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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직지 전국시낭송대회 지정시-수정 지정시 포함
■ 지정시 수정 공지
“직지 전국시낭송대회” 참가자 분들께 알립니다. 지정시 중 일부 수정된 작품이 있어서 변경된 첨부파일로 다시 올렸습니다. 아래 작품 중 파란색 글씨가 수정된 부분입니다.
예선 심사에서는 수정 내용을 미처 인지하진 못한 참가자들께 불이익이 없도록 수정 전후 지정시 낭송을 모두 인정하여 심사하겠습니다. 단, 본선에서는 수정된 내용으로 낭송함을 원칙으로 합니다. 원활한 진행이 되지 못하여, 혼란을 드린 점 매우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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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작품(9번, 13번, 20번, 33번. 36번)
9. 직지의 꿈
김 희 성
우리는 이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버려진 암자에 천리마를 탄 이가 찾아왔을 때
생의 기록과 환영하듯 감기던 울음
그 견고함이 또 하나의 열매가 되어
직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눈물로 밤을 견뎠습니다.
초록의 숨들로 큰 숲을 피우기 위해 모의하던 이들
손아귀에 깃든 탄생의 기쁨과
수많은 발자국이 직지를 기억해냈습니다.
숨이 되고 살이 되고
달게 여문 생이 되었던 나날들
완결을 이뤄내기 위한 시간들
꿈이 교차하던 밤은 실핏줄도 푸르렀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간절해졌습니다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상 밖에 잠시 내려둔 꿈을 기억하기까지
환고와 환영의 시간들이
직지를 빚어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직지가 기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건국하듯 함께한 떨림들이 마음속을 왕래하면
우리는 푸르러 직지의 한 생이 될 것입니다.
틈 사이에 드리운 숨 같은 말
우리는 서로의 문장을 열거하며
긴 마당을 만들어갔습니다.
밤을 자라게 하는 건
제 몸을 빛내는 유성들이라며
직지는 세상을 기록하는
한 끗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 두 번째 연 띄어쓰기 (오랜시간 ➜ 오랜 시간)
* 세 번째 연 조사(실핏줄로➜ 실핏줄도)
* 다섯 번째 연(틈 사이로➜ 틈 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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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직지 흥덕사(서인석)
* 네 번째 연 넷째 줄 (장엄함 ➜장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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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천년의 온도(임진순)
* 두 번째 연 여섯 째 줄 (남겨지는 ➜넘겨지는)
* 다섯 번째 연 첫째 줄 조사 첨부(반딧불이 ➜반딧불이를)
* 연가름 수정: 전체 총 7연으로 나뉨(아래 파란색 글씨 부분이 수정된 연가름)
작은 반딧불이
살아있는 빛이라 말하듯
빛의 한 벌을 직지라 부르고 있었다
맥박이 희미한 흥덕사에
살랑이는 금빛 나비 날아왔다.
당신의 온도가 시간을 건너고 있다.
작은 반딧불이를
살아있는 빛이라 말하듯
빛의 한 벌을 직지라 부르고 있었다.
맥박이 희미한 흥덕사에
살랑이는 금빛 나비 날아왔다
당신의 온도가 시간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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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직지의 편지(이미순)
* 세 번째 연 마지막 줄(담➜땀)
- 여러 사람의 땀으로 찍히는 한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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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흥덕사의 꽃, 직지(노영숙)
* 세 번째 연(치가운 ➜차가운)
-차가운 금속덩이에 생명을 부어
2021년 직지(直指)전국시낭송대회
- 지정시 50편 -
• 차례 •
1. 직지, 혼불 _임준빈 ∙ 1
2. 직지의 봄 _임준빈 ∙ 3
3. 직지(直指) _정미숙 ∙ 5
4. 직지, 귀혼(歸魂) _임준빈 ∙ 7
5. 직지, 그리움 _임준빈 ∙ 9
6. 직지, 낙엽의 말 _유세현 ∙ 11
7. 직지, 가을 소묘 _유세현 ∙ 13
8. 직지의 고장, 청주 _장병학 ∙ 15
9. 직지의 꿈 _김희성 ∙ 17
10. 직지, 가을 뜨락에서 _노동주 ∙ 19
* *
11. 직지(直指), 우리 가을에 만나요 _노동주 ∙ 21
12. 직지, 내 고향 하늘은 _양정순 ∙ 23
13. 직지 흥덕사 _서인석 ∙ 25
14. 직지, 그대 향한 고백 _안소현 ∙ 27
15. 직지(直指) 난초 앞에서 _노동주 ∙ 29
16. 직지의 울음 받아내며 _윤성해 ∙ 31
17. 오래된 숨 _이 강 ∙ 33
18. 꽃씨의 시간 _이정숙 ∙ 35
19. 직지, 있어야 할 곳은 _이지영 ∙ 37
20. 천년의 온도 _임진순 ∙ 39
* *
21. 나는 아직 기다린다 _전형주 ∙ 41
22. 직지, 자화상 _정기옥 ∙ 43
23. 할머니의 직지 _정순신 ∙ 45
24. 직지심체벚나무 _조영행 ∙ 47
25. 직지(直指) 그대 향한 사모 _임준빈 ∙ 49
26. 꺼지지 않는 임의 등불입니다 _성낙수 ∙ 51
27. 직지, 눈 오는 날에 _정기옥 ∙ 52
28. 직지, 망향가(望鄕歌) _임준빈 ∙ 54
29. 직지(直指), 어머니 _노동주 ∙ 56
30. 어느 가을날에 _김창영 ∙ 58
* *
31. 직지, 길을 묻는다 _한이나 ∙ 60
32. 직지 _이서희 ∙ 62
33. 직지의 편지 _이미순 ∙ 64
34. 쏘가리, 직지심경 _김도연 ∙ 65
35. 직지, 그날이 올까 봐 _안소현 ∙ 66
36. 흥덕사의 꽃, 직지 _노영숙 ∙ 68
37. 직지(直指), 너에게 부르는 노래 _오만환 ∙ 70
38. 직지 탄생 설화 _김수진 ∙ 72
39. 밤의 탁본 _김영욱 ∙ 74
40. 직지의 기억 _강수화 ∙ 76
* *
41. 직지(直指), 자유에 대하여 _오만환 ∙ 78
42.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_성낙수 ∙ 80
43. 직지에 빠지다 _김동인 ∙ 82
44. 직지의 집 _김은혜 ∙ 84
45. 직지 쇠를 품다 _윤신애 ∙ 85
46. 마음의 조판 _김강인 ∙ 86
47. 직지심체요절, 그 부리로 아침을 열다 _정정순 ∙ 87
48. 쇳물의 증언 _최병규 ∙ 89
49. 보라, 이것이 직지니라 _최효림 ∙ 90
50. 흥덕사 추녀 밑에 풍경이 날아갔다 _임준빈 ∙ 92
1. 직지, 혼불
임 준 빈
달빛 흐르다 멎은 듯
감물 찬 당신의 고요는
떠나간 그 자리가 못내 아쉬워
흐느낍니다.
들리시나요
고요를 흔들다 못해
자취를 감춘
흥덕사 풍경소리는
바람 몰아쳐도
침묵으로 일관이시더니
아예 자태를 숨겼습니다.
그 숨결 간 데 없고
지금은 거센 솔바람이 뒤덮다가
봄을 맞은 산 목련꽃 향기가
당신의 체취로 휘돌다 갑니다.
향기로움도 사치스러운
당신의 겸손은 뽐냄도 명성도 이미 접어
금속활자 속에 배어 있는 아릿한 혼이
막역한 활자장 곤장 속에 번진
매운 매처럼 아립니다.
혼불이시여!
민족애로 불타는 고국이시여!
당신은 지금
이름 없는 이름으로
어디에 계신답니까
프랑스 하늘에
흐린 날 먹구름으로 일렁이다
본향의 향수로 청아함 떨치신 그리움들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유리창을 수없이 두드렸을
울분과 분노
천둥처럼 들려옵니다.
천 번을 그리고 만 번을
불러도 불러 봐도
응답 없는 말 없는 자의 말
눈감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생각나는
당신은 당신은
기필코 꺼지지 않는
혼의 등불입니다.
2. 직지의 봄
임 준 빈
내 본향엔 지금쯤
진달래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고
무심천 갯버들은 가슴 활짝 열어 봄을 알리고
미소하는 입술마다 직지꽃 피어나겠다.
물장구치는 버들치, 송사리, 붕어 떼들
키득키득 몸짓 나래 여울지겠다
머지않아 목련꽃 피고
개나리 벚꽃 영산홍 철쭉 줄지어 꽃잔치 벌어지겠다.
가고 싶은 고향이여!
그리운 내 고국이여!
실향한 이 슬픈 운명 앞에
환한 봄날이 뜨면
그날이 그리워라
미치도록 그리워라.
내 살던 터엔
소나무 향기 내리붓고 봄기운 감돌아
새로운 축제도 열리겠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리운 사람들은 그리운 사람끼리
만나면 등이라도 치고 지고
두 어깨를 부비며
그리운 사랑 노래 울려 퍼지겠지.
없는 나를 앉혀놓고
마음껏 안아보겠지 만져보겠지
그러면 나는 그 품에 안겨
조용히 눈 감을 테요.
생각만 해도 눈가에
영롱한 이슬빛이 뜨는 내 고국
밤이 찾아오면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문 밖으로
별들이 마구 쏟아져 내리고
밤이 익을 무렵이면
긴 목 내밀어 비밀한 향수에 젖어
어느새 내 눈가엔
짙푸른 별꽃이 핀다.
맑게 씻은 혼이
쓸쓸한 별이 되는 무심한 밤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까마득한 별들이 스르르 와 박힌다.
3. 직지(直指)
정 미 숙
무심천 나루터에 서면
아직도 아련히 들려오는
선인들의 노래
직지 숨결 담아
살랑이듯 바람이 분다.
구중궁궐 마다하고
민초와 생을 나눈 선불교 사상
세상 뜰에 번져나갔네.
무심의 물결
풀섬 지었다 허무는 실개천의 사랑
인고의 세월 속에
사람의 마음 바로 보라는 직지
심연의 늪은 깊어갔네.
작금, 시류에 떠밀려
슴슴한 강의 뿌리는 없고
바다에 이를 희망의 닻은 내렸는가!
표류하는
인류 최고의 금속활자본
어떻게 건져올까?
하루를 아프게 지우는
저 설움의 노을빛이여
그대 저무는 하루하루는
이미 천년이 되었건만
피고 또 져도
그날은 오지 않네.
하소연에 뿜은 연가
지는 노을에 다시 지피지만
시든 꽃은 일어설 줄 모르네.
밤이 오면 별은 다시 뜨듯이
아득한 희망 하나
뜨거운 눈시울로 별빛에 새기는 사연
나의 고국(古國)은 알고 있겠지.
돌틈에 꽃씨를 심는
노심초사, 이 절박의 심정을.
4. 직지, 귀혼(歸魂)
임 준 빈
별이 별을 쓰다듬는 밤
야윈 달은 길을 나서지 못했으리라
스스로의 그림자를 피워선 지고
차마 잠재우지 못했으리라
아스라한 역사, 슬픈 계곡을 열고
눈물 같은 강 하나 내어 유유히 흘렀으리
으깬 천년의 벽 가시덤불로 둘러쳤으리
범람의 별들은 새벽을 찢는 닭울음처럼
깨치는 그 날을 연민했으리라
젖은 상념들
그리움의 숲에 묻어놓고
천륜을 기다리는 나무가 되었으리니
아득한 고국, 하루가 천년
아린 생강처럼 보고 싶을 때마다
밤하늘에 심은 별들이
속절없는 나무 한 그루로 자라
울울창창 아우성쳤으리라
죽음보다 더 그리워한 사람들
달빛 바라보며 외치던 숨 없는 함성들
여기인들 그곳이 없었겠는가?
거기인들 이곳이 없었겠는가!
지금은 까만 밤
먼 하늘 프랑스 국립도서관 유리창을 깨뜨리며
내리붓는 그리움 흥건한 그 달빛
서로를 바라보는 애절한 눈동자엔
귀혼의 꿈, 별처럼 영롱하다
고국이여!
침묵의 민족이여!
나 여기 한 줌의 재로 시든 별 되어
직지의 혼 밝히는 야속한 밤에
혼불은 정처 없이 타오르고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이르노니
우리 서로 눈물 같이 그리울 땐
하나밖에 없는
저 달을 바라보기로 하자
풋사랑처럼 맺은 언약일지언정
그대여 멈추지 마오 굽히지 마오
가령, 어느 하늘 비탈 아래
별이 별을 만나 부서질지라도
달이 달을 만나 눈부실지라도.
5. 직지, 그리움
임 준 빈
천 개의 그리움을
천 개의 별에 꿰었다가
어느 눈 오는 날 터뜨리어
한 올 한 올 눈송이로 오실 당신.
별을 헤던 수많은 순간들
이제 천 년이 흘렀습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꿈결처럼
당신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그대 쏟아지며 오시는 길은
그리 아름답고 황홀하지 않다지만
우리의 상봉은 눈물바다일 것입니다.
믿습니다 뜻깊은 그날을
무심히 흐르는 강물에 벚꽃 지는 꽃비로 오실 줄을
몸을 던지시며 조국의 품에 입술을 맞출
눈물에 젖은 그 흐느낌의 절규를 압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걷던 발걸음을 멈추며
환호성을 지르겠지요.
당신이 오시는 그 길가엔
축복의 꽃향기 묻은 꽃잎 같은 사랑과
간절했던 소망의 성취로 감격하겠죠
좋아 뒹굴겠지요.
당신은 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쁨의 눈물을 쏟으며
우러러 기다림이 터진 열매의 향기
본향엔 꽃잔치가 되겠지요.
기다림의 과정은 지루하고 슬퍼도
결과는 행복할 거외다
장미가 안개꽃에 가려져 있어야 그윽하듯이
당신은 우리의 기다림과 보고픔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간절한 부름 앞에 놓일 때마다
별이 되신 그대
당신이 없는 그 하늘가 별빛 속에 묻은
의로운 민족의 촉수여.
오늘은 부활하는 희망입니다.
6. 직지, 낙엽의 말
유 세 현
한때는
봄빛 아롱지는 연둣빛 입술을 모으며
세상을 다 품을 듯한 미소였다
햇볕 들이치고
비바람 몰아치고
뇌우마저 온몸으로 맞이해야 할 즈음
살을 에는 상처도 감내해야만 했다
나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인생의 문고리를 힘껏 움켜쥐고 살아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그리고 이겨내야 한다고.”
여름밤 별들을 헤며
소년의 눈물은 의지로 굳어져 갔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함을 그 별에게서 배웠다
벌레 먹는 잎새로 삶을 연명하듯 숙명처럼 살았어도
누군가를 분명 먹여 살린 훈장이었기에
이 아픔도 흐뭇한 행복이리라
푸르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
더 위로 더 옆으로 드넓어지는 상생의 숲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내 생명의 근원 뿌리와 대화를 한다
바라봐 주지 않아도 좁고 어두운
고통속에서도
묵묵히 내게 주어진 길을 걸었던 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바닥으로 떨어져 썩어 본향으로 돌아가는
향기로운 죽음 앞에
나는 언제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직지(直指)
너를 한 장의 낙엽이라고 하자
그대도 언젠가는
뿌리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왔다가는 여정이라면
낙엽처럼 직지처럼
소년에게 의지를 주는 아름다운 향기를 남겨봄이 어떠한가
나의 소박한 무덤은
백운화상의 혼이 깃든 흥덕사지 뒤뜰이다
오늘도 쌓여 돌아갈 채비를 한다.
7. 직지, 가을 소묘
유 세 현
간절히 기다리던 임이시여!
하염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당신을 맞이합니다
당신만큼 소중한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날 괴물 같은 기후와 몰염치한 장마를
용기 있고 지혜롭게 잘 견뎌준 당신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만큼 참신한 계절이 왔습니다
신이 주신 선물처럼 풍성한 결실을 안고
한가득 희망을 싣고 왔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도도했던 벼 이삭의 고개 숙인 겸손과
바람 타고 노니는 코스모스 분홍빛 웃음과
누이 닮은 연분홍 봉숭아 꽃물을 들이며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사랑과 더 이상의 미움과 질투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봉숭아 꽃씨를 터뜨리고
마음이 가난했던 사람들은 높고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은 유유히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허황한 꿈을 좇는 사람들은 자연의 지혜를 나누며
코스모스 꽃잎으로 수줍게 흔들어 보입니다
반복되는 인생길에서 오늘 또 다른 당신을 안아봅니다
그대는 그런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고 맑고 푸르러 다 안아 아우르는
손안에 가진 것 없다 하여도 가득 풍성한
나의 마음은 부자입니다
그대여! 저 넓고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보세요
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그대 마음의 사립문을
활짝 열어놓으세요
그대 마음의 계곡에 종달샘 맑은 물이 흐르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가벼이 씻어 헹구는 햇살도
부러운 당신의 가을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흥덕사 풍경소리 맑게 퍼지면
옛 고려의 스님들은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금속활자에 알알이 새긴 글자 글자들이
애민의 혼이 깃든 거푸집의 사랑 안에서 잉태한
어느 장인의 땀방울로 맺어진 결정체임을
천년이 흘러도 알게 합니다
어디 무엇인들 눈물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기나긴 기다림이 없는 게 또 있겠습니까
가을, 저 알곡의 열매들
모진 천둥과 비바람과 싸워 이룬 훈장입니다
부디 넓어지소서! 깊어지소서!
나의 조국이여 민족이여!
우리 조상의 자랑스러운 얼과 혼이 깃든 직지여!
8. 직지의 고장, 청주
장 병 학
솔향기 뿜어내는 흥덕사지
여운 따라 굽이치는 산 너울
민족의 혼 불사른 백운화상의 얼
장인(匠人)의 피땀 빚어낸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금자탑.
사람의 마음 바로 보라는
부처님 뜻 깨닫게 하는 직지
게송(偈頌)에 젖은 연빛 자비심
은은한 꽃향기만이 남실남실.
붙박이별 바라보며 밤을 지새우며
심오한 고뇌 속에 쇠붙이 녹여 혼신 다한
기록문화의 도시 직지의 고장, 청주
문화창조의 뿌리 직지의 본향, 청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올이 등재된
금빛 직지 꽃피운 찬란한 직지꽃
지구촌 종말이 오는 그날이 온다 해도
직지꽃 향기만은 화알활 불타오르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
그리움 넘치도록 훌쩍이는
‘직지심체요절’형제 중 하권
직지 상권은 어디메쯤 잠자고 있을까?
부름에 화답 없는 통한의 노래여.
심오한 선(禪)의 요체 깨달아
한아름씩 뿜어내는 직지의 혼
깨치고 일깨우며 눈물로 손짓하는
남북한 민족 화합의 직지 찾기 운동
설운의 봇물 터지듯 내리 붓는다.
고고하게 틀어 앉은 고인쇄박물관
불심으로 거듭나 새롭게 복원 된
고려의 옛터 흥덕사지 금당
정성어린 직지풍경은 간 곳 없고
고려의 금속활자 영혼만이 휘영청
애잔한 직지물결도 떠나질 못하네.
마알간 서편 하늘가 해질녘,
올곧은 삶 줄줄이 붓질하며
직지마음에 녹아내린 무심천의 으악새들
비움의 나래 펴듯 출렁이는 은물결
노을빛 무심(無心)만이 깊어만 가는구나.
9. 직지의 꿈
김 희 성
우리는 이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버려진 암자에 천리마를 탄 이가 찾아왔을 때
생의 기록과 환영하듯 감기던 울음
그 견고함이 또 하나의 열매가 되어
직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눈물로 밤을 견뎠습니다.
초록의 숨들로 큰 숲을 피우기 위해 모의하던 이들
손아귀에 깃든 탄생의 기쁨과
수많은 발자국이 직지를 기억해냈습니다.
숨이 되고 살이 되고
달게 여문 생이 되었던 나날들
완결을 이뤄내기 위한 시간들
꿈이 교차하던 밤은 실핏줄도 푸르렀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간절해졌습니다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상 밖에 잠시 내려둔 꿈을 기억하기까지
환고와 환영의 시간들이
직지를 빚어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직지가 기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건국하듯 함께한 떨림들이 마음속을 왕래하면
우리는 푸르러 직지의 한 생이 될 것입니다.
틈 사이에 드리운 숨 같은 말
우리는 서로의 문장을 열거하며
긴 마당을 만들어갔습니다.
밤을 자라게 하는 건
제 몸을 빛내는 유성들이라며
직지는 세상을 기록하는
한 끗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10. 직지, 가을 뜨락에서
노 동 주
풀섶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는
이 가슴 애타도록 그대의 음성입니다.
마치 그대 향한 이 마음
사랑의 이슬을 머금고
촉촉이 적셔오는 그대의 입술처럼
뜨겁습니다.
사랑은 왜 이토록 가슴이 저린지요
참을 길 없어
그대 닮은 단풍잎 한 장 입에 물었습니다.
산자락 짊어진 노을은
서녘 하늘로 번지고
그대 향한 그리움은 멈출 줄 모릅니다.
저기 불타오름을 보세요.
참 야속한 가을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렵니다
저 늦은 가을이 있었기에 그나마
내 사랑이 그대 안에서 잠들 수 있었으니까요
물들 수 있었으니까요.
사랑하는 그대 앞에서
들국화 꽃잎이
이젠 추운지 고갤 떨굽니다.
흥덕사지 뒤란에 번지는
단풍잎들은 어쩌면 그대 숨결 닮았습니까
타다타다 지치면
바닥에 뒹굽니다.
마치 그대가 이곳 본향이 그리워
도서관 뜨락에 애절한 마음만 나온 채 서성이다
눈시울 적신 그날처럼.
저 낙엽이 지면
겨울 한숨 침묵으로 저몄다
봄이면 연둣빛 미소를 자아내는
잎새들, 환생의 계절을 건너가며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그대의 몸짓스런 또 다른 봄이 찾아오겠지요.
무심천변 하늘거리는 벚꽃나무엔
그대 사랑
하롱하롱 꽃피우겠지요.
오늘따라
그대 품이 죽음처럼 그립습니다.
11. 직지(直指), 우리 가을에 만나요
노 동 주
하늘은 높고
바람은 정겹습니다.
하늘길 바라보면
그대 닮은 별이 반기고
바람결 따라가면
그대 발자국 있을테니까요.
예 놀던 무심천엔
붕어떼 버들치 더욱 텀벙이고
갈댓잎이 서걱서걱 가을을 붙들고 있겠지요.
그 마음 그리워 그리워서
묶여있는 이 몸, 마음만 탈출하여
국립도서관 벽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그쪽도 가을이지요?
마음 따라 이곳도 가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계절도 닮아가는지요.
가을은 참으로 정겹습니다.
우리를 멍들게 하였고
만남의 꿈마저 흔들어놓았던
여름을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언젠간 오겠지요 우리의 그 날이
만나면 반가워 온몸 으깨며 적실
눈물 젖은 해후의 그 순간이.
머지않아 하얀 눈이 내릴 것입니다.
들국화꽃잎에게 다가갔습니다.
고국에 매혹의 향기 배어 나오는 들국화
그 꽃송이 속으로 그리움 묻고 흐느꼈습니다
또한 다짐했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견딜 수 있다고.
그날이 꼭 올 거라고.
찬 이슬 마시며 견디는 의지의 꿈
꽃잎을 기꺼이 피워 올리는 당신이 희망
철당간에서 다진 무심의 게송
백운화상의 가슴으로 울다 멎은 흥덕사지 풍경
그대 혼 살아 있음에
그 사랑 젖어 있음에
눈 감아도 우리는 언제나 또렷했습니다.
아리따운 고국(古國)이여!
향기로운 직지(直指)여!
12. 직지, 내 고향 하늘은
양 정 순
가을입니다 어머니!
지금부터 나는, 모국(母國)이 불러주는
늦가을의 향내음에 취하여 화두부터
어머니의 가슴에 포개어 외쳐봅니다.
따뜻했던 모국의 어머니
지금은 기억조차 져버린
그 아득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누군지도 모를 손에 이끌려 낯선 땅에 왔습니다.
아마도 저는 이쯤 가을의 문턱에서
들국화 꽃잎도 찬 서리에 마르고
늦가을 비가 혼을 덮는 을씨년스런 가을이었겠지요.
흥덕사 뒤뜰엔 솔잎 향기 맵게 내리고
감나무엔 홍시가 수줍은 묘덕의 미소로 열리는 뜨락
풍경은 가는 바람에도 염치없이 울어대고
배고팠던 까치가 모처럼 달콤한 포만에 빠지는
고향엔 가을 사랑이겠지요.
그뿐이겠습니까
무심천 갈댓잎은 하얀 꽃잎이 포말로 구르고
희게 희게 무심의 미소 짓던 그날이 그립지만
지금은 먼 산이 되어 버린 아픔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눈물을 꺼내
그리움의 붓에 적셔 가을 편지를 씁니다.
어느 시인은 그러더군요
시를 읽다가 시를 짓는다고
저는 고향을 그리워하다 보고픔의 먹물을 적셔
눈물 편지를 씁니다.
언젠가 돌아올 그 날이 오겠지만
이 현란한 가을의 정취를 스스로 안으며
노오란 은행잎을 가슴에 깔았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에도
석양빛에 물드는 가을 들장미가
봄이 그리운 사랑의 전령처럼
슬프게 떨고 있습니다.
하늘에 퍼져가는 저 먹구름도 푸른빛이 그리워
청운(靑雲)의 옷으로 갈아입는데
세상은 왜 이리 아픕니까
뒹구는 가을 낙엽도 왜 그리 슬퍼 보입니까
나의 숨겨둔 희망은
여지없이 가을녘을 물들이는 노을처럼
맑은 사슴의 눈빛으로
그쪽 향해 다가갈 것입니다.
기다림이 희망입니다.
13. 직지 흥덕사
서 인 석
고요한 산사의 풍경 소리 귓전에 들려온다.
흥덕사 산자락을 깨우듯
다시 태어난 직지심체요절이여
늦은 밤 호롱불 불 밝히고
빠알간 숯덩이에 금속활자 꽃이 피니
새로운 활자가 화사하게 피어나듯
청주 흥덕사에 꽃이 아름드리 피었구나
뚝딱뚝딱 나무망치 두드리는 소리
쇳물 붓는 소리
활자 다듬기 소리
조판 위에 하나하나 새겨진 너의 모습이
무심천 물속에서 아이들 첨벙대는 소리처럼
청아하고 아름답게 들려온다
아 고려 말 고려인들이여
풀잎 위 발자국 새기며 한 걸음 한 걸음 왔는가
양병산 붉은 너울이 가슴으로 밀려와
온 산의 울림을 주는 장엄한 종소리처럼
온 세상에 울려 퍼져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되었구나
침략 받고 불타고 인고로 틔운 처절한 잎사귀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잎이 돋고
청산을 돌고 돌아서
청주 흥덕사 금속활자본이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되어
물 좋고 산 좋은 곳 청주 흥덕사 자랑이니
한밭들에 내려앉아 문명의 목적을 향유하듯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되었구나
14. 직지, 그대 향한 고백
안 소 현
천상에 걸린 초승달마저
그리움의 살이 돋아 커져만 가는데
그토록 눈부신데
심연의 깊은 곳
오장의 뿌리 끝에서 밀어올리는
그대 향한 몸부림인데
한 번도 눈길 주지 않는
그대는 누구신가요
꿈속에서나 당신을 만져보기 위해
입 맞추기 위해
밤새도록 식은땀에 범벅이 된 지도 오래되었건만
140억 개의 신경세포를 마비시켜
이젠 몸져누워야만 하는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
야속한 님이시여!
속절없이 속절없이 세월만 가고
흔들리는 나뭇가지 뒤돌아보지 않는 새처럼
훌쩍 떠나간 지 어언 백여년.
그런 당신을 간절히 기다리다
쏟아낸 나의 눈물은
강이랄까 바다랄까.
흥덕사지 빈들에 앉아
솔밭 사이 백운화상 혼으로 울어대는 산새 소리
철당간에 다진 게송의 말씀
무심천에 씻은 그 마음 모아
무릎 꿇어 기도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해후의 그 날까지
그러면 나는 그대에게
노을이 타는 저녁
잦은 별들도 모두 숨을 죽인 젖은 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눈물 꽃 우거진
사랑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15. 직지(直指) 난초 앞에서
노 동 주
달이 뜨면
청초한 잎새를 오므린다.
수줍은 새악시야.
지난날들에 내가 사랑한
천년의 그리움은 그냥 두기로 하자
별이 무성하게 피어오르면
그 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끝내 별들 속에 갇혀 숨어버리고 싶은 순정.
사랑한다는 것은 단풍처럼 물이 드는 일
그립다는 것은
못 견디어 죽고 싶다는 몸부림이다.
나 여기 수천 번을
아니아니 천년을
천 번도 더 고꾸라졌다 살아났다.
고국(古國)이란 큰 별이
밤이면 속절없이 피어오른다.
만질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어 함부로 번져오는
내 마음속의 불화살
이곳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처음
짝사랑이란 시집을 꺼내 읽어보았네.
내 가슴 안에 살고 있는
찢어질 듯 보고픔이 그대 향한 짝사랑이었다.
내가 지은 시집을 내가 꺼내 읽은 셈
고국이란 그 사내는
한 번도 만남을 허락한 적이 없었던
냉랭한 사람
참 야속했다
더 이상 그 인연이 아니길 기도했다.
기꺼이
그날이 온다면 나는 이 고통과 설움이
생애 전부여도 행복하다.
달밤에 괸 저 난초꽃이 오늘 밤은
정령 아름다워라.
네 푸르름 고와 모둔 청초한 잎새여
내 꿈속에서 마음껏 그려냈던
고요히 흐르는 본향 땅 무심의 언덕에
고슬고슬 피어나는 직지꽃 같다.
16. 직지의 울음 받아내며
윤 성 해
이름만 들어도 뿌듯한 금속활자본 직지
불멸의 이름을 얻고도
이국땅에서 우는
애절한 울음을 받아내려고
온종일 주자소에 머무릅니다.
두께와 크기에 맞게 글자본을 양각하고
판형자본 붙인 어미자에
주물토를 채웁니다.
밀랍을 녹여내고 쇳물이 굳으면
가지 쇠에 달린
활자를 떼어내어 배열하여
조판의 수평을 잡아 놓고
유연먹을 골고루 칠하고
한지에 고스란히 받아냅니다.
내 가슴 조여오는 울음소리 잦아집니다
지금 감옥 같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위풍당당히 걸어나오는 직지의 울림이
행간을 뚫고 나와 나를 사로잡습니다.
마냥 직지에 매료되어
주자소에서 보내는 이 작은 노력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빗장을 푸는
마침맞은 열쇠라고 믿고
직지 반환의 길에 동참하렵니다.
*주자소- 활자의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
*어미자- 한지에 글을 써서 나무에 새긴 완성된 글자
*판형자본-한지로 글을 써서 나무판에 붙인 글자
*유연먹-기름먹
17. 오래된 숨
이 강
손끝으로
툭 튀어나온 글자를 쓰다듬자
오래된 숨을 토해내요
나는 안녕, 하고 웃어요
먼지가 폴폴 날리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책꽂이 구석에 숨어 있다가
퀴퀴한 책 내음에 푹 빠져 일하던
한 사서의 손에 이끌려 세상으로 나왔대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곳에서
터질 듯 쪼그려 있었대요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고향 사람이 말을 걸었대요
나는 헤아려보아요
먹이 묻은 자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스쳤는지
손끝에 간신히 잡히는 금속활자 하나가
오래된 숨을 뱉어내요
나는 그 숨을 따라 거닐어요.
한 번 들이쉬면 글자들이 옷을 입고
글자들이 춤을 춰요
흥겨운 춤사위 속에 온 우주가 스며들어요
세상의 이야기를 가득 담는 그릇이 되어요
반짝이는 별과 굴러가는 빛
흘러가는 물
푸른 산과 작은 사람의 이야기가
종이 위에 새겨져요
우주의 오묘한 맛이 눈가에 아른거려요
훅,
오랫동안 쌓였던 먼지를 걷어내고
직지를 살펴보아요
뿌연 악(惡)의 기운을 털어내고 사람의 마음을 열어요
이제 미래의 숨을 쉬어요
선한 숨을 쉬어요.
18. 꽃씨의 시간
이 정 숙
도가니 속 꽃불은
무심천 녹일 봄소식이었을 거야
너의 옹알이 아지랑이 속 떠돌고
보춘화 향기 날아들 무렵
구리와 주석
합방 이루노라 만든 열기
흥덕사지에 깔렸을거야.
어느 구석자리 각자장 손길
조각칼 마술로 매끈한 글자 치켜들면
밀랍틀 만드는 금속활자장 시선 번득거렸을거야
암수의 틀 짜 맞추는 주조장 눈엔
불꽃 피워낼 순간 희붐하게 밝아 왔겠지.
장인의 혼 오롯이 녹아든 쇳물가지
쟁쟁 고려 땅에 울렸을 거야
모래 속 뜨거운 꽃 고개 내밀 때면
천년 먹여 살릴 민족 정기에
데지 않게 조심해야 해
봐, 봐
당간지주 당찬 기운 흥덕사 되살리고 있지
고이 간직된 치미
기와지붕 높이 걸리는 건
꽃 향기 퍼뜨리란 신호잖아
무심천 따라 회귀할거야, 직지
장인 본향 잊힐 리 없어
꽃숭어리 목 길게 빼고 엄마 소식 기다리는데
모래 본능 필연의 기억
되살려 내고 말거야.
*각자장-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의 제작기능을 가진 장인
*주조장-활자를 주조하는 장인
*치미-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
19. 직지, 있어야 할 곳은
이 지 영
흥덕사
금방이라도 매케한 화약내가 일 듯
오랫동안 비워진 주인 잃은 한 자리
사방이 어지러운 공기로 자욱한 때
뿌연 시야 사이로
민족의 유산 하나 멀어져가고
낯선 이국의 먼지와 어둠에 갇혀
숨이 멎어버린 정신의 주춧돌.
600여년의 세월
온몸으로 격어 낸 우리의 시간을 뒤로
고매한 여인의 손에서
다시 깨어난 정심이여
직지의 티끌은
생경한 시간에 쌓인 먼지가 아니요
직지의 손때는
온기 없는 호기심의 손길이 아니다.
이제 밝게 걷힌 시야 사이로
비로소 품어야 할 잃어버린 깨달음.
비로소 빛을 발할 있어야 할 자리
후손을 향한 고귀한 말씀
그리운 혼과 낯익은 흙의 내음을 따라
이제 그만
순풍에 환영의 닻을 내리길.
20. 천년의 온도
임 진 순
누가 알까
시간을 건너는 온도를
하권만 남겨진 책 하나 있다
장과 장 사이를 펼치는 순간
오랜 시간 감았던 눈 뜨듯
빛으로 팽창되고 있었다.
빛이란 긴 시간 어둠을 뚫고 오는 것이어서
넘겨지는 페이지마다
최초의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고려의 체온이었다
아비는 늘 폭염속 장작을 지폈다
천이백도 이상 달궈지는 불 앞을 지켜야했다
몸속 남아 있는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휘어진 등이 바삭바삭 말라가고 있었다
당신 몸에서 빠져나간 수분으로
쇳물을 만드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감당해야 하는 일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떨어지는 쇳물을
겨울 햇살 떨어지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 자씩 살아나는 한지의 심장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당신의 심장에도 혈이 돌았을까
작은 반딧불이를
살아있는 빛이라 말하듯
빛의 한 벌을 직지라 부르고 있었다
맥박이 희미한 흥덕사에
살랑이는 금빛 나비 날아왔다
당신의 온도가 시간을 건너고 있다.
21. 나는 아직 기다린다
전 형 주
먼 여행 끝에 정착한 곳이지만
이곳은 내 고향이 아니다.
한때는 콜랭드 플랑시의 집에
또 한때는 중국의 낡은 문서들 틈에
내 존재를 잊고 조용히 묻혀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지만
익숙한 얼굴은 찾아볼 수 없다.
인자한 표정 진지한 눈빛으로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마주보던
청주시 흥덕사의 스님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얼굴들
아주 오랜 시간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고향의 산과 들이 그립다
내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제 나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여러 사람들과 눈을 맞대고 인사한다.
그러나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나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그러나 누구도 헤아리지 않는다
나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그러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돌아가려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음을
나는 아직 기다린다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조국으로 완전히 돌아갈 그 날을.
22. 직지, 자화상
정 기 옥
숲에서 홀로 서 있는 나무
눕기도 하고 그늘에 젖어
별들과 햇살에 몸을 맡겨
함께 울창해야 하건만
그렇지 않아 외롭습니다.
이국의 밤은 깊어가고
별들의 재롱도 꺼져가는데
달빛마저 등진 처사
서러워 서러워 우옵니다.
바다를 외로이 지키는 등대
먼바다의 무인도처럼
홀로 정겹습니다.
본향 땅, 봄이 오면
꽃 무리 지던 꽃 섶에
두고 온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립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끼리
그리운 사람은 그리운 사람끼리
성그는 밤하늘
고국이 그리워도 별처럼 멀고
무심천은 보이지 않아도
항시 마음 안에 출렁이듯
제 얼굴에 비친 제 모습이
바람 없이 울어대는 풍경인 양
쓸쓸합니다.
선생님 없는 교실을 혼자 지키며
어릴 적, 노을에 눈시울 적시던
볼이 고운 가녀린 소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나는 해질녘 측은 듯이 앉아
그쪽 향해, 턱 괸
직지 닮은 아이입니다.
마음 둘 곳 없어
수 없이 별을 헤던
천년의 긴 세월
흔들림만큼 뿌리를 뻗는 나무들처럼
그날을 향한 그리움만큼
질박의 소망은 커져만 갑니다.
직지, 나는
하나님과 부처님이 기도로 태어난 감람나무
뿌리 끝에서 영혼까지 타버린
나목입니다.
23. 할머니의 직지
정 순 신
할머니
지난 여름
흥덕사에 다녀온 것이
할머니를 배운 마지막 여행이 되었어요.
할머닌 활자를 만드는 것이
꼭 음식 만드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사람 위하는 건 다 마찬가지라고.
아비자와 어미자가 거푸집에서
글자를 낳는 것이
사람 사는 일과 다름없다 하셨지요
사람이 자식을 맹그는 건
이 땅에 자기를 냉기는 게 아니라
더불어 세상을 아름답게 맹글기 위한 거라 하셨지요.
직지(直指)
저 글자가 무언지는 몰라도
차가운 쇳덩이에 뜨거움을 보태어
세상에 빛을 주고 있다 하셨지요.
검은 쇠가 반짝반짝 빛나는 건
사람들의 크디큰 염원이 담긴 까닭이라고도 하셨고요
할머닌
글자 맹그는 저니들에게
냉수라도 한 잔 건네주고 싶다 하셨지요
세상 살믄서 가슴 한켠에 쌓이고 묵힌
먹먹한 가슴, 사태 같은 분노, 화산 같은 울분을
세상 밝히는 글자로 끄집어내는
용암처럼 터질 것 같은 그 가슴
눈물조차 말랐을테니
냉수라도 한 대접 건네어
담금질해주고 싶다 하셨지요.
살아가는 일은
가슴 마다 맺힌 응어리를 쇳물에 녹여
저마다 글자 지어내고 닳아지도록 닦아내어
그래서 환한 세상 맹그는 거라 하셨지요.
24. 직지심체벚나무
조 영 행
흥덕사 돌계단에 앉아 읽습니다
나뭇잎들 빼곡하게 금속자로 찍힌
봄벚나무, 직지 그 푸른 주자본
저 많은 말씀 만들고 있느라
뿌리는 어디만큼 뻗어갔을까요
햇살은 말씀 잘 들리라고
우듬지에 모이고
바람은 구문의 갈피를
천천히 넘겨줍니다.
푸르게 조판된 문장과 봄볕 깊은 여백들
이 산 저 산 전하는 뻐꾸기
읽고 또 읽느라
나뭇가지에 붉은 발을 오므려 밑줄을 긋고 있지요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라도 있는지
허공을 향해 묻기도 합니다.
오자도 탈자도 없다고 자신만만 피어났을 겁니다만
흰민들레 지면 패랭이꽃 불두화 위로
오탈자를 골라내며
직지심체벚나무 설파 중인 호랑나비 한 마리
내 고개도 끄덕끄덕 받아 적고 있습니다.
청주흥덕사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
꽃빛으로 받아 읽는
봄벚나무직지심체 한 권.
25. 직지(直指) 그대 향한 사모
임 준 빈
지난날들은 너무 길었습니다.
산 위에 산 하나 있고
강 아래 강 하나 흘렀습니다.
꽃다운 당신의 체취는
흥덕사 뜰 안에 핀 연꽃 위에 얹어 놓고
물그림자 되어 떠나갔습니다.
꽃비보다 은은한 그 몸짓은
짧은 여행이 아닌
아주 긴 작별의 시작이었습니다.
뜻 모를 약속 하나 남겨둔 채
떠날 것이 두려워 미리 보내는 슬픔처럼
겹겹한 산기슭을 휘돌아 날아갔습니다.
우리들은 그랬습니다.
진실한 이별 아닌 유혹의 사슬에 가려
어린아이의 철없는 눈망울로
당신의 가는 길을 바보처럼 인정했습니다.
이제 와 무심의 강물 소리 들으며 깨우칩니다.
유혹의 입맞춤 낙엽보다 가벼운 거래의 수치심
찰라보다 더 짧은 삶 사위어
푸른 하늘은 절망의 옷으로 갈아입고
당신은 이미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음을
느지막이 꿈결처럼 알았습니다.
억겁의 인연 갈기갈기 찢어놓은 채
떠나가신 당신의 여운 앞에
설운 가슴 쓸어내려 참회하며 통곡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농익은 그리움, 밤하늘에 박힌 큰 별 하나가
소리 내어 누군가를 부릅니다.
해후의 그날을 위해
달빛이 괸, 찬란한 별빛을 그려
밤바다에 아롱지는 금모래빛 사리를 모아
시든 별들을 깨웁니다.
당신 앞에 우리들은
고개 숙인 부끄러운 속죄.
정녕 눈부신 아침의 태양을 맞이하려
황홀한 자태 애써 감추는 저 노을처럼
우리는 이제
침묵보다 깊은 희망입니다.
26. 꺼지지 않는 임의 등불입니다
성 낙 수
오래 전, 성안길 비껴 흐르는 무심천
잔잔한 물결 거슬러
몸에 배인 창조의 태생으로 수많은 시간 흘러 빚어
정 깊게 좋은 임의 등불입니다.
격하게 타오르는 불길 이겨 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로 태어나
굳게 엮어 자리 마주해 청주 흥덕사의 직지로 불리는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임의 등불입니다.
신명나게 감동 주어
안타깝도록 소중해 괜스레 눈물로
수만 번 불러 지겹지 않은
깨알 같이 소중한 기쁨으로
골 물길로 흘러 욕심 없는 달빛처럼
소중한 임의 등불입니다.
따사한 임의 눈빛에 격하게 반하여
임의 잔잔한 목소리에 빠져
세상 어디에 비취지 않는 곳 없이
모두를 위해 꺼지지 않아 막중한
임의 등불입니다.
27. 직지, 눈 오는 날에
정 기 옥
바람결에 날아드는
저 눈발들이
그대였으면 좋겠습니다.
푹푹 쌓이는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과
눈길을 걸어가노라면
뽀드득뽀드득
보드라운 밟힌 소리가
그대의 음성이었음 좋겠습니다.
거기다가
댕그랑 댕그랑
향그런 솔잎 향기 사이로 뿜어나오는
흥덕사 풍경 소리
더욱 자욱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편
겨울지는 산사, 고즈넉한 뒤뜰
잿빛 도포 옷 입고
가지런한 걸음걸이로
자가웃 폭설 밟고 나서는 비구니 스님
그 뒷모습이 묘덕스님 같아 정겹습니다.
눈이 오는 날은
이래서 참 좋습니다.
그대여서 좋고
다가와서 좋고
함께여서 다행입니다.
그렇듯 온통
그대가 되어 오시는 이 눈부신 날
겨울나무 가지를 딛고 오르는
이내 눈꽃 사랑입니다.
내리붓는 하늘 비탈
하얀 꽃송이 속
흰 나비처럼
내 마음에 살포시 앉으면
애타게 사랑한
어느 구술(口術) 고운 시 낭송가는
그대 혼 담아 노래하겠지요.
직지, 그러면 그날 밤
그대 모습 환해지고
더 구체적이어서 몹시도 황홀할 거외다.
눈이 오는 날은
그대 있으매
슬퍼도 행복합니다.
가령,
그대 몸짓 바람결처럼 스러진다 해도
그것은 해후의 그날을 위한
신의 마지막 용서
아름다운 소멸입니다.
28. 직지, 망향가(望鄕歌)
임 준 빈
잃어버린 추억
창자 쥐어짜는 하늘에
검은 공기들이 푸드득 날아간다.
감춰 둔 희망
그래도 새들의 곡조는 높아
푸른 공기들이 부리 톱에서 새어 나온다.
잃는다는 것은 새로 얻는다는 것
비움의 미학이다.
낙엽이 지면 나무들은
안으로 안으로 더 강한 의지가 굳고
찬 서리 내린 들국화는 내일의 소망을 위해
마지막 향기를 다듬는다.
어머니 손길 같은 고국
실개천보다 너른 냇물
백운화상의 혼으로 깃드는 무심천엔
지금도 노을은 붉게 타오르고 있겠지.
내가 떠나오던 날, 흙탕물을 일구며
이리저리 자발없이 나뒹굴던 어린 물고기들
저항의 몸짓들이 지금도 생생하여
두고 온 사랑 애달프다.
안 볼 듯이 울어 치던
흥덕사 추녀 밑 풍경마저 눈물 감추었으련만
이곳에 와, 애써 지은 저 하늘별들은
왜 이리 볼수록 총총한가, 분명한가!
그리움 사무칠 때마다 쏘아 올린 나의 기도
녹슬지 않는 별처럼 천년의 열매로 아롱진다.
푸른 하늘아 푸른 별들아
저 구름에 비껴 마음껏 지즐대는 민족의 숨결아
봄이 오면 꽃은 여전히 따라오고
파릇한 새싹을 밀어 올리듯이
이 추운 겨울은 끝없는 겨울이 아니다.
나의 사랑 장독 뒤란
시렁 밑 울 엄니 살던 곳
고국(古國)의 그대 있음에.
29. 직지(直指), 어머니
노 동 주
노을이 탐스레 익어가는
가을입니다 어머니.
이맘때면 나무들은
어머니 옷으로 마음껏 갈아입고
잠깐이지만 화려한 몸짓에 축제의
긴 여정에 들어갑니다.
한 해 잘 견딘 보상이지요
그 참음이 한 해 한 해 모여
천년에 이른 지금에서도
이루지 못한 한 깊은 그리움에 싸여
꽃 같은 감사와 행복
바람에 뒹굴기도 하고
무심의 환희에 빠지기도 합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불러보던 외침은
어느새 새벽별 되어 비추고
가을빛에 열매들은
그 소리 담아 익어갑니다.
지금쯤 본향에는
은빛 조롱박이 익어가겠지요.
고향의 언덕 그리고 흥덕사지 뒤편
어머니 풋풋한 사랑 닮은
커다란 단감나무에도
제 애처로움 감춘 홍시가 주렁주렁 열렸겠지요
마치 묘덕스님의 웃음 마냥
붉은 미소들이 조롱조롱 피어났겠지요
금방이라도 잔잔한 걸음 모으며 거닐 것만 같은
가을풍경이겠지요.
무심천변엔 갈댓잎들이 하얗게 하얗게
아쉬움 지우며
한 잎 한 잎 이쪽을 향해 떨구겠지요
무심천 물비늘 따라 꽃비처럼 날아드는 갈댓잎이
지는 석양빛에 물들면, 이곳에서
제 보고픔 담아 바람결에 보내겠습니다.
그곳, 어머니 마음 뜰에
제 붉은빛 그리움이 흥건히 적셔질 때까지.
30. 어느 가을날에
김 창 영
참으로 슬픔을 사랑하는 까닭에
진실 하나에 별 하나를 꿴다.
진실로 기다림을 아는 아이라서
들풀에 젖는 이슬처럼
그대에게 안긴다.
무형물의 유형
고향 없는 사람의
봄 잔치 살구꽃이여
아아, 무심천의 벚꽃이여
그 마을에 꽃지는 저녁
노을도 슬퍼서 몸져누우리.
진실로 진실로 세상이 반겨서
꽃은 피는가
가령,
세상 끝이 어두워서 꽃은 꽃잎을 떨구는가.
직지꽃
이름 없는 이름에
누구는 환한 달빛이 되고
누구는 서러워 눈물을 단다.
“나는 숭고한 나라의
가난한 꽃 한 송이”
어느 늦가을날이었다
홀로 해변을 걷는데
새벽녘에 내린 이슬에
얼굴을 폭 가린 들국화가
칭얼대듯 아는 척을 한다.
“내게도 고향이 있느냐고
민족이 낳은 부모가 있는거냐고”
푸념 어린 한마디에,
찬 바닷바람이 달래려
흥덕사 풍경처럼 젖은 음성으로
그의 가슴에 안기어 흐느끼고 있다.
직지, 한민족의 혼
추녀 밑을 휘돌아 와
풍경이 전해주는 편지라면서
활자에 박힌 게송의 글씨
사랑, 용서, 상생
똘방똘방 읽어나가고 있었다.
31. 직지, 길을 묻는다
한 이 나
직지심경은
오래된 유적 마음의 길이다.
청주 나들목에서
강서동 반송교까지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고향을 내달릴 때 가벼운 마음이 한 걸음이다.
철당간을 지나
무심천을 건너
구부러진 골목과 산책로를 휘돌아가면
고려의 직지에 닿을까, 흥덕사에 찍어낸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칠백년의 숨결을 맡을 수 있을까
글자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지 길 속에 길을 찾는다.
고인쇄박물관에 와서, 복원된
직지에게 세상의 길을 묻다
종이를, 쇠와 불을, 먹을 다루던 조상의 엄한 손길
글자 한자 틀릴 때마다
마음 졸이며 혹독했을 정신의 치열함을 읽는다.
누대로 전해진 어둠 속 불빛
심법을 만난다.
사람의 마음을 맑고 바르게 보면 얻어질
마음공부를 되뇌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훤하다
직지의 슬픔과 자랑이
무심천 가득히 윤슬로 반짝인다.
32. 직지
이 서 희
쇠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따뜻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뜨겁게 태어났으나
두드려지고 식혀지면 그 뿐
다른 것을 해치거나 다치게 하면서
쇠는 자신은 그렇게만 사는지 알았다
뜨겁게 태어나
다시 두드려지고 식혀질 때
쇠는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들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정성으로 새겨진 이름들을
종이 위에 찍어보며 쇠는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쇠는 종이를 사랑했고
그 종이를 넘기는 손들을 사랑했으며
자신이 만든 것을 보는 반짝거리는 눈과
넓어지는 세계에 황홀해했다
하나하나의 글자들은
종이 위에 피어나는 꽃이었고
그것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며
퍼져나가는 향기였다
쇠는 꿈을 꾼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보며
향기로 가득찬 세상을 꿈꾼다
그러면 자꾸만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33. 직지의 편지
이 미 순
책을 열면
금빛 뜨거운 쇳물소리가 들린다.
검은 먹물로 온몸을 물들이고 활자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볼 때까지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보라고 이야기하는 듯
오래, 아주 오랜 시간 가부좌를 틀고 있다.
직지는 백운화상의 애타는 가슴 품고
나를 찾아오라고, 찾아달라고 손짓하는데
먼 이국의 도서관에서 기다리는 직지심체요절.
고향 청주 흥덕사 돌담에 앉아
부레옥잠 부푸는 소리 들으며 탑을 도는 꿈을 꾼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솔바람이 살랑살랑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는다.
햇살을 똑바로 줄 세우는 기와지붕
고려의 햇살도 저처럼 올곧게 서 있었겠지.
한 벌의 책자를 완성할 때마다
고인쇄박물관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여러 사람의 땀으로 찍히는 한 페이지
그리운 페이지에 프랑스 우표 붙은
직지의 편지를 끼우며 합장하듯
나는 책을 덮는다.
34. 쏘가리, 직지심경
김 도 연
미호천 쏘가리 힘차게 물결 가르면
봄이, 온 거다.
그 물결소리. 흥덕사 앞마당
연못까지 흘러 직지를 짓는다.
양병산 정자나무는 제 그늘로
연못을 파고 있었던 거다.
정자나무 뿌리는 저 미호천 깊은 곳까지
연결된 수로이자 산소 구멍이다.
물고기들도 가끔씩 흙의 제 기원을 찾고자
경계 넘어 흥덕사의 기억을 더듬으며
알아볼 수 없는 필체로 책을 엮는다.
알알이 차오르는 자음과 모음을 찍어 본다.
쏘가리는 무슨 글자를 자꾸 쓰면서 헤엄쳐 온다
몸에서 빠져나간 쏘가리 알들이
“백운화상 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봉독하며
직지 상권 토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불공을 드린다.
지느러미 후다닥후다닥 물방울을 엮듯이
흥덕사 그늘 연못에 금속활자 금형을 뜨고 있다.
35. 직지, 그날이 올까 봐
안 소 현
슬퍼도 슬퍼도
난 참아낼 수 있어.
그리워 그리워도
난 이겨낼 수 있어.
저 하늘벽을 넘는 뭉게구름을 봐
저 들녘, 찬서리에 떨고 있는 들국화를 봐
그날이 올까 봐
그날이 찾아올까 봐
이렇게 그렇게 가고 있는 거야
죽고 싶을 만큼 아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무너지는 가슴 추스르는 거야
살아가는 일이란
천둥과 벼락을 맞으며 꽃을 피워내는
한 송이 떨림 같은 것.
언젠간 찾아올 거야
기필코 맞이할 거야
하루에도 수천 번 부서지며
하얀 포말을 이루며 꽃이 되는 파도꽃처럼
어느 외딴 섬 갯바위에 부딪히며
흘린 눈물로 웃음꽃을 게워내는 풍란처럼
우리는 가야 해
이겨내야 해.
슬픔을 슬픔이라 하면 안 돼
그리움을 그리움이라 하면 안 돼
그것은 우리를 좀 더
굳건히 일으키기 위해 꺾이지 않는
갈대의 속울음 같은 것.
오늘은
저 밤별들의 속삭임이
따스하게 들리는 겨울밤
기도하듯, 무릎 꿇듯
그 자릴 고집하는 별들처럼
나의 마음은 날마다
그쪽을 향해 눈부셔, 슬퍼도 기뻐!
너(故國) 하나로 난
살아가는 이유.
36. 흥덕사의 꽃, 직지
노 영 숙
고려 475년 한반도를 감싸안은
아취와 기상으로
천년의 바람타고 하늘에 가득하다.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가부좌틀고
우주, 자연, 진리를 깨달은 지 100여년
찰라의 “할” 고함에 긴 숨 쉬어본다.
청주목 흥덕사에 석찬과 달잠이
차가운 금속덩이에 생명을 부어
고동 소리 지축을 흔들고
가는 동자꽃 영롱한 지혜는
고려인만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무심으로 흐르는 물줄기 따라
참선하여 마음을 직지할 때
백운 아래 기나긴 눈바람에도
우뚝 선 우암산 정기는 늘 푸르고
묘덕의 널리 베푼 보시는
돌고 돌아 불꽃으로 타오른다.
아직도
맑은 바람과 흰구름 친구 삼아
잃어버린 빛바랜 화두 한 쪽 찾으려는
직지인의 자긍심은
지금 이 순간 가슴에 열정의 불 지피는
고려 황제의 꽃 중의 꽃이다.
37. 직지(直指), 너에게 부르는 노래
오 만 환
노을빛 붉게 타오르는 무심천을 걸었어
그대 없이 흐르는 저 물줄기
나는 보고픔 넓어지고 싶어 강물이라 불렀네.
그대와 나를 위해 기다리는
나룻배 한 척
우리는 나란히 앉았네.
어젯밤 꿈결이었어.
벚꽃 휘날리는 꽃비 사이로
그대와 난 마주 앉아 하얀 미소를 보냈네.
우리는 없어도
영혼의 불빛은 남아 천년으로 타오르고
약속은 잊었지만, 희망의 노래는 멈출 줄 몰라
저 강물은 바다를 향해 그치지 않고 흘러갔듯이
우리 그날을 위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로 해.
그리움은 별이 되어 빛나고
슬픔은 바위 되어 무심하지만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
우람한 천년의 나무
한마음으로 살아왔듯이
여기서 머무를 수는 없어
아픈 기억들은 저 하늘에 뿌리고
슬픔은 구름 속에 묻으면 돼.
내가 부르는 너의 노래
그대 향한 몸짓
저 별들이 깡그리 악보가 될 때까지.
하늘은 숭고한 우리의 무대.
그리고 둥근 달은
혼과 믿음의 지휘자야.
저기 하늘빛 재 너머
어디론가 정처없이 흘러가는 흰구름을 봐
언제나 우리 마음 곁에서 응원하며
온몸으로 박수치는 관객이지.
38. 직지 탄생 설화
김 수 진
노송은 매일밤 꿈을 꾸었다.
미동조차 없던 밤, 망망대해를 떠돌던 활자들의 행열
활자들이 흥덕사의 지붕 위에 앉은 날
바람은 꼼짝을 하지 않고
노송은 발자취를 따라 시경(詩經)을 읽었다.
누군가는 그 형상이 마치 불경을 읊는 수도승 같다고 했다.
획과 획 사이에서 우주를 뒤흔들며
별자리의 흔적을 밟다보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건 죄다 밤뒤의 아침이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푸른 숨을 뱉었다
춤추길 오래 그것이 움직임이
그리운 누군가에게 남기는 편지 같을 때
직지는 목마른 기억 속에서 태어났다.
바람은 동전 한 닢 입에 쥐듯
무언의 뿌리를 활자로 새겼다.
계절은 비워내도 피어나며 내리사랑 하였지
숲속을 떠돌던 길손들도 아름다운 계절에 안식을 누리던 해
직지는 그렇게 긴 시간을 깨었다.
사방에 배열된 작은 소란
세상을 만들어가는 연습은 여전히 쉽지 않고
노송은 제 몸 곳곳에 별의 뿌리를 수록했다
깊은 밤 시작된 위대한 파동에
아옹다옹 모질게 울던 생들
직지는 감탄하듯 바람을 고이 접으며
방대한 역사를 풀어낸다.
어둠을 씻어내던 고촉(高燭)의 전등
최초의 불빛은 오래도록 별이 되어
이내 천년의 하늘도 환하게 꽃피웠다.
39. 밤의 탁본
김 영 욱
밤의 문선공이 황금빛 낮의 들판에서
낱알의 자음과 모음을 타작하고 있다.
만추의 논틀밭틀에서 별의 활자들을 골라내고 있다.
밤의 식자공이 가을 별자리를 짜맞추고 있다.
기둥 하나 세울 터도 없는 허공에서
폐가수스 사각형의 아귀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다.
밤하늘 드넓은 먹지 위에 올록볼록
피어나는 연꽃의 화두(火斗)
폐사지의 거푸집에서 안드로메다까지
빛나는 흥덕사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올려다보라!
백운화상이 심어놓은 부처님 말씀
그 뿌리에도 바람이 들어
뜬구름 떠받든 불당의 처마 밑으로
금박 두른 사족가지 거느렸으나
모든 백지의 본문은 이미 완성본이라
요사체의 가로세로 띠살문에
칸칸히 채워놓은 불립문자.
은하수에 시리도록 담금질한 눈빛만이
그 금속성의 필체를 알아보나니
평생 쌀 한 톨에 좌석을 새긴
어느 눈 먼 필경사
굽은 손가락이 진짜 직지라!
밤의 인쇄공이 천체의 윤전기를 밤새도록 돌리고 있다
윤장대를 굴리며 기도하는 까막눈 어미의 마음으로
하얀 새벽을 출력하고 있다.
40. 직지의 기억
강 수 화
오래된 북소리가 안개 속에서 운다
바람은 오래전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고
차가운 칼날은
새파랗게 반사되고
노기에 왜적을 마주한
당신의 투명한 눈동자는
날선 소름이 된다
깃발이 펄럭이자 멀리서
빈 가슴 졸이는 늙은 노모가
어둠을 응시한다.
당신의 이름의 운(雲)이 같아
흐르는 시간에 멈추어
박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얽히고설킨 것들을 끊자
물길은 구불거리며 흘러가고
번지는 그리움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머물고 있다
얼어붙은 시간속을 녹여
흥덕사 올라가는 길
나무의 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가면 하늘의 길이 열려
한 획이 백성이 되고
한 획이 부처의 넓은 자비 되어
녹아있는 언어 하나가 되었다
스님과 살고 있는 직지
가끔은 옹이진 손으로 다가오는
다정한 속삭임에 웅크린 몸을 뒤집자
직지의 꿈은 세상과 하나가 되어
쓰다듬는 손길마다 스며드는 언어들
별처럼 빛나고 있다.
직지는 혼을 담아 정교한 틀 속에 일렬로 서서
수군거린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천년 시간 속 직지가 피어난다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 기억하며 가슴에 새긴
41. 직지(直指), 자유에 대하여
오 만 환
남들은 한없이 편해지는 것을 자유라 한다.
구속의 반대라 한다.
그러나 산비탈에 핀 한 송이 꽃을 보아라
바람과 천둥, 그리고 비와 눈발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얻어지는 삶의 향기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별처럼
거센 파도 에둘러 굴복하는 파도꽃처럼
자유는 전쟁 같은 슬픔을 사랑한 속죄.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없다.
이미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다만 그들이 누리고 행복해하고 있을 때
어느 한켠에서는
그 기쁨을 위해 눈물 흘렸다는 것을
그때서야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거듭 말하고 싶다.
자유는 또한
그 자체, 자유로움을 알려 하지 않는다는 진실도.
나는 그 자유를 버린 지 오래다
나는 그 자유를 획득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 문헌실
오~랜 세월은
가장 향기로운 자유였는지 모른다.
뿌리친 그 자유를
고국은 나를 진정토록 지켜주려고 한다.
민족은 나를 뼈의 혼처럼 인식시키려 한다.
내가 사랑한, 내가 그래도 의지했던 그곳에서……
하지만 지금은 이국의 땅,
어쩌면 신실한 신이 선물한
별과 나눈 천년지기 무심(無心)의 삶이여.
언젠가 하얀 등이
버려도 화등처럼 켜질 것이다!
42.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성 낙 수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수백 년 고된 세월 참아 이겨 남긴
위대한 불멸의 이름자인 직지여,
흥덕사 직지여, 청주 흥덕사 직지여.
고운 노래 위해 속을 채우지 않는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으로 한 올 한 올 풍경 소리 엮어
탄생한 직지여, 불멸의 사랑이여, 영원한 임이여.
화롯가에 둘러앉아 나누던 정겨운 이야기로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제가 다가가서 감히 당신의 탄생을 위해
다 바쳐 고생한 스님들의 소중한 이름자
큰소리로 찾아 드릴게요.
눈썹 짙은 경한 스님, 눈매 고운 묘덕 스님,
눈빛 매서운 석찬 스님, 잔잔한 미소의 달잠 스님
이제 떠나지 마셔요.
오늘, 내일, 모레
쉼 없이 정이 물린 목소리로 불러 드릴게요.
오랜 시간 한숨 없는 애환과
고민 섞인 흥덕사 안 터 정원과
뒤란에 풀꽃으로 남아 있도록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위대한 불멸의 이름자인 직지여,
흥덕사 직지여, 청주 흥덕사 직지여.
43. 직지에 빠지다
김 동 인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수런수런 가을비의 속삭임이 돋았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혈맥을 휘도는 박동이 덜컹 덜컹 감겨왔다
즈믄날 빚은 달빛과
외길 따라온 바람을 한 데 섞어
정수리에 붓고는
글자에 갇히지 않도록 가지쇠를 들어내
뭉턱 뭉턱 불거져 오른 어미자의 얼굴들이
내게 훅 달려들었다
생각도 글자도 돌에 새겼으니 돌일 뿐이라고
다만 세상에 널리 나누고 싶어
돌을 깨고 나와야 했다고
고즈넉한 숨결로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앞에 서면
나도 심지를 세우고
바람을 깎고 생각을 걷어 내고
모서리 난 마음 잘 다듬어
둥글어지고 싶다
빛살 하나로 폐부를 찌르는
활자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가슴에 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44. 직지의 집
김 은 혜
형광등이 비워진 검은 집 안에서
오랫동안 태양은 차단기를 내렸다
누전된 창문을 바라보면 언제나
활자들이 음각을 파내어 들어왔다
플러그에 끼워진 맨살 아래에
자릿자릿 숨을 타고 오는 전류들
차가운 필라멘트 같았던 등짝은
감전된 글자들에 함부로 데였다
스위치가 내려진 직지의 시간
검은 집은 온종일 조명을 지웠다
물렁하게 피복된 전선을 잡은 채
좁은 통로를 온몸으로 열던 음절들
잡음처럼 콘센트에 바람이 분다
문 틈으로 새어오는 작은 먼뎃불빛
온몸에 번진 활자들 온통 반짝인다
집어등처럼 눈 시리던 백야의 문
발광하던 활자들, 관통하던 생(生)들
천체 속에서 검은 집이 켜진다
운석들이 쏟아지듯 환하게 직지가
깜빡깜빡 켜진다
45. 직지 쇠를 품다
윤 신 애
흥덕사 양각의 시간을 풀무질하며
어르고 달래는 느린 산의 풍경소리
운천동 허리에 남아 먹향을 우려낸다.
일필휘지로 석탑에 배열한 이끼와
작은 씨톨 하나에도 견성이 스며
허방도 올곧게 짚으면 직지이듯
미혹(迷惑)을 덜어내고 엇물린 자간으로
밀랍의 어미자가 거푸집에 몸을 풀고
쇳물을 녹일 때마다 산이 달아오른다.
한 획이 백운이고 두 획이 부처이듯
흙이 쇠를 식히다가 데인 마음 놓으면
금속의 활자 꽃들을 절마당이 품는다.
46. 마음의 조판
김 강 인
마음에 조판이 필요한 날이면 직지를 생각한다
새털구름이 서툰 가로획으로 하늘을 덮은 저녁
흥덕사 뜰에 고요가 날개를 접는다
골똘히 고개 숙인 별꽃아재비는
흰 꽃잎마다 글자의 기억을 품고 있을까
박새들이 오래된 글자처럼 뜰을 종종대고
바람은 내내
돌아오지 않은 구절들을 기다리며 서성인다
밀랍에 조각칼로 가로획 세로획 새길 때
노을이 쇳물처럼 그 자리를 채웠을 것이다
이르게 뜬 별들이 순한 입술을 빛내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밤늦도록 소곤거렸던 먼 옛날
하늘은 사람의 마음처럼 돌고 또 돌아
같은 자리에 멈추고
나는 고개를 들어 별들의 군락을 바라본다
삼라만상이 하나하나 마음의 거푸집이다
이 조판을 마치면
나도 마른 등성이의 소나무처럼
한 꺼풀 벗고 단단해질 것이다
47. 직지심체요절, 그 부리로 아침을 열다
정 정 순
흥덕사 뜰,
굳은 밀랍 있네
씨방 그 속
초두변 새을변
퍼즐 맞추듯 노오란 입술
드디어 입을 여네
주형들 요철마다 촘촘히 부어진
자음과 자형, 자형과 자음
서로 입을 맞추며 지지지직
신열이 오를 때도 있었지
가슴이 트는 통증도 있었지
계속되는 불의 연단
어두웠던 거푸집 밀어내고
웅크렸던 말,
봇물 터지듯 밀려 나오네
흥덕사 뜰에 가득한 황금 언어들
고려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
노오란 금이슬 물고 문장들 또렷하다
네 입술의 말, 네 가슴의 말
또렷또렷하다
수수만 년 지지 않을 황금 꽃 사랑
직지심체요절,
그 부리로부터 동방의 아침이 열리네
48. 쇳물의 증언
최 병 규
토층의 눈물로 고였던 고대 콩알 같기도 하고
어쩌면 태초의 용암덩이의 파편 같기도 한
암울하던 그 층계에서 풍우로 스민 빗물로
겨우 연명해 온 선대의 체온들이 온기로 살아있다
용암지대에나 녹아 있을 법한 철기들의 언어
억겁을 두고 행성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처럼
통점이 도졌을 암울한 시대를 걸어 왔다
흥덕사지터에 비바람으로 쓸려간 자국과
고생대에 묻혀간 흔적처럼 어둠만 걸어 다녔다
불가의 반야심경마저 녹여내는 쇳물의 흔적을
콩알만한 불경의 토씨들에게 울먹이던 전설처럼
부처의 살점을 깎아내는 눈물대신 흘렸을 쇳물
그 통점의 비화로 맺혀있던 토층의 언어들이다
솔바람만 옛 정취로 풍경의 애환을 우는 절터에
마침내 새 날의 태양이 뚝뚝 동해를 흘릴 때
백운화상이 흘렸을 불경 대신 주조의 쇳물이 흘렀다
푸른 대지의 장소로 탄생한 한줄기 직지의 빛이
깊고 깊은 토층의 암흑 속에서 증언의 눈을 뜬다
49. 보라, 이것이 직지니라
최 효 림
이 어찌 한낱 돌과 견주랴
영원히 죽지 않는 흑표범
섬세한 경한(景閑)의 손길과 만나
밝게 빛나는 검은 별이 된 것을
어찌 정각(正覺)에 가치를 매기랴
위대한 깨달음의 기록
수백 년의 세월과 만나
비로소 뚜렷한 종이가 된 것을
황금보다 가치 있는 금속
만월의 비치우는 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거늘
당신은 어째서 먼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는가
과거에 빛나던 금속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까지 빛을 발하는구나
이 어찌 누가 알지 못하랴
어느 지석(紙石)이 이를 대체하며
대체 무엇과 만나며
어떤 것이 되겠는가
어찌 영원에 시간을 재랴
타인의 시간이 무슨 의미이며
빼앗긴 진실이 어찌 무의미하며
너는 누구를 만나려 하는가
불꽃의 열정과 하나 된 금속
붉은 꽃의 고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거늘
당신은 어째서 우월함을 비교하려 하는가
가까이서 보라
더 자세히 보라
그래야 깨닫게 될지니
어찌 무엇으로 빗대랴
직지심체요절 그 자체
대한민국의 마음과 만나
이미 대한의 일부가 된 것을
보라, 이것이 직지니라
50. 흥덕사 추녀 밑에 풍경이 날아갔다
임 준 빈
마음의 돌계단을 딛고 오르면
솔향기 그윽하게 내리붓는
고려의 옛터 흥덕사지
바람결에 울어대던 풍경의 슬픔이
뚝 그쳤다.
그 설움, 멎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떼어간 것일까?
울음마저 빼앗긴
아슬한 역사가 숨숨이 뒹구는 솔숲 사이
소스란 바람은 푸르게 펄럭이고 있다.
금속활자에 박힌
한 올 한 올 슬픔마저도
향그런 꽃 글씨로 부활하던
그날의 환희는 쇳물처럼 뜨겁고
무심(無心)의 정적만이 흐르는가.
한 활자 틀릴 때마다
40대의 곤장을 치른 피눈물의 참회
도가니에서 풀무질로 끌어 올렸을
활자장의 혼과 애국의 충절
자비로 불탄 시주의 온정 묘덕의 사랑
숲의 낙엽 되어 구른다.
설움에 복받쳐
매달려 아롱지던 풍경이
아예 족속마저 잃었다.
빈들에 아우성치는
이름 모를 혼령들이
이따금 까치 울음소리로 분노하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금서(禁書)를 자유로이 낱장으로
넘겨볼 수 없는 설움.
거꾸로 치솟는 역사의 울분
그저 허공에 던질 수밖에 없는
쓰라린 운명, 위로받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보라는
직지의 가르침.
쇠 북소리 퉁기며 노을에 잠기는 고요.
화등(花燈)빛 물그림자 떠 있는 무심천엔
푸른 갈댓잎 사이로
달빛에 젖는 백운화상의 흐느낌이
물빛으로 담금질하고 있다.
연둣빛 잎새가
바람결에 촉을 틔우며
무성히 무성히 깊어지는 봄 숲
참회의 눈물로 돌아온 탕자처럼
흥덕사지 추녀 밑에
풍경 되어 노래하고 싶다.
2021년 직지(直指)
전국시낭송대회
- 지정시 50편 -
• 차례 •
1. 직지, 혼불 _임준빈 ∙ 1
2. 직지의 봄 _임준빈 ∙ 3
3. 직지(直指) _정미숙 ∙ 5
4. 직지, 귀혼(歸魂) _임준빈 ∙ 7
5. 직지, 그리움 _임준빈 ∙ 9
6. 직지, 낙엽의 말 _유세현 ∙ 11
7. 직지, 가을 소묘 _유세현 ∙ 13
8. 직지의 고장, 청주 _장병학 ∙ 15
9. 직지의 꿈 _김희성 ∙ 17
10. 직지, 가을 뜨락에서 _노동주 ∙ 19
* *
11. 직지(直指), 우리 가을에 만나요 _노동주 ∙ 21
12. 직지, 내 고향 하늘은 _양정순 ∙ 23
13. 직지 흥덕사 _서인석 ∙ 25
14. 직지, 그대 향한 고백 _안소현 ∙ 27
15. 직지(直指) 난초 앞에서 _노동주 ∙ 29
16. 직지의 울음 받아내며 _윤성해 ∙ 31
17. 오래된 숨 _이 강 ∙ 33
18. 꽃씨의 시간 _이정숙 ∙ 35
19. 직지, 있어야 할 곳은 _이지영 ∙ 37
20. 천년의 온도 _임진순 ∙ 39
* *
21. 나는 아직 기다린다 _전형주 ∙ 41
22. 직지, 자화상 _정기옥 ∙ 43
23. 할머니의 직지 _정순신 ∙ 45
24. 직지심체벚나무 _조영행 ∙ 47
25. 직지(直指) 그대 향한 사모 _임준빈 ∙ 49
26. 꺼지지 않는 임의 등불입니다 _성낙수 ∙ 51
27. 직지, 눈 오는 날에 _정기옥 ∙ 52
28. 직지, 망향가(望鄕歌) _임준빈 ∙ 54
29. 직지(直指), 어머니 _노동주 ∙ 56
30. 어느 가을날에 _김창영 ∙ 58
* *
31. 직지, 길을 묻는다 _한이나 ∙ 60
32. 직지 _이서희 ∙ 62
33. 직지의 편지 _이미순 ∙ 64
34. 쏘가리, 직지심경 _김도연 ∙ 65
35. 직지, 그날이 올까 봐 _안소현 ∙ 66
36. 흥덕사의 꽃, 직지 _노영숙 ∙ 68
37. 직지(直指), 너에게 부르는 노래 _오만환 ∙ 70
38. 직지 탄생 설화 _김수진 ∙ 72
39. 밤의 탁본 _김영욱 ∙ 74
40. 직지의 기억 _강수화 ∙ 76
* *
41. 직지(直指), 자유에 대하여 _오만환 ∙ 78
42.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_성낙수 ∙ 80
43. 직지에 빠지다 _김동인 ∙ 82
44. 직지의 집 _김은혜 ∙ 84
45. 직지 쇠를 품다 _윤신애 ∙ 85
46. 마음의 조판 _김강인 ∙ 86
47. 직지심체요절, 그 부리로 아침을 열다 _정정순 ∙ 87
48. 쇳물의 증언 _최병규 ∙ 89
49. 보라, 이것이 직지니라 _최효림 ∙ 90
50. 흥덕사 추녀 밑에 풍경이 날아갔다 _임준빈 ∙ 92
2021년 직지(直指)
전국시낭송대회
지 정 시
1. 직지, 혼불
임 준 빈
달빛 흐르다 멎은 듯
감물 찬 당신의 고요는
떠나간 그 자리가 못내 아쉬워
흐느낍니다.
들리시나요
고요를 흔들다 못해
자취를 감춘
흥덕사 풍경소리는
바람 몰아쳐도
침묵으로 일관이시더니
아예 자태를 숨겼습니다.
그 숨결 간 데 없고
지금은 거센 솔바람이 뒤덮다가
봄을 맞은 산 목련꽃 향기가
당신의 체취로 휘돌다 갑니다.
향기로움도 사치스러운
당신의 겸손은 뽐냄도 명성도 이미 접어
금속활자 속에 배어 있는 아릿한 혼이
막역한 활자장 곤장 속에 번진
매운 매처럼 아립니다.
혼불이시여!
민족애로 불타는 고국이시여!
당신은 지금
이름 없는 이름으로
어디에 계신답니까
프랑스 하늘에
흐린 날 먹구름으로 일렁이다
본향의 향수로 청아함 떨치신 그리움들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유리창을 수없이 두드렸을
울분과 분노
천둥처럼 들려옵니다.
천 번을 그리고 만 번을
불러도 불러 봐도
응답 없는 말 없는 자의 말
눈감아도 보이고
듣지 않아도 생각나는
당신은 당신은
기필코 꺼지지 않는
혼의 등불입니다.
2. 직지의 봄
임 준 빈
내 본향엔 지금쯤
진달래 꽃망울이 부풀어 오르고
무심천 갯버들은 가슴 활짝 열어 봄을 알리고
미소하는 입술마다 직지꽃 피어나겠다.
물장구치는 버들치, 송사리, 붕어 떼들
키득키득 몸짓 나래 여울지겠다
머지않아 목련꽃 피고
개나리 벚꽃 영산홍 철쭉 줄지어 꽃잔치 벌어지겠다.
가고 싶은 고향이여!
그리운 내 고국이여!
실향한 이 슬픈 운명 앞에
환한 봄날이 뜨면
그날이 그리워라
미치도록 그리워라.
내 살던 터엔
소나무 향기 내리붓고 봄기운 감돌아
새로운 축제도 열리겠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리운 사람들은 그리운 사람끼리
만나면 등이라도 치고 지고
두 어깨를 부비며
그리운 사랑 노래 울려 퍼지겠지.
없는 나를 앉혀놓고
마음껏 안아보겠지 만져보겠지
그러면 나는 그 품에 안겨
조용히 눈 감을 테요.
생각만 해도 눈가에
영롱한 이슬빛이 뜨는 내 고국
밤이 찾아오면 프랑스 국립도서관 창문 밖으로
별들이 마구 쏟아져 내리고
밤이 익을 무렵이면
긴 목 내밀어 비밀한 향수에 젖어
어느새 내 눈가엔
짙푸른 별꽃이 핀다.
맑게 씻은 혼이
쓸쓸한 별이 되는 무심한 밤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까마득한 별들이 스르르 와 박힌다.
3. 직지(直指)
정 미 숙
무심천 나루터에 서면
아직도 아련히 들려오는
선인들의 노래
직지 숨결 담아
살랑이듯 바람이 분다.
구중궁궐 마다하고
민초와 생을 나눈 선불교 사상
세상 뜰에 번져나갔네.
무심의 물결
풀섬 지었다 허무는 실개천의 사랑
인고의 세월 속에
사람의 마음 바로 보라는 직지
심연의 늪은 깊어갔네.
작금, 시류에 떠밀려
슴슴한 강의 뿌리는 없고
바다에 이를 희망의 닻은 내렸는가!
표류하는
인류 최고의 금속활자본
어떻게 건져올까?
하루를 아프게 지우는
저 설움의 노을빛이여
그대 저무는 하루하루는
이미 천년이 되었건만
피고 또 져도
그날은 오지 않네.
하소연에 뿜은 연가
지는 노을에 다시 지피지만
시든 꽃은 일어설 줄 모르네.
밤이 오면 별은 다시 뜨듯이
아득한 희망 하나
뜨거운 눈시울로 별빛에 새기는 사연
나의 고국(古國)은 알고 있겠지.
돌틈에 꽃씨를 심는
노심초사, 이 절박의 심정을.
4. 직지, 귀혼(歸魂)
임 준 빈
별이 별을 쓰다듬는 밤
야윈 달은 길을 나서지 못했으리라
스스로의 그림자를 피워선 지고
차마 잠재우지 못했으리라
아스라한 역사, 슬픈 계곡을 열고
눈물 같은 강 하나 내어 유유히 흘렀으리
으깬 천년의 벽 가시덤불로 둘러쳤으리
범람의 별들은 새벽을 찢는 닭울음처럼
깨치는 그 날을 연민했으리라
젖은 상념들
그리움의 숲에 묻어놓고
천륜을 기다리는 나무가 되었으리니
아득한 고국, 하루가 천년
아린 생강처럼 보고 싶을 때마다
밤하늘에 심은 별들이
속절없는 나무 한 그루로 자라
울울창창 아우성쳤으리라
죽음보다 더 그리워한 사람들
달빛 바라보며 외치던 숨 없는 함성들
여기인들 그곳이 없었겠는가?
거기인들 이곳이 없었겠는가!
지금은 까만 밤
먼 하늘 프랑스 국립도서관 유리창을 깨뜨리며
내리붓는 그리움 흥건한 그 달빛
서로를 바라보는 애절한 눈동자엔
귀혼의 꿈, 별처럼 영롱하다
고국이여!
침묵의 민족이여!
나 여기 한 줌의 재로 시든 별 되어
직지의 혼 밝히는 야속한 밤에
혼불은 정처 없이 타오르고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이르노니
우리 서로 눈물 같이 그리울 땐
하나밖에 없는
저 달을 바라보기로 하자
풋사랑처럼 맺은 언약일지언정
그대여 멈추지 마오 굽히지 마오
가령, 어느 하늘 비탈 아래
별이 별을 만나 부서질지라도
달이 달을 만나 눈부실지라도.
5. 직지, 그리움
임 준 빈
천 개의 그리움을
천 개의 별에 꿰었다가
어느 눈 오는 날 터뜨리어
한 올 한 올 눈송이로 오실 당신.
별을 헤던 수많은 순간들
이제 천 년이 흘렀습니다
그날이 오면 우리는 꿈결처럼
당신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그대 쏟아지며 오시는 길은
그리 아름답고 황홀하지 않다지만
우리의 상봉은 눈물바다일 것입니다.
믿습니다 뜻깊은 그날을
무심히 흐르는 강물에 벚꽃 지는 꽃비로 오실 줄을
몸을 던지시며 조국의 품에 입술을 맞출
눈물에 젖은 그 흐느낌의 절규를 압니다.
지나는 사람들은
손에 손을 잡고 걷던 발걸음을 멈추며
환호성을 지르겠지요.
당신이 오시는 그 길가엔
축복의 꽃향기 묻은 꽃잎 같은 사랑과
간절했던 소망의 성취로 감격하겠죠
좋아 뒹굴겠지요.
당신은 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쁨의 눈물을 쏟으며
우러러 기다림이 터진 열매의 향기
본향엔 꽃잔치가 되겠지요.
기다림의 과정은 지루하고 슬퍼도
결과는 행복할 거외다
장미가 안개꽃에 가려져 있어야 그윽하듯이
당신은 우리의 기다림과 보고픔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간절한 부름 앞에 놓일 때마다
별이 되신 그대
당신이 없는 그 하늘가 별빛 속에 묻은
의로운 민족의 촉수여.
오늘은 부활하는 희망입니다.
6. 직지, 낙엽의 말
유 세 현
한때는
봄빛 아롱지는 연둣빛 입술을 모으며
세상을 다 품을 듯한 미소였다
햇볕 들이치고
비바람 몰아치고
뇌우마저 온몸으로 맞이해야 할 즈음
살을 에는 상처도 감내해야만 했다
나의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인생의 문고리를 힘껏 움켜쥐고 살아왔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그리고 이겨내야 한다고.”
여름밤 별들을 헤며
소년의 눈물은 의지로 굳어져 갔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부터 사랑해야 함을 그 별에게서 배웠다
벌레 먹는 잎새로 삶을 연명하듯 숙명처럼 살았어도
누군가를 분명 먹여 살린 훈장이었기에
이 아픔도 흐뭇한 행복이리라
푸르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
더 위로 더 옆으로 드넓어지는 상생의 숲에서
잠시 잊고 살았던 내 생명의 근원 뿌리와 대화를 한다
바라봐 주지 않아도 좁고 어두운
고통속에서도
묵묵히 내게 주어진 길을 걸었던 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나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비록 짧은 여정이지만
바닥으로 떨어져 썩어 본향으로 돌아가는
향기로운 죽음 앞에
나는 언제나 자유로워질 수 있다
직지(直指)
너를 한 장의 낙엽이라고 하자
그대도 언젠가는
뿌리로 돌아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왔다가는 여정이라면
낙엽처럼 직지처럼
소년에게 의지를 주는 아름다운 향기를 남겨봄이 어떠한가
나의 소박한 무덤은
백운화상의 혼이 깃든 흥덕사지 뒤뜰이다
오늘도 쌓여 돌아갈 채비를 한다.
7. 직지, 가을 소묘
유 세 현
간절히 기다리던 임이시여!
하염없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당신을 맞이합니다
당신만큼 소중한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날 괴물 같은 기후와 몰염치한 장마를
용기 있고 지혜롭게 잘 견뎌준 당신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만큼 참신한 계절이 왔습니다
신이 주신 선물처럼 풍성한 결실을 안고
한가득 희망을 싣고 왔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도도했던 벼 이삭의 고개 숙인 겸손과
바람 타고 노니는 코스모스 분홍빛 웃음과
누이 닮은 연분홍 봉숭아 꽃물을 들이며 찾아왔습니다
이처럼 소중한 사랑과 더 이상의 미움과 질투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봉숭아 꽃씨를 터뜨리고
마음이 가난했던 사람들은 높고 푸른 하늘을 응시하며
고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은 유유히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허황한 꿈을 좇는 사람들은 자연의 지혜를 나누며
코스모스 꽃잎으로 수줍게 흔들어 보입니다
반복되는 인생길에서 오늘 또 다른 당신을 안아봅니다
그대는 그런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고 맑고 푸르러 다 안아 아우르는
손안에 가진 것 없다 하여도 가득 풍성한
나의 마음은 부자입니다
그대여! 저 넓고 푸른 하늘을 훨훨 날아보세요
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그대 마음의 사립문을
활짝 열어놓으세요
그대 마음의 계곡에 종달샘 맑은 물이 흐르고
무거운 삶의 무게를 가벼이 씻어 헹구는 햇살도
부러운 당신의 가을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
흥덕사 풍경소리 맑게 퍼지면
옛 고려의 스님들은 두 손 모아 합장하고
금속활자에 알알이 새긴 글자 글자들이
애민의 혼이 깃든 거푸집의 사랑 안에서 잉태한
어느 장인의 땀방울로 맺어진 결정체임을
천년이 흘러도 알게 합니다
어디 무엇인들 눈물이 아닌 것이 있겠습니까
기나긴 기다림이 없는 게 또 있겠습니까
가을, 저 알곡의 열매들
모진 천둥과 비바람과 싸워 이룬 훈장입니다
부디 넓어지소서! 깊어지소서!
나의 조국이여 민족이여!
우리 조상의 자랑스러운 얼과 혼이 깃든 직지여!
8. 직지의 고장, 청주
장 병 학
솔향기 뿜어내는 흥덕사지
여운 따라 굽이치는 산 너울
민족의 혼 불사른 백운화상의 얼
장인(匠人)의 피땀 빚어낸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금자탑.
사람의 마음 바로 보라는
부처님 뜻 깨닫게 하는 직지
게송(偈頌)에 젖은 연빛 자비심
은은한 꽃향기만이 남실남실.
붙박이별 바라보며 밤을 지새우며
심오한 고뇌 속에 쇠붙이 녹여 혼신 다한
기록문화의 도시 직지의 고장, 청주
문화창조의 뿌리 직지의 본향, 청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올이 등재된
금빛 직지 꽃피운 찬란한 직지꽃
지구촌 종말이 오는 그날이 온다 해도
직지꽃 향기만은 화알활 불타오르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
그리움 넘치도록 훌쩍이는
‘직지심체요절’형제 중 하권
직지 상권은 어디메쯤 잠자고 있을까?
부름에 화답 없는 통한의 노래여.
심오한 선(禪)의 요체 깨달아
한아름씩 뿜어내는 직지의 혼
깨치고 일깨우며 눈물로 손짓하는
남북한 민족 화합의 직지 찾기 운동
설운의 봇물 터지듯 내리 붓는다.
고고하게 틀어 앉은 고인쇄박물관
불심으로 거듭나 새롭게 복원 된
고려의 옛터 흥덕사지 금당
정성어린 직지풍경은 간 곳 없고
고려의 금속활자 영혼만이 휘영청
애잔한 직지물결도 떠나질 못하네.
마알간 서편 하늘가 해질녘,
올곧은 삶 줄줄이 붓질하며
직지마음에 녹아내린 무심천의 으악새들
비움의 나래 펴듯 출렁이는 은물결
노을빛 무심(無心)만이 깊어만 가는구나.
9. 직지의 꿈
김 희 성
우리는 이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버려진 암자에 천리마를 탄 이가 찾아왔을 때
생의 기록과 환영하듯 감기던 울음
그 견고함이 또 하나의 열매가 되어
직지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눈물로 밤을 견뎠습니다.
초록의 숨들로 큰 숲을 피우기 위해 모의하던 이들
손아귀에 깃든 탄생의 기쁨과
수많은 발자국이 직지를 기억해냈습니다.
숨이 되고 살이 되고
달게 여문 생이 되었던 나날들
완결을 이뤄내기 위한 시간들
꿈이 교차하던 밤은 실핏줄도 푸르렀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간절해졌습니다
삶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상 밖에 잠시 내려둔 꿈을 기억하기까지
환고와 환영의 시간들이
직지를 빚어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직지가 기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라를 건국하듯 함께한 떨림들이 마음속을 왕래하면
우리는 푸르러 직지의 한 생이 될 것입니다.
틈 사이에 드리운 숨 같은 말
우리는 서로의 문장을 열거하며
긴 마당을 만들어갔습니다.
밤을 자라게 하는 건
제 몸을 빛내는 유성들이라며
직지는 세상을 기록하는
한 끗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10. 직지, 가을 뜨락에서
노 동 주
풀섶에서 들려오는
가느다란 풀벌레 소리는
이 가슴 애타도록 그대의 음성입니다.
마치 그대 향한 이 마음
사랑의 이슬을 머금고
촉촉이 적셔오는 그대의 입술처럼
뜨겁습니다.
사랑은 왜 이토록 가슴이 저린지요
참을 길 없어
그대 닮은 단풍잎 한 장 입에 물었습니다.
산자락 짊어진 노을은
서녘 하늘로 번지고
그대 향한 그리움은 멈출 줄 모릅니다.
저기 불타오름을 보세요.
참 야속한 가을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렵니다
저 늦은 가을이 있었기에 그나마
내 사랑이 그대 안에서 잠들 수 있었으니까요
물들 수 있었으니까요.
사랑하는 그대 앞에서
들국화 꽃잎이
이젠 추운지 고갤 떨굽니다.
흥덕사지 뒤란에 번지는
단풍잎들은 어쩌면 그대 숨결 닮았습니까
타다타다 지치면
바닥에 뒹굽니다.
마치 그대가 이곳 본향이 그리워
도서관 뜨락에 애절한 마음만 나온 채 서성이다
눈시울 적신 그날처럼.
저 낙엽이 지면
겨울 한숨 침묵으로 저몄다
봄이면 연둣빛 미소를 자아내는
잎새들, 환생의 계절을 건너가며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그대의 몸짓스런 또 다른 봄이 찾아오겠지요.
무심천변 하늘거리는 벚꽃나무엔
그대 사랑
하롱하롱 꽃피우겠지요.
오늘따라
그대 품이 죽음처럼 그립습니다.
11. 직지(直指), 우리 가을에 만나요
노 동 주
하늘은 높고
바람은 정겹습니다.
하늘길 바라보면
그대 닮은 별이 반기고
바람결 따라가면
그대 발자국 있을테니까요.
예 놀던 무심천엔
붕어떼 버들치 더욱 텀벙이고
갈댓잎이 서걱서걱 가을을 붙들고 있겠지요.
그 마음 그리워 그리워서
묶여있는 이 몸, 마음만 탈출하여
국립도서관 벽을 헤치고 나왔습니다.
그쪽도 가을이지요?
마음 따라 이곳도 가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계절도 닮아가는지요.
가을은 참으로 정겹습니다.
우리를 멍들게 하였고
만남의 꿈마저 흔들어놓았던
여름을 견뎌냈기 때문입니다.
언젠간 오겠지요 우리의 그 날이
만나면 반가워 온몸 으깨며 적실
눈물 젖은 해후의 그 순간이.
머지않아 하얀 눈이 내릴 것입니다.
들국화꽃잎에게 다가갔습니다.
고국에 매혹의 향기 배어 나오는 들국화
그 꽃송이 속으로 그리움 묻고 흐느꼈습니다
또한 다짐했습니다.
당신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나 견딜 수 있다고.
그날이 꼭 올 거라고.
찬 이슬 마시며 견디는 의지의 꿈
꽃잎을 기꺼이 피워 올리는 당신이 희망
철당간에서 다진 무심의 게송
백운화상의 가슴으로 울다 멎은 흥덕사지 풍경
그대 혼 살아 있음에
그 사랑 젖어 있음에
눈 감아도 우리는 언제나 또렷했습니다.
아리따운 고국(古國)이여!
향기로운 직지(直指)여!
12. 직지, 내 고향 하늘은
양 정 순
가을입니다 어머니!
지금부터 나는, 모국(母國)이 불러주는
늦가을의 향내음에 취하여 화두부터
어머니의 가슴에 포개어 외쳐봅니다.
따뜻했던 모국의 어머니
지금은 기억조차 져버린
그 아득한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누군지도 모를 손에 이끌려 낯선 땅에 왔습니다.
아마도 저는 이쯤 가을의 문턱에서
들국화 꽃잎도 찬 서리에 마르고
늦가을 비가 혼을 덮는 을씨년스런 가을이었겠지요.
흥덕사 뒤뜰엔 솔잎 향기 맵게 내리고
감나무엔 홍시가 수줍은 묘덕의 미소로 열리는 뜨락
풍경은 가는 바람에도 염치없이 울어대고
배고팠던 까치가 모처럼 달콤한 포만에 빠지는
고향엔 가을 사랑이겠지요.
그뿐이겠습니까
무심천 갈댓잎은 하얀 꽃잎이 포말로 구르고
희게 희게 무심의 미소 짓던 그날이 그립지만
지금은 먼 산이 되어 버린 아픔의 현실 속에서
스스로의 눈물을 꺼내
그리움의 붓에 적셔 가을 편지를 씁니다.
어느 시인은 그러더군요
시를 읽다가 시를 짓는다고
저는 고향을 그리워하다 보고픔의 먹물을 적셔
눈물 편지를 씁니다.
언젠가 돌아올 그 날이 오겠지만
이 현란한 가을의 정취를 스스로 안으며
노오란 은행잎을 가슴에 깔았습니다.
제가 사는 이곳에도
석양빛에 물드는 가을 들장미가
봄이 그리운 사랑의 전령처럼
슬프게 떨고 있습니다.
하늘에 퍼져가는 저 먹구름도 푸른빛이 그리워
청운(靑雲)의 옷으로 갈아입는데
세상은 왜 이리 아픕니까
뒹구는 가을 낙엽도 왜 그리 슬퍼 보입니까
나의 숨겨둔 희망은
여지없이 가을녘을 물들이는 노을처럼
맑은 사슴의 눈빛으로
그쪽 향해 다가갈 것입니다.
기다림이 희망입니다.
13. 직지 흥덕사
서 인 석
고요한 산사의 풍경 소리 귓전에 들려온다.
흥덕사 산자락을 깨우듯
다시 태어난 직지심체요절이여
늦은 밤 호롱불 불 밝히고
빠알간 숯덩이에 금속활자 꽃이 피니
새로운 활자가 화사하게 피어나듯
청주 흥덕사에 꽃이 아름드리 피었구나
뚝딱뚝딱 나무망치 두드리는 소리
쇳물 붓는 소리
활자 다듬기 소리
조판 위에 하나하나 새겨진 너의 모습이
무심천 물속에서 아이들 첨벙대는 소리처럼
청아하고 아름답게 들려온다
아 고려 말 고려인들이여
풀잎 위 발자국 새기며 한 걸음 한 걸음 왔는가
양병산 붉은 너울이 가슴으로 밀려와
온 산의 울림을 주는 장엄한 종소리처럼
온 세상에 울려 퍼져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되었구나
침략 받고 불타고 인고로 틔운 처절한 잎사귀는
다시 태어나 새로운 잎이 돋고
청산을 돌고 돌아서
청주 흥덕사 금속활자본이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되어
물 좋고 산 좋은 곳 청주 흥덕사 자랑이니
한밭들에 내려앉아 문명의 목적을 향유하듯
세계기록문화유산이 되었구나
14. 직지, 그대 향한 고백
안 소 현
천상에 걸린 초승달마저
그리움의 살이 돋아 커져만 가는데
그토록 눈부신데
심연의 깊은 곳
오장의 뿌리 끝에서 밀어올리는
그대 향한 몸부림인데
한 번도 눈길 주지 않는
그대는 누구신가요
꿈속에서나 당신을 만져보기 위해
입 맞추기 위해
밤새도록 식은땀에 범벅이 된 지도 오래되었건만
140억 개의 신경세포를 마비시켜
이젠 몸져누워야만 하는 당신은 어디 계신가요
야속한 님이시여!
속절없이 속절없이 세월만 가고
흔들리는 나뭇가지 뒤돌아보지 않는 새처럼
훌쩍 떠나간 지 어언 백여년.
그런 당신을 간절히 기다리다
쏟아낸 나의 눈물은
강이랄까 바다랄까.
흥덕사지 빈들에 앉아
솔밭 사이 백운화상 혼으로 울어대는 산새 소리
철당간에 다진 게송의 말씀
무심천에 씻은 그 마음 모아
무릎 꿇어 기도합니다.
그날이 올 때까지
해후의 그 날까지
그러면 나는 그대에게
노을이 타는 저녁
잦은 별들도 모두 숨을 죽인 젖은 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눈물 꽃 우거진
사랑의 고백을 하겠습니다.
15. 직지(直指) 난초 앞에서
노 동 주
달이 뜨면
청초한 잎새를 오므린다.
수줍은 새악시야.
지난날들에 내가 사랑한
천년의 그리움은 그냥 두기로 하자
별이 무성하게 피어오르면
그 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끝내 별들 속에 갇혀 숨어버리고 싶은 순정.
사랑한다는 것은 단풍처럼 물이 드는 일
그립다는 것은
못 견디어 죽고 싶다는 몸부림이다.
나 여기 수천 번을
아니아니 천년을
천 번도 더 고꾸라졌다 살아났다.
고국(古國)이란 큰 별이
밤이면 속절없이 피어오른다.
만질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어 함부로 번져오는
내 마음속의 불화살
이곳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오랜 삶을 살아오면서 처음
짝사랑이란 시집을 꺼내 읽어보았네.
내 가슴 안에 살고 있는
찢어질 듯 보고픔이 그대 향한 짝사랑이었다.
내가 지은 시집을 내가 꺼내 읽은 셈
고국이란 그 사내는
한 번도 만남을 허락한 적이 없었던
냉랭한 사람
참 야속했다
더 이상 그 인연이 아니길 기도했다.
기꺼이
그날이 온다면 나는 이 고통과 설움이
생애 전부여도 행복하다.
달밤에 괸 저 난초꽃이 오늘 밤은
정령 아름다워라.
네 푸르름 고와 모둔 청초한 잎새여
내 꿈속에서 마음껏 그려냈던
고요히 흐르는 본향 땅 무심의 언덕에
고슬고슬 피어나는 직지꽃 같다.
16. 직지의 울음 받아내며
윤 성 해
이름만 들어도 뿌듯한 금속활자본 직지
불멸의 이름을 얻고도
이국땅에서 우는
애절한 울음을 받아내려고
온종일 주자소에 머무릅니다.
두께와 크기에 맞게 글자본을 양각하고
판형자본 붙인 어미자에
주물토를 채웁니다.
밀랍을 녹여내고 쇳물이 굳으면
가지 쇠에 달린
활자를 떼어내어 배열하여
조판의 수평을 잡아 놓고
유연먹을 골고루 칠하고
한지에 고스란히 받아냅니다.
내 가슴 조여오는 울음소리 잦아집니다
지금 감옥 같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위풍당당히 걸어나오는 직지의 울림이
행간을 뚫고 나와 나를 사로잡습니다.
마냥 직지에 매료되어
주자소에서 보내는 이 작은 노력이
프랑스 국립도서관 빗장을 푸는
마침맞은 열쇠라고 믿고
직지 반환의 길에 동참하렵니다.
*주자소- 활자의 주조를 관장하던 관서.
*어미자- 한지에 글을 써서 나무에 새긴 완성된 글자
*판형자본-한지로 글을 써서 나무판에 붙인 글자
*유연먹-기름먹
17. 오래된 숨
이 강
손끝으로
툭 튀어나온 글자를 쓰다듬자
오래된 숨을 토해내요
나는 안녕, 하고 웃어요
먼지가 폴폴 날리는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
책꽂이 구석에 숨어 있다가
퀴퀴한 책 내음에 푹 빠져 일하던
한 사서의 손에 이끌려 세상으로 나왔대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곳에서
터질 듯 쪼그려 있었대요
어디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고향 사람이 말을 걸었대요
나는 헤아려보아요
먹이 묻은 자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스쳤는지
손끝에 간신히 잡히는 금속활자 하나가
오래된 숨을 뱉어내요
나는 그 숨을 따라 거닐어요.
한 번 들이쉬면 글자들이 옷을 입고
글자들이 춤을 춰요
흥겨운 춤사위 속에 온 우주가 스며들어요
세상의 이야기를 가득 담는 그릇이 되어요
반짝이는 별과 굴러가는 빛
흘러가는 물
푸른 산과 작은 사람의 이야기가
종이 위에 새겨져요
우주의 오묘한 맛이 눈가에 아른거려요
훅,
오랫동안 쌓였던 먼지를 걷어내고
직지를 살펴보아요
뿌연 악(惡)의 기운을 털어내고 사람의 마음을 열어요
이제 미래의 숨을 쉬어요
선한 숨을 쉬어요.
18. 꽃씨의 시간
이 정 숙
도가니 속 꽃불은
무심천 녹일 봄소식이었을 거야
너의 옹알이 아지랑이 속 떠돌고
보춘화 향기 날아들 무렵
구리와 주석
합방 이루노라 만든 열기
흥덕사지에 깔렸을거야.
어느 구석자리 각자장 손길
조각칼 마술로 매끈한 글자 치켜들면
밀랍틀 만드는 금속활자장 시선 번득거렸을거야
암수의 틀 짜 맞추는 주조장 눈엔
불꽃 피워낼 순간 희붐하게 밝아 왔겠지.
장인의 혼 오롯이 녹아든 쇳물가지
쟁쟁 고려 땅에 울렸을 거야
모래 속 뜨거운 꽃 고개 내밀 때면
천년 먹여 살릴 민족 정기에
데지 않게 조심해야 해
봐, 봐
당간지주 당찬 기운 흥덕사 되살리고 있지
고이 간직된 치미
기와지붕 높이 걸리는 건
꽃 향기 퍼뜨리란 신호잖아
무심천 따라 회귀할거야, 직지
장인 본향 잊힐 리 없어
꽃숭어리 목 길게 빼고 엄마 소식 기다리는데
모래 본능 필연의 기억
되살려 내고 말거야.
*각자장-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기는 각자의 제작기능을 가진 장인
*주조장-활자를 주조하는 장인
*치미- 고대의 목조건축에서 용마루의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
19. 직지, 있어야 할 곳은
이 지 영
흥덕사
금방이라도 매케한 화약내가 일 듯
오랫동안 비워진 주인 잃은 한 자리
사방이 어지러운 공기로 자욱한 때
뿌연 시야 사이로
민족의 유산 하나 멀어져가고
낯선 이국의 먼지와 어둠에 갇혀
숨이 멎어버린 정신의 주춧돌.
600여년의 세월
온몸으로 격어 낸 우리의 시간을 뒤로
고매한 여인의 손에서
다시 깨어난 정심이여
직지의 티끌은
생경한 시간에 쌓인 먼지가 아니요
직지의 손때는
온기 없는 호기심의 손길이 아니다.
이제 밝게 걷힌 시야 사이로
비로소 품어야 할 잃어버린 깨달음.
비로소 빛을 발할 있어야 할 자리
후손을 향한 고귀한 말씀
그리운 혼과 낯익은 흙의 내음을 따라
이제 그만
순풍에 환영의 닻을 내리길.
20. 천년의 온도
임 진 순
누가 알까
시간을 건너는 온도를
하권만 남겨진 책 하나 있다
장과 장 사이를 펼치는 순간
오랜 시간 감았던 눈 뜨듯
빛으로 팽창되고 있었다.
빛이란 긴 시간 어둠을 뚫고 오는 것이어서
넘겨지는 페이지마다
최초의 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던 고려의 체온이었다
아비는 늘 폭염속 장작을 지폈다
천이백도 이상 달궈지는 불 앞을 지켜야했다
몸속 남아 있는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휘어진 등이 바삭바삭 말라가고 있었다
당신 몸에서 빠져나간 수분으로
쇳물을 만드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감당해야 하는 일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떨어지는 쇳물을
겨울 햇살 떨어지듯 바라보고 있었다.
한 자씩 살아나는 한지의 심장을 바라보며
죽어가는 당신의 심장에도 혈이 돌았을까
작은 반딧불이를
살아있는 빛이라 말하듯
빛의 한 벌을 직지라 부르고 있었다
맥박이 희미한 흥덕사에
살랑이는 금빛 나비 날아왔다
당신의 온도가 시간을 건너고 있다.
21. 나는 아직 기다린다
전 형 주
먼 여행 끝에 정착한 곳이지만
이곳은 내 고향이 아니다.
한때는 콜랭드 플랑시의 집에
또 한때는 중국의 낡은 문서들 틈에
내 존재를 잊고 조용히 묻혀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지만
익숙한 얼굴은 찾아볼 수 없다.
인자한 표정 진지한 눈빛으로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마주보던
청주시 흥덕사의 스님들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얼굴들
아주 오랜 시간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고향의 산과 들이 그립다
내 이름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제 나는 세계문화유산이 되어
여러 사람들과 눈을 맞대고 인사한다.
그러나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나를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그러나 누구도 헤아리지 않는다
나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깊이를
그러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돌아가려는 희망은 사라지지 않음을
나는 아직 기다린다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나는 여전히 소망한다
조국으로 완전히 돌아갈 그 날을.
22. 직지, 자화상
정 기 옥
숲에서 홀로 서 있는 나무
눕기도 하고 그늘에 젖어
별들과 햇살에 몸을 맡겨
함께 울창해야 하건만
그렇지 않아 외롭습니다.
이국의 밤은 깊어가고
별들의 재롱도 꺼져가는데
달빛마저 등진 처사
서러워 서러워 우옵니다.
바다를 외로이 지키는 등대
먼바다의 무인도처럼
홀로 정겹습니다.
본향 땅, 봄이 오면
꽃 무리 지던 꽃 섶에
두고 온 친구들의 웃음소리
그립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외로운 사람끼리
그리운 사람은 그리운 사람끼리
성그는 밤하늘
고국이 그리워도 별처럼 멀고
무심천은 보이지 않아도
항시 마음 안에 출렁이듯
제 얼굴에 비친 제 모습이
바람 없이 울어대는 풍경인 양
쓸쓸합니다.
선생님 없는 교실을 혼자 지키며
어릴 적, 노을에 눈시울 적시던
볼이 고운 가녀린 소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나는 해질녘 측은 듯이 앉아
그쪽 향해, 턱 괸
직지 닮은 아이입니다.
마음 둘 곳 없어
수 없이 별을 헤던
천년의 긴 세월
흔들림만큼 뿌리를 뻗는 나무들처럼
그날을 향한 그리움만큼
질박의 소망은 커져만 갑니다.
직지, 나는
하나님과 부처님이 기도로 태어난 감람나무
뿌리 끝에서 영혼까지 타버린
나목입니다.
23. 할머니의 직지
정 순 신
할머니
지난 여름
흥덕사에 다녀온 것이
할머니를 배운 마지막 여행이 되었어요.
할머닌 활자를 만드는 것이
꼭 음식 만드는 것 같다고 하셨지요
사람 위하는 건 다 마찬가지라고.
아비자와 어미자가 거푸집에서
글자를 낳는 것이
사람 사는 일과 다름없다 하셨지요
사람이 자식을 맹그는 건
이 땅에 자기를 냉기는 게 아니라
더불어 세상을 아름답게 맹글기 위한 거라 하셨지요.
직지(直指)
저 글자가 무언지는 몰라도
차가운 쇳덩이에 뜨거움을 보태어
세상에 빛을 주고 있다 하셨지요.
검은 쇠가 반짝반짝 빛나는 건
사람들의 크디큰 염원이 담긴 까닭이라고도 하셨고요
할머닌
글자 맹그는 저니들에게
냉수라도 한 잔 건네주고 싶다 하셨지요
세상 살믄서 가슴 한켠에 쌓이고 묵힌
먹먹한 가슴, 사태 같은 분노, 화산 같은 울분을
세상 밝히는 글자로 끄집어내는
용암처럼 터질 것 같은 그 가슴
눈물조차 말랐을테니
냉수라도 한 대접 건네어
담금질해주고 싶다 하셨지요.
살아가는 일은
가슴 마다 맺힌 응어리를 쇳물에 녹여
저마다 글자 지어내고 닳아지도록 닦아내어
그래서 환한 세상 맹그는 거라 하셨지요.
24. 직지심체벚나무
조 영 행
흥덕사 돌계단에 앉아 읽습니다
나뭇잎들 빼곡하게 금속자로 찍힌
봄벚나무, 직지 그 푸른 주자본
저 많은 말씀 만들고 있느라
뿌리는 어디만큼 뻗어갔을까요
햇살은 말씀 잘 들리라고
우듬지에 모이고
바람은 구문의 갈피를
천천히 넘겨줍니다.
푸르게 조판된 문장과 봄볕 깊은 여백들
이 산 저 산 전하는 뻐꾸기
읽고 또 읽느라
나뭇가지에 붉은 발을 오므려 밑줄을 긋고 있지요
이따금 이해할 수 없는 구절이라도 있는지
허공을 향해 묻기도 합니다.
오자도 탈자도 없다고 자신만만 피어났을 겁니다만
흰민들레 지면 패랭이꽃 불두화 위로
오탈자를 골라내며
직지심체벚나무 설파 중인 호랑나비 한 마리
내 고개도 끄덕끄덕 받아 적고 있습니다.
청주흥덕사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
꽃빛으로 받아 읽는
봄벚나무직지심체 한 권.
25. 직지(直指) 그대 향한 사모
임 준 빈
지난날들은 너무 길었습니다.
산 위에 산 하나 있고
강 아래 강 하나 흘렀습니다.
꽃다운 당신의 체취는
흥덕사 뜰 안에 핀 연꽃 위에 얹어 놓고
물그림자 되어 떠나갔습니다.
꽃비보다 은은한 그 몸짓은
짧은 여행이 아닌
아주 긴 작별의 시작이었습니다.
뜻 모를 약속 하나 남겨둔 채
떠날 것이 두려워 미리 보내는 슬픔처럼
겹겹한 산기슭을 휘돌아 날아갔습니다.
우리들은 그랬습니다.
진실한 이별 아닌 유혹의 사슬에 가려
어린아이의 철없는 눈망울로
당신의 가는 길을 바보처럼 인정했습니다.
이제 와 무심의 강물 소리 들으며 깨우칩니다.
유혹의 입맞춤 낙엽보다 가벼운 거래의 수치심
찰라보다 더 짧은 삶 사위어
푸른 하늘은 절망의 옷으로 갈아입고
당신은 이미 다른 세상을 꿈꾸고 있었음을
느지막이 꿈결처럼 알았습니다.
억겁의 인연 갈기갈기 찢어놓은 채
떠나가신 당신의 여운 앞에
설운 가슴 쓸어내려 참회하며 통곡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농익은 그리움, 밤하늘에 박힌 큰 별 하나가
소리 내어 누군가를 부릅니다.
해후의 그날을 위해
달빛이 괸, 찬란한 별빛을 그려
밤바다에 아롱지는 금모래빛 사리를 모아
시든 별들을 깨웁니다.
당신 앞에 우리들은
고개 숙인 부끄러운 속죄.
정녕 눈부신 아침의 태양을 맞이하려
황홀한 자태 애써 감추는 저 노을처럼
우리는 이제
침묵보다 깊은 희망입니다.
26. 꺼지지 않는 임의 등불입니다
성 낙 수
오래 전, 성안길 비껴 흐르는 무심천
잔잔한 물결 거슬러
몸에 배인 창조의 태생으로 수많은 시간 흘러 빚어
정 깊게 좋은 임의 등불입니다.
격하게 타오르는 불길 이겨 내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로 태어나
굳게 엮어 자리 마주해 청주 흥덕사의 직지로 불리는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임의 등불입니다.
신명나게 감동 주어
안타깝도록 소중해 괜스레 눈물로
수만 번 불러 지겹지 않은
깨알 같이 소중한 기쁨으로
골 물길로 흘러 욕심 없는 달빛처럼
소중한 임의 등불입니다.
따사한 임의 눈빛에 격하게 반하여
임의 잔잔한 목소리에 빠져
세상 어디에 비취지 않는 곳 없이
모두를 위해 꺼지지 않아 막중한
임의 등불입니다.
27. 직지, 눈 오는 날에
정 기 옥
바람결에 날아드는
저 눈발들이
그대였으면 좋겠습니다.
푹푹 쌓이는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과
눈길을 걸어가노라면
뽀드득뽀드득
보드라운 밟힌 소리가
그대의 음성이었음 좋겠습니다.
거기다가
댕그랑 댕그랑
향그런 솔잎 향기 사이로 뿜어나오는
흥덕사 풍경 소리
더욱 자욱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편
겨울지는 산사, 고즈넉한 뒤뜰
잿빛 도포 옷 입고
가지런한 걸음걸이로
자가웃 폭설 밟고 나서는 비구니 스님
그 뒷모습이 묘덕스님 같아 정겹습니다.
눈이 오는 날은
이래서 참 좋습니다.
그대여서 좋고
다가와서 좋고
함께여서 다행입니다.
그렇듯 온통
그대가 되어 오시는 이 눈부신 날
겨울나무 가지를 딛고 오르는
이내 눈꽃 사랑입니다.
내리붓는 하늘 비탈
하얀 꽃송이 속
흰 나비처럼
내 마음에 살포시 앉으면
애타게 사랑한
어느 구술(口術) 고운 시 낭송가는
그대 혼 담아 노래하겠지요.
직지, 그러면 그날 밤
그대 모습 환해지고
더 구체적이어서 몹시도 황홀할 거외다.
눈이 오는 날은
그대 있으매
슬퍼도 행복합니다.
가령,
그대 몸짓 바람결처럼 스러진다 해도
그것은 해후의 그날을 위한
신의 마지막 용서
아름다운 소멸입니다.
28. 직지, 망향가(望鄕歌)
임 준 빈
잃어버린 추억
창자 쥐어짜는 하늘에
검은 공기들이 푸드득 날아간다.
감춰 둔 희망
그래도 새들의 곡조는 높아
푸른 공기들이 부리 톱에서 새어 나온다.
잃는다는 것은 새로 얻는다는 것
비움의 미학이다.
낙엽이 지면 나무들은
안으로 안으로 더 강한 의지가 굳고
찬 서리 내린 들국화는 내일의 소망을 위해
마지막 향기를 다듬는다.
어머니 손길 같은 고국
실개천보다 너른 냇물
백운화상의 혼으로 깃드는 무심천엔
지금도 노을은 붉게 타오르고 있겠지.
내가 떠나오던 날, 흙탕물을 일구며
이리저리 자발없이 나뒹굴던 어린 물고기들
저항의 몸짓들이 지금도 생생하여
두고 온 사랑 애달프다.
안 볼 듯이 울어 치던
흥덕사 추녀 밑 풍경마저 눈물 감추었으련만
이곳에 와, 애써 지은 저 하늘별들은
왜 이리 볼수록 총총한가, 분명한가!
그리움 사무칠 때마다 쏘아 올린 나의 기도
녹슬지 않는 별처럼 천년의 열매로 아롱진다.
푸른 하늘아 푸른 별들아
저 구름에 비껴 마음껏 지즐대는 민족의 숨결아
봄이 오면 꽃은 여전히 따라오고
파릇한 새싹을 밀어 올리듯이
이 추운 겨울은 끝없는 겨울이 아니다.
나의 사랑 장독 뒤란
시렁 밑 울 엄니 살던 곳
고국(古國)의 그대 있음에.
29. 직지(直指), 어머니
노 동 주
노을이 탐스레 익어가는
가을입니다 어머니.
이맘때면 나무들은
어머니 옷으로 마음껏 갈아입고
잠깐이지만 화려한 몸짓에 축제의
긴 여정에 들어갑니다.
한 해 잘 견딘 보상이지요
그 참음이 한 해 한 해 모여
천년에 이른 지금에서도
이루지 못한 한 깊은 그리움에 싸여
꽃 같은 감사와 행복
바람에 뒹굴기도 하고
무심의 환희에 빠지기도 합니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불러보던 외침은
어느새 새벽별 되어 비추고
가을빛에 열매들은
그 소리 담아 익어갑니다.
지금쯤 본향에는
은빛 조롱박이 익어가겠지요.
고향의 언덕 그리고 흥덕사지 뒤편
어머니 풋풋한 사랑 닮은
커다란 단감나무에도
제 애처로움 감춘 홍시가 주렁주렁 열렸겠지요
마치 묘덕스님의 웃음 마냥
붉은 미소들이 조롱조롱 피어났겠지요
금방이라도 잔잔한 걸음 모으며 거닐 것만 같은
가을풍경이겠지요.
무심천변엔 갈댓잎들이 하얗게 하얗게
아쉬움 지우며
한 잎 한 잎 이쪽을 향해 떨구겠지요
무심천 물비늘 따라 꽃비처럼 날아드는 갈댓잎이
지는 석양빛에 물들면, 이곳에서
제 보고픔 담아 바람결에 보내겠습니다.
그곳, 어머니 마음 뜰에
제 붉은빛 그리움이 흥건히 적셔질 때까지.
30. 어느 가을날에
김 창 영
참으로 슬픔을 사랑하는 까닭에
진실 하나에 별 하나를 꿴다.
진실로 기다림을 아는 아이라서
들풀에 젖는 이슬처럼
그대에게 안긴다.
무형물의 유형
고향 없는 사람의
봄 잔치 살구꽃이여
아아, 무심천의 벚꽃이여
그 마을에 꽃지는 저녁
노을도 슬퍼서 몸져누우리.
진실로 진실로 세상이 반겨서
꽃은 피는가
가령,
세상 끝이 어두워서 꽃은 꽃잎을 떨구는가.
직지꽃
이름 없는 이름에
누구는 환한 달빛이 되고
누구는 서러워 눈물을 단다.
“나는 숭고한 나라의
가난한 꽃 한 송이”
어느 늦가을날이었다
홀로 해변을 걷는데
새벽녘에 내린 이슬에
얼굴을 폭 가린 들국화가
칭얼대듯 아는 척을 한다.
“내게도 고향이 있느냐고
민족이 낳은 부모가 있는거냐고”
푸념 어린 한마디에,
찬 바닷바람이 달래려
흥덕사 풍경처럼 젖은 음성으로
그의 가슴에 안기어 흐느끼고 있다.
직지, 한민족의 혼
추녀 밑을 휘돌아 와
풍경이 전해주는 편지라면서
활자에 박힌 게송의 글씨
사랑, 용서, 상생
똘방똘방 읽어나가고 있었다.
31. 직지, 길을 묻는다
한 이 나
직지심경은
오래된 유적 마음의 길이다.
청주 나들목에서
강서동 반송교까지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고향을 내달릴 때 가벼운 마음이 한 걸음이다.
철당간을 지나
무심천을 건너
구부러진 골목과 산책로를 휘돌아가면
고려의 직지에 닿을까, 흥덕사에 찍어낸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칠백년의 숨결을 맡을 수 있을까
글자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지 길 속에 길을 찾는다.
고인쇄박물관에 와서, 복원된
직지에게 세상의 길을 묻다
종이를, 쇠와 불을, 먹을 다루던 조상의 엄한 손길
글자 한자 틀릴 때마다
마음 졸이며 혹독했을 정신의 치열함을 읽는다.
누대로 전해진 어둠 속 불빛
심법을 만난다.
사람의 마음을 맑고 바르게 보면 얻어질
마음공부를 되뇌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훤하다
직지의 슬픔과 자랑이
무심천 가득히 윤슬로 반짝인다.
32. 직지
이 서 희
쇠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따뜻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뜨겁게 태어났으나
두드려지고 식혀지면 그 뿐
다른 것을 해치거나 다치게 하면서
쇠는 자신은 그렇게만 사는지 알았다
뜨겁게 태어나
다시 두드려지고 식혀질 때
쇠는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들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정성으로 새겨진 이름들을
종이 위에 찍어보며 쇠는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꼈다
쇠는 종이를 사랑했고
그 종이를 넘기는 손들을 사랑했으며
자신이 만든 것을 보는 반짝거리는 눈과
넓어지는 세계에 황홀해했다
하나하나의 글자들은
종이 위에 피어나는 꽃이었고
그것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며
퍼져나가는 향기였다
쇠는 꿈을 꾼다
자신이 만든 세상을 보며
향기로 가득찬 세상을 꿈꾼다
그러면 자꾸만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이었다.
33. 직지의 편지
이 미 순
책을 열면
금빛 뜨거운 쇳물소리가 들린다.
검은 먹물로 온몸을 물들이고 활자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볼 때까지
참선하는 자세로 앉아보라고 이야기하는 듯
오래, 아주 오랜 시간 가부좌를 틀고 있다.
직지는 백운화상의 애타는 가슴 품고
나를 찾아오라고, 찾아달라고 손짓하는데
먼 이국의 도서관에서 기다리는 직지심체요절.
고향 청주 흥덕사 돌담에 앉아
부레옥잠 부푸는 소리 들으며 탑을 도는 꿈을 꾼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솔바람이 살랑살랑
책장 넘기는 소리를 듣는다.
햇살을 똑바로 줄 세우는 기와지붕
고려의 햇살도 저처럼 올곧게 서 있었겠지.
한 벌의 책자를 완성할 때마다
고인쇄박물관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
여러 사람의 땀으로 찍히는 한 페이지
그리운 페이지에 프랑스 우표 붙은
직지의 편지를 끼우며 합장하듯
나는 책을 덮는다.
34. 쏘가리, 직지심경
김 도 연
미호천 쏘가리 힘차게 물결 가르면
봄이, 온 거다.
그 물결소리. 흥덕사 앞마당
연못까지 흘러 직지를 짓는다.
양병산 정자나무는 제 그늘로
연못을 파고 있었던 거다.
정자나무 뿌리는 저 미호천 깊은 곳까지
연결된 수로이자 산소 구멍이다.
물고기들도 가끔씩 흙의 제 기원을 찾고자
경계 넘어 흥덕사의 기억을 더듬으며
알아볼 수 없는 필체로 책을 엮는다.
알알이 차오르는 자음과 모음을 찍어 본다.
쏘가리는 무슨 글자를 자꾸 쓰면서 헤엄쳐 온다
몸에서 빠져나간 쏘가리 알들이
“백운화상 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을 봉독하며
직지 상권 토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불공을 드린다.
지느러미 후다닥후다닥 물방울을 엮듯이
흥덕사 그늘 연못에 금속활자 금형을 뜨고 있다.
35. 직지, 그날이 올까 봐
안 소 현
슬퍼도 슬퍼도
난 참아낼 수 있어.
그리워 그리워도
난 이겨낼 수 있어.
저 하늘벽을 넘는 뭉게구름을 봐
저 들녘, 찬서리에 떨고 있는 들국화를 봐
그날이 올까 봐
그날이 찾아올까 봐
이렇게 그렇게 가고 있는 거야
죽고 싶을 만큼 아파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지만
무너지는 가슴 추스르는 거야
살아가는 일이란
천둥과 벼락을 맞으며 꽃을 피워내는
한 송이 떨림 같은 것.
언젠간 찾아올 거야
기필코 맞이할 거야
하루에도 수천 번 부서지며
하얀 포말을 이루며 꽃이 되는 파도꽃처럼
어느 외딴 섬 갯바위에 부딪히며
흘린 눈물로 웃음꽃을 게워내는 풍란처럼
우리는 가야 해
이겨내야 해.
슬픔을 슬픔이라 하면 안 돼
그리움을 그리움이라 하면 안 돼
그것은 우리를 좀 더
굳건히 일으키기 위해 꺾이지 않는
갈대의 속울음 같은 것.
오늘은
저 밤별들의 속삭임이
따스하게 들리는 겨울밤
기도하듯, 무릎 꿇듯
그 자릴 고집하는 별들처럼
나의 마음은 날마다
그쪽을 향해 눈부셔, 슬퍼도 기뻐!
너(故國) 하나로 난
살아가는 이유.
36. 흥덕사의 꽃, 직지
노 영 숙
고려 475년 한반도를 감싸안은
아취와 기상으로
천년의 바람타고 하늘에 가득하다.
고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가부좌틀고
우주, 자연, 진리를 깨달은 지 100여년
찰라의 “할” 고함에 긴 숨 쉬어본다.
청주목 흥덕사에 석찬과 달잠이
차가운 금속덩이에 생명을 부어
고동 소리 지축을 흔들고
가는 동자꽃 영롱한 지혜는
고려인만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무심으로 흐르는 물줄기 따라
참선하여 마음을 직지할 때
백운 아래 기나긴 눈바람에도
우뚝 선 우암산 정기는 늘 푸르고
묘덕의 널리 베푼 보시는
돌고 돌아 불꽃으로 타오른다.
아직도
맑은 바람과 흰구름 친구 삼아
잃어버린 빛바랜 화두 한 쪽 찾으려는
직지인의 자긍심은
지금 이 순간 가슴에 열정의 불 지피는
고려 황제의 꽃 중의 꽃이다.
37. 직지(直指), 너에게 부르는 노래
오 만 환
노을빛 붉게 타오르는 무심천을 걸었어
그대 없이 흐르는 저 물줄기
나는 보고픔 넓어지고 싶어 강물이라 불렀네.
그대와 나를 위해 기다리는
나룻배 한 척
우리는 나란히 앉았네.
어젯밤 꿈결이었어.
벚꽃 휘날리는 꽃비 사이로
그대와 난 마주 앉아 하얀 미소를 보냈네.
우리는 없어도
영혼의 불빛은 남아 천년으로 타오르고
약속은 잊었지만, 희망의 노래는 멈출 줄 몰라
저 강물은 바다를 향해 그치지 않고 흘러갔듯이
우리 그날을 위해
더 이상 슬퍼하지 않기로 해.
그리움은 별이 되어 빛나고
슬픔은 바위 되어 무심하지만
우리는 땅과 하늘 사이
우람한 천년의 나무
한마음으로 살아왔듯이
여기서 머무를 수는 없어
아픈 기억들은 저 하늘에 뿌리고
슬픔은 구름 속에 묻으면 돼.
내가 부르는 너의 노래
그대 향한 몸짓
저 별들이 깡그리 악보가 될 때까지.
하늘은 숭고한 우리의 무대.
그리고 둥근 달은
혼과 믿음의 지휘자야.
저기 하늘빛 재 너머
어디론가 정처없이 흘러가는 흰구름을 봐
언제나 우리 마음 곁에서 응원하며
온몸으로 박수치는 관객이지.
38. 직지 탄생 설화
김 수 진
노송은 매일밤 꿈을 꾸었다.
미동조차 없던 밤, 망망대해를 떠돌던 활자들의 행열
활자들이 흥덕사의 지붕 위에 앉은 날
바람은 꼼짝을 하지 않고
노송은 발자취를 따라 시경(詩經)을 읽었다.
누군가는 그 형상이 마치 불경을 읊는 수도승 같다고 했다.
획과 획 사이에서 우주를 뒤흔들며
별자리의 흔적을 밟다보면
눈 앞에 아른거리는 건 죄다 밤뒤의 아침이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은 푸른 숨을 뱉었다
춤추길 오래 그것이 움직임이
그리운 누군가에게 남기는 편지 같을 때
직지는 목마른 기억 속에서 태어났다.
바람은 동전 한 닢 입에 쥐듯
무언의 뿌리를 활자로 새겼다.
계절은 비워내도 피어나며 내리사랑 하였지
숲속을 떠돌던 길손들도 아름다운 계절에 안식을 누리던 해
직지는 그렇게 긴 시간을 깨었다.
사방에 배열된 작은 소란
세상을 만들어가는 연습은 여전히 쉽지 않고
노송은 제 몸 곳곳에 별의 뿌리를 수록했다
깊은 밤 시작된 위대한 파동에
아옹다옹 모질게 울던 생들
직지는 감탄하듯 바람을 고이 접으며
방대한 역사를 풀어낸다.
어둠을 씻어내던 고촉(高燭)의 전등
최초의 불빛은 오래도록 별이 되어
이내 천년의 하늘도 환하게 꽃피웠다.
39. 밤의 탁본
김 영 욱
밤의 문선공이 황금빛 낮의 들판에서
낱알의 자음과 모음을 타작하고 있다.
만추의 논틀밭틀에서 별의 활자들을 골라내고 있다.
밤의 식자공이 가을 별자리를 짜맞추고 있다.
기둥 하나 세울 터도 없는 허공에서
폐가수스 사각형의 아귀를 망치로 두드리고 있다.
밤하늘 드넓은 먹지 위에 올록볼록
피어나는 연꽃의 화두(火斗)
폐사지의 거푸집에서 안드로메다까지
빛나는 흥덕사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올려다보라!
백운화상이 심어놓은 부처님 말씀
그 뿌리에도 바람이 들어
뜬구름 떠받든 불당의 처마 밑으로
금박 두른 사족가지 거느렸으나
모든 백지의 본문은 이미 완성본이라
요사체의 가로세로 띠살문에
칸칸히 채워놓은 불립문자.
은하수에 시리도록 담금질한 눈빛만이
그 금속성의 필체를 알아보나니
평생 쌀 한 톨에 좌석을 새긴
어느 눈 먼 필경사
굽은 손가락이 진짜 직지라!
밤의 인쇄공이 천체의 윤전기를 밤새도록 돌리고 있다
윤장대를 굴리며 기도하는 까막눈 어미의 마음으로
하얀 새벽을 출력하고 있다.
40. 직지의 기억
강 수 화
오래된 북소리가 안개 속에서 운다
바람은 오래전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고
차가운 칼날은
새파랗게 반사되고
노기에 왜적을 마주한
당신의 투명한 눈동자는
날선 소름이 된다
깃발이 펄럭이자 멀리서
빈 가슴 졸이는 늙은 노모가
어둠을 응시한다.
당신의 이름의 운(雲)이 같아
흐르는 시간에 멈추어
박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얽히고설킨 것들을 끊자
물길은 구불거리며 흘러가고
번지는 그리움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머물고 있다
얼어붙은 시간속을 녹여
흥덕사 올라가는 길
나무의 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가면 하늘의 길이 열려
한 획이 백성이 되고
한 획이 부처의 넓은 자비 되어
녹아있는 언어 하나가 되었다
스님과 살고 있는 직지
가끔은 옹이진 손으로 다가오는
다정한 속삭임에 웅크린 몸을 뒤집자
직지의 꿈은 세상과 하나가 되어
쓰다듬는 손길마다 스며드는 언어들
별처럼 빛나고 있다.
직지는 혼을 담아 정교한 틀 속에 일렬로 서서
수군거린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천년 시간 속 직지가 피어난다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 기억하며 가슴에 새긴
41. 직지(直指), 자유에 대하여
오 만 환
남들은 한없이 편해지는 것을 자유라 한다.
구속의 반대라 한다.
그러나 산비탈에 핀 한 송이 꽃을 보아라
바람과 천둥, 그리고 비와 눈발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얻어지는 삶의 향기
그게 바로 진정한 자유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별처럼
거센 파도 에둘러 굴복하는 파도꽃처럼
자유는 전쟁 같은 슬픔을 사랑한 속죄.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없다.
이미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다만 그들이 누리고 행복해하고 있을 때
어느 한켠에서는
그 기쁨을 위해 눈물 흘렸다는 것을
그때서야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거듭 말하고 싶다.
자유는 또한
그 자체, 자유로움을 알려 하지 않는다는 진실도.
나는 그 자유를 버린 지 오래다
나는 그 자유를 획득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 문헌실
오~랜 세월은
가장 향기로운 자유였는지 모른다.
뿌리친 그 자유를
고국은 나를 진정토록 지켜주려고 한다.
민족은 나를 뼈의 혼처럼 인식시키려 한다.
내가 사랑한, 내가 그래도 의지했던 그곳에서……
하지만 지금은 이국의 땅,
어쩌면 신실한 신이 선물한
별과 나눈 천년지기 무심(無心)의 삶이여.
언젠가 하얀 등이
버려도 화등처럼 켜질 것이다!
42.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성 낙 수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수백 년 고된 세월 참아 이겨 남긴
위대한 불멸의 이름자인 직지여,
흥덕사 직지여, 청주 흥덕사 직지여.
고운 노래 위해 속을 채우지 않는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으로 한 올 한 올 풍경 소리 엮어
탄생한 직지여, 불멸의 사랑이여, 영원한 임이여.
화롯가에 둘러앉아 나누던 정겨운 이야기로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제가 다가가서 감히 당신의 탄생을 위해
다 바쳐 고생한 스님들의 소중한 이름자
큰소리로 찾아 드릴게요.
눈썹 짙은 경한 스님, 눈매 고운 묘덕 스님,
눈빛 매서운 석찬 스님, 잔잔한 미소의 달잠 스님
이제 떠나지 마셔요.
오늘, 내일, 모레
쉼 없이 정이 물린 목소리로 불러 드릴게요.
오랜 시간 한숨 없는 애환과
고민 섞인 흥덕사 안 터 정원과
뒤란에 풀꽃으로 남아 있도록
당신 거기 가만히 있어 줄래요.
위대한 불멸의 이름자인 직지여,
흥덕사 직지여, 청주 흥덕사 직지여.
43. 직지에 빠지다
김 동 인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수런수런 가을비의 속삭임이 돋았다
처음 그 모습을 보았을 때
혈맥을 휘도는 박동이 덜컹 덜컹 감겨왔다
즈믄날 빚은 달빛과
외길 따라온 바람을 한 데 섞어
정수리에 붓고는
글자에 갇히지 않도록 가지쇠를 들어내
뭉턱 뭉턱 불거져 오른 어미자의 얼굴들이
내게 훅 달려들었다
생각도 글자도 돌에 새겼으니 돌일 뿐이라고
다만 세상에 널리 나누고 싶어
돌을 깨고 나와야 했다고
고즈넉한 숨결로 빛이 나고 있었다
그 앞에 서면
나도 심지를 세우고
바람을 깎고 생각을 걷어 내고
모서리 난 마음 잘 다듬어
둥글어지고 싶다
빛살 하나로 폐부를 찌르는
활자를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가슴에 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44. 직지의 집
김 은 혜
형광등이 비워진 검은 집 안에서
오랫동안 태양은 차단기를 내렸다
누전된 창문을 바라보면 언제나
활자들이 음각을 파내어 들어왔다
플러그에 끼워진 맨살 아래에
자릿자릿 숨을 타고 오는 전류들
차가운 필라멘트 같았던 등짝은
감전된 글자들에 함부로 데였다
스위치가 내려진 직지의 시간
검은 집은 온종일 조명을 지웠다
물렁하게 피복된 전선을 잡은 채
좁은 통로를 온몸으로 열던 음절들
잡음처럼 콘센트에 바람이 분다
문 틈으로 새어오는 작은 먼뎃불빛
온몸에 번진 활자들 온통 반짝인다
집어등처럼 눈 시리던 백야의 문
발광하던 활자들, 관통하던 생(生)들
천체 속에서 검은 집이 켜진다
운석들이 쏟아지듯 환하게 직지가
깜빡깜빡 켜진다
45. 직지 쇠를 품다
윤 신 애
흥덕사 양각의 시간을 풀무질하며
어르고 달래는 느린 산의 풍경소리
운천동 허리에 남아 먹향을 우려낸다.
일필휘지로 석탑에 배열한 이끼와
작은 씨톨 하나에도 견성이 스며
허방도 올곧게 짚으면 직지이듯
미혹(迷惑)을 덜어내고 엇물린 자간으로
밀랍의 어미자가 거푸집에 몸을 풀고
쇳물을 녹일 때마다 산이 달아오른다.
한 획이 백운이고 두 획이 부처이듯
흙이 쇠를 식히다가 데인 마음 놓으면
금속의 활자 꽃들을 절마당이 품는다.
46. 마음의 조판
김 강 인
마음에 조판이 필요한 날이면 직지를 생각한다
새털구름이 서툰 가로획으로 하늘을 덮은 저녁
흥덕사 뜰에 고요가 날개를 접는다
골똘히 고개 숙인 별꽃아재비는
흰 꽃잎마다 글자의 기억을 품고 있을까
박새들이 오래된 글자처럼 뜰을 종종대고
바람은 내내
돌아오지 않은 구절들을 기다리며 서성인다
밀랍에 조각칼로 가로획 세로획 새길 때
노을이 쇳물처럼 그 자리를 채웠을 것이다
이르게 뜬 별들이 순한 입술을 빛내며
직지인심 견성성불
밤늦도록 소곤거렸던 먼 옛날
하늘은 사람의 마음처럼 돌고 또 돌아
같은 자리에 멈추고
나는 고개를 들어 별들의 군락을 바라본다
삼라만상이 하나하나 마음의 거푸집이다
이 조판을 마치면
나도 마른 등성이의 소나무처럼
한 꺼풀 벗고 단단해질 것이다
47. 직지심체요절, 그 부리로 아침을 열다
정 정 순
흥덕사 뜰,
굳은 밀랍 있네
씨방 그 속
초두변 새을변
퍼즐 맞추듯 노오란 입술
드디어 입을 여네
주형들 요철마다 촘촘히 부어진
자음과 자형, 자형과 자음
서로 입을 맞추며 지지지직
신열이 오를 때도 있었지
가슴이 트는 통증도 있었지
계속되는 불의 연단
어두웠던 거푸집 밀어내고
웅크렸던 말,
봇물 터지듯 밀려 나오네
흥덕사 뜰에 가득한 황금 언어들
고려금속활자 직지심체요절
노오란 금이슬 물고 문장들 또렷하다
네 입술의 말, 네 가슴의 말
또렷또렷하다
수수만 년 지지 않을 황금 꽃 사랑
직지심체요절,
그 부리로부터 동방의 아침이 열리네
48. 쇳물의 증언
최 병 규
토층의 눈물로 고였던 고대 콩알 같기도 하고
어쩌면 태초의 용암덩이의 파편 같기도 한
암울하던 그 층계에서 풍우로 스민 빗물로
겨우 연명해 온 선대의 체온들이 온기로 살아있다
용암지대에나 녹아 있을 법한 철기들의 언어
억겁을 두고 행성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처럼
통점이 도졌을 암울한 시대를 걸어 왔다
흥덕사지터에 비바람으로 쓸려간 자국과
고생대에 묻혀간 흔적처럼 어둠만 걸어 다녔다
불가의 반야심경마저 녹여내는 쇳물의 흔적을
콩알만한 불경의 토씨들에게 울먹이던 전설처럼
부처의 살점을 깎아내는 눈물대신 흘렸을 쇳물
그 통점의 비화로 맺혀있던 토층의 언어들이다
솔바람만 옛 정취로 풍경의 애환을 우는 절터에
마침내 새 날의 태양이 뚝뚝 동해를 흘릴 때
백운화상이 흘렸을 불경 대신 주조의 쇳물이 흘렀다
푸른 대지의 장소로 탄생한 한줄기 직지의 빛이
깊고 깊은 토층의 암흑 속에서 증언의 눈을 뜬다
49. 보라, 이것이 직지니라
최 효 림
이 어찌 한낱 돌과 견주랴
영원히 죽지 않는 흑표범
섬세한 경한(景閑)의 손길과 만나
밝게 빛나는 검은 별이 된 것을
어찌 정각(正覺)에 가치를 매기랴
위대한 깨달음의 기록
수백 년의 세월과 만나
비로소 뚜렷한 종이가 된 것을
황금보다 가치 있는 금속
만월의 비치우는 달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거늘
당신은 어째서 먼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는가
과거에 빛나던 금속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까지 빛을 발하는구나
이 어찌 누가 알지 못하랴
어느 지석(紙石)이 이를 대체하며
대체 무엇과 만나며
어떤 것이 되겠는가
어찌 영원에 시간을 재랴
타인의 시간이 무슨 의미이며
빼앗긴 진실이 어찌 무의미하며
너는 누구를 만나려 하는가
불꽃의 열정과 하나 된 금속
붉은 꽃의 고귀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거늘
당신은 어째서 우월함을 비교하려 하는가
가까이서 보라
더 자세히 보라
그래야 깨닫게 될지니
어찌 무엇으로 빗대랴
직지심체요절 그 자체
대한민국의 마음과 만나
이미 대한의 일부가 된 것을
보라, 이것이 직지니라
50. 흥덕사 추녀 밑에 풍경이 날아갔다
임 준 빈
마음의 돌계단을 딛고 오르면
솔향기 그윽하게 내리붓는
고려의 옛터 흥덕사지
바람결에 울어대던 풍경의 슬픔이
뚝 그쳤다.
그 설움, 멎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 떼어간 것일까?
울음마저 빼앗긴
아슬한 역사가 숨숨이 뒹구는 솔숲 사이
소스란 바람은 푸르게 펄럭이고 있다.
금속활자에 박힌
한 올 한 올 슬픔마저도
향그런 꽃 글씨로 부활하던
그날의 환희는 쇳물처럼 뜨겁고
무심(無心)의 정적만이 흐르는가.
한 활자 틀릴 때마다
40대의 곤장을 치른 피눈물의 참회
도가니에서 풀무질로 끌어 올렸을
활자장의 혼과 애국의 충절
자비로 불탄 시주의 온정 묘덕의 사랑
숲의 낙엽 되어 구른다.
설움에 복받쳐
매달려 아롱지던 풍경이
아예 족속마저 잃었다.
빈들에 아우성치는
이름 모를 혼령들이
이따금 까치 울음소리로 분노하지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금서(禁書)를 자유로이 낱장으로
넘겨볼 수 없는 설움.
거꾸로 치솟는 역사의 울분
그저 허공에 던질 수밖에 없는
쓰라린 운명, 위로받고 싶었다.
사람의 마음을 바로 보라는
직지의 가르침.
쇠 북소리 퉁기며 노을에 잠기는 고요.
화등(花燈)빛 물그림자 떠 있는 무심천엔
푸른 갈댓잎 사이로
달빛에 젖는 백운화상의 흐느낌이
물빛으로 담금질하고 있다.
연둣빛 잎새가
바람결에 촉을 틔우며
무성히 무성히 깊어지는 봄 숲
참회의 눈물로 돌아온 탕자처럼
흥덕사지 추녀 밑에
풍경 되어 노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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