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무슬림의 의무
무슬림에게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인샬라!”(Inshallah)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말의 아랍어 의미는 “알라의 뜻이라면…”(If God’s will)이다. 이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다르게 행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날 알라의 심판을 받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무슬림에게 이슬람의 교리에서 정해 놓은 행함을 따른다는 것은 구원을 얻는 길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1. 신앙고백(Shahada)
이슬람들은 “알라 이외에 어떤 신(神)도 존재하지 않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La illaha illa Allah Muhammad rasul Allah, 라일 엘라 알라 무함마드 라쑬 알라)라고 신앙고백을 한다. 알라(Allah)만을 유일한 신으로 고백하는 것이 무슬림이 되는 중요한 전제다.
이것은 이슬람 신학의 근본이며 무슬림들의 도덕적 규범이기도 하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 도이다.”라는 말은 그가 전한 모든 것을 확신하고 Shahada 그가 금기하거나 경고한 것은 피하고, 그가 제정한 규범을 따라서 알라를 경배한다는 뜻이다. 또한, 알라가 명령한 경배 의식, 법과 규범의 제정, 윤리와 도덕, 가족체계, 법 제정, 금기 등 제반 사항에 대한 교리 적용도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왜냐하면, 무함마드가 알라의 법을 인간에게 전한 사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신앙고백에서 “알라 외에 신이 없다.”는 고백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인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철저히 부정하는 대전제 때문이다. 꾸란에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알라와 동등한 자리에 놓고 섬긴다.”는 죄목을 거론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 중에서 가장 사악한 죄 즉 쉬르크(Shirk)라는 것이다. 쉬르크(Shirk)란 어떤 것을 알라와 대등하게 두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2. 기도(Salat)
기도는 이슬람을 지탱하고 있는 두 번째 기둥이다. 꾸란은 하루에 세 번 즉 아침, 점심, 저녁에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무함마드가 하루에 Salat 다섯 번씩 기도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가 사망한 이후에 하루 다섯 번 기도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모든 무슬림의 의무적인 기도 시간은 다음과 같다.
– 해가 뜨기 바로 전 새벽(Fajr)
– 해가 뜨고 정오가 되기 전(Zuhr)
– 오후 중반(Asr)
– 해가 지고 나서 바로(Magrib)
– 일몰 후(Isha)
무함마드는 처음에 유대인들처럼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였으나 A.D. 624년에 그 방향을 메카의 카바 신전으로 바꾸었다.
기도는 어느 곳에서든지 가능하다. 무슬림들은 기도 시간이 되면 개인용 매트를 깔고 기도한다. 시대가 발달함에 따라서 자신의 위치에서 나침판으로 메카를 향하여 자리를 잡고 기도한다. 기도하기 전에는 세정의식(洗淨儀式, wudu)을 한다. 얼굴을 씻는데 특히 입, 코, 귀와 같은 구멍과 손부터 발까지 그리고 발부터 발목까지 씻어야 한다. 신체 전체(ghusl)를 닦는 것은 성관계 혹은 월경 이후에 하는 것이다.
만일 물이 없는 상황이라면 모래로 씻는 것도 무방하다. 이슬람 사원에서 하는 합동기도도 중요하다. 무함마드는 “깨끗이 씻고 이슬람 사원에서 하는 기도의 상급은 집에서 하는 기도의 그것보다 27배나 많다. 또한, 이슬람 사원으로 기도하러 가는 각 발걸음마다 죄에 대한 기록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그가 받는 보상은 한 단계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3. 구제금(Zakat)
무슬림은 그의 재산에서 이슬람 세(稅) 즉 구제금을 납부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 불우한 사람 등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위한 몫으로 기꺼이 구제 Zakat 금을 내야 한다. 구제를 뜻하는 아랍어 자카트(Zakat)는 ‘정화’(淨化) 혹은 ‘성장’(成長)을 뜻한다. 이는 재산의 일부를 구제를 목적으로 나눔으로써 한 사람이 가진 재산을 정화시키는 행동이다.(꾸란 2:43; 110; 112; 277; 4:162; 5:58) 원래의 재산과 일 년 동안의 수입에 부과되는 것이다. 상품이나 현금일 경우는 2.5%이며, 땅에서 재배되는 과실일 경우에는 10%가 일반적인 관례이다. 구제금은 과부, 고아, 병든 자,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이슬람을 전파하는데, 그리고 메카 성지순례를 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된다.
이렇듯 구제금을 내는 일은 모든 무슬림의 의무이다. 종종 이슬람 정부는 이를 국가 경제를 일으킬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파키스탄 정부는 수입의 2.5%의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하루에 필요한 곡물에 대한 추가부담금을 부과하기도 한다. 자발적인 기부(Sadaqa)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꾸란 2:263) 자발적인 기부에 대한 사용처도 꾸란은 명시하고 있다. 자발적인 기부는 천국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된다.
4. 금식(Sawm)
이슬람에서의 금식(禁食)은 알라를 경배할 목적으로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먹거나 마시지 않는 것이다. 라마단 달은 이슬람력으로 9월 Sawm 로서 가장 훌륭한 달이자 많은 복이 내린 달이다. 무함마드에 의하면 라마단 달이 시작되면 천국의 문들이 열리고 지옥의 문들이 닫히며, 사탄은 사슬에 묶이게 된다. 라마단 달에 금식하고 밤에 예배를 드리면 이전에 저질렀던 죄를 용서받는다고 한다. 라마단 달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꾸란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마단 달에 금식하라는 명령은 꾸란에서 시작된다. “인류의 복음인 꾸란과 그 복음의 설명과 기준이 내려진 달이 라마단 달이거늘 단식을 실천하라 하셨도다.”(꾸란 2:185) 특별히 라마단 달 가운데 27일째 되는 밤은 라일라툴-꽈드르(능력의 밤)라고 하는데, 꾸란의 첫 계시가 임했던 밤이다. 이때 기도하면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이 기도에 참여한다.
금식은 모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있는 사춘기 이상 무슬림들은 의무적이다. 하지만 예외도 존재한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 여행자, 어린이, 노약자, 혹은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 월경 혹은 임신 중인 여성 노동자들도 잠시 동안 라마단 금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하지 못한 기간만큼 금식을 채워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이 금식을 깬 자는 자신이 저지른 커다란 죄와 창조주에 대한 거역 행위에 대하여 알라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깬 날 수만큼 추가 금식을 해야 한다.
엄격한 사람은 금식 중에 침도 삼키지 않는다.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거나, 흡연하거나, 약물을 복용하거나, 사교를 하거나, 향수를 바르거나, 성교하는 것도 금지된다. 추가적으로 도박, 음담패설, 분노, 여자의 화장 등도 금지된다.
5. 성지순례(Hajj)
성지순례란 메카에 있는 알라의 집을 방문하여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순례는 몸과 정신이 건전하고 순례할 나이가 된 능력이 있는 모든 Hajj 무슬림의 의무다.(꾸란2:196-203; 22:26-33)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지 않거나 나이가 들어서 자신이 순례를 하지 못하지만, 경제적인 지출이 가능하면 타인을 통해서 대신할 수 있다.
메카의 카바 신전은 아담과 이브가 알라를 경배했던 곳이며 이후에 알라의 명령을 받은 이브라힘과 이스마일이 카바 신전을 건축하였으며(꾸란 2:127), 여러 번의 재건축 과정을 거쳐서 메카의 부족들이 그 검은 돌(黑石, 운석으로 추정됨)을 놓을 때 무함마드가 그들과 함께하였다. 맨 처음 메카로 성지순례를 하라고 명령한 것은 이브라힘이었다.(꾸란 22:27)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나의 사원(메디나의 선지자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다른 사원에서 드리는 것보다 천 배나 더 좋다. 그러나 하람사원(메카)에서 드리는 예배는 다른 사원에서 드리는 예배보다 십만 배나 더 좋다.”고 하였다. 또한, 이곳은 무함마드가 최초의 무슬림이 된 곳이다.(꾸란 27:91) 여성이 성지순례를 원하면 마흐람(mahram)이라고 불리는 보호자와 동행을 해야만 한다. 마흐람은 남편이나 결혼이 불가능한 남성들이다.
꾸란에 의하면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꾸란이 명한 대로 행함이 중요하다. “그 때 선행이 많았던 자들은 번성할 것이며 그의 저울이 가벼운 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잃고 지옥에서 영원히 살며”(꾸란 23:102,103)라고 기록되어 있다.
6. 지하드(Jihad)
지하드는 이슬람 종파에 따라서 종종 이슬람의 6번째 행위강령에 포함되기도 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에게서 온 계시를 전 세계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 의하면 “나는 사람들이 ‘알라 외에는 경배받기에 합당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고 알라에게 명령을 받았노라. 그리고 누구든지 그렇게 말 하는 자가 그의 생명과 소유를 구하게 될 것이다.” Jihad 라고 한다.
지하드는 꾸란의 명령이기도 하다. “금지된 달이 지나면 너희가 발견하는 불신자마다 살해하고 그들을 포로로 잡거나 그들을 포위할 것이며 그들을 대비하여 복병하라.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예배를 드리며 자카트를 낼 때는 그들을 위하여 길을 열어 주리니 실로 알라는 관용과 자비로 충만하심이라.”(꾸란 9:5)
꾸란과 하디스에 의하면 지하드는 종교적 의무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단순히 자신 혹은 이슬람 사회에 있는 악을 몰아내는 행동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전쟁을 통하여 믿지 않는 자들과 대적하여 이슬람을 전파하는 방법으로 지정되어 있다.(꾸란 8:37-39) 꾸란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추방하거나 파괴하려는 열정을 볼 수 있다.(꾸란 4:101)
꾸란의 알라는 인간의 선행과 이슬람법 순종 여부에 기초하여 인간에 대한 용서를 결정한다. 살아 있는 동안 천국에 관한 보증은 없다. 왜냐하면, 알라가 심판의 날에 용서할 자들과 벌할 자들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하드에서 죽은 자만이 곧장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약속되었다. “알라의 길에서 순교한 자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은 알라의 양식을 먹으며 알라의 곁에 살아 있느니라. 그들은 알라가 주신 은혜 가운데서 기뻐하며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그들 뒤에 올 그들 순교자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곳의 그들에게 두려움도 없으며 슬픔도 없으리라.”(꾸란 3:169,170)
기독교에도 피의 역사는 있어 왔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예수는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마 26:52)고 하셨다. 반면에 이슬람의 꾸란과 하디스는 칼을 통한 피의 지하드를 명령하고 있다. / 유해석 선교사(FIM국제선교회 대표) 출처 / 기독일보 2016.1.14.
이슬람은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와 중요 교리 비교
이슬람은 2001년 911테러 사건과 더불어 21세기 시작을 테러와의 전쟁으로 장식함으로써 세계역사에 등장했다. 이제 이슬람은 더 이상 먼 중동의 종교만이 아니다. 오늘 한국에서도 중동 이슬람 국가와의 교역 증진으로 이슬람의 각종 선교와 문화들이 우리 사회에 들어오고 있다. 서울대를 비롯하여 한국 대학가에 이슬람선교가 들어와 있고 우리 산업계에 이슬람 노동자들이 대거 들어오고 있다. 이제 이슬람을 보다 제대로 아는 것이 한국교회가 이슬람 세계선교 전략에 대비하는 일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교리를 비교하는 데 있어 신론, 중보자, 계시론, 종교관, 구원론, 종말론을 비교하여 서로 다른 점을 밝히고자 한다.
1. 신론(神論)
(1) 달(月) 신 : 열조의 신
아브라함이 떠나온 갈대아 우르 지역은 난나(nanna)라는 달신(月神)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태양은 남신(男神)이고 달신은 여신이지만 아라비아에서 달신은 남신이었다. 이슬람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아랍 지역의 달신인 석신(石神) 우상숭배에서 유래하였다. 그 가운데 알라(Allah)라는 신은 중동 사람들이 섬겼던 부족신들 내지 아랍의 지역 신들에서 유래하였다. 알라(Allah)는 메카(mecca)의 카바(Kaaba) 신전 안에 있던 360개 우상들 중의 하나였던 쿠라이쉬(Quraish) 종족의 신이다. 무함마드가 속한 쿠라이쉬 부족은 달(月) 신을 섬겼다.
그러므로 알라신은 여호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단지 이 석신(石神)이 나중에 단일신론으로 발전한 과정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 이슬람의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과 다르다. 그것은 신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신관은 단일신관이며, 그 기원은 아라비아 지역의 달(月) 신이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의 신관은 삼위일체 신관이며, 그 기원은 아브라함과 열조의 신앙이다.
(2) 단일(單一) 신 : 삼위일체(三位一體) 신
이슬람의 신앙고백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이다. 알라는 창조자를 신의 아들이나 신의 영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알라와 그의 모든 천사의 적(敵)이다.(sura 2:97,98; 5:73) 이슬람은 오직 단일하고, 유일한 신을 믿는다. 무함마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신론 즉 하나님의 세 위격의 통일을 이렇게 부정했다. “셋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말을 그치라. 그것이 너희에게 더 좋을 것이다.”(sura 4:171) 이슬람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천벌을 받을 신성 모독으로 여긴다. 이슬람에 의하면 알라는 항상 하나이고 둘이나 셋일 수가 없다. 무슬림은 알라를 인간으로부터 완전히 멀리 떨어진 초월적 존재로서 표상하기 때문에 알라를 아버지로서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아버지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초월적 존재인 알라에 대한 모독으로 여긴다.
(3) 군주적 신 : 사랑의 신
무슬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법을 인격적으로 순종하는 기독교와 다르다. 무슬림은 알라에 대하여 율법적인 관계를 가지나 기독교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슬람은 알라에 대한 완전한 믿음과 절대복종을 말하나 패역한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독생자를 주시는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알지 못한다. 이슬람은 예수를 단지 ‘알라의 선지자’ ‘창조된 말씀’ 내지 ‘인간적으로 활동하는 알라의 창조된 영’으로 격하시켜 버리고 있다.
2. 중보자
(1) 이슬람에는 중보자가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중보자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이다. 그런데 이슬람의 종말론에는 무함마드가 내세에 중보자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요 선지자에 불과한 무함마드가 어떤 근거로 어떻게 중보자 역할을 하는지 명료하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 피로 그의 생명을 우리를 위하여 쏟으셨으므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다.
(2) 인간 무함마드 : 의인 예수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는 이슬람 시조 인간 무함마드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차이다. 무함마드는 10명의 아내를 거느렸고 실수와 허물로 그 행위에 모순이 많은 인간이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며 우리를 위한 대속 자가 되신 구세주이다. 무함마드는 무슬림에게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주었으나 예수는 구세주로서 그의 몸과 인격을 대속 제물로 우리에게 주셨다. 무함마드는 원수를 증오하고 보복하고 살해하려고 가르치나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보복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슬람의 윤리보다 차원 높은 기독교의 윤리의 우월성을 발견한다.
(3) 이슬람의 예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 왜곡
– 예수는 신이 아니라 예언자라는 것이다. 이슬람은 예수를 무함마드를 포함한 25명의 예언자들(아담 · 노아 · 모세 · 예수 등) 중 하나로 보며 그중 무함마드는 ‘최종 최고의 예언자’라고 주장한다.
–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 아니라고 코란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마리아 아들을 메시아라 칭하니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다.”(sura 5:72)
–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 유다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3. 계시론
무함마드는 40세 때인 610년 라마단 때에 당시의 종교적 유행에 따라 메카(Mecca)에서 5km 떨어진 광야에 있는 히라 산 동굴(Cave Hira)에 들어가 기도하였다. 그때 그는 동굴 안에서 시끄러운 종소리와 같은 굉음의 환청(幻聽)을 경험하고 한 영(靈)을 보게 되었다. 그는 술 취한 사람처럼 바닥에 쓰러져 진땀을 흘리고 낙타 새끼 같이 부르짖었다. 무함마드는 이 방문자를 신령(神靈, jinn)으로 생각했다. 무함마드가 본 신령이란 당시 유행했고 아랍인들이 이미 토속적으로 섬겨왔던 강신술(降神術)이나 주물숭배(fetishism)의 영(靈)이었을 것이다.
무함마드의 초기 계시에는 계시자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다만 ‘무명의 영’(jinn)이라 칭했다. 무함마드는 622년 하지라 이후에 이 무명의 영(靈)을 구약 성경의 가브리엘과 동일시하고 있다. 이것은 무함마드가 메디아에서 만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함마드는 자기에게 계시를 가져다 준 가브리엘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천사였으며 그 천사를 보낸 자는 아라비아의 지고의 신(至高神) 알라(Allah)라고 칭함으로써 외형은 유대교적 모습을 지니고 있다.
4. 율법 : 은혜
이슬람은 무함마드의 꾸란 이외 모세의 율법서, 다윗의 시편, 복음서를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슬람은 유대교 및 기독교를 모방한 종교라고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공통점이 많은 종교다. 그러나 이슬람은 사리아(sharia) 법 아래 있는 율법의 종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다. 이슬람이란 알라(Allah)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알라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동함을 말한다. 무슬림은 이슬람 교리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5. 구원론
이슬람은 선행을 통한 자력 구원을 믿는다. 꾸란에 의하면 알라(Allah)의 심판에서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의 대리가 될 수 없다.(sura 6:154) 꾸란은 모든 사람이 자신이 알라(Allah)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꾸란은 대속과 속죄를 위한 희생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이것은 꾸란의 신관(神觀)에서 나온다. 알라(Allah)는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중보자나 피의 희생이나 어린 양이나 대속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슬림은 스스로 옳게 여기고 그들의 의(義)를 스스로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행만이 그들의 악행을 제거해 준다.(sura 11:114) 무슬림은 율법적인 요구를 완성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sura 29:9) 이슬람은 알라와 그의 선지자에 대한 신앙고백조차도 선행으로 간주한다.
6. 종말론
꾸란에 의하면 이슬람 낙원은 황금으로 가득 찼고 눈을 아래로 깔고 커다란 눈을 가진 아리따운 순결한 여자로 가득 차 있다.(sura 37:49, 50) 그중 청순한 복수의 여자들과 가정을 이루고 성(性)을 즐긴다.(sura 44:51-55, 52:20, 55:72-76, 56:28-37) 그러나 자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것은 낙원이 쾌락의 극치를 추구하는 곳임을 나타낸다. 이러한 이슬람의 종말관은 기독교의 종말관을 왜곡하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종말 메시지에 모순되고 있다. 이슬람의 낙원은 순결한 처녀와 소년들과 결혼하는 물리적 행복을 말하고 있으나, 기독교의 천국은 장가가거나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열락(悅樂)하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복이다.
맺는 말
교리적인 면에서 비교해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은 전혀 다른 타 종교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는 같은 여호와와 하나님을 섬기나 이슬람은 전혀 다른 신인 알라(Allah)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믿는다. 중보자, 계시론, 구원론, 종말론도 다르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이슬람 양자의 대화와 협력은 이같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각 종교의 고유한 정체성의 기반 위에서 수행되어야만 한다. 출처 / 한국복음주의협회 2015년 10월 발표회 발제문, 발표자 / 김영한 교수(숭실대학교)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어떻게 탄생했나?
이슬람 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꾸란(Quran)은 천상(天上)에 원본(原本)이 있으며 무함마드(Muhammad, 571?-632, 이슬람교 시조)에게 계시된 완벽한 경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이들은 또 꾸란으로 신구약성경의 진위(眞僞, 참과 거짓)를 구별하는 기준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신구약성경은 여러 사람이 천 오백여 년 동안 쓴 것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오류가 많지만, 꾸란은 알라(Allah, 이슬람의 하나님)가 무함마드 한 사람에게 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혼돈과 오류가 없고, 무함마드가 처음 계시를 받은 때부터 지금까지 일점일획도 변치 않고 원본이 그대로 보존돼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만일 이점에 의심을 품으면 거룩한 꾸란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하며 꾸란이 변질되었다거나 한 구절이나 한 단어라도 추가되거나 삭제되었다고 말하는 자체가 알라(Allah)의 저주를 자초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모순이 이슬람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슬람 학자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슬람의 확장을 위해 그리고 이슬람권에서의 자신의 영향력과 신분 유지를 위해 또 사실을 말했을 경우 직면하게 될 핍박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맘 부카리(Bukhari)나 이맘 무슬림(Muslim)3)이 수집한 하디스(Hadith, 무함마드의 언행 집)는 이슬람교에서 공식적인 경전은 아니지만 꾸란 경전에 버금가는 권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꾸란보다 더한 권위가 부여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의 교리를 설명할 때 제일 먼저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행해야 할 다섯 기둥에 대해서 가르친다. 그러나 꾸란에는 이 다섯 가지 의무를 모아 놓은 곳이 없다. 이는 이맘 부카리가 편집한 하디스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교리나 가르침에서 문제점을 제기할 때 어떤 학자들의 주장에 근거하여 말하기 보다는 꾸란과 이맘 부카리 혹은 이맘 무슬림의 하디스의 내용을 인용하여 반증한다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서는 하디스에 비교적 많은 자료가 있다. 그런데 그 자료들은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듣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무함마드는 신(神)으로부터 책을 받은 일도 없고, 그가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으로 만든 일도 없고, 후대 무슬림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책으로 묶어 만들라고 명령한 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꾸란에는 알라(Allah)가 무함마드에게 책(꾸란)을 내려보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꾸란은 알라가 무함마드에게 성경의 모체가 되는 책을 내려주셨다고 말한다. “그대에게 그 책을 계시하신 분은 알라이시며 그 안에는 근본의 말씀이 있어 성경의 모체가 되고…”(꾸란 3:7) “그분의 종(무함마드)에게 그 책(꾸란)을 계시한 알라께 찬미를 드리나니 그 안에는 일점의 왜곡됨도 없노라.”(꾸란 18:1) 이 두 구절 외에도 꾸란에는 여러 곳에서 알라는 무함마드에게 책(al-kitab, the Book)을 내려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의 꾸란이라는 경전은 주후 632년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 없었다. 즉 이슬람의 역사와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죽을 때까지 꾸란을 책의 형태로 만든 일이 없었다. 다만 그가 간헐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고 암송하는 소리를 들었던 제자들이 그 내용을 나뭇잎이나 돌 등에 새겨놓고 암기하기도 했던 것들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꾸란의 내용을 암기하던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게 되어 무함마드의 계시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게 되자 우마르(Umar)의 제안에 이슬람의 첫 칼리프 아부 바크르(Abu Bakr, 573-634)가 그것들을 모으게 하였고, 1차 수집한 것을 우마르의 딸 하프사에게 맡겼다가 결국 3대 칼리프 우트만(Uthman, 577-656)의 명에 의해서 하프사가 가지고 있는 것과 흩어져 있던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여 종합 편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어떤 종류의 완본이든지 조각 본이든지 모두 불태우도록 명령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초기 무슬림들은 꾸란을 책으로 만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카리의 하디스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죽은 후 전쟁터에서 꾸란을 암송하던 사람들이 죽고 전쟁이 더 심해져 꾸란 암송 자들이 다 죽어버리면 꾸란 자체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구절들을 수집하여 책으로 묶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주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명하지 않았던 일을 그의 허락 없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비록 자기들이 볼 때는 좋은 일이지만 알라가 나중에 그 일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들자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Zaid bin Thabit, ?-665)에게 명하여 꾸란의 조각들을 모으라고 명했던 것이었다. 아부 바크르의 이 같은 명령을 받은 타비트는 산을 옮기라는 명령보다 더 어려운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했다고 한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무함마드는 자기가 계시 받았다고 말했던 꾸란 구절들을 잊어버리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낭송해 준 구절들을 나중에 망각하고 잊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낭송하는 것을 듣고 생각났다고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다음의 하디스 구절이 그 증거다. “메신저(무함마드)께서는 사원에서 낭송자가 꾸란을 낭송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는 내가 잊었던 그것을 생각나게 했으니 나는 알라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62) 꾸란의 구절을 망각하는데 대한 계시는 꾸란 자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취소하거나 망각케 한 어떤 계시의 구절이 있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낫거나 비슷한 것을 가지고 온다. 알라(Allah)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너희는 모르느냐?”(꾸란 2:106, 힐럴리 역)
꾸란을 낭송하는 방법은 원래 여러 가지였다. “알라의 메신저(무함마드)께서 가브리엘 천사가 내게 꾸란을 어떤 식으로 낭송해 주기에 내가 다른 식으로 낭송해달라고 계속 부탁을 했더니 결국은 7가지 방법으로 낭송해 주셨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Volume 6, Book 61, Number 513) 꾸란은 원래 다양한 방법으로 낭송할 수 있도록 계시되었다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무함마드는 가브리엘 천사가 내려준 꾸란을 그대로 받은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의 요청에 의해서 가브리엘 천사가 낭송하는 방법을 7가지로 다시 계시해 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무슬림들은 7세기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한 가지 억양과 발음과 악센트로 낭송해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의미도 모르는 아랍어로 꾸란을 낭송하게 하는 것일까?
우트만 꾸란의 편집이 완료되었을 때 꾸라이시 족들이 교정을 보았다. 우트만은 3명의 꾸라이시 사람들에게 “자이드 빈 타비트의 꾸란 중 어느 부분이라도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꾸라이시 방언으로 기록하라. 왜냐하면, 꾸란은 그들의 방언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7)
꾸란을 수집할 때 실수로 빠뜨렸던 구절들이 있었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꾸란을 가장 잘 외우고 있었던 네 사람이 있었다. 무함마드는 사람들에게 압둘라 빈 마수드, 쌀림, 무아드, 우바이 빈 카압 이 네 사람에게 꾸란을 배우라고 명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21)
그러나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를 역임했던 아부 바크르는 자이드 빈 타비트에게 꾸란을 모으라고 명령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09) 타비트는 실수로 꾸란의 한 구절을 빠뜨렸다고 고백하고는 나중에 무함마드가 낭송하던 것을 들었던 생각이 나서 그 구절을 찾아 나섰다가 결국은 쿠자이마 빈 타비트 알 안싸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구절은 꾸란 쑤라 타우바(9:128~129)였다고 기록되어 있다.(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0)
계시된 꾸란 구절이 즉시 수정된 경우도 있다. 꾸란 4:95에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는 구절이 무함마드에게 계시되었다고 하여 자이드가 기록하려는데 그때 아므르 빈 움막툼(Amr bin Um Maktum)이라는 소경이 무함마드 뒤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오 알라의 메신저여 나 같은 소경에 대한 당신의 명령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다음과 같은 계시가 다시 내려왔다는 것이다. “무슬림 중 알라를 위해서 전쟁에 나가 싸우는 자들과 불구자도 아닌데 집에 앉아 있는 자는 동등하지 않다.”(꾸란4:95)(Sahih al Bukhari Volume 6, Book 61, Number 512)
꾸란에는 사탄에게 받은 계시도 있다. 무함마드가 소속되어 있던 메카의 꾸라이시 족이 섬기던 신 알라(Allah)에게는 세 딸 신(神)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라트, 우짜, 마나트였다. 그들에 대한 꾸란이 계시되었는데, “너희는 라트, 우짜, 마나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느냐? 저들은 하늘 높이 나는 학과 같아서 그들의 중재는 알라께서 열납하시느니라”(꾸란53:19~23)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알라의 단일신론을 주장하면서 딸 신들을 인정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 계시를 취소하는 새로운 계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계시는 지금 꾸란에 있는 것처럼 세 딸들의 권위를 부인한다.(꾸란 53:19~23) 그러자 사람들이 왜 알라의 계시가 바뀌었냐고 물었을 때 “그 구절은 사탄이 내 혀에 넣어준 것이었기 때문에 가브리엘 천사의 계시에 의해서 취소되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Al Tabari Hadith Book6 No. 107)
그와 같은 것을 보편화시키면서 인정하는 구절도 있다. “그대 이전에 우리가 보낸 선지자나 예언자들이 계시를 낭송할 때 사탄이 거짓을 그 속에 섞어 넣지 않은 자는 없다. 그러나 알라께서는 사탄이 섞은 것을 취소하시고 자신의 계시를 세우셨다. 알라는 모든 것을 아시고 지혜로우시다.”(꾸란 22:52 힐럴리 역)
꾸란에서 사라진 구절도 있다. “알라의 말씀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때 그 계시함이 무엇인가는 알라만 아심이라. 이에 그들이 그대는 위조자라고 말하나 그들 대다수는 알지 못하더라.”(꾸란 16:101 최영길 역) 대체라는 말은 하나를 취소하고 다른 것으로 바꾼다는 말인데 하늘에 원본이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이같은 꾸란에 대해 미화된 홍보용 자료들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꾸란은 사실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부터 수시로 취소 또는 첨가되기도 하며 대체되기도 하는 변화를 거듭해 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책으로 묶을 생각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가 죽은 후 꾸란의 구절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이라는 계시가 분명히 꾸란에 있었고 무함마드도 투석(投石) 형(刑)을 집행했고 그의 후계자들인 칼리프들도 투석형을 알라의 명령으로 알고 집행했는데 지금은 꾸란에 그 구절이 없다는 것을 보더라도 양심 있는 무슬림 학자들이라면 꾸란이 하늘에 원본이 있었던 것이 그대로 책으로 계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글쓴 이 /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은 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
칼럼니스트며 기독교 변증가인 마이클 브라운 박사(Dr. Michael Brown)가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Of Course Muslims and Christians Don’t Worship the Same God)라는 최근 칼럼에서 무슬림의 알라(Allah)와 기독교의 여호와(Jehovah) 하나님이 다른 이유를 5가지로 제시했다.
1. 여호와는 ‘하늘 아버지’ 그러나 알라는 ‘아버지’가 아니다.
무슬림들에게 알라(Allah)는 ‘아바’ 혹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문(마 6:9-13)에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즉 ‘아바’(아빠)라고 부르나(롬 8:15, 갈 4:6), 이슬람의 무슬림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이슬람 신학에서 알라(Allah)의 이름이 무려 99개나 되지만 ‘아버지’라는 개념은 없다.
2. 여호와는 성도와 ‘교제’하는 친구가 되지만 알라는 아니다.
무슬림에게 알라(Allah)는 초월적 존재로 경배와 송축 그리고 복종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친구처럼 교제할 수 있다.(사 41:8, 요 15:14) 그러나 무슬림들에게는 이런 개념이 없다. 무슬림들은 아랍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아랍어 기도문을 주문처럼 암송하며 오직 알라(Allah)의 신성(神性)만을 강조한다.
3. 무슬림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하루 5번씩 기도하는데 그때 “알라는 단 한 분이시다. 알라는 영원하시다. 성자와 성부를 두지 않는다. 그분과 동등한 것은 세상에 없다.”라고 꾸란(Quran)을 암송한다. 이는 무함마드의 다신교 신앙이 무슬림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또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며 결국 무슬림들은 하루 5번씩 그들의 기도 때마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교리 중 하나인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4. 무슬림들은 예수를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만 본다.
무슬림들도 예수를 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많은 선지자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같이”(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요 14:11),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 “그 본체의 형상”(히 1:3) 등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를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참 사람이시오 또한 참 하나님으로 믿는다.
5. 무슬림들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지 않는다.
꾸란(Quran)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예수를 하나님 아들이라 믿는 자는 알라(Allah)의 저주가 있을 것이다. 진리로부터 멀어져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수라 9:30)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며 믿는 것’(롬 10:9, 10)이 구원의 필수 조건이지만 무슬림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고 믿으라.”라고 한다면 알라(Allah)의 저주를 받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고 할 것이다.
무슬림들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과 ‘알라’(Allah)는 같은 하나님이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다 같이 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슬람의 ‘알라’(Allah)와 ‘여호와 하나님’은 같은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르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5번 무슨 기도를 할까?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루 세 번 식사할 때만 기도한다. 하지만 식사기도는 기도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부분이 있다. 식사를 위한 절차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일까? 하기야 요즘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식사기도조차 안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은 하루 세 번의 식사기도에 새벽기도까지 도합 네 번을 기도한다.
무슬림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무적으로 정확한 시간에 맞춰 하루 다섯 번 씩 메카 방향을 향해 돌멩이를 놓고 이마를 땅에 대며 기도한다. 그들은 과연 무슨 기도를 하는 것일까? 무슬림들은 본인이 생각하는 기도내용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정해진 구절을 암송할 뿐이다. 이 구절은 매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정해져 있는 것이며 앞으로도 절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무슬림들의 기도내용은 코란 1장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을 ‘개경 장(Opening Chapter)’이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은 기도할 때마다 2~3번씩 이 개경 장을 암송한다. 아침에 2번, 점심에 4번, 오후에 4번, 해질 때 3번, 밤에서 자정 사이에 4번 암송하는 것을 다 합치면 하루에 최소한 17번 암송한다.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이슬람 국가에서 행해지는 공적, 사적인 중요한 행사의 모든 첫 순서는 공이 개경 장을 암송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2003년 성탄절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이란의 도시 밤(Bam)이 지진으로 폐허가 되고 4~5만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을 때 한국교회가 정성을 모아서 ‘사랑의 집짓기 운동’을 펼쳤다. 우여곡절 끝에 집이 완공 되어서 2005년 주민들에게 집을 넘겨주는 행사를 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측에서는 한국교회 대표와 대한적십자사 등이 참석을 했고 이란 측에서는 시장과 시의원, 적신월사 대표 등이 참석을 했다.
그때 한국교회 및 NGO 대표가 요구한 것은 “한국교회가 기독교인들의 사랑과 정성을 모아 지은 집이니까 어렵더라도 코란 낭송 순서는 생략하자”라고 했고 밤 시장 이하 모든 분들이 흔쾌히 동의해서 행사가 시작되었다. 행사는 이란의 사회자가 진행했고 나는 통역을 맡았다. 그런데 이란의 사회자가 갑자기 코란의 개경 장을 암송하는 것이었다. 나는 통역을 할 수 없어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코란이 아랍어라서 통역을 할 만큼 이해 할 수도 없었지만 코란 낭송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고서 마이크를 잡자마자 개경 장을 낭송하는 것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개경 장은 총 7절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자비로우시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2. 온 우주의 주님이신 알라께 찬미를 드리나이다. 3. 그 분은 자애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4. 심판의 날을 주관하시도다. 5. 우리는 당신만을 경배하오며 당신에게만 구원을 비노니 6. 저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소서. 7. 그 길은 당신께서 축복을 내리신 길이며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들이 걷지 않는 가장 올바른 길이옵니다.
지면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 구절들을 모두 주석을 달고 설명을 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7절에 있는 ‘노여움을 받은 자나 방황하는 자’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노여움을 받은 자란 유대인을 말하며 방황하는 자란 기독교인들 말한다는 것을 무슬림들은 어려서부터 귀가 닳도록 배운다. 최영길 번역 한국어 코란 주석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세상의 모든 무슬림들이 매일 17번씩이나 의무적으로 암송하고 있는 구절이 유대교와 기독교와는 담을 쌓는 내용인 것이다. 그러니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이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우리의 친구이고 같은 신을 믿는 이웃이며 창조주의 말씀을 가진 경전의 백성으로 우리는 그들을 존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소리인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평화를 외치는 무슬림일지라도 그 구절을 매일 17번씩이나 외우며 유대교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이 가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인도해 달라고 알라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무하마드가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미워한 이유는 간단하다. 어떤 우상 숭배자도 코란이 거짓인 것을 알지 못한다. 성경을 미리 읽어 본 유대교도와 기독교인만이 그가 계시 받았다고 말하는 내용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내용인지를 분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하마드가 계시를 받았다고 말할 때마다 앞장서서 반박한 이들이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뿐이었다. 이 때문에 무하마드는 특별히 기독교인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의 계시를 거짓이라고 하고 무시하는 자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지나갈 수 없듯이 그들이 낙원에 들어가는 일은 없다”(Q 7:40). “진리가 나타나도 이를 거짓말이라 이르는 자처럼 악한 자가 더 있을까”(Q 29:66). “오 믿는 자들이여 나의 적도 그대들의 적도 벗으로 삼지 말아라”(Q60:1).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에 이렇게 씌어 있는데도 기독교인들을 친구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경전을 모르고 무조건 따라다니는 무지한 무슬림이든지, 알면서도 기독교인들을 속이는 무슬림이든지 둘 중에 하나다.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슬림들과 똑같이 우리도 벽을 쌓자고 한 것이 아니다. 그들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기독교에 대한 증오의 실상을 알고 지혜롭게 접근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런 이슬람의 실상을 알고 품어주는 것과 모르고 속아서 품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 이만석 목사(한국이란인교회) -
이슬람과 기독교의 가르침의 차이점
구분 | 이슬람(무슬림) | 기독교(크리스챤) |
1. 믿음의 대상 | 유일신 알라(Allah) 절대 자존하며 인간 과 그 어떤 언약도 맺지 않음, 기독교의 하나님과 완전히 다른 신 | 삼위일체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
2. 구원에 이르는 길 | (1) 선행과 알라에 대한 충성도 (2) 성전(Jihad)를 통해 죽어야 함 |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 |
3. 경전의 성격 | 가브리엘의 계시를 무함마드가 구술함 |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
4. 경전의 지위 | 무함마드를 통해 단 23년 동안 주어진 알라의 메시지 | 유일무이 무오 (無誤)한 하나님의 진리 |
5. 선지자의 자리 매김 | 독점적 지위를 갖는 선지자(Prophet) 이면 서 단순한 메신저로 서의 무함마드 | 구원의 유일한 길,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
6. 삼위일체 에 대한 시각 | 알라, 예수, 마리암 (Maryam 혹은 Marium) | 성부, 성자, 성령 |
6. 죄에 대하여 | 알라의 징벌을 피할 수 없는 요소. 회개의 개념은 단순한 실책에 대한 용서, 알라의 자비를 구하는 데 초점 | 회개를 통해 ‘죄사함’을 입음 |
7. 천국관의 차이 | 여자는 갈 수 없음. 선행이 무거울 때, 알라의 가르침에 성실했을 때, 성전(Jihad)를 통해 알라와 무함마드를 위해 죽었을 때 |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영접했을 때 |
8. 신 앞에서 의 사람의 지위 | 종(Servant). 언제나 신의 자비를 구해야 하는 종속적 존재 |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림 |
9. 생활에 서의 신앙 | 외식적이고 드러내는 경건생활 인격적 변화 는 관심 사항 아님 |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중심이 됨 |
10. 남녀의 지위 | 여자는 남자에게 속하 는 종속물이자 소유물. 성적인 유희의 대상임 | 동등한 영적 지위 를 누림 |
11. 신으로 부터의 사랑 의 성격 | 조건적 물질적 자애 로움 (알라-주인, 인간-종) | 무조건적 영적 사랑 (독생자의 보혈로 인간을 구원) |
12. 축복에 대하여 | 조건부 축복, 알라의 일방적 권위 에 불과함 | 축복의 언약을 지키 시는 거룩한 영 |
13. 사람에 대한 섭리 하심의 정의 | 종에 대한 주인의 심판과 권세, 인간에 대한 절대적 권위 강조 |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인내 하시는 마음 |
<출처 - 월간 목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