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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그러니 서 있는 돌의 역사를 아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나섰죠” 울산 신정동에 사는 이희득(사진·55)옥산문화재연구소장은 결혼도 제쳐두고 문화재와 사랑에 빠진 만학도다. 5년 전 경주 위덕대 불교학과 16학번으로 진학한 그는 현재 같은 대학 대학원생이다. 지난 9일 만난 이씨는 “20년 전 문화재의 매력에 빠진 이후 한 달에 대여섯 번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고 했다. ◆ 하마비 숨겨진 이야기들 재조명 이 씨는 1박 2일 답사 때는 하루 600~800km를 운전해 6~7개의 문화재를 관람했다. 1년이면 400~500개를 둘러보는 강행군이었다. 궁궐·왕릉·석탑·석불·절터 등 대상도 다양했다. 지난 1월 책 ‘한국의 철비’를 펴냈고, 이전에도 ‘한국의 하마비를 찾아서’(전 5권)를 쓴 저자다. 국내 최초로 전국 곳곳에 흩어진 하마비(조선시대 종묘나 궐문 앞에 세운 석비) 458기, 철비(철로 만든 공덕비) 96기를 일일이 찾아내 기록했다. 일반에 생소한 하마비와 철비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 분야는 아무도 제대로 다루지 않아서”라고 했다. 그는 “내비게이션도 없던 2000년대 초반 지도 한 장, 삼각대만 들고 동네 주민에게 물어물어 문화재를 찾았을 때의 희열은 말로 못 한다”고 했다. 그의 연구로 하마비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재조명됐다. 하마비(下馬碑)는 조선시대 누구든 그 앞을 지날 땐 신분을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겨 궁가나 종묘 앞에 세운 비석이다. 그런데 세워진 곳에 따라 모든 신분이 내리는 게 아니었다. 종2품 병마절도사가 상주한 경상좌도병영성의 하마비엔 “토포사(조선시대 도적을 잡던 특수직)보다 아래 관직은 말에서 다 내리라”는 뜻의 문구가 새겨져 있다. 전쟁을 대비해 성 전체를 관할하는 병마절도사 같은 경우 말에서 내리는 게 불필요했을 것이다. 반면 종묘 하마비 앞에선 왕조차 말에서 내려야 했다. ◆ “병영성하마비 방치돼 박락 심해” 하마비 중 이 씨가 최고로 꼽는 것은 서울 금암문화공원에 있는 정조 어필 하마비다. 이씨는 “글씨의 삐침이나 획, 비에 나타나는 무늬가 어느 하마비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현재 울산에서 알려진 하마비는 언양향교와 병영성에 있다. 이 씨는 병영성하마비는 임란이후에 병영성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소 150년 전 쯤 됐다는 것인데 글자깊이나 크기, 벼슬명이 새겨진 것으로 봐서 가치가 크다고 그는 평가한다. 그러니 외부에 방치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박락은 이미 심각해요. 학성공원에서 울산박물관으로 옮긴 태화사지12지신상과 같이 비라도 안 맞게 해야 합니다” 이 씨의 바람은 울산에 ‘하마비문화관’을 짓는 것. 오래전 경북 성주 태실문화관을 방문한 후 갖게 된 소망이다. 하마비문화관이 울산에 세워진다면 그동안 모은 자료를 모두 기증하고 싶다. ◆ 신장이식수술·어려운 형편중 자비로 책 내 20여 년 전 신장 이식수술을 받았던 그는 제대로 직장생활을 못해 월급과 근로 장려금을 아껴 모은 돈으로 근근이 책을 출판해 왔다. 여섯 번째 책 ‘한국의 철비’ 출판비는 카드 할부로 겨우 충당했다. 문화재가 전 지역에 걸쳐 있다 보니 지자체 등의 지원도 못 받았다. 사도세자를 모셨던 사당에서 만난 하마비를 들다가 손가락이 찢어져 응급실까지 가는 등 20년간 조사과정에서 갖은 어려움도 겪었다. 직접 발로 뛰어 조사한 하마비들과 철비들은 직접 사진 촬영을 하고 상태와 어느 종류인지 기록을 해 놓아 기록물로서 손색이 없다. 그는 약 3년 후면 또다시 신장을 이식을 받아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다. 어려운 형편에도 답사와 학업을 이어가는 이유에 대해 이씨는 “답사를 떠날 때면 없는 힘도 솟아난다”며 “남에겐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그 안엔 무궁무진한 우리 선조의 이야기가 녹아 있고, 관심을 가지지 않고 기록을 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
첫댓글 자랑스런 웅촌인 상 주시면 더욱 좋겠는데 내만 이렇게 신경 쓰는가? 다들 머하시나 후원도 하고 홍보도 하고 하여야 하는데 반응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