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비량 사역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바울은 자비량 목회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임을 우리에게 설명하기 위해 세가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전9:7)
순서대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먼저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즉, "자기 비용으로 군복무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병사들은 자기 나라를 지키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로 부터 생활비 일체- 의식주와 생필품, 의약품비등 기타 모든 것 포함 - 를 제공받으며 복무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일입니다.
혹시 예외 규정이 있을런지 모르나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고,특수한 경우에 해당될 것이며, 또한 임시적으로나 그렇지 영구적으로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포도를 재배하는 사람 역시 그렇습니다. 밭에다 포도나무 가지를 꽂아야 하고, 땅을 파고 거름을 주어야하고, 가지 치기를 해주어야 하고, 또 포도 송이를 종이로 싸주어야 하고, 소독도 해 주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왜 이런 번거로운 수고를 합니까?
체력 단련을 위해 그렇게 합니까? 시간이 남아서 소일거리로 합니까? 아닙니다.
좋은 포도를 맺게하여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을 즐기기 위해서 입니다.
3.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양떼를 기르는 것도 양의 젖과 고기를 먹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허구한 날 양떼를 몰고 다니는 수고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수고에는 그로 말미암아 얻게될 유익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신25:4의 말씀에서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말라.(고전9:9)>는 말씀을 인용하고, 모세오경에서 "성전의 일을 하는 자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어야 하고, 제단에서 섬기는 자는 제단에 바쳐진 것을 먹어야 한다>(고전9:13)는 말씀들을 인용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바울은 누구나 다 아는 이런 상식적인 말들을 하고 있을까요?
목회자에 대한 생활비 공급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이며, 마땅한 것이며, 정당한 것이며, 타당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오히려 <자비량 목회>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며, 마땅치 않은 일이며 타당하지 않은 것이라는 논리를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정신상태를 점검해 보아야할 것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바울은 자비량 사역을 했을까?
세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습니다.
1. 교회가 세워지기 전의 이방인들을 상대하는 것이므로,
2. 복음에 장애가 될까봐,
3.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 하기 위하여.
이 중 1항은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이므로 생략하고 제 2항과 제 3항에 대해서는 살펴보겠습니다.
2. 복음에 장애가 될까봐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자비량 전도의 이유를 이와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당연한)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 복음에 아무 장애 (ἐγκοπή )가 없게 하려> 함이라."(고전9:12)
그렇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로써 당당히 생활비를 요구할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장애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장애( ἐγκοπή:엥코페 >가 무엇일까요?
엥코페란 <베어버림> <단절> <장애>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비량 사역을 하지 않고, 만일 생활비를 받게 된다면, 복음 전하는 일이 <단절>될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고린도 서신을 잘 읽어보면 이런 구절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9:1)
"다른이 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됨을 주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고전9:2)
"나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 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후11:5)
"내가 아무 것도 아니나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 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고후12:11)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2)
왜 이렇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자신의 사도성을 주장하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는 그의 사도성을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하니"(고후10:10)
바울은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른 사도들 처럼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으로 부터 직접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만나본 적도 없고, 훈련을 받아본 경험도 없으며, 전도자로 파송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은 전도자 바울에게 있어서 커다란 핸디캡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났고(행9장),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훈련을 받긴 했습니다만(갈1:18), 그런 개인적인 체험만 가지고 공적으로 인정받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누가라는 동역자가 있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과의 회동했었다는 기록(행15장)을 남기긴 했습니다만 바울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는 오늘날의 우리들 처럼 바울이 인정을 받고 있진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로 말미암아 나타난 <표적>과 <기사>와 <계시>와 <수고>와 <고생>을 많이 언급하면서 자신의 사도성을 변증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의 자비량 사역의 이유, 혹은 불가피성을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보수를 요구하기 위해서는 그럴 만한 자격을 인정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누가 무자격자에게 일을 시키겠으며, 설사 일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된 보수를 주겠습니까?
일단 자격이 없는 사람은 공신력이 없기 때문에 고용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정기적인 보수를 받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핸디캡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다른 사도들, 예컨대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사도들은 그러한 자비량의 길을 선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로 택함을 받은 너무나 충분한 증거들을,또는 증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일은 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으며, 심지어 아내 까지 대동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물론 바울도 실력상으로는 다른 어느 사도들 못지 않게 자격이 풍부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인 스펙이 없었으므로 바울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어느 누군가가 바울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사도의 사명을 받은 증거>를 보이라고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바울은 난처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한 상황을 미리 대비하여 자비량 사역의 길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사명이기에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9:17)
바울이 자비량 사역을 하는 것은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자비량 사역을 소개하는 것은 혹시나 <생활비 달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고전9:15)
다른 사도들 처럼 자기에게도 생활비를 달라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는 자기가 갚아야할 빚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이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결 론>
바울의 경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복음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도권에서 확실하게 안수를 받고 소속된 교회를 위임받거나 선교지로 파송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가 싫으면 바울처럼 <자비량 사역>을 하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상한 눈초리도 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상급을 받을런지도 모릅니다.
수십년 전에 저한테서 복음을 받은 제 고향의 한 농부는 크게 은사를 받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전도자가 되셨습니다. 물론 무보수로 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으신 분이고, 어느 교단이나 교회로 부터 안수도 받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서 큰 상급을 받으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내가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받으려니와 "(고전9:17)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자기가 <자비량 사역>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하지 않은 사역자들을 비난하고, 조롱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교사 자격증도 없이 무료로 가정 교사를 하는 사람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해서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교사들을 향하여 <돈을 받고 일하는 나쁜 교사들>이라고 욕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쁜 교사들>이라고 욕하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국 교회를 허무는 일이요, 그 댓가는 자신이 받아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