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언약의 참
성경 말씀: 시편 85편; 요한복음 18:33-38
요약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측면에서 참됩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참의 성경 개관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참은 존재론적이 아닌 언약적입니다. 참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언약의 삶은 기본적으로 또 궁극적으로 참으로 서사됩니다. 옛 언약은 참을 온전히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참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말해집니다. 예수님은 힘의 세상에 그분 생명으로 참을 보이십니다.
이루어지는 참
사람들은 막연하지만 직관적으로 참을 영원히 불변함으로 여깁니다. 변하는 것은 참일 수 없습니다. 참되다고 여겨진 어떤 사람이 변화된 특성을 보이면, 더 이상 참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참은 불변으로만 말해질 수 없습니다. 참의 내용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상 삶에서 사람들은 “참말”이라는 말로 참을 생각합니다. 발설된 말이 사실에 부합되는 경우, “참말”로 여겨집니다. 사실에 부합하는 말은 참말임으로, 참은 어떻든 말에 적용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늘 변함으로, 말은 표현되는 상황에 따라 참말일 수도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참을 직관적으로 영원히 불변으로 생각함과 참을 ‘참말’로 여김은 상반됩니다. 전자의 시각으로 참은 말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말은 사실을 표현하여야만 참말이지만, 사실은 늘 변하기 때문에 영원히 불변일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영원한 불변이나 사실은 참을 말하는데 잘못됩니다.
어떻든 참의 어려움은 철학에서 탐구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참의 다룸은 다른 출발점을 갖습니다. 성경의 기반은 세상에 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세상에 있음이 아닌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으로 참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짐의 측면에서 참됩니다. 성경에서 참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표현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으로, 그 시작은 어떻든 하나님의 말씀이 참됨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쓰진 것은 참되다고 말해져야 합니다. 사실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고 말하는 것은 이미 언약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 백성에게 주어지고, 그분 백성에게 참되게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거나, 그것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 백성에게 적용됩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됩니다. 그러므로 참은 언약의 통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약으로만 의미 있게 말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약속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우선성은 단지 언약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참은 하나님의 말씀에 설정되고, 세상에 있는 것으로 지적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포된 참이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참과 더불어 참됨입니다.
참은 하나님 말씀의 외적 내용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참인지 아닌지 평가되게 됩니다. 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참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즉 참은 하나님의 말씀에 외적 시각이 아닌 내적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참은 언약의 통념이고 시각입니다. 참의 시각은 하나님의 말씀이 읽어지면서 형성됩니다. 이 경우 참은 드러남의 구별됨을 보이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이루어짐은 세상에 있는 것 가운데 구별되게 드러납니다. 드러남으로 참은 구별됩니다.
참 생명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참 생명으로 서사합니다. 따라서 참은 예수님으로 드러나는 생명입니다. 성육신된 예수님의 생명은 세상에 참 빛입니다(요 1:4,9). 그것은 세상에 모든 사람에게 빛을 줍니다. 빛은 어두움에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이 육신이 된 성육신의 생명입니다. 그러나 세상 의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출생을 거쳐 그들에게 주어진 생명을 지닙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드러난 참을 말하려고 합니다. 물론 참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됩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의 참으로 말함은 여기저기 나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참을 알지니, 참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1-32)”; “나는 길이요 참이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5:1).”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의 재판은 힘의 빌라도에 의해 재판받는 참의 예수님을 부각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참에 대해 증언하러 세상에 오셨고 참에 속한 자는 모두 예수님의 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하십니다(요 18:37). 참의 예수님은 힘의 빌라도 앞에서 초연함을 보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참의 구별됨으로 부각함으로, 예수님을 힘의 대결로 서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고침이 단지 막강한 힘의 표현으로 보이면, 예수님의 서사는 힘의 대결 설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경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다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힘에 의한 참의 죽음으로 보아져야 합니다. 여기서 참의 죽음은 물론 참 생명의 죽음입니다. 참 생명의 죽음은 씨와 같은 죽음을 뜻합니다. 씨의 죽음은 소멸이 아닌 번식입니다. 그것은 추수를 향합니다.
성육신된 생명으로 참의 생명은 창조된 생명에 대조됩니다. 요한은 창조 이전 하나님과 함께한 말씀의 성육신된 생명으로 참을 말합니다. 성육신된 생명은 참이지만, 창조된 생명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창조된 세상에서 참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간접적으로 말합니다.
요한에게 참은 창조된 내용이 아닙니다. 예정된 내용입니다. 창조된 생명은 타락됩니다. 그러므로 창조된 생명은 힘의 지배 아래 있을 뿐이고, 참을 보일 수 없습니다. 성육신된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으로 드러난 참은 구원의 내용입니다. 구원은 힘으로부터 참으로 이루어집니다.
힘의 세상에 참의 예수님은 구원자로 보입니다. 구원이 참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힘에 의한 조건적 구출만 언급됩니다. 즉 예수님으로 구원은 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삶의 조건적 나아짐이 구원으로 혼동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구원은 구약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서사되는 점에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참으로 서사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도입합니다. 수명의 언어가 아닌 생명의 언어와 힘의 언어가 아닌 참의 언어를 도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함께를 참의 언어로 부각합니다.
함께의 생명
예수님의 생명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입니다. 성육신의 생명은 직접적으로 이 점을 보입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성육신으로 개시됨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을 참으로 전개합니다. 하나님과 함께는 언약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이 보이는 것은 참의 언약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함께를 힘으로 말하려 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함께는 하나님의 힘을 수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힘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힘의 하나님의 함께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참의 하나님의 함께를 보입니다. 예수님이 참으로 서사되는 한, 이 점은 불가피합니다. 즉 참의 예수님은 참의 언약으로 전개됩니다. 예수님으로 새 언약은 참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삶은 참의 삶으로 펼쳐집니다.
참의 언약 혹은 참의 하나님의 함께는 예수님의 이야기, 곧 복음입니다. 그것은 참을 반영하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 함께의 참을 드러내는 점에서 복음입니다. 구원의 좋은 소식은 참을 들려줍니다.
사람들은 단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좋은 것의 실현을 바랍니다. 따라서 힘에 의한 변화를 기대합니다. 나은 세상이 힘에 의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힘을 언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하나님 함께를 소식으로 알립니다. 그것은 참의 소식입니다. 그 소식은 힘에 의한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함께의 참 생명이 성육신으로 오심을 알립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을 알립니다.
참 생명은 세상을 지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그것은 죽음으로 번성할 것입니다. 생명으로 참은 씨와 같이 생명으로 번성합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세상의 변화가 아닌 참 생명의 번성을 위함입니다. 이렇게 성육신과 십자가는 같이 말해집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개인으로 의식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누리게 될 힘이 고려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생명은, 개인이 그의 태어난 생명을 지니기 때문에, 개인에게 무의미합니다. 그는 단지 그의 태어난 생명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힘을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에게 하나님과 함께는 힘으로 말해집니다.
그러나 참의 영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생명은 참으로 서사됩니다. 참의 영을 떠나 하나님의 함께는 참으로 말해질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의식은 개인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으로 보이는 것은 함께가 아닌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함께는 예수님으로 참으로 서사됨으로, 예수님으로 새 언약은 참의 언약입니다. 즉 예수님의 이야기는 참으로 증거됩니다. 참의 영에 의해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설교는 참의 영으로 참의 언약의 선포입니다. 참 생명의 파급을 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늘 변합니다.
세상의 변화는 힘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세상 삶은 힘으로 영위됩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하는
생명의 참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힘의 세상에 참으로 드러납니다.
수명의 세상에 생명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 표현되는 힘이 아닌,
아버지와 함께로 드러나는 참으로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