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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방패에서 소총까지
오래전부터 조선군에 대한 분석을 해보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동안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어 오다 이제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조선군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조선군에 대한 기존의 통념이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지금까지 조선시대는 비교적 고증이 잘되고 있다고 생각 해왔지만 꼭 그렇도 않더군요. 오히려 삼국시대보다 더욱 심각한 것 같습니다. 삼국시대는 그나마 사람들의 관심이라도 받고 있지만 조선시대는 역사적으로도 가장 인기가 없는 시대여서 그런지 그다지 관심조차 없는 듯합니다. 비록 못한 걸 못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다고 잘못된 부분이나 오류가 있다면 문제가 있겠지요.
특히 사극의 경우 매우 심각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건국초부터 심지어 구한말까지 줄기차게 등장하는 삼지창 든 포졸의 모티브는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조선은 원, 명교체기에 건국해서 소위 포함외교로 불리던 시기인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나라인 만큼 시기별로 군대의 모습도 다양하게 변모한 나라입니다. 가히 칼과 방패로 시작해서 소총부대로 마직막을 장식(?)한 나라입니다.
조선군의 편제
조선군의 편제와 구성은 시기별로 변화가 있고 전, 후기도 상당히 차이가 있어서 이 주제만으로도 책 한권이 나올 수 있을 정도여서 여기에서 상세히 소개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글을 쓰게 된 동기도 조선군의 잘못 알려진 부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조선군의 편제와 구성에 대해선 간략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조선전기 군대의 기본 단위를 간략히 도식화 한 것인데 조선군의 기본 단위는 '위'입니다. 위는 오늘날의 '사단'과 유사한 개념입니다. 1개'위'는 5개의 '부'와 예비대인 '유군'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위는 '위장'의 지휘를 받고 그 휘하에 부는 '부장'이 지휘를 하고 유군은 '유군장'의 지휘를 합니다. 마치 요즘의 사단장, 대대장, 연대장 하는식입니다. 위가 다섯개가 모이면 '5위'라고 칭하는데 오늘날의 군단급에 해당하며 '대장군'의 지휘를 받습니다.
각 '부'는 4개의 '통'이라는 단위 부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2개는 보병이고 나머지 2개는 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주'와 '전'으로 나뉘는데 '주'는 본대와 보조를 맞추면서 작전을 하고 '전'은 필요에 따라 본대를 이탈해서 원정, 우회기습, 매복, 포위, 정찰등 다양한 임부를 수행하는 기동부대의 성격입니다.
즉 각'부'는 보주통(보병), 보전통(보병), 기주통(기병), 기전통(기병)의 4개의 통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통상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주통'과 기동부대의 성격을 가진 '전통'으로 구분 됩니다. 유군은 예비대로서 5개의 단위부대로 나뉩니다.
그리고 하부의 병력단위로는 125명으로 구성된 '여'가 있는데 '여수'의 지휘를 받습니다. '여수'는 병력 규모로 보면 로마군의 100인대 대장과 비슷한 지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는 5개의 '대'로 구성되는데 1개의 '대'는 25명으로 구성됩니다. '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을 '대정'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대'는 5개의 오로 구성되며 '오장'의 지휘를 받고 5명의 병사(졸)로 구성됩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5의 배수체제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오행사상의 영향인 듯 합니다. 고구려의 '둔전제'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기도 한데....... 확신은 못 하겠군요.
보병
보병의구성
보병은 상황에따라 병종이 유기적으로 투입되는데 위의 유형이 가장 기본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팽배수와 총통은 보병전에 있어서 반드시 투입되는 병종입니다. 원거리에서 적을 총통으로 무력화 시키고 팽배수는 적이 돌진해오면 저지선의 역할을 하거나 전진해서 적을 제압합니다.
이 형태는 창수가 뒤를 받치는 형태인데 총통이 원거리 공격을 하고 뒤이어 팽배수가 선두에 서고 창수가 뒤를 받치면서 적의 돌격에 대비하거나 전진해서 제압을 하는 형태입니다.
이형태는 사수가 추가된 형태입니다. 원거리의 적은 총통을 발사해서 1차로 무력화 시킨고 사수가 활로 2차로 무력화 시킨다음 팽배수와 창수가 대미를 장식하는 형태입니다.
조선 보병의 오위병종이 모두 포진된 유형으로 총통이 원거리의 적을 무력화 시키고 사수가 지근거리에서 2차로 무력화 시키면, 팽배수가 근접하는 적을 맡게 되고 창보병이 뒤를 받치며 장검을 든 도수가 마지막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전형입니다.
팽배수(방패병)
팽배수는 원방패와 칼로 무장한 병종으로 조선초기에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던 보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때 시위대 소속의 팽배수만 수천단위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팽배수를 복원해본 것입니다. 투구는 첨주형투구, 갑옷은 쇠자갑을 모티브로 했고 원방패와 환도를 착용한 것으로 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쇠자갑은 아니고 경번갑입니다. 경번갑은 쇠자갑에 사각형의 작은 철판들로 보강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지휘관 급이 입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재로는 위쪽의 사진 자료에서 보는 것과 같이 허리아래정도까지 내려오는 쇠자갑(체인메일)이나 쇠미늘 갑옷을 입었습니다. 투구도 야전군은 위의 복원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진자료에서 보는 것과 같은 원주형 철모였을 것입니다. 얼핏보면 작은 세숫대아처럼 생겼는데... 급하면 저기에 물을 담아서 세수도 했을 것 같군요.
대체적으로 초기의 조선군의 기본 복장은 저런 형태였습니다. 조선전기에는 화포가 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육박전도 중요했기 때문에 상당한 중무장 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푸른전포를 걸친 조선군의 모습은 대체로 총포류 무기가 폭넓게 보급된 조선후기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조선의 대표적인 갑옷으로 알려져 있는 두정갑, 두석린갑도 조선후기에 유행한 것입니다.
가장 문제가 칼이었는데 팽배수가 환도를 들었는지 아니면 검을 들고 있었는지가 관건이었습니다. 일단 환도를 든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현재로선 팽배수가 검을 들었을 가능성을 암시하는 근거는 조선역해전도가 유일하기 때문에 단정짓기는 어려운 부분이었고 조선군이 검을 실전에서 다량 병장기로 사용했다는 근거도 없어서 칼은 환도를 소지한 것으로 재현했습니다.
조선역해전도도 다소 문제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기에도 팽배수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일단 임란때 그정도의 많은 숫자의 팽배수들이 남아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두정갑에 원방패를 들고 있는 것도 조금은 엇박자입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말하면 중세기사의 복장에 로마시대의 방패인 스쿠튬을 들려놓은것과 비슷한 양상이더군요. 대체적으로 두정갑이 폭넓게 사용된 것은 중기 이후입니다.
조선전기는 주로 북방의 여진족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최전방 지역에는 주요 거점마다 목책으로 이루어진 요새들이 건설되어 있었고 일정 규모의 병력이 상주하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은 주로 이들 요새들을 공격하거나 주요 이동로에서 이동하는 조선군을 기습공격하는 경우도 많았고 국경지역에서 자주 소요를 일으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들 여진족과의 전투라면 기병끼리의 전투만을 연상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조선초기에 팽배수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여진족들의 매복 기습이 았던 것도 이유인 듯 합니다. 특히 함경도 지역은 산세가 험준해서 산악전투도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숲이 우거진 지역이나 바위가 많은 이동로의 경우 이동중 기습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경우에 방패로 신속히 방진이나 귀갑진을 형성해서 대응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리고 보병에 의한 대기병전에도 결코 빠지지 않는 병종이었습니다.
총통
총통은 쉽게 말해서 화약을 사용하는 화포를 말합니다. 크기와 종류가 매우 다양해서 여기에서 모두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대체적으로 쇠로 주조된 것으로 한발식 공성전에 사용되는 큰 포탄이나 살상용인 작은 조란환등을 사용합니다. 그밖에도 장군전 같은 거대한 화살을 장전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원거리의 적을 공격하는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조란환은 수십 수백개의 탄을 한번에 발사해서 적의 병력을 살상합니다.
창수
조선초의 보병용 창은 비파형으로 생긴 넓은 날이 달린 창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보조무기로 환도를 착용했습니다.
도수
도수들은 긴 손잡이에 날이 초승달처럼 생긴 외날장도를 무기로 사용 했습니다.
사수(궁수)
1)
2)
3)
사수는 활로 원거리 지원을 하는 병종으로 평시엔 활은 '궁대'1)라고 부르는 활집에 넣어서 소지하고 다닙니다. 화살은 '시복'2)3)이라는 화살꽂이에 꽂고 다니는데 활은 왼쪽 허리에 화살은 오른쪽 허리에 착용합니다. 서부활극에서 총잡이들이 권총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실 조선군은 팽배수와 총통수를 제외한 거의 모든 병종이 기본적으로 활을 소지하기 때문에 사수(궁수)의 경계가 좀 모호하긴 합니다. 유사시엔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수로 변신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갑사들도 활은 필수로 소지하는 무기였고 왼만한 지휘관들도 활은 기본 무기였습니다.
도끼, 철퇴(둔기)
도끼는 삼국시대의 유물에서도 많이 출토될 정도로 비교적 오래전부터 사용되어온 것 같습니다. 주로 방패를 부순다거나 바리케이트 제거같은 공병용이나 적을 소탕시 문을 부수는 용도등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도끼입니다. 철퇴나 메이스 같은 둔기류도 비슷한데 역시 방패나 중갑을 부순다거나 하는 용도였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철퇴로 사람을 암살했다는 기록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려말 충신 정몽주와 조선의 명장이었던 김종서장군도 철퇴로 살해당하기도 했습니다.
기병
기병은 명실상부한 전기 조선군의 양대축의 하나였습니다. 부대단위의 편성을 보면 기병과 보병의 비율이 거의 50:50이었을 정도로 명실상부한 조선군의 주력이었습니다. 무기는 활과 창이 주력 무기였고 보조 무기로 근접전에 대비해서 환도를 소지했습니다. 전투는 주로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서 적의 대열을 흔들어 놓은다음 창으로 돌진하면서 적의 심장을 뚫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지근거리에서 창을 던지기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다음 환도를 뽑아들고 적의 목을 베었습니다.
잡색군
잡색군은 지금의 우리군편제에 비유하면 향토예비군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각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며 창을 주무기로 하고 활을 보조무기로 합니다. 이름이 잡색군인 이유는 조선의 정규군은 부대단위를 색으로 구분하고 있었는데(깃발이나 갑옷, 방패의 색이나 문양, 디자인등....) 잡색군은 무기와 갑옷을 사비로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병장기와 복장이 천차만별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잡색군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전기의 갑옷
조선군과 관련한 주요 쟁점중의 하나가 조선의 병사들은 갑옷을 입었는가 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인터넷 상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더군요.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군대라면 워낙 푸른전포 차림의 이미지가 강해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우리가 전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존속 기간과 시기를 보면 그 이전까지의 모든 역사를 다 합친 것 보다도 급격한 전술적 변화와 국가적으로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전술적 환경도 여러차례 변화가 있었고 국가 제정도 시기에 따라서 극과 극을 달렸던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로마제국조차 국력이 급격히 기울던 4세기 무렵엔 병사들이 갑옷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병사들이 갑옷을 입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다르다."가 정답입니다. 세종실록등을 보면 적어도 태종 ~ 세조대에 이르는 치세기에 병사들도 갑옷으로 완벽히 무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군의 모습은 사실 대부분 조선후기의 모습입니다.(물론 삼지창은 제외........) 대략 17세기 이후가 되면 조선도 총,포류의 무기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갑옷대신 푸른색이나 붉은색의 전포를 입었습니다. 물론 중앙의 정예군은 두정갑으로 무장하기는 했지만............. 이는 유럽쪽도 양상은 비슷합니다. 16세기 무렵까지만해도 스페인군의 모습을 보면 철제 흉갑에 철모를 쓰고 있지만 18세기 이후 대영제국의 병사들을 보면 그냥 붉은색 롱코트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군대의 모습은 일반적인 상식하곤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전술환경도 화약이 도입되고 화포가 개발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근접전의 비중도 중요했기 때문에 비교적 중무장이었습니다. 즉 일정기간동안은 방패와 체인메일이나 쇠미늘갑으로 무장한 중보병이나 기병의 가치가 유효했다는 뜻입니다.
투구는 오늘날의 군용철모와 비슷하게 생긴 원주형 투구와 첨주형 투구가 주력투구였습니다. 갑옷은 쇄자갑이라고 부르는 서양의 체인메일에 해당하는 갑옷과 쇠미늘 갑옷 또는 가죽제 미늘 갑옷도 있었습니다. 길이는 대체적으로 허리아래 정도까지 오는 갑옷으로 보편적으로 알고있는 조선군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치는 시기에 저런형태의 갑옷이 유행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도 초기에는 상당부분 고려의 하이테크를 이어 받았을 것이므로 군사분야도 그렇게 차이는 없었을 것입니다.
대략 조선전기의 조선군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뭐 전문가적 수준까지는 아니라도 대략 이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정도로 다루어 보았습니다. 차후에 시간이 된다면 중기 이후의 조선군에 대해서도 알아보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역시 조선 초기는 군사 대국이었군요.
조선 초기만이 아닌, "군사 강국이지만 뽀록나서 몇번 박살난" 강국중 하나겠지요;; 아마 중세유럽과 비슷한 속도로 장갑 경량화가 시작됀듯 합니다.
역시 아직 조선초기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였군요... 아무래도 그때가 고려의 뒤를 바로 이어서이고 태조 이성계가 아무래도 무장 출신이니...
장갑경량화는 더 빨라요.마갑도 훨씬 이전인 13세기 이후엔 거의 사장되고.. 그리고 가죽제 갑옷으로 대체하고 활동중심으로 손이랑 목 안면 부위는 삼국시대이후부터도 포기
투구멋집니다
팽배수의 주무장이 검이었냐 환도였느냐. 흠..솔직히 환도일 가능성도 높아보이네요. 조선역해전도도 1940년에 그려진 그림이니..물론 조선에서 검이 상당량 사용된 건 맞습니다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죠. 근접전에서 같은길이라면 환도가 더 살상력이 높을 수도 있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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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정린갑옷은 볼 때마다 중동의 파리스나 맘룩의 갑옷이 연상되는군요. ^^ 그리고 참 철퇴는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져서 문관들도 허리에 착용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궁안에서 차고다니다가 실수로 어전에까지 들어 혼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역해전도가 1940년에 그려진것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고증적인 가치는 별로라는 얘긴데... 허긴 임란당시의 그림치곤 너무 화질이 좋아서 좀 고개가 갸웃하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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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군 사주로 당대일본의 최고화가가 그린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이순신과 임란관련 연구가 활발했던 때라 최소한 동시대 조선의 그림보다 고증이 뛰어나면 뛰어났지 떨어지진 않았습니다. 뭐 어쨋든..17세기에 동양에서 그정도로 세밀히 묘사해서 그리는건..
아는 카폐에 전파 시키겠소~
장비 하나하나를 따지면 세심하게 고증이 되었있긴한데 시기별 구분이 없이 한데 버무려 있다는 것이 문제인 듯 합니다.
그건 위 본문도 마찬가지인듯..
인정합니다. 부득이 그런 면도 있습니다.
이런건 한열사에..
여기에 언급한건 초기에 조선군이 기본적으로 저런 시스템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의미일뿐 늘 저것이 완벽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열사류로 보는 것은 쩌끔.....
철저히 타인으로서의 관계상에선,제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으나.생면부지도 아닌 그마나 익숙해진 듯한데 아니였나보군요.-_-.섭섭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한움큼님의 깊은 뜻을 몰라뵈었습니다.;;;
한움큼재님의 댓글은 [이런 훌륭한 글을 한열사에 올려 무지몽매한 이들을 계몽하자]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흐흐
저기 도수 아래 있는건 월도입니다. 임진왜란 이후에나 쓰인 병장기죠.
이삼장군 언월도... 맞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쓰인병기군요;
저런 부분이 좀 힘들었습니다. 실물이 않남아있는 유물은........ 글로 다 설명하려니..... 특유의 귀차니즘이..;;;;;;;
제 블로그에 퍼가서 보관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그리고 저 역시 조선해역도에 약간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포를 "묶어" 놓은 것부터 시작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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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애들이 대들보에 서양포들을 묶어사용했던건 사실인걸로압니다만.
일본애들은 안택선에도 특유의 약함때문에 대들보에 묶어놓고 사용했습니다.. 절대 조선처럼 대포를 쏘진 않았습니다. 명중률도 훨씬 떨어지구요(쀍멸에서 나온 일본함 함포샷은 구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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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솔져님, 실례지만 저 인물 재현사진은 출처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왕궁수비대(명칭 까먹음) 교대식 같은 사진 있습니다.우리카페 역사자료실에도 있지요.
왼쪽인물은 우리카폐에 있는 거고요, 오른쪽인물은 인터넷 돌아댕기다가 멌있어서 다운 받아둔거였는데 이번 자료 만드는데 아주 딱이더군요. 찾아보시면 많이 떠다니고 있습니다.
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환도란 것은 딱히 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환도의 모양이 워낙 다양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그 제작기법도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구요... 외형은 서로 달라도 환도라 불렸으니 환도가 확실하다 봐야겠지요.
음 그럼.. 검종류도 환도로 명칭될 수 있다는 뜻인가요? 뭐 환도류 즁에도 운검이나 별운검 처럼 검으로 명칭되는 경우도 있었으니 가능성이 없지도 않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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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 때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괜히 사병들 몰수하는 제도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삼국시대부터 절마저도 병력을 보유할 정도였는데요. 흔히들 일본의 승군을 생각하시겠지만 우리나라가 훨씬 전부터 승군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고려때도 승군이 반역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힘들었다 할 정도로 강했다고 합니다.
고려는 나중에 승군을 최정예인 별기군에 포함시킬 정도로 승군의 파워가 대단했다 합니다. 고구려때는 평양성을 열고 나당연합군을 끙어들인 자가 고위승려일 정도로 승려들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큰 힘을 가지고 있었죠. 조선 초는 고려때의 수십년의 내전 및 외적과의 전투로 단련된 정예를 거느리고 있었죠.
최영장군이 승산이 어느정도 확신했길래 강병을 꽤나 모았길래 요동정벌 운운했겠죠~ 괜히 헛소리 하듯 그랫겠습니까? 그리고 조선의 태조가 그 병력을 고스란히 돌려서 고려를 무너뜨리고 세로운 왕국을 세웠죠~
게다가 조선은 여진족 일부를 기병세력으로 끌어들였을 가능성도 큽니다. 태조가 적지않은 여진병력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을 정도이니 여진족의 병력도 끌여들였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의 의제 퉁투란(이지란)도 여진인이구요. 태종때의 내전때도 여진족이 이쪽 저쪽을 편들어 전투를 치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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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안녕하세요. 글 내용이 너무 좋아요 ^^
올 엑박 뜨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