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목요일 (마르10,46ㄴ-52)(집회42,15-25)
제1독서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
42,15-25
15 나는 이제 주님의 업적을 기억하고 내가 본 것을 묘사하리라.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
16 찬란한 태양은 만물을 내려다보고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17 주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들에게조차
당신의 온갖 놀라운 업적을 묘사할 능력을 주지 않으셨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그 놀라운 업적을 세우시어
만물을 당신 영광 안에 굳게 자리 잡게 하셨다.
18 그분께서는 깊은 바다와 사람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그 술책을 꿰뚫어 보신다.
사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는 온갖 통찰력을 갖추시고 시대의 표징을 살피신다.
19 그분께서는 지나간 일과 다가올 일을 알려 주시고
숨겨진 일들의 자취를 드러내 보이신다.
20 어떤 생각도 그분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분 앞에는 말 한마디도 숨길 수 없다.
21 당신 지혜의 위대한 업적을 질서 있게 정하신 주님께서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같은 한 분이시다.
그분에게는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으며 어떤 조언자도 필요 없다.
22 그분의 업적은 모두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찬란하게 보이는가!
23 이 모든 것이 살아 있고 영원히 지속되며
그분께서 필요하실 때는 만물이 그분께 순종한다.
24 만물은 서로 마주하여 짝을 이루고 있으니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
25 하나는 다른 하나의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니
누가 그분의 영광을 보면서 싫증을 느끼겠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피조물의 완전함을 묵상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어느 것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집회 42,24)
집회서 저자는 주님의 업적을 찬양하며 이렇게 단언합니다. 굳이 남을 보지 않고 우리 자신만 들여다봐도 적잖은 결함과 결핍 투성이인데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으셨다니, 저절로 고개가 갸우뚱, 의아하게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가 완전함과 완벽함을 혼돈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완벽하지 않은 상태를 불완전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완벽은 완전함과 다르고, 또 그건 인간의 영역 밖의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 누구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내적 외적 결핍, 결함을 불완전하다고 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이 품고 있는 완성태를 보시니까요. 그래서 그분께 우리 모두는 선하고 아름다우며 진실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시며, 자비와 용서의 아버지를 닮은 상태를 완전하다고 하셨습니다.(마태 5,38 참조) 또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면 완전한 사람이 된다고까지 하셨지요.(마태 19,21) 뭔가를 그럴듯하게 다 갖춰야 완전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얕은 생각에 균열을 내는 가르침입니다.
복음에서는 육체적 물질적 관점에서 불완전하다고 여겨지는 이가 나옵니다. 바로 "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8)
예수님께서 완전한 분이심을 믿고 아는 눈먼 이가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는 자비가 완전함을 표출하는 한 방식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 지혜로운 외침은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로 많은 이의 불쾌감을 자극해 그저 묻혀버릴 뻔했지요. 누구에게는 참으로 절박한 필요가, 다른 누구에게는 귀찮고 성가신 소음일 뿐이니 그날 예리코 길거리는 세상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은 현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그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멈추시어 그를 불러오게 하시자,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와 청합니다. "다시"라는 걸로 보아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라 중도 장애를 입은 사람일 것 같습니다. 어느 편이 '봄'에 대해 더 간절할지 경험해보지 못한 입장에서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 그저 그의 간절함에 함께 머무르며 공감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그의 간절한 열망과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 그의 치유를 선언하십니다. 그 치유는 기술이 아니라 당사자의 믿음이라고 하시니 그분은 얼마나 겸손하고 또 완전하신지요!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2)
드디어 그가 원하던 바를 얻자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바를 얻게 된 이의 첫 행동이 바로 지체없는 따름이었으니까요.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 앞에 나아간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니 사실 어쩌면 험한 일만 남은 여정이 될 터이지요. 그가 어디까지, 어느 순간까지 예수님 곁에 머물며 신의를 지켰는지 이후 복음사가는 침묵하지만, 그의 나머지 여정은 우리가 채워야 하는 열린 결말로 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완전성의 얼굴을 봅니다. 자비를 믿는 이의 완전성! 버림과 따름의 완전성! 스스로 자비가 된 이의 완전성! 간절히 원하던 바를 얻자 그것으로 기꺼이, 기쁘게, 겸손히 주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야말로 그의 지향과 의지가 오롯이 주님의 바람과 일치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됩니다. 그가 단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무언가를 열망한 것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이지요.
결과론적이고 외적인 견지에서야 예리고의 눈먼 이가 실제로 보게 된 치유를 완전함의 회복이라 보겠지만, 신앙의 눈은 한 걸음 더 들어가라고 촉구합니다.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 그리고 그로써 용서와 자비의 사람이 된 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그에게 마련하신 완전함이 극대화된 표출일 것입니다.
"주님의 업적은 그분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고, 그분의 결정은 선의에서 나왔다."(집회 42,15)
그렇습니다. 모든 창조, 모든 피조물은 불완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의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그분의 충만함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분의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으신 선의로 지탱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주님 선하심의 열매이고, 그분 자비의 완전함을 나날이 더 닮아가는 중입니다. 결함과 결핍의 아쉬움을 안고도, 믿기에 행복한 이들이지요. 그분은 우리의 결핍과 결함을 회복시켜 주심으로써 우리가 완전함을 발휘할 기회를 주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부끄러워 말고 어떤 방해에도 포기하지 말고 더욱 용기를 내어 주님께 치유를 청하며 나아갑시다. 버림과 따름의 여정에 들어서서 나날이 완전하게 되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