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어떤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돈이 든 자루도 옷 두 벌도 금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얼핏 보기에는 ‘좀 너무하시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근본 생각을
헤아려보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깊은 뜻이 있으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넉넉한 돈 자루를 지니고 있다면 제자들이 하느님을 의지하기보다 재물이나 사람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에게 제일 위험한 생각은 ‘돈이면 다 된다.’라는 풍조입니다.
런데 안 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랑’이고 ‘진실’입니다.
물론 돈이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궁극적인 힘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떠나 인간에게 의지하는 자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에례 17,5-6)
그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를 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7-8절)
아무리 사막이라도 물가에 심은 나무는 싱싱하게 자라듯이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는
지치지도 않고 생기 있게 하느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자와 라자로’의 주님 비유 이야기를 전하며 사람이 어디에 기준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기준은 재물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라자로는 재물이 없었기에 많은 고초와 수모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사실 구원을 받을 아무런 일을 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부자와 비교해서 현실에서의 삶과 대조적으로 죽음 후의 세계에서는 아브라함의
보살핌을 받는 위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마치 현세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다 구원된다는 생각일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사실 하느님을 믿고 그분만을 따르는 신앙이 중요한 것이지요.
라자로가 과연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서 복음은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복음에서 비유의 초점은 부에게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재물의 위력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부자는 얼핏보기에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며 살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더 깊이 본다면 하느님께서 소외된 이를 위해서 재물을 나누라는 사랑을 당부하셨는데
부자는 재물에 가리고 호의호식하는 바람에 미처 헐벗고 고통스러운 라자로의 불행을 볼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루카의 의도는 악인과 의인에게는 심판에 따라서 구원과 멸망이 따른다는 것과 구약의
소극적인 율법실천과 신약의 적극적인 실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을 하지마라’라는 하무라비 법전의 틀에 따라 부정적인 규정이 따르는 데 비해
주님께서는 ‘-을 하라.’라는 긍정적 규정 실천이 따르는 것입니다.
부자는 라자로의 딱한 사정을 자신의 재물에 가려 못 보았고 더 나아가서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을 하지마라.’에는 해당되지 않지만 ‘-을 하라.’에는 걸리는 것입니다.
가난 자체가 축복이 아니듯 부자 자체도 죄가 아닙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마치
다 자기의 것인 양 나눌 줄도 모를 때 오늘 복음의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배고픔과 사람들의 푸대접 속에서도 악으로 기우러지지 않고 올바른 마음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지요.
더더군다나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자로’ 비유말씀을 바리사이들에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한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그것은 이기적인 부자가 그래도 자기 가족은 챙기는 것처럼 바리사이들은 이스라엘이라는
혈육만을 챙기는 모습을 빗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법과 예언서를 입으로는 떠들어도 실천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는 하느님의 아들마저 받아들이지 않는 사실을 또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선과 아집에 사로잡히고 교만하고 약자들을 우습게보며 성경이 마치 자신들만의
전용인 양, 그리고 이웃에게 배타적인 바리사이들을 겨냥하신 주님의 말씀인 것이지요.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
첫댓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