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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대한민국사 제1권 > 1945년 > 군정청 정보부장, 신문편집책임자와의 회견, 언론의 중대사명 강조
제목 | 군정청 정보부장, 신문편집책임자와의 회견, 언론의 중대사명 강조 |
연월일 | 1945년 09월 23일 |
출전 | 매일신문 1945년 09월 23일 |
군정청 정보부장, 신문편집책임자와의 회견, 언론의 중대사명 강조
미국군정청뉴맨정보부장은 23일 오전 10시부터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각 신문사의 편집책임자와 회견하고 건국대책에 공헌해야 할 언론기관의 중대한 사명을 강조하는 동시에 일본인의 퇴거등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하였다.
“미국조선주둔최고사령관 하지중장의 명령은 북위 38도 이북에도 조선인에 한하여서만은 적용 시행된다. 조선내의 각 기관에 아직도 일본인관리가 남아 있지만 이것은 단기간을 전제로 하는 임시방편이다. 점차로 조선인관리로 하여금 일본인관리의 자리에 앉게 할 방침이므로 이렇게 되면 그들은 곧 내보낼 터이다. 그러므로 일본인관리를 추방하려고 음모나 선전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다. 또 현재 일본군인을 조선으로부터 내보내려고 수송에 주력하는 중인데 군인의 수송이 끝나면 그 다음에는 일본주민을 내보내겠다. 그런데 현재 일본내에 있는 조선인은 약 500만명이나 된다. 그러므로 조선내에 있는 일본인을 학대한다면 일본에 있는 조선인도 학대를 받게 될 것임으로 이같은 점에 신중히 유의해 주기 바란다.
여기서 각 신문편집주간의 회합을 만들어 여론에 대한 정당한 지도를 해 주기 바란다.
낭설의 보도가 없도록 하여 참된 언론자유의 길로 나가도록 함이 좋겠다. 미국군으로서는 신문검열같은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낭설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事가 있다면 상당한 고려를 해야만 하겠으므로 그런 사태에 이르지 않도록 협력해 주기 바란다. 일례를 들어 말하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에 손해가 있었다는 풍설이 있거던 좀 더 그 진상을 조사함이 좋겠다. 군정당국에도 말하여 조사하도록 함이 좋겠다. 언론자유라는 것을 남용하면 검열을 하게 될지도 모르고 사태의 여하에 따라서는 압수하게 될지도 모르겠으므로 각자가 자주적으로 자유를 옹호하기 바란다.
만일 무책임한 풍설이 전파되어 치안을 문란시키는 일이 있다면 미군당국은 이를 제지하기 위하여 어떤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책임은 크다. 내란과 폭동이 있어 생명재산의 손실이 크게 된다면 건국과정에 있는 오늘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들은 현재 매일 5시간씩 일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이해관계때문이 아니다. 다만 조선의 신건설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 뿐이다.”
매일신문 1945년 09월 23일
백과사전.
1940년대 후반 ~ 1950년대[편집]
전쟁이 끝난 당시 20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있었다
7집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 > 1920년(경신년) > 3월 > 23일 《화요일》 어둑어둑하고 추움. 23일 《화요일》 어둑어둑하고 추움...아이누(Ainu)註 053족은 유럽의 백인종이 나중에 동쪽으로 이주해온 종이다. (7) 아이누 족은 일본 중부와 조선에 살았던 황인종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23rd. Tuesday. Gloomy-chilly. Lunch at Y.M.C.A. Dr. Hardlicker's remarks continued. (6) The Ainu race is a later emigration to the East from the common white race in Europe. (7) The Ainu race was conquered by the yellow brown people who peopled central Japan from Korea.
『震光』 제4 • 5호 합간(중국어본)(1935년 11월호) 일본의 東京 • 武藏은 고대 백제 • 신라 • 가락인들이 처음 개척한 곳이다. 오늘날까지도 이곳에는 高麗村 • 聖天院 • 高麗王碑 • 狹山勝樂寺 • 山口觀音鐘 • 白鬚神社 등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유적과 유물이 적지 않다. 백수신사는 고대 이 지역을 개척했던 우리 선인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向島 • 西介原 등 고려촌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백 수십 곳에 산재해 있다. 志木 • 白子와 같은 지명 역시 우리의 선인들이 명명한 것이다
국역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5권 > 光武 11년 丁未(1907년) ③ > 30. 鎭衛隊의 해산
30. 鎭衛隊의 해산
伊藤博文은 各道에 전화를 하여 경관으로 하여금 진위대를 해산하게 하였다. 그것은 서울과 마찬가지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훈련장에 모이게 하여 총을 일제히 세워 놓게 하고 먼저 맨손으로 무예를 시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병사들이 무예를 시험하고 있을 때, 일제히 그 총을 거두어 갔다. 그 矯詔가 반포된 후 병사들은 속수무책이었으므로 탄식만 하고 있다가 어찌할 수 없이 제각기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兩西와 關北에서도 많은 병사들이 의병들의 軍陣으로 투신하였고, 兩湖 이남 지역도 土匪들과 합류한 병사들이 많았다. 그 후 의병이 사방에서 일어나자 많은 병사들은 모두 그들과 합류하였다. 이때 安東과 原州 兩隊는 먼저 기회를 틈타 총을 메고 해산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은 매우 괴로워하였다.
各道에서 병대를 창설할 때 도둑들이 모여들었으나 그들을 금지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오직 배불리 먹고 취하여 교만하고 악독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착취하였으므로 지방민들은 그들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고 원수처럼 미워하여, 그들이 해산되었을 때는 모든 백성들이 손을 들고 경축하였다. 또 그 후 얼마 안되어 의병이 계속 일어나 일본과 각축전을 벌이다가 사상자 및 가산을 탕진한 사람들이 약 1000만명이나 되어 병대를 창설할 때와 같지 않았다.
고전번역서 > 유방집 > 유방집 > 열전 8 > 최종정보
유방집(遺芳集) 독립운동가 82인의 열전 / 열전 8
김성범전〔金成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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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이름은 성범(成範)이고, 운산(雲山) 사람이다. 1925년 5월부터 20개월 동안 정의부(正義府) 의 결사대원으로 있었다. 적진을 깨뜨렸고, 운산 등지를 휘젓고 다니면서 군과 면의 사무소를 격파하고 공문서를 불태웠으며 많은 사람을 사살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1928년 11월 30일에 신의주 지방 법원에서 사형을 판결받았다. 공이 사형을 판결받을 때에 좌우를 노려보며 말하였다.
“10년 동안 우리 독립군이 양쪽 강 등지에서 옮겨 다니며 전투를 벌인 것이 6000회가 넘고 죽인 적은 헤아릴 수 없다. 지금 내가 전투에서 죽지 못하고 포로 신세가 되었으니 독립군을 매우 욕되게 하였다. 너희 원수들이 나를 도마 위의 고기로 여겨 난도질을 하며 멋대로 하고 있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좋고 죽여도 좋다.”
그러고는 마침내 크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니, 적의 법정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공의 나이 27세였다. 동지 백임호(白林虎)는 28세였으며, 2년 형을 판결받았다.
[주-D001] 정의부(正義府) :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정서(軍政署), 광정단(匡正團) 등을 통합하여 1924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노보키예프스코예
1908년 5월 20일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4 34권 러시아편 I > 6. 연해주의 군총독 각하께
내무부 비밀
남우수리스크 크라이
국경수비위원회
1908년 6월 19일 연해주의 군총독 각하께
297호
노보키예프스크
(연해주)
전신주소 : 노보키예프스크
5월 12일 672호 암호전문에서 기술된 요구를 이행하기 위하여, 우리 국경에서 한인 이주자들 사이에 반일운동이 비록 약화된 정도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각하께 보고 드립니다. 이 운동은 우리 공민들이거나 국경지방에 있는 사람들이거나 일본인들에 의하여 잔혹하게 억압받고 강탈당하고 있는 자기 조국에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모든 한인 거주민들에 의하여 지지 받고 있습니다. 한국 북부지역에 있는 한인봉기자들의 계획이 아주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이런 공감분위기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내의 일본인들과 그들의 동조자들은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으며, 대규모 봉기군은 소부대와 초소만이 아니라 상당한 병력을 가진 일본군부대를 소탕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북부와 서부에는 몇몇 도시가 봉기군에 의하여 장악되고 있으며, 5월초에 일본군에 의하여 격퇴된 튜멘-울라 강 상류의 무산 시는 지금까지 반란군 수중에 있습니다. 회령 시로부터 부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에게서 그 도시를 탈취하려던 일본인들의 시도는 격퇴 당했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한국인들의 사기를 드높이고 있고, 그들은 만주 동부와 우리 지역에서 자금을 모으고 무기를 구입하는 일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저의 강력한 주장, 그리고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 국경에서의 반일운동을 허락할 수 없다는 지침에 의하여, 이곳에서 선동행위를 하던 지도자들인 이범윤과 블라디미르 리는 동조자들과 함께 이미 오래전에 노보키예프스코예를 떠났습니다. 이곳 포시에트스크 구역에는 총 몇 명만이 남았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들의 활동은 블라디보스토크, 수찬스크, 수이푼스크 구역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블라지미르 리가 이전에 얀치힌스크의 촌장이던 표트르 최를 방문하고자 이곳으로 왔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그에게 추방위협을 하면서 즉각 떠나라고 말하였고, 그는 이를 수행했습니다. 저는 포시에트스크 경찰서장에게 최를 소환하여 그가 러시아 공민으로서 한인애국자들의 활동에 개입하지 말도록 설명하게끔 지시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기꾼적인 기질대로 위선적인 태도를 취하여, 일에 부정직하게 관여하여 돈을 갈취하고 자기 용도대로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사기꾼같은 책략 때문에 암살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저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국경수비위원 서명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0 40권 중국보도기사 2 > 1940년대 전반(중경시기) > 204) 전후 한국문제에 관한 공개서한(續)
제목 | 204) 전후 한국문제에 관한 공개서한(續) |
발신일 | 5월 23일 |
발신자 | 嚴大衛 |
204) 전후 한국문제에 관한 공개서한(續)
嚴大衛
甲. 정략 방면에서입니다. 사람들이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한 역사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동맹국이 南洋戰線에서 실패하였을 때, 사람들 이구동성으로 ‘전략상의 실패보다는 정략 상의 실패가 주된 원인’이라고 하였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실이 존재했던 자체를 망각하고 있습니다.세계대전이 폭발했을 때 동맹국의 구호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각 식민지 민족은 ‘이 기회를 틈타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희망 섞인 구호를 들고 나왔습니다. 이런 모순을 이용한 적 수상 東條는 제81차 적국 의회 석상에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년 중으로 버마에 독립국가를 출현시킬 것”이며, “필리핀은 라우렐의 지도하에 명예로운 독립을 얻게 될 것”이라고 호언하였던 것입니다. 東條의 호언장담이 장차 실현될지 여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일본의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東條가 이런 발언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일 東條의 발언 내용이 버마와 필리핀에 전해진다면, 두 나라 인민들은 어떤 감상을 갖게 될까요? 이로 인해 동맹국의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이 미치게 될지는 평범한 사람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어떤 경우에도 동맹국과 운명을 같이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동맹국이 東條를 좇아 기만적인 심리를 갖지 않았으면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동맹국에 대해 결코 좋은 인상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정략상의 필요에서 동맹국은 당장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전후 한국이 완전한 독립을 실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절대 원치 않고, 불가능한 최악의 가상이기는 하지만, 동맹국이 일본과 타협하려는 뜻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동맹국이 한국임시정부 승인을 주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8년 10월 14일, 협약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흔쾌히 승인하였습니다. 같은 해 11월 9일에는 폴란드의 독립도 약속하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협약국들은 두 나라 무장세력에 무기를 지원하고 작전에 참가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두 나라 군대의 참전으로 협약국들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동맹국들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협약국이 그랬던 것과 동일한 이유와 방법으로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의 광복독립을 도울 수는 없는 것입니까? 보증컨대 만일 동맹국들이 당장 흔쾌하게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면, 이 소식을 들은 3천만 한국인들은 즉각 동맹국의 승리를 위해 값을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공헌을 할 것입니다. 동맹국의 한국독립 보장은 적에게는 반대로 엄청난 타격이 될 것입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상황은 우리의 바람과는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동맹국은 일본을 향한 한인들의 적개심을 키워주고 이를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기는커녕, 오히려 한인들의 용기를 잃게 하는 그릇된 언론을 퍼트리고 있을 뿐입니다. 어느 것이 동맹국을 위한 길인지 그 답은 자명할 것입니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전후 한국을 국제공동관리에 두어야 한다는 등 황당한 언론이 출현한 것은 분명 동맹국 전체의 여론을 반영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논의가 계속된다면, 이는 분명 동맹국의 정략 상의 엄청난 착오가 아닐 수 없습니다.
乙. 전략 방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한국은 대륙침략을 위한 일본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병참기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목하 한국 농토의 100분의 85(약 9백만 정보, 1정보는 대략 중국의 15畝에 해당), 자본의 100분의 95(전체 각 중요 산업자본의 100분의 99는 일본인이 장악)는 이미 일본인들이 강점한 상태입니다. 또한 수많은 군수공장이 한국 경내에 건설되었습니다. 일본이 전쟁수행에 필요로 하는 군수품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한인 가운데 1천 6백만 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2백만 명의 노동자가 각종 공장에서 노예와 같이 부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적의 강압에 의해 전장에 끌려온 한인이 최소 10만(적들이 말하는 이른바 지원병을 포함하여)에 달합니다. 전선에 끌려온 한인들은 대부분 통역, 운전수 등 중요한 분야에 투입되었습니다. 이외에도 85만 명의 한인이 일본 국내의 공장과 광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敵寇는 내년부터 한국에서 징병제를 강제실시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적들은 당장 내년에 20만(적 방송에 의하면)의 한인을 징집하여 무장시킬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동맹국은 차제에 적들의 압박과 착취 아래 어쩔 수 없이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는 한인들이 태업, 파업, 파괴를 진행하도록 선동할 방법을 강구하여 적구의 전쟁기반을 흔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총반격을 준비하는 중요한 전략의 하나라고 여겨집니다. 만일 이 전략을 철저히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면 의외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며, 전쟁의 승리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전의 목표가 명확하지 않고, 전략의 성과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면,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음은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동맹국은 이번 전쟁의 작전목표는 인류의 정의와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이미 여러 차례 공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도 한인의 배일감정을 자극하여 한인들이 동맹군과 긴밀히 합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좋은 전략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맹국이 전후 한국의 완전한 자유독립을 보증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보증이 선행되어야만 전략이 더욱 성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한국은 반드시 독립을 이루어야 합니다.
丙. 세 번째로 이상 방면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제섭 선생 등의 이상에 대해 경앙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후에도 국제공동관리라는 낡은 형식과 체제를 계속 존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더더구나 전후 국제 공동관리라는 형식으로 한국을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협조하는 3대 목표에 대해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한국이 독립을 이루지 못하면 3대 목표 또한 실현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성명하는 바입니다.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협조하는 양대 목표는 ‘아시아를 세계의 기타 부분과 동일시하며’, ‘아시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입니다. 한편 영 · 미 두 나라 영수가 발표한 대서양헌장의 제3항은 “각 민족이 자신들의 정부형식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를 존중하며, 만약 이런 권리를 박탈당한 민족이 있으면 두 나라는 그들이 원래 향유하고 있던 주권과 자주정부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하였습니다. 한국이 독립을 이루지 못하는데 대서양헌장 3항의 약속이 철저하게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이 아시아에서마저 평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데 아시아가 세계의 기타 부분과 동일시될 수 있겠습니까? 한국이 독립을 이루지 못하는데 ‘아시아에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계획이 실현될 수 있겠습니까? 제섭 선생 등이 전후 한국을 국제 공동관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된 원인은 아마도 전략 상의 필요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인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정치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두 개 이상의 국가로부터 간섭을 받게 되면 그 나라는 반드시 전란에 휩싸이거나 과분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이전 청조 · 러시아 · 일본 세 나라 세력이 동시에 한국에서 각축을 벌인 결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영국과 일본이 타협하여 각기 중국과 한국에서 상대방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한 결과, 일본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한국을 병탄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을 병탄함으로써 일본은 후일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18세기 러시아 · 독일 · 오스트리아 3국 세력이 폴란드에서 각축을 벌인 결과, 폴란드는 瓜分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이번 세계대전이 종식된 뒤 동맹국의 역량이 제국주의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다거나, 파시스트적 침략사상을 소멸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한 나라가 한국을 침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국제공동관리라는 방식으로 한국을 통치하려 든다면, 과거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 결과가 초래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궁극적으로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의 도화선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번 세계대전을 통해 동맹국들이 애초의 작전목표를 관철하고, 대서양헌장의 정신을 전 세계에 적용하여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장한 4대 자유를 전 인류가 향유하게 된다면, 한국은 어떤 외부세력으로부터도 침략의 위협을 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소련과 중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한국을 침략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전후 일본이 재차 한국을 침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전후 동맹국들은 분명 일본의 무장을 해제시켜 그들이 재차 타국을 침략할 여력을 갖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전후 동맹국들은 아시아에 항구적인 평화국면을 정착시키기 위해 반드시 한국과 같은 약소민족국가를 단기간에 강국으로 성장시키는데 협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럽의 항구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강이 벨기에 · 네덜란드 등 소국의 역량이 강화되도록 도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이상의 논의를 통해 전후 한국과 대만문제에 대한 제섭 선생 등의 이상은 한국인의 이상과는 너무 거리가 먼 것이며, 또한 대만인들의 이상과도 천양지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주장은 실제적 환경의 요구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상이라는 방면에서 살펴볼 때도 한국은 반드시 전후 즉각 독립을 이뤄야 합니다.
丁. 마지막으로 도의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문명인이란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동물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각 동맹국들은 마땅히 약소국가의 독립운동에 대해 열렬한 동정과 원조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이는 회피해서는 안 되는 책임이기도 합니다. 한국독립은 동맹국의 이해관계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필연입니다. 한국독립은 또한 문명적 인류의 도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당연한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미국의 극소수 인사들은, 아시아의 장래에 대해 너무 과도한 우려 끝에, 한국이 완전한 독립국으로 거듭나기 전에 국제공동관리라는 과도기를 거쳐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내놓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을 제기한 인사들이 한국에 대해 악감정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만은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세 가지 이유는 이해방면에 주안점을 두고 미국 일부 인사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반박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도의라는 관점에서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합니다.지면관계상 여기서 망국 전후 한국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망국 전후 한국 국내에서 펼쳐진 의병들의 항쟁이 얼마나 장렬했던지, 수많은 민족영웅들이 어떻게 피 흘렸던지, ‘3 · 1’독립운동은 얼마나 비장했던지, 9 · 18사변 이후 한국독립군이 어떻게 중국의용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일항전을 전개했던지, 한국의 영웅 李奉昌은 어떻게 일황을 저격하였던지, 尹奉吉은 어떻게 白川 · 野村 · 植田 · 重光 등 적 수괴를 폭살시켰던지, 이런 장렬한 한국혁명의 역사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7 · 7’사변 이후 한인들이 세운 항일 전적만으로도 한국혁명사는 휘황찬란하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7 · 7’사변 직전 한인들은 대규모 배일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로 인하여 적에게 잡혀간 애국영수와 청년은 전국적으로 약 3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같은 해, 즉 1937년 한국 농민들은 착취를 일삼는 일본인 지주에게 대항하여 전후 31,799 차례의 抗租運動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겨울에는 경상북도 대구지역의 학생 1백 여 명이 중국 항전에 호응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기밀이 누설되어 학생 다수가 체포되었습니다.1938년에는 全羅南道 한 곳에서만도 1,170 차례의 항조운동이 발생했습니다. 이 해에 이른바 ‘사상보호감찰소’에 수감된 혁명청년은 8천 여 명에 달했습니다. 같은 해 11월 경성 부근에서는 민중폭동이 발생하여 적들과 사흘간 투쟁을 전개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하고 가두시위를 전개했습니다.1939년 1월 多獅島(압록강 하구에 위치)에서는 한국 노동자들이 건설 중에 있던 적 군항을 완전히 파괴하였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咸鏡北道 甲山 지역의 화전민들이 자발적으로 유격대를 조직하여 중국 동북지방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군을 성원하였습니다. 1940년 9월에는 한국 전역의 기독교 신도와 일반민중이 日寇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며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적들은 황급히 중국 화북으로부터 1개 사단을 차출하였으며, 이것으로도 부족하자 본국으로부터 적지 않은 병력을 급파하여 간신히 폭동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같은 해 10월에는 釜山 지역 학생 4천 여 명이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여 적군과 격투를 벌이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같은 해에는 咸興의 군수공장이 한인 노동자들의 방화로 소실되었습니다. 이 해에 日寇는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위험분자’ 3백 여 명을 체포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전국에서는 31,893건에 이르는 대소규모의 항조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지역별로는 全羅北道가 4,336건으로 가장 많았고, 함경북도가 90여 건으로 가장 적었습니다.
1941년에는 新義州 · 平壤 · 鎭南浦 · 元山 등지에서 3천 여 민중이 강요된 지원병제도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1942년 4월 18일, 미군 폭격기가 동경에 폭격을 가하던 바로 그날에는 한국 仁川의 혁명민중들이 반일폭동을 일으켜 그 가운데 14명이 적에게 체포되었습니다.1942년 2월 23일 런던 방송국은 2월 1일부터 6일까지 일주일 사이에 한국 각지에서는 수많은 폭동이 일어났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방송에 의하면 경성의 혁명민중들이 2월 1일 새벽 1시 왜구의 경찰서 1곳을 습격하고, 일본인 가옥 180채와 창고 12곳을 파괴했습니다. 2월 2일 새벽 2시에는 평양의 적군 비행장이 습격을 받아 비행기 20대가 파괴되고 일본인 가옥 66채가 소실되었습니다. 雄基의 혁명민중들도 적들의 저유고 6곳과 군수품 창고를 파괴했습니다. 원산의 혁명민중들은 창고 3곳, 어선 92척, 저유고 2곳을 파괴하고 수백 호의 일본인 가옥을 불살랐습니다. 신의주의 혁명민중들은 무기를 가득 실은 화물차 8량과 제지공장 한 곳을 불살랐습니다. 이 와중에 제지공장의 불이 주변으로 번져 부근의 산들이 불탔으며, 혁명민중들은 압록강 철교에도 큰 손상을 입혔습니다.이상의 폭동 과정에서 한인 약 2천 명이 희생되고, 부상당하거나 체포된 사람도 1만 8천 여 명에 달했습니다. 물론 적들도 7백 여 명이 피살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도 한국 경내에서는 영용한 투쟁이 부단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들이 엄격하게 통제하는 바람에 한국 국내의 더욱 자세한 소식을 알기는 쉽지 않은 형편입니다.국외 각지에서도 한국 혁명지사들은 유혈투쟁을 전개하여 중국 항전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1937년 10월, 朝鮮義勇隊(후일 韓國光復軍과 합병)가 漢口에서 성립되었습니다. 성립 이래 5년 동안 조선의용대는 중국 항전에 직접 참가하여 수많은 전적을 세워 중국 인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1938년 여름에는 한인들로 조직된 유격대가 南口에서 중국유격대와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적 군용차량 10여 대를 파괴했습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重慶에서 성립되었습니다. 지난 해 7월 한국광복군은 조선의용대와 정식으로 합병을 이루어 한국 무장혁명부대의 통일이 완성되었습니다. 그간 한국광복군은 외부로부터의 지원이 여의치 않아 어려운 환경에 처하였지만, 대원들의 사기는 여전히 충천하여 기회만 주어진다면 엄청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1940년 9월, ‘僞滿洲國’ 長春에 교거하는 한인 기독교 영수 79명과 다수의 신도들이 한국 국내의 교우들과 반일폭동을 밀모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같은 해에는 華北에 주둔하고 있는 적 20사단에 끌려온 한인지원병 수백 명이 탈주하여 적에게 커다란 손실을 입혔습니다. 같은 해에는 또한 일본 北海島 · 兵庫縣 · 大阪府 · 京都府 · 神奈川縣 · 東京府 · 山口縣 · 福岡縣 · 富山縣 · 長崎縣 등지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455회의 파업과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폭동에 참가한 한인 노동자는 총 8만 4천 4백 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1942년에는 廣州에 주둔중인 적군에 끌려온 한인병사 수백 명이 대규모 무장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한인 무장유격대가 화북과 동북 각지에서 밤낮없이 적들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투를 벌였습니다.왜 이토록 많은 한인들이 장렬한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지 묻는다면, 왜 한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오직 하나 ‘조국광복’과 ‘자유독립’을 위해서입니다.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 한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한인들은 지금 ‘조국독립’이라는 유일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동맹국의 원조를 바라는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다. 동맹국이 승리해야만 한국독립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 믿기에, 한인들은 중국의 승리, 미국의 승리, 영국 · 소련과 기타 동맹국이 모두 승리하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동맹국이 반드시 승리하고 축심국이 패배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나라를 위해 남편을 잃은 과부, 나라를 위해 자식을 잃은 부모, 나라를 위해 부모를 잃은 고아, 옥에 갇힌 동지를 위해 한인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한인들이 혁명대업을 완수하기 위해 서로를 격려하며 분투할 때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계속 분투하라. 적과의 투쟁을 계속하라. 동맹국의 승리가 멀지 않았다. 동맹국이 승리하면 그들은 우리가 흘린 고귀한 피의 대가를 반드시 지불할 것이다’는 말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그렇습니다. 지금 한국 인민들은 동맹국에 커다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동맹국이 그들에게 다시 자유의 공기를 마실 기회를 가져다 줄 것으로 확신하고 있습니다. 동맹국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기에 한인들은 정신을 곧추세우고 용기백배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영용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런 때에 동맹국이 가령 한인들에게 ‘세계대전이 끝난 뒤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되 국제공동관리라는 과도기를 거치게 될 것이다’고 약속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한인들은 웃어야 할까요 · 울어야 할까요 · 그나마 동맹국의 은혜라 여기며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 아니면 원망해야 할까요 ·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눈이 침침하고 장이 끊어지는 듯하며 감정이 복받쳐 더 이상 글을 이을 수 없습니다.결론적으로, 어떤 관점에서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전후 한국은 반드시 독립을 이루어야 합니다. 한국이 반드시 동맹국과 똑같은 자유평등을 누려야만 동아세계에 영구한 평화가 구현될 수 있으며, 세계인류는 비로소 영원한 행복을 누려 평안하고 즐거운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귀보가 평소 정의와 공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본인의 짧은 소견이 능히 귀보를 통해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이는 한국을 위해서도 다행이며, 동아세계를 위해서도 다행이자 세계인류를 위해서도 다행이리라 생각됩니다. 평안하심을 빕니다.
아우 嚴大衛 배상.
5월 23일. (完)
· 重慶 『大公報』, 1943년 6월 12일.
· 天津 『大公報』, 1943년 6월 12일
현대역 : 정숭교
FRUS 1945.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Volume VI > 한국 미국의 대한정책 > 미국의 한국점령을 환영한다는 조소앙의 의견을 보고 - 주중대사(헐리)가 국무부 장관에게
제목 | 미국의 한국점령을 환영한다는 조소앙의 의견을 보고 - 주중대사(헐리)가 국무부 장관에게 |
문서번호 | 895.01/8-1445: Telegram |
발신자 | 헐리(Hurley) |
수신자 | 국무부 장관(the Secretary of State) |
발신일 | 1945.8.14 오후 4시. (1945년 08월 14일) |
수신일 | 8.15 오전 10시 10분 (1945년 08월 15일) |
895.01/8-1445: Telegram
주중대사(The Ambassador in China) (헐리, Hurley)가 국무부 장관(the Secretary of State)에게
중경(Chungking), 1945.8.14 오후 4시.
[접수 8.15 오전 10시 10분]
1356. “대한민국 임시정부(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외무장관” 조소앙(Tjo So-wang)씨가 8월 14일 본 대사관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일본을 패망시킨 미국의 공로를 치하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1) “임시정부”는 점령군, 특히 미국이 한국에 상륙하는 데 협력하고자 하며 (2) “임시정부”는 미국이 극동 전역에 산재한 일본군 내의 약 백만에 달하는 한국인들을 무장해제하고 재편성하는 것을 지원하고자 하고 (3) 한국인 혁명 지도자들은 한국 정치문제에 관해 발언권을 갖고자 한다는 것; 예를 들어 일본, 만주(Manchuria) 및 러시아에 있는 수백만 한국인들의 송환 문제, 한국 내의 공장 처분문제 등을 언급하였습니다. 그와의 대담을 통해 그가 한국 내에서 소련의 영향 및 조치들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습니다.
조소앙씨에게는 그의 입장을 국무부에 전하겠다고 알렸습니다.
국무부에 송부. 모스크바에 재송.
헐리(Hurley)
첫댓글
당시의 상황을 좀더 깊이 있게 분석할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