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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소망의 여명
욥기 14:7-17
7 나무는 희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9 물기운에움이돋고가지가뻗어서새로심은것과같거니와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규례를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14 장정이라도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기다리시겠나이다
16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감찰하지 아니하시나이까
17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허락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상황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또한 마귀의 의도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욥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만 알고 있었고 어둠의 영인 마귀의 의도가 그에게 발생한 사건에 섞여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욥기에 계시된 하늘 어전 회의를 보게 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내게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뜻과 이에 상반되는 사탄의 의도가 얽혀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우리는 욥의 세 친구가 대단히 신학 지식이 많고 나름대로 논리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욥이 살던 시대에 동방에서 욥의 친구로 알려진 유명한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부귀와 명예도 한껏 갖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뜻하신 그리스도와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몰랐고 이에 복음을 알도록 택함 받은 욥과 마찰을 빚게 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욥의 제사장 역할과 그가 드린 번제 덕분에 그들 역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하게 됩니다. 이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십자가 속량에 의해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예표입니다. 또한 오직 욥의 제사장직이 상징하는 살아계신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욥의 세 친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을 대적하는 역할을 했고 이는 그들 뒤에서 마귀가 그들의 마음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로 보건대, 누구든지 가인처럼 복음이 담기지 않은 신의식을 가질 수 있으며 심지어 인간의 공로와 열정을 담은 예배까지 드릴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헛된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만이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 예배입니다.
[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3-2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욥기를 다루면서 또 한 가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계시의 점진성입니다. 욥은 구약 시대에 복음의 초보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가 ‘번제’를 드린 것과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른 것으로 보아 그는 언약의 하나님을 믿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담고 있는 메시야의 대속을 희미하게나마 바라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신자들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대속자가 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한 거듭난 생명을 받은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도 아직은 분명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나아가 신자의 부활과 함께 주어질 영원한 기업인 새하늘과 새땅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욥의 신학은 바른 노선에 서 있었지만 우리처럼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정경 66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욥기는 노아 홍수 이후 아브라함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된 가장 첫 번째의 성경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욥의 신학이 매우 초보적인 복음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구속사, 즉 독생하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메시야로 오심과 그분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 그리고 성령을 보내심, 재림, 나아가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에 대한 구체적인 계시를 아직은 모르는 상태입니다. 심지어 천상의 하나님의 어전에서 있었던 마귀의 도전 및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의도마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 모든 고통은 근본적으로 죄로 인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을 무너뜨렸을 때 첫째 아담의 죄로 인해 죄와 율법의 저주가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율법의 저주는 고통과 죽음이었습니다. 물론 아담이 죄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우리 인간들은 그 어떤 고통도 경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을 깨뜨렸고, 그로 인해 이 세상에 죄와 죽음과 고통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과 긍휼이 무한하신 분이기에 이것이 인류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란을 일으키고 행위 언약을 깨뜨린 아담과 하와에게 그들이 에덴 동산을 떠나기 전에 약속의 씨, 곧 오실 구세주에 대한 복음을 주었습니다. 즉, 율법으로 인해 인간에게 임한 죄의 저주가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거될 수 있는 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대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율법으로 인한 죄의 저주를 감당하신 십자가의 속량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따라서 모든 저주를 대신 짊어지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우리에게는 감당해야 할 율법의 저주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고난, 곧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고난은 더 이상 율법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오는 고난이 아닙니다. 그 대신 의인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순수한 복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된 자가 받는 모든 고난은 영원한 상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기획해 놓으신 것입니다.
[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 1:24, 29)
물론 신자라도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지 않고 죄를 범할 때는 하나님의 징계가 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징계마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일 뿐입니다.
[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
7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가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
10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히 12:6-8, 10)
이처럼 신자들에게 임하는 고난은 율법의 저주이거나 하나님의 형벌이 아닌 오직 순수한 축복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하나님께서 그를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기뻐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게 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받은 고난은 그가 지은 어떤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며 또한 욥의 어떤 연약한 죄성을 고쳐주기 위한 교정 수술 같은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가 가진 참된 믿음을 확인하고 더욱 연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온 천하에 칭찬하시자 사탄이 욥의 믿음을 무너뜨리겠다고 던진 도전장 때문에 비롯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사탄의 시험을 이기고 믿음을 지키면 그의 믿음은 연단을 거쳐 확증되면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원토록 인정 받는 믿음이 되며 이에 따른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고난은 놀랍게도 새언약 시대에 성도들이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과 매우 유사합니다.
[
19 부당하게고난을받아도하나님을생각함으로슬픔을참으면이는아름다우며
20 …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19-21)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하지만 욥은 그가 받는 고난에 대해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는 가운데 깊게 기도하면서 모든 인간에게 있는 작은 죄악마저도 완전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에 그는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중보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중보자가 나타나시기를 부르짖게 됩니다.
[
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불평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28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죄 없다고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29 내가 정죄하심을 당할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
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34 주께서 그의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의 위엄이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라
](욥 9:27-35)
이렇게 중보자를 필요로 하며 주께 요청한 욥은 다시 하나님께 아룁니다.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 놓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어왔으며 언제나 순전함을 지켜왔다고 토로합니다. 평생 주를 향한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군가에게 마음 속 깊은 사연과 슬픔을 나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특히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깊은 마음의 세계를 그대로 토로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서 토로합니다.
“내 영혼이 지금 나의 삶을 싫어합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원통함을 발설합니다. 내 마음이 비록 이 괴로움을 말하더라도 하나님이시여! 나를 정죄치 마시옵소서. 왜 제게 이러한 고통과 고난을 주시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하여 주소서”(참조, 욥 10:1-2).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은 저를 학대하시고 멸시하시면서 왜 악인의 꾀는 허락하시는지요?”(참조, 욥 10:3). /* 여기서 욥이 악인의 꾀라고 할 때 그 악인은 욥의 세 친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
“주의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니시니,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지 않으십니까? 제 마음과 동기를 알지 않으십니까? 지금까지 제가 보인 충성스런 마음과 삶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 주의 날은 인생의 날이 아니며, 주의 해는 인생의 해가 아니기에 제 삶 전체를 처음부터 지금까지 다 아실 텐데, 왜 나의 작은 허물까지 찾아내시고 나의 모든 죄를 조사하여 결국 이렇게 형벌을 내리십니까?”(참조, 욥 10:4-6).
그러면서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않고 흠 없이 살아왔다고 하소연합니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님은 제 마음 속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이렇게 자기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하소연한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만드시고 어떻게 돌보셨는지를 회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성스럽게 저를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제 몸을 만드시고 가죽과 살, 뼈와 힘줄을 만드신 후 생명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후 제 영혼을 평생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저의 작은 허물까지 마음에 두시고 용서하지 않으시고 화를 내시는지요. 제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음에도 머리조차 들지 못할 정도로 이런 고통과 비참을 당하게 하시니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조금이라도 머리를 드는 듯 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난 사자처럼 저에게 달려들어 전혀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십니다”(참조, 욥 10:9-16).
특히 욥은 그의 세 친구가 주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하소연 합니다. 10장 17절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증인들을 세워 저를 치십니다. 진노를 더하십니다. 군대를 모아서 치시는 듯 합니다. 왜 저만 유독 미워하십니까? 친히 증인을 세우실 만큼 왜 저의 작은 허물을 혹독히 다루십니까?”
“그러면 왜 저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는지요?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 태어나기 전에 죽었더라면 훨씬 나을 뻔 했습니다. 태어나더라도 낳자마자 무덤으로 바로 갔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참조, 욥 10:18-19).
욥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죽음이 코 앞에 와 있는 것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제 제가 살아 있을 날이 몇 일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이제 노를 거두시고 저의 남은 짧은 기간이나마 평안하게 하소서. 저의 삶이 온전하였음을 인정해 주소서. 제가 죽기 전에 그리하여 주옵소서. 이제 곧 저는 죽음의 영역인 음부로 내려갈 것입니다”(참조, 욥 10:20-22).
이처럼 욥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신 정직하게 기도합니다.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모든 사정을 그대로 아룁니다.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진실한 기도가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위선을 떨 수 없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자신 속의 생각과 동기와 마음을 압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걸릴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욥에게도 작은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진실한 마음을 갖고 철저하게 살아왔다는 사실은 변할 수 없습니다. 욥은 바로 이 사실을 진실하게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진실로 믿음을 잃지 않고 아직까지 주를 경외하며 감사와 사랑으로 살아왔다고 그의 진정을 토로한 것입니다.
오, 이러한 고백을 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욥은 얼마나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경외하며 섬겨왔음을 온 생명을 다 바치더라도 고백할 수 있는 욥의 인내와 신앙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이렇게 욥이 기도를 마치자 욥의 세 번째 친구인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을 공격합니다. 그는 세 친구 중에 가장 연소자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잔인하고 냉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1장에서 나타나는 이 친구의 영적 원리는 매우 간단합니다. 인생에서 고통을 받는 이유는 악함 때문이요, 인생에서 형통하는 이유는 선행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발은 이미 욥이 당한 재앙을 보며 그와 그의 자녀들이 큰 죄악을 짓고도 숨겨 놓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은 순전하다고 주장하는 욥의 말을 거짓이 담긴 헛소리로 간주합니다. 그러면서 소발은 욥의 거짓말을 드러내겠다고 덤벼듭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욥을 ‘말이 많은 사람’(1절), ‘허망한 사람’(11절), ‘악한 자’(20절)라고 부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은 참아오셨지만 마침내 재판을 열고 욥에게 재앙을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욥 11:10-11).
그리고 욥이 당한 고난은 사실 하나님께서 내리셔야 할 징벌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개역 개정은 6절을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고 번역했는데,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너의 죄악을 전부 벌하신 것은 아니고 일단 일부분만 징벌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욥이 당한 재앙은 욥이 지은 죄악에 대해 하나님이 부으실 재앙의 일부분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악을 토설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나머지 재앙마저 부으실 것이라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욥이 이미 당한 재앙마저 그가 지은 무서운 죄악에 비하면 가볍다는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하나님을 왜곡시키는 악인이며 친구인 욥을 향해 무정하고 잔인한 사람입니까? 그가 하는 말은 공갈을 동반한 위협 및 염장을 지르는 추측성 발언일 뿐입니다.
이렇게 공갈을 섞어서 위협한 소발은 이제 회유하며 떠듭니다. 마음을 고쳐 먹고 죄악을 멀리 버리고 주를 향하여 기도하면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머지 하나님의 재앙을 받고 영원히 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당장 그가 지은 죄악과 그의 자녀들이 지은 죄악을 토설한 후 진정으로 회개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
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5 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8 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9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욥 11:13-19)
그리고 고집 부리는 욥을 악인으로 빗대며 그가 도망할 곳은 없고 죽음 밖에 없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욥 11:20).
이와 같이 소발은 악인의 비참한 최후를 강조하면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발은 허접한 신학으로 하나님을 심각하게 왜곡시켰고 근거 없는 추측으로 욥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악하고 어리석은 소발은 그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날 복음을 모르는 종교인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정확하게 소발과 같은 종교인에게 해당합니다. 그러한 종교인은 다메섹 도상에서 우리 주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 사울처럼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대변할 수 없는 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 16:2-3).
복음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 모릅니다. 성령에 대해 모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모릅니다. 따라서 복음 안에서 긍휼한 마음을 갖기보다 자기 잣대로 사람들을 판단하는데 앞섭니다.
이 세상에서 살다 보면 남의 지은 죄를 어떻게든 끄집어 내어 판단하려는 자기 의에 빠진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협박과 공갈과 회유를 통해 숨겨진 죄악을 찾아 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는 소발과 같은 종교인들이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소발은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욥 11:11-12)라고 하며 욥의 인격 전체를 송두리째 짓밟는 사악하고 잔인한 공격을 가합니다.
이제 욥은 소발의 무자비하고 독한 말을 다 듣고 변론합니다. 욥은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구나. 너희가 죽으면 이 세상에 지혜도 다 죽겠구나. 너희는 모든 지혜를 다 소유한 것처럼 하나님처럼 행세하는구나. 하지만 너희가 말하는 정도의 상식을 모르는 자가 누구겠느냐. 내가 너희만 못한 줄 아느냐”(욥 12:2-3)라고 대답합니다.
욥은 계속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주의 응답을 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너희는 오히려 비웃고 조롱하는구나. 하지만 너희가 나를 조롱하더라도 나는 의롭고 온전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구나”(참조, 욥 12:4).
그리고 욥은 복음을 모르는 세 친구를 향해 예리하게 대답합니다.
“안일하고 생각하기에 게으른 너희 같은 자들은 재앙 당한 자를 보면 무조건 멸시하지. 그래서 재앙 당한 자로 하여금 더욱 실족하게 하고 더욱 괴롭게 하고 더욱 고통을 당하게 하지. 그러나 너희의 조롱과 멸시의 생각이 틀린 증거를 한 가지 대겠다. 어떤 때는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풍성하게 사는 때도 많다!”(참조, 욥 12:5-6).
“아!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먼저 짐승에게서 배우라. 너희 지혜는 짐승의 지혜만도 못하구나.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에게 배우라. 땅에게 말하라. 땅이 가르치리라. 모든 피조물도, 여호와께서 강도의 장막을 형통케 하는 때가 있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게 잘 먹고 풍요하게 지내는 때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참조, 욥 12:7-8).
그런데 이 말을 하던 욥이 갑자기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부릅니다. 12장 9절입니다.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여호와’는 하나님과 은혜 언약을 맺은 주의 백성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은 욥기에서 1장, 2장, 그리고 오늘 12장 9절에서 나오고 욥에게 주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38장, 40장, 42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욥이 자신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호칭인 여호와를 부르며 말합니다.
“의롭고 순전한 내게 발생한 이 재앙도 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손에서 왔도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악인이 이 세상에서는 형통하기도 하고 거꾸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온전하게 살아가는 의인이 오히려 이 세상에서 재앙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서 고백하는 이 진실한 고백은 욥의 세 친구의 세속적 형통 신학을 근본적으로 허무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욥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은 인간의 지혜와 논리로 파악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다스림 가운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신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주의 손 안에 있으며 세상의 그 어떤 일도 그 분의 주권에서 벗어나 발생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연로하신 자에게 이런 사실을 헤아리는 지혜로움이 더 있으며 장수하는 자가 더 명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지혜와 명철로는 참 지혜와 권능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오직 모든 모략과 명철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허시면 세우는 자가 없고, 그분이 사람을 가두시면 나오게 할 자가 없다”(참조, 욥 12:7-14).
욥은 또한 이 세상의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도 하나님의 완전한 손길에 달려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막으시면 땅이 마르고, 물을 보내시면 홍수가 일어난다. 이처럼 능력과 지혜가 다 하나님의 손에 있고, 심지어 속이는 자나 속는 자나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참조, 욥 12:15-16).
또한 욥은 이 세상의 모든 정치 및 역사의 운영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다스린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를 자랑하던 모사를 벗은 몸으로 끌고 가시며, 권세를 자랑하던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게 되게 하시고, 권력을 자랑하던 왕을 왕좌에서 물러나게 하시고, 위선을 탈을 쓰고 있던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려가게 하신다. 권력자들을 넘어뜨리시며 그들이 신임하던 충성된 신하들의 말을 허사로 만드시고 지혜를 자랑하던 노인들과 장로들의 명철을 무디게 하시며,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고, 강한 자들의 띠를 푸신다”(참조, 욥 12:17-21).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가운데 은밀하게 행하여진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조차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신다(욥 12:22). 민족을 흥왕하게도 하시며 다시 멸하기도 하시고 그들을 온 땅에 널리 퍼지게도 하시며 다시 포로로 끌려가게도 하신다(욥 12:23). 세상 군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셔서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도 하시며, 빛 없는 캄캄한 곳에서 더듬게 하시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게도 하신다”(욥 12:24-25).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섭리와 운영은 너희가 말하는 이 세상의 인과응보적인 원칙과는 달리 인간이 헤아리기에는 너무 높고 깊다. 하나님께서 역사와 사건을 인도하심은 우리의 이해 한계를 넘어선다.”
욥은 변론하는 와중에 복음을 향해 전진합니다. 더욱 생각이 명료해지고 복음적인 깨달음이 깊어집니다. 사실 욥은 여러 달 동안 고통 속에서 기도로 주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고난 속에서 더욱 담대하여지고 또한 더욱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직 욥이 처한 현실을 바꾸어주지 않으셨지만 놀랍게도 욥은 기도 가운데 복음의 빛을 받게 되면서 더욱 깊은 지혜와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과 관련한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이 헤아리기에 너무 깊고 오묘합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5-27).
사랑하는 여러분!
욥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과 재앙과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또한 욥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든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해가 되지 않는 현재 상황에 대해 기도로 더욱 주의 뜻을 알고자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러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여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인내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욥기 13장 15절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욥 13:15-16).
개역 개정은 15절을 “내가 희망이 없노라”라고 부정적으로 번역하였지만 원어 (야할)의 피엘 형태는 오히려 그 반대로 ‘소망한다’는 뜻입니다. 즉, 바른 번역은 NASB처럼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소망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혹은 KJV 처럼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라고 번역함이 옳습니다.
그리고 개역 개정은 16절에서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를 앞에 두었지만 원어는 “이 소망이 (또는 이 믿음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를 앞에 두고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리라”를 뒤에 둡니다. 그러므로 16절은 “이 소망(또는 믿음)이 구원이 되리니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리라”고 번역됩니다.
지금 욥은 참으로 비참하고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인내로 자신의 믿음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호흡 마치는 순간까지 놓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마침내 만나게 되어 자신의 진심과 진정을 고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욥의 믿음과 소망을 보시고 욥을 인정하고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의 확신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위해 욥은 기도로 주의 약속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은 허물에 대한 모든 용서 역시 그가 드려온 번제가 상징하는 중보자로 인해 가능하다는 것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번제에 대해 믿었고 나아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진실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욥이 죽음 앞에서도 고백하는 그의 가장 깊은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자, 욥의 확신을 들어보기 바랍니다. 욥기 13장 18-19절입니다.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여기서 사용되는 ‘사정’은 원어로 (미쉬파트)인데 법적 판결을 뜻합니다. 즉, 욥은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진심을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정직하게 진술했고, 그 진술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받아들여져서 의롭다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욥은 이 사실을 따질 수 있는 자가 누구냐고 말합니다. 이로써 욥은 믿음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과 하나님이 그의 사정을 받아들여주실 것을 확신하며 구원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14장으로 건너와서 인간 모두가 자신을 비롯하여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그리고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로 인해 죽음에 처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
10 장정이라도 죽으면 소멸되나니 인생이 숨을 거두면 그가 어디 있느냐
11 물이 바다에서 줄어들고 강물이 잦아서 마름 같이
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욥 14:10-12)
이처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 아래 있는 모든 인생을 품꾼의 날과 같이 인생의 날을 제한하셨으며 그 누구도 그 한계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희망이 없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죽음과 함께 인간은 영원히 잊혀지는 비참에 떨어질 것입니다.
[
18 무너지는 산은 반드시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9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희망을 끊으시나이다
20 주께서 사람을 영원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보내시오니
21 그의 아들들이 존귀하게 되어도 그가 알지 못하며 그들이 비천하게 되어도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22 다만그의살이아프고그의영혼이애곡할뿐이니이다
](욥 14:18-22)
그리고 죄로 인해 죽은 모든 영혼들은 이 하늘이 없어지기 전까지 죽음의 영역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욥 14:12).
물론 어느 날 현재의 이 하늘과 땅은 주의 재림과 함께 새하늘과 새땅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교통하는 자들은 영광의 부활로 일어날 것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영벌의 부활로 일어나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욥은 진행 되는 고통 가운데 고통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워지는 날을 소망합니다. 물론 그 날은 주께서 재림하셔서 새하늘과 새땅을 시작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계 21:1-6)
그러나 욥은 이러한 완전한 계시가 없기 때문에 고통이 없는 미래를 소망할 뿐입니다.
[
13 주는 나를 스올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키실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정하신 날까지 나를 기억하옵소서
14 그리하면 나는 다시 살아나는 그 날까지 나의 모든 고난의 날 동안을 참으면서 풀려나기를 기다리겠나이다
15 그 날에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나를 만나리이다
16 그때까지주께서나의걸음을보호하시고더이상나의죄를감찰하지마옵소서
17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참조, 욥 14:13-17)
이처럼 욥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인정 받는 믿음을 소유한 자는 죽음의 영역인 음부에서도 평안할 것이고 그 후 어느 날 하나님을 만나 뵈며 부활하여 고통이 없는 영원한 세상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망을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욥의 이 믿음은 곧바로 대속자가 살아계시다는 복음과 이어지고 마침내 의롭다 칭함 받은 자신도 부활에 참여할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욥기 19장에 기록된 복음입니다.
[
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3-26)
오늘도 고난과 죽음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놓으신 선하신 대제사장이며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오신 영원한 왕이십니다. 이 시간 주 없이 살아온 비참한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주께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죄 가운데 죽게 되어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는 하나님 나라의 평강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구원 얻은 자들은 욥과 같은 억울한 고난을 복음 때문에 당하는 때가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욥처럼 인내하며 믿음을 계속 지켜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께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인정을 받고 영원한 영광을 얻어 누릴 수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