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무가 쓰러져 이끼의 집이 되고 시간은 썩고 썩어 바람으로 불어 가는데 나 어디로도 흐르지 못해 막막한 가슴으로 식장산 굽이진 산길에 닿았습니다 언 길 오르다 만난 동굴 제 속에 세상 어둠을 들여 침묵으로 참선에 빠져 있었지요 발소리 찍으며 나도 그 안에 들어 내 속의 어둠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쉽게 내 안으로 들어설 수 없었지요 굽이굽이 아홉 구비를 돌아야 만날 수 있다는 구절사, 그 절에 가면 마음의 빗장을 풀 수 있을까요 하지만 아픈 걸음으로 돌아온 길 일주문 앞에서 또 막히고 말았습니다 자신 안으로 들어서는 문 하나 만들지 못한 자에게 결코 이곳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암캐 한 마리 이빨을 세우고 두려움에 돌아보니 걸어왔던 길도 사라지고 없었지요 구절사 앞에서 내 안의 길 모두 길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한 구비 돌 때마다 나를 벗겨내면서 결국 십진수의 세계를 버려야 닿을 수 있는 곳, 양파껍질 같은 몸을 다 벗어야 들어설 수 있는 문, 일주문을 돌아서면서 겨우 작은 허물 하나 뜯어낼 수 있었습니다
*** 소위 주판알을 굴리는 골치 아픈 '십진수의
세계'를 벗어나 온전한 나의 길을 찾기 위하여
찾아가는 '구절사 앞에서 내 안의 길 모두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소득은
있었다고 해야겠지요. (시와 사람 2004.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