 인원이 1인으로 한정되어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회시에 급제하고 원나라의 관직에 올라 승진을 거듭한 끝에 대부(大夫)의 지위에까지 이른 사람은, 오직 초은(樵隱) 선생과 우리 부자(父子)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위는 모두가 동성(東省 정동행중서성)의 낭중(郞中) 정도로 그치고 말았다.
거가(車駕)가 북쪽으로 파천(播遷)한 지 7년째 되는 해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는 또 병에 걸려 6년 동안이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병이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시작했을 때에, 선생이 내 집에 들러서 슬피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 계시다가 떠났는데, 그 뒤로 몇 달이 지나서 그만 선생이 별세하였으므로, 내가 지금까지도 비통하게 여기고 있다.........................
정유년(1357, 공민왕6)에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그리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현재 정당문학으로 있는 염흥방(廉興邦) 등 33인을 뽑았는데, 당시에 인재를 제대로 얻었다고 일컬었다.
기해년(1359, 공민왕8)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로 자리를 옮기면서 어사대부를 겸하였다.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내가 외람되게 재주가 없는 몸으로 대간(臺諫)의 일을 섭행(攝行)한 것이 두세 차례나 되지만, 한 번도 조정의 기강을 떨쳐서 일으켜 세운 적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서는 굳이 상께 아뢰어 귀찮게 해 드릴 수가 없었고, 큰일에 대해서는 또 묘당(廟堂)이 처리할 것이라서 중간에 방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마디도 아뢸 만한 것이 있지 않았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대간의 직책을 맡으면서부터 백관(百官)의 기강이 바로잡혀 숙연해졌으니, 선생의 겸손한 태도가 대개 이러하였다.
경자년에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에 임명되었다. 신축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그해 겨울에 사적(沙賊 홍건적)이 침입하자, 조정이 남쪽으로 옮겨 우선 그 예봉(銳鋒)을 피하기로 하였다. 선생이 지금의 시중공(侍中公 이인임(李仁任))과 함께 충주(忠州)에 가서 상의 행차를 영접하고 배알(拜謁)하니, 상이 매우 기뻐하면서 수행(隨行)하도록 명하였다. 이듬해 2월에 우리 군사가 크게 집결하여 경성(京城)을 수복하였다. 큰 병란(兵亂)을 치른 뒤끝이라서 모든 일을 급히 조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상이 선생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 삼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첨의 평리(僉議評理)에 임명하였다가, 겨울에 중대광(重大匡)으로 품계를 올려 삼사 좌사(三司左使)를 제수하였다.
계묘년(1363, 공민왕12) 봄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임명되었다. 여름에 승진하여 우문관 대제학(右文館大提學)과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었으며,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갑진년에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지고 판예문춘추관사(判藝文春秋館事)가 되었다. 그해 겨울에 삼중대광(三重大匡)의 품계로 오르면서 도첨의찬성사 판판도사사(都僉議贊成事判版圖司事)에 임명되었다.
이때 패라첩목아(孛剌帖木兒)가 군대를 이끌고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승상(丞相)을 내쫓고 자기가 대신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주달(奏達)할 인물을 찾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이에 상이 또 이르기를 “이모(李某)가 아니면 안 된다.” 하였으므로, 선생이 중국에 들어가서 승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의 언사가 간결하고 분명한 데다 용모가 단정하고 정중하였으므로, 승상이 여러 차례 선생을 눈여겨보더니, 선생이 물러가자 종자(從者)에게 말하기를 “앞에 나아가서도 두려워할 만한 점을 보지 못했다[就之不見所畏]고 하는 말은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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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문고 제6권 / 기(記)보법사기(報法寺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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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王城)의 남쪽 백마산(白馬山)의 북쪽에 큰 사찰이 있었다. 이 사찰은 태조(太祖)의 비(妃)인 유씨(柳氏)가 집을 희사해서 세운 것인데, 그때 시주한 전토(田土)와 농민(農民)이 지금까지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중도에 폐허로 변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시중(侍中)인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공(尹公 윤환(尹桓))이 선원(禪源) 법온 화상(法蘊和尙)과 중건(重建)할 것을 함께 맹세하고 지정(至正) 계미년(1343, 충혜왕4)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장차 공사를 마칠 즈음에 또 상의하여 말하기를 “대장경(大藏經)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하고는, 이에 중국의 강절(江浙)에서 대장경을 구해 왔으니 이때가 무자년(1348, 충목왕4)이요, 거주하고 있던 서당(西堂)을 철거하고서 대장경을 비호하게 하였으니 이때가 임진년(1352, 공민왕1)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각(殿閣)이 일단 갖추어지자 범패(梵唄)에 쓰이는 도구라든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마련해 놓고는 계사년(1353, 공민왕2)에 낙성 초회(落成初會)를 열었으며, 신축년(1361, 공민왕10)에 다시 낙성 중회(落成中會)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해 겨울에 사적(沙賊 사유(沙劉) 등이 이끈 홍건적(紅巾賊))의 유린을 당한 나머지 전각과 기명(器皿)을 비롯해서 불서(佛書)와 불상(佛像) 등이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가 경성(京城)을 수복한 뒤에 약간이나마 다시 수선하고 나서 조계(曹溪)의 선사(禪師)인 행재(行齋)를 초빙하여 사찰의 주지를 맡게 하였으니, 이때가 갑진년(1364, 공민왕13)이었다. 을사년(1365, 공민왕14)에 부인 유씨(柳氏)가 죽자 윤공이 한편으로는 슬퍼하고 한편으로는 느끼는 바가 있어 공사를 더욱 급히 독촉한 결과 그 이듬해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파평군 윤공 묘지명 병서 (坡平君尹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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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지정(至正)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서울을 핍박해 와서 현릉(玄陵)이 남방으로 행행할 계책을 결정하니, 조관들이 많이 벼슬을 버리고 달아났다. 파평군(坡平君) 윤해(尹侅)가 전직 복주 목사(福州牧使)로서 필마로 왕의 거가를 따라 광주(廣州)에 이르러, 객사의 문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웃기를 평상시와 같이 하였는데, 내 비로소 그 얼굴을 알게 되었으니, 대개 기이한 큰 인물이었다..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유원 고려국 충근절의 찬화공신 중대광 서령군 시 문희 유공 묘지명 병서 (有元高麗國忠勤節義贊化功臣重大匡瑞寧君諡文僖柳公墓誌銘 幷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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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한마음으로 왕실을 받들어 사적인 무리가 없으면 다행이다.” 하였다. 바로 부사(副使)로 고쳐 제수되고, 정유년에 동지상의회의도감사(同知商議會議都監事)에 승진되고, 기해년에 다시 지원제점사 천대사(知院提點司天臺事)로 승진되었다. 신축년 겨울에 사적(沙賊)이 황주(黃州)를 침범하니, 그 상황이 몹시 급박하게 되어 조정의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공이 조용히 아뢰어 남행(南幸)할 계책을 결정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국가가 믿는 것은 성지(城池)와 양식입니다. 이제 성곽이 완전하지 못하고, 창고에 저축이 없으니, 만일 적이 사교(四郊)를 포위한다면 장차 어떻게 지키겠습니까.” 하였던 것이다. 안동부(安東府)에 이르러서는 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동수국사(樞密院使翰林學士承旨同脩國史)가 되었다. 다음해에 적이 평정되자 세 원수(元帥)의 공로가 더욱 높아지더니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독단으로 살해하고 또 말하기를, “이제 총병관을 죽였으나, 유모(柳某)가 그 속에 있어 매양 기이한 묘략을 꾸미니 이 자가 두렵다. 제거해 버리는 것이 편하다.” 하였다. 공이 이를 알고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기란 어려운 것인데 이제 여러 장수들이 신을 꺼려하는 것은 다만 신이 전하의 좌우에 있기 때문입니다.
속동문선 제3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의 총 시(義塚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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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효온(南孝溫)
백년의 호운이 다하였으니 / 百年胡運窮
불쌍도 하여라, 지정(원 순제의 연호)의 군주 / 可潾至正主
원화가 대로(온 누리)를 하직하니 / 元和辭大爐
살기가 하늘에 가득하여서 / 殺氣滿天宇
횐 칼로 불의를 원수 갚으니 / 白刃讎不義
중원이 반이나 늑대ㆍ호랑이 / 中原半豺虎
지정이 힘 모자라 금치 못하매 / 至正不能禁
홍건적이 제노라 무력 뽐낼 때 / 紅巾吾甚武
승상은 벌써 사약에 죽고 / 丞相已賜藥
불화는 새로 되에 잡혀고 죽고 / 不華新死虜
누가 우리 군사 기운을 떨치리요 / 誰能張我師
육군이 흩어져 부오가 없네 / 六軍無部伍
요군이 원실을 뒤엎으려고 / 妖軍問周鼎
기내에 흰 깃(화살)을 날려보내니 / 郊畿飛白羽
백만 군이 모조리 병기를 놓고 / 百萬齊放仗
한 날에 불쌍한 혼백 되었네 / 同日魂魄苦
떠날 적엔 여인들이 울음을 울며 / 去時兒女啼
붙잡고 금루의를 부르더니만 / 牽我唱金縷
돌아올 기약은 아득하고 / 歸期杳茫茫
해골이 언덕에 내버려졌네 / 形骸委丘塢
천자께서 의귀들을 애통하시와 / 天子哀義鬼
무덤에 은전을 더하시오니 / 窀穸加恩數
원사가 와서 금귀를 풀어 / 院使解金龜
백골을 풀섶에서 일일이 거둬 / 白骨收草莾
나누어 만 사람이 구덩 만드니 / 分爲萬人坑
의총이 올망졸망 언덕에 가득 / 義塜數丘土
기나 긴 밤 원귀들이 많이 울었고 / 煩冤脩夜多
대낮에 뇌성ㆍ벽력 성내네 / 雷霆白日怒
묵은 길에 까마귀ㆍ솔개 내리고 / 古道烏鳶下
빈 수풀에 여우ㆍ토끼 춤추는구나 / 空林狐免舞
구름이 번복되듯 인간 세상 빠르나 / 雲飜人代速
낙강은 만고에 그냥 흐르네 / 樂江流萬古
거친 무덤에 잔디풀이 해묵었으니 / 荒隴莎草宿
하룻밤 가을 산에 비가 우수수 / 一夜秋山雨
[주-D001] 금루의(金縷衣) :
당나라 두추랑(杜秋娘)이 부른 금루의곡(金縷衣曲)이 있는데, “그대여, 금루의를 아끼지 말고 젊은 시절 아끼라. 꽃이 피어 꺾을 만하거든 곧 꺾을 것이요, 꽃이 없어진 뒤에 빈 가지만 꺾지를 마소.” 하였다.
[주-D002] 금귀(金龜)를 풀어 :
귀인들이 차는 인(印)인데, 그것을 풀어 돈을 만들어 백골을 장사지냈다는 말이 있다.
속동문선 제5권 / 칠언고시(七言古詩)
극성회고(棘城懷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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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정(崔淑精)
당년에 성난 외구가 성문을 막아 / 當年怒寇闌塞門
맹렬한 화염이 활활 요원의 불길 같았네 / 猛熖烈烈如爎原
아군이 길이 몰아 즉시 성 밑에 이르니 / 長驅不日到城下
막막한 요기가 천지를 뒤덮었는데 / 妖氛漠漠䨪乾坤
지휘관이 접전할 기회를 그르쳐 / 期門受敵誤機會
아군이 낭패하고 되놈들이 와아 했네 / 南軍狼狽胡語喧
수십만 군이 일조에 섬멸되고 / 數十萬人一朝殲
남은 군졸 사면으로 흩어져 패해 달아났네 / 餘卒四散仍敗奔
귀천을 막론하고 해골이 되어 / 同將貴賤作枯骨
원기가 맺혀서 컴컴한 구름 되었었네 / 怨氣結作陰雲屯
슬픈 바람 휘휘 지금도 불어오는데 / 悲風颯颯吹至今
옛성은 푸른산 밑에 황폐했도다 / 古城寥落蒼山根
시를 던져 의혼들을 조상하려니 / 投詩直欲弔毅魂
천고의 유원이 붓 끝에 묻혀 오누나 / 筆端千古埋遺冤
[주-D001] 극성(棘城) :
황주(黃州) 남쪽 25리의 고성(古城). 지금의 정방산성(正方山城). 고려 때 홍건적(紅巾賊)에게 우리 군사가 섬멸된 고전장(古戰場
동문선 제49권 / 노포(露布)
총병관 중서평장사 정세운이 홍건적을 평정한 노포[摠兵官中書平章事鄭世雲平紅賊露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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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씨(無名氏)
임금께서 일찍이 세상을 건질 마음을 품으시와 널리 인재를 구하셔 삼가 장수의 임명을 받게 되매, 임금의 알아주심에 누가 될까 걱정하였다. 나는 듣건대, 흥하고 쇠하는 것은 기수(氣數)에 매였으므로 다스리고 어지러움이 그지없다. 백성을 편하게 하는 요점으로 도적을 막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태왕(太王)이 빈(邠) 땅을 버린 것은 능히 적(狄)의 괴롭힘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요, 명황(明皇)이 촉(蜀)땅에 거동한 것은 안록산(安祿山)의 침범을 막지 못한 것이다. 적미(赤眉)를 쓸어없애고서야 유(劉)씨의 한(漢) 나라는 중흥이 되었고, 황건(黃巾)을 파하고 나서야 조(曹)씨의 위(魏) 나라는 이어 받게 되었다. 모두 생각하면 시운(時運)인 것이요, 한갓 사람의 탓만은 아니다. 지난해 동지달에 죄악이 많은 억센 도적을 만났는데, 그의 독함을 말하면 승양이나 범으로도 같을 수가 없고, 그의 군대 진행하는 것을 보면 또한 손빈(孫臏)이나 오기(吳起)로도 막아내기가 어렵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방자하여 지니 세상에서는 누구냐 하는 이도 없었다. 승전한 기세를 타서 몰아 들어와 이미 천하에 횡행하였고 멀리 제휴하여 바로 들어오기는 이내 우리 나라에 까지 기세를 떨쳤다. 성낸 기세를 당적할 수가 없어 소문만 들으면 모두 저절로 무너졌다. 백 만이나 되는 억센 군대는 어느덧 서울 안에 들어왔고 억조(億兆)의 이 나라 백성은 행길에서 떠돌았다.
가엾다. 백성들은 도탄(塗炭)에 빠졌고 하물며 임금이 멀리 파천하셨음이야 실로 장상들의 깊은 근심이었다. 그리하여 구름같이 모여드는 군대를 가지고 드디어 개미떼 같은 오랑캐를 쳐부수었다. 우리 군대는 병에 물 쏟아지듯 하는 세력이니, 적에게 달려들기 무엇이 어려우며 저 놈들은 쪼개지는 대쪽처럼 칼날 닿는 대로 문득 찢어졌다. 천하에서 억제하지 못하는 놈을 베어죽였다. 물고기가 솥 가운데에서 숨을 쉴 것이냐 토끼는 그물 밖으로 벗어나기 어려웠다. 전단(田單)의 일시적인 기묘한 방법은 본따를 것이 없고 제갈량(諸葛亮)의 팔진(八陣)이 스승될 만하였다. 눈 속에 성을 쳐들어가니 이소(李愬)는 채주(蔡州)땅을 빼앗았고, 도망가지 못할 강물을 배후에다 두고 진을 쳤으니 한신(韓信)은 조(趙) 나라 성에 꽂힌 기(旗)를 뽑고야 말았다. 일은 비록 같지 않으나 이치는 진실로 합한 것이다. 지난번 기해년에 군사를 모집하여 일찍이 도둑놈을 조선에서 쓸어없애고 曾掃賊於朝鮮두 번이나 도적이 억세게 달려든 것을 이기고야 말았으니, 모두 신 등의 공적이 아니오, 이는 대개 전하(殿下)의 용맹과 지혜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며, 성스럽고 공명함이 날로 높아서 멀리 아름다운 바람을 퍼뜨리매 예(禮)와 풍악[樂]을 삼대(三代)에 따른것이요, 크게 문덕(文德)을 펴 간우(干羽)의 춤을 뜰에서 추었다. 올빼미 같은 놈들은 순종하게 되고 견양(犬羊) 같은 놈들도 항복하였으니, 성인의 덕화에 관계되지 아니한 것이 없으며 또한 지극한 인애(仁愛)의 품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치의 자연함이요, 비운(否運)이 가면 태운(泰運)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는 중흥의 시기이며 실로 다시 시작되는 처음이다. 신들은 감히 매[鷹]처럼 날치는 용맹을 뽐내어 아침나절에 청명하게 되도록 하지 아니하리까. 기뻐 뛰는 정성을 펴서 행재(行在)를 우러러 바라지 아니하랴.
첫댓글 홍건적이 제노라 무력 뽐낼 때 / 紅巾吾甚武 홍건적이 자기들 무력 뽐낼 때
불화는 새로 되에 잡혀고 죽고 / 不華新死虜 不華(?) 虜( 거란 홍건적 또는 ?)
요군(妖軍).: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수군수군하는 부대
태평천국의 난 때의 요군(妖軍): 태평군은 적군에 관계된 모든 것에 ‘요’를 붙었다.
部伍 : 군대 진영의 편성된 행렬
망한 원의 잔병이 홍건적이라네요? 신축년 1361년 이전에 이미 원은 망했다는 이야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