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하시는 일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빌립보서 전체의 핵심이라 할만한 구절이다.
사도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의 토대를 단숨에 소개하고 있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고,
원수들은 그가 그동안 교회에서 해온 일들을 무너뜨리려 했다.
이런 어려움들 속에서도 바울은 자기 자신과 빌립보 교인들에 대해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런 확신을 가능케 한 주된 요소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있다.
첫째, 그는 이 일이 빌립보 교인들 안에서,
그들 가운데서 계속될 것을 알았다.
둘째, 그는 빌립보 교인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 안에서 이 일이 계속될 것을 알았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그들 가운데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일을 믿었다.
다시 말해서 그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분명히 파악한 데서 나온 것이며,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교회를 이루는 능력과 생명이 어떤 것인지 아는 데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깊은 지식과 이해가 그의 확신을 불러왔다. 구원 계획과 그 의미, 성격과 능력을 아는 사람만이 사도가 느낀 것을 똑같이 느낄 수 있고 그가 경험한 것을 똑같이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염려하고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보면서 염려하는 것은 분명 이 지점에서 실패한 탓이며, 이 중대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회의 미래에 대한 불안 역시 대부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사도의 이 장엄한 말씀에 담긴 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의 본질적인 핵심을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속에서 착한 일이 이루어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 착한 일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원리, 착한 일의 창시자,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그것을 착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시작하신 이”는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또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 스스로 무엇을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바울 자신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겠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늘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고 말한다.
빌립보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 싶었으나 성령이 막으셨고,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인해 유럽에 첫발을 디뎠다.
빌립보에 도착한 사도는 강가에 모여 정기적으로 기도하던 여자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었다.
성경은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다고 말한다.
말씀을 전하도록 바울을 이끄신 주께서 루디아와 그 가족의 마음을 여셨기 때문에 바울이 그 집을 시작으로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다.
그 어떤 사건이나 사람도 사람을 죄구덩이에서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 교리, 오직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교리에 대해 성경은 논쟁의 여지를 주지 않고 분명하게 단언한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그가 주인이시다. 그가 우리를 지으셨다.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이 이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신다고 말한다.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 마지막 완성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은 계속 일하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곳’으로 바라본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행동과 활동이 낳은 결과물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것은 종교개혁의 중대한 표어였다.
두 번째 원리, 이 일의 본질, “안에서”라는 말이 그 본질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생각한다.
이 착한 일을 “너희 안에서”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다시 태어남, 새 창조, 중생, 거듭남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영혼 안에서 영혼에 대해 결정적인 일을 행하신다.
존 웨슬리는 기독교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한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걸의 정의를 가장 좋아했다.
기독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변화 중에 가장 깊은 변화, 결정적인 변화이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깨우쳐 주시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요 잃은 자들임을 보여 주신다.
내 실상을 보게 하고,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게 하고, 나를 얽어매고 구속하는 죄에서 구원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게 하신다.
하나님을 찾고자 애쓰지만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신다.
그 다음으로 성령이 하시는 복된 일,
모든 사역의 완성은 바로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홀연히 우리의 눈을 열어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보게 하신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라는 것, 우리에게 지극히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다.
그리고 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스스로 새 사람이 되고 새 본성을 입었음을 인식하게 하시는 것이다.
과거에 즐겼던 일들이 싫어지고,
기도하기 시작하고, 성경이 좋아진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고 계속해 나가시는 착한 일이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사람과 환경을 통해, 우리가 종종 우연이라고 부르는 일들을 통해 ‘새사람’을 완성시켜 나가신다.
거친 모서리를 다듬고 이곳저곳을 깎아 모양을 빚어 나가신다.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는 바,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인이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작업장이며
그리스도인은 그가 만드시고 빚으시는 작품이다.
회심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계속 일하신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 위대한 과정의 일부이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진행하시는 착한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 번째 원리, 이 일을 하시는 목적,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그리스도 예수의 날을 위해 우리를 빚으시고 준비시키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은 구원 사역이 마무리되는 장엄한 완성의 날이다.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이 되는 것이며(벧후3:13),
하나님의 아들이 왕으로 다시 오셔서 통치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날이 주의 날이다.
최종적인 해방과 궁극적인 구속이 이루어지는 영광의 날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한다
“나와 너희한테 무슨 일이 닥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이 일을 계속해 나가실 것이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 그가 승리자로 돌아와 통치하시는 날,
그 장엄하고 놀라운 마지막 날에 참여할 것이다”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이 크고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계속해 나가시는 목표와 목적이 여기 있다.
우리가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위로요 위안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당히 그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확실하게 준비시켜 주실 것이다.
세상이 우리의 많은 것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우리의 많은 것을 부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은 건드리지 못한다.(벧전1:4) 인간과 인간의 모든 노력과 책략이 미치지 못하는 하늘에 하나님이 보관하고 계시기에 안전하다.
네 번째, 원리 이 일의 확실성,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 이 일을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과 그 영광에 대한 내 소망은 나 자신의 의지력이나 갈망이나 이해력에 달려 있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끝내신다는 확실한 사실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견고하고 확실한 주춧돌을 마련해 놓으셨다.
성경은 두 군데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2:19),
6절 본문의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는 이 말씀이다.
바울은 롬 5:10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의 원수로 그를 미워하며 살 때 너희를 위해 죽으셨다면, 하물며 지금은 더더욱 너희를 지키고 품으시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일을 마치시지 않겠느냐’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박할 수 없는 논리이다.
적용) 어떻게 이 일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확신하는가?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그 답은 빌립보 교인들이 복음에 참여한 것에 감사를 드리는 바울의 말에 나와 있다.
복음의 진리가 여러분의 가장 크고 우선되는 관심사라면 착한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고 안심해도 된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7)
복음을 비웃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빌립보 교인들이 거기 대응하여 복음을 옹호했다는 뜻이며,
그리스도를 하잖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그 이름을 옹호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복음을 “변명”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지금 복음을 옹호하고 있다면,
착한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고 안심해도 된다.
복음을 “확정”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시금석은 죄가 점점 더 미워지고 있다면,
하나님의 착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점점 더 거룩함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소원이 점점 커지고 있다면,
착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표지이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고후9:15),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고전15:11)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면,
이와 같은 것들이 착한 일의 시금석이다.
그 이유는 한 가지, 육에 속한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소원이 생기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시고 계속하시는 덕분이다.
우리 모두 이 위대한 사도와 함께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