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읍에서 합천과 대의면 방향으로 오리정도 가면 가례복지회관 맞은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 ‘퇴계이황선생유허비 입구’라는 자연석 비가 있다.
의령 가례동천 표지비석 골목길로 셋집 대문을 지나면 안내비가 나오고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마을로 내려와 멈춘 산줄기 끝자락에 비스듬한 검은 바위 면에 ‘嘉禮洞天’이 있다.
의령 가례동천이 있는 마을 가례마을에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에는 가례동천이 새겨진 바위 앞에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었는데, 가덕산이 밀려 내려 메웠다고 한다. 마을 앞의 白溪川은 자굴산 보리사에서 밥하는 뜨물로 내를 희게 되어 붙인 이름이고, 지금도 동네 아래 냇가에는 ‘백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주변을 흰들이라고 한다. 퇴계이황선생 유허비 입구와 가례동천 글귀 퇴계 선생은 21세에 허씨 부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부인을 항상 친구로 대하듯 하였다 한다. 처가는 칠곡면 도산마을로 초기에는 퇴계선생의 고향과 연관하여 小陶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퇴계선생은 의령 처가에 자주 들러 지역 선비들과 교류를 하는 한편, 때때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바위에 ‘가례동천’이라는 친필 글씨를 남겼다. 허씨 부인은 두 아드님 준, 채를 두고 결혼 6년 만에 숨을 거두었으며, 현재 허씨 부인의 무덤은 영주에 보존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퇴계선생이 직접 쓴 ‘가례동천’이란 유필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여자는 시집오면 친정 동네지명을 ‘택호’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가례동천’은 허씨 부인의 택호로 사용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퇴계선생의 아들 채는 외할아버지의 농사일을 감독하며 농사꾼으로 자라 21세에 정혼을 해 놓고도 혼례를 올리지 못한 채 급사하였다고 한다. 채의 무덤은 가매장 했다가 사후 10년 후에야 외할아버지 선산에 이장되어, 지금의 의령 무하리 고망봉 산기슭에 묻혀 있다고 전해온다. 가례동 퇴계이황선생이 이름붙인 처가 의령가례통천 글귀 퇴계선생은 생과부가 된 며느리를 친정으로 되돌려 보냈는데, 훗날 한양을 가다 민가에 하룻밤을 유하게 된다. 반찬도 입맛에 맞고, 아침에는 족의를 내 오는데 발에 잘 맞아 ‘안주인이 한때 며느리였던 그 여인일 것이다‘라는 야담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가례동천’ 네 글자를 보고 있으면, 퇴계선생의 말씀이 들리는 듯하고, 부인을 친구처럼 대하며,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는 듯하다. 가례동천 글귀의 바위벽은 가로 360㎝, 세로 240㎝이며 네 글자가 차지하는 크기는 가로 226㎝, 세로 30-45㎝이다. 우에서 좌로 배열하고, 가장 큰 ‘례’는 폭 33㎝, 세로 45㎝이다. 비바람에 ‘례’자와 ‘동’자, ‘동’자와 ‘천’ 사이에는 세로로 바위틈이 넓어지고, 세월의 무게로 음각이 마모되어 윤곽이 흐릿하다. 특히 ‘天’자는 식별이 어려운 상태이다. 오랜 세월로 글씨는 많이 훼손되어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 흔적은 역력하다. 아마 당시는 자굴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여기쯤에서 소를 이루었다가 다시 흘러갔을 만한 자리이다. 주변에 ‘퇴계선생유허비’ 비석과 글자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자연석비 하나, 70년대 세운 유적비 1개와 90년대 환경정화위원회가 세운 비가 달랑 바위가로 세워졌다. 그 앞으로 회양목을 심어 환경을 조성해 놓았지만 가례동천은 인가에 둘러싸여 경관조차 씁쓸하고 허허롭다.
유허비와 유허비 정화사업기념비 동천으로 드는 공간은 지금도 야금야금 침식되어 좁아진 듯 담 벽에 모신 퇴계님만 가례동천을 오가는 길손을 맞고 보내는 느낌이다. 퇴계선생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1501년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식(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은 안동사람이지만 경상남도 지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 번째 처가가 의령이고, 두 번째 처가도 거창이다. 곧 퇴계 선생의초취, 재취 부인의 집이 모두 경남에 있었다. 의령읍에서 서쪽으로 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가례면(嘉禮面)이 있다. 이 마을 이름을 퇴계 이황 선생께서 지으셨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례라고 하면 ‘혼례’ 를 뜻한다고 알고 있다. 아마도 퇴계 선생이 이 마을 허씨 댁으로 장가들고서 가례로 지어신 것이 아닌가싶다. 퇴계 선생은 21세 때 진사 허찬(許瓚)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허찬의 집이 현재 의령군 가례면(嘉禮面)에 있었다. 허찬은 본관이 김해로, 그 아버지 허원보(許元輔)가 고성에서 의령으로 이사를 하면서 의령에 살게 되었다. 하지만 퇴계가 장가 들 당시에는 장인 허찬이 의령에 살고 있지는 않았다. 퇴계 장인 허찬이 처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찬은 당시 영주(현재 경북 영주시)에 사는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허찬의 장인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 벼슬을 지낸 분으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욕심이 없고 해학을 좋아 하였다. 그러나 슬하에 딸만 둘이 있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허찬은 맏사위로서 문경동의 집에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허찬은 의령과 영주에 집과 토지를 소유하고서 이 두 곳을 자주 왕래를 했다.
퇴계의 부인인 허씨는 1501년 영주에서 태어났다. 퇴계가 사는 예안과 영주는 거리가 거리 멀지 않았다. 그리고 문경동이 퇴계의 숙부인 송재 이우와 같은 시기에 조정에 벼슬을 하면서 서로 교분이 있었다. 그래서 퇴계의 인물됨을 알고 문경동이 외손서로 삼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퇴계와 허씨 부인은 21살 동갑으로 영주에서 혼인식을 올렸다. 의령 허씨 집안으로 장가든 퇴계는 7차례 정도 의령을 방문하였다. 의령 처가에 들른 퇴계 선생은 청향당 이원등 지역 선비들과 교류를하는 한편, 때때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다. 이때 퇴계 선생이 낚시를 하던 곳이 현재 가례면 뒷산 밑 ‘가례동천’이라고 바위에 새긴 곳이라고 전해온다. 지금은 마을이 들어서 옛날 이곳에서 어떻게 낚시를 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는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퇴계 선생은 처가를 찾으면 낚시를 했던 장소에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친필 글씨를 남겼다. 가례동천은 ‘병풍을 둘러 친 듯이 아름다운 곳’이란 뜻으로 주변경치가 그야말로 절경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아 절경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지만, 퇴계 선생은 이곳 경치에 반해 글을 남겼으리라 생각된다.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계 선생의 친필 글씨는 비바람에 많이 마모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 고을 선비들이 가례동천 암벽 옆에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퇴도이선생유허비(退陶李先生遺墟碑)를 세웠다. 이 비문은 한말 대쪽같은 선비이며 우국지사인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가 지었다. 500년 이라는 역사를 간직한 가례동천과 우리나라 대표적 유학자이신 퇴계이황선생의 흔적이 살아 숨쉬는 경남 의령군에서 가례동천과 의령구름다리.의병박물관.충익사.의령재래시장도 둘러보며 시골의 훈훈한 인심도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 보시는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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