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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특강
“가정 성화와 공동체 일치”
1. 하느님을 닮았기에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6-27)”
사람이 하느님의 모상을 지녔다는 것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탁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성경적으로 표현하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 자체를 위하여 바라신 유일한 존재이며, 그분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과 소통한다는 것은 인간이 항상 하느님과 관계를 맺으며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하고,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자신의 가능성, 희망, 확신을 분명하고 충만하게 마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과 대화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모르거나 그분 안에 머물지 못하거나 그분과 대화하지 않으면, 세상이 주는 온갖 편견과 거짓으로 일그러지고 편집된 채로 자신과 타인을 잘못 이해하며 사랑하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불행이며 고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느님에게서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이유와 목적을 인생 내내 일깨워주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화, 가정 안에서 가장 소중한 유산은 교회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젊은이를 비롯해서 중년 노인에 이르기까지 힘들어 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목적의 상실 때문입니다. 존재의 이유와 삶의 목적이 없다는 것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존재, 희망이 없는 삶은 곧 죽음입니다. ‘살아있는 시체’인 것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만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임종하게 될 사람에게도 희망은 똑같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사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라는 말은 죽음 자체에도 희망이 있기에 그렇습니다.
죽음도 생생한 삶의 한 부분이고 죽음에도 희망이 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만이 물음에 답을 줍니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태어남으로 시작하여 죽음을 넘어 영원한 하느님 나라까지 이어져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바로 파멸이 아니라 건너감,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 5,1)”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위령 감사송 1)”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이 세상과 하느님 나라가 마주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바로 그 죽음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믿지 않는 이에게는 감추어져 있지만 믿는 이에게는 분명하게 드러난 진리입니다. 이 모든 사실을 확증해주신 분이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이 그렇게까지 우리를, 나를 끝까지 이 신앙에로 부르시고 이끄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사랑으로 당신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가 선하신 그분의 이유이고 사랑이신 그분의 목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하느님은 믿음으로 당신을 찾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엄마 아빠처럼 지극한 사랑의 부모가 되고 싶어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또 사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사랑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사랑이신 분이고 사랑밖에 모르시는 분이시기에 그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는 나도 너도 똑같이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유입니다. 사랑의 목적이며 결과입니다. 세상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럴 자격이 없다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따지고 꼬집고 합리화시키지만, 하느님의 큰 사랑을 넘어서는 다른 자격도 이유도 근거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엄함-존귀함, 그리고 그 존엄함을 지키는 인권은 근거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에게 하느님의 그 사랑을 불신하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어떤 조건, 어떤 이유, 어떤 자격, 어떤 상황이 있다면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합시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2-35)”
2. 처음부터 사람은 ‘우리’였음을.
하느님께서 그렇게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사랑으로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더욱 분명히 말한다면 ‘나와 너’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와 너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은 나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너’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는 하느님 사랑으로 ‘우리’가 됩니다. 하느님께 사랑받고 그분을 사랑하고 있기에, 나와 너는 남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닮았고 또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일치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사랑을 받고 사랑하는 법도 배워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드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사랑, 나와 네가 이루는 우리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드러나는 관계 중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완전한 관계가 ‘부부’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하느님을 쏙 빼닮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부부의 사랑에서 가정과 생명이 창조됩니다. 그래서 ‘가정의 원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합니다. 재물도 합리성과 효율성도 이해타산도 개인주의도 가정을 이루고 지키는 원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느님 모습과 사랑을 닮은 나와 너의 사랑은 가정에서 시작하여 가정 밖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사랑은 정체되어 있지 않고 역동적으로 확장되고 꽃향기처럼 멀리 퍼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통해 부부는 ‘우리’가 되었고, 그 사랑에서 자녀가 태어나 자녀와 부모도 ‘우리’가 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시작하고 경험한 사랑을 바탕으로 ‘가정 밖 나와 너도 우리’가 됩니다. 이것이 공동체이고 세상이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부터 하느님 사랑을 품지 못하고 가정 안에서 그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면, 그 영향과 결과가 고스라니 교회 공동체와 사회에도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이 아프고 힘겨운데 본당 공동체가 건강할 수 없습니다. 가정이 내적인 분열을 경험하고 있는데 본당 공동체 구성원이 일치할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이 있을 리 없습니다. 가정에서 ‘우리’가 깨졌는데, 본당 단체나 분과 공동체에서 ‘우리’가 잘 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고장 났다면 본당과 다른 공동체 사랑도 고장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에서 하느님 사랑 닮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해 굶주린 사람은 늘 다른 곳에서도 허기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허기진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거칠고 일방적이고 쉬 실망하고 상처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될 수 있는 희망과 방법 있습니다. 가정에서 하느님 사랑을 배우지 못했거나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 공동체 신앙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 그 사랑법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죠. 교회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배운 하느님 사랑법을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와 친구에게 다가가 실현할 때 비로소 ‘우리’가 되고, 나와 네가 하느님 사랑 안에서 출생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개인적인 미사 참례, 성당에서 봉사, 신심활동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참 사랑법은 그 표징이자 열매로 나와 네가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고 있는 ‘또 다른 나’로서 ‘너’를 소중히 마주하는 행위가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시고 사람들을 만나시며 치유하시고 일러주시고 잡아주시고 함께 해주신 모든 일들, 수난과 죽음을 겪으신 사건,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법입니다.
지금 내 남편과 아내가 ‘우리’로 잘 엮어져 있습니까? 지금 부모와 자녀가 ‘우리’로서 잘 지내고 있습니까? 더 나아가 여러분이 알고 지내는 이들이 남이 아니라 ‘우리’로 여겨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느님 사랑을 간직하고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이 ‘하느님 나라, 천국’입니다.
3. ‘우리’가 되게 하는 하느님 사랑법 배우기
나와 네가 ‘우리’가 되어 생명이 전달되고 자비가 일어나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 나라-천국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자비의 현현으로서 가시는 곳마다 마주하시는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은 모두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길을 일러주는 교과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그 길을 본받아 갈 수 있습니다.
1) 카나의 혼인 잔치 –사람을 살리고 기쁨을 더하는 귀한 ‘물’이 되기
혼인 잔칫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손님들은 물론이고 혼주에게도 당혹함을 가져다줍니다. 기쁨과 즐거움, 축복은 멈추고 맙니다. 이와 같이 ‘결핍과 모자람’은 사람에게 큰 불편과 고통과 슬픔을 안겨줍니다. 자존감도 떨어지고 무엇을 하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도 꺾어버립니다. 예수님은 그런 결핍과 부족함을 질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심으로써 혼인잔치와 같은 삶의 기쁨과 용기를 더욱 북돋워주십니다. 사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께는 ‘물’이면 충분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물’은 일상에서 가장 흔한,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그 흔한 물도 갈증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생명수가 됩니다. 더러움을 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정화수가 됩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육수가 됩니다.
우리 가정과 본당 공동체에는 과연 예수님을 통해 포도주가 될 ‘물’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 물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정과 본당을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귀하게 쓰일 물이며 또 그 물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함의 표현, 미안함의 표현, 늘 그 자리 그 역할에 충실해 주는 모습, 늘 함께 주는 존재, 잘 들어주고 이해해주는 배려, 자신을 희생하며 궂은일에 참여하는 봉사 등이 바로 포도주로 변화될 귀한 ‘물’입니다. 그런 물을 통해서 가족과 본당 신자들은 영적이고 인간적인 갈증을 풀고, 생명력을 회복하며 생기를 얻어, 자신의 몫을 다하게 됩니다. 지금 나의 가족과 본당의 형제들이 그런 나의 물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도 목마르지만 그들도 나만의 그 귀한 물을 마시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 그리스도 자비의 샘을 만난 사람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여기 물이 필요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물을 목말라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는 순간 생명과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상종할 수 없을 만큼 앙숙(怏宿),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다인은 사마리인을 우상숭배를 하는 부정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고, 사마리아인은 유다인을 완고하고 배타적이며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관계에서 유다인이었던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다가가셨을 뿐만 아니라, 물을 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뜨거운 대낮에 여정을 이어가시면서 목을 축일 수 있는 물을 앙숙으로 지내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청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의 감정과 갈등과 불목이 만든 벽과 굳게 잠긴 문을 얼마든지 뛰어넘고 풀 수 있음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이신 예수님이 다가가지 못할 곳과 상황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과 본당 안에서도 어떤 이유나 사건으로 갈등과 불목은 언제든 생길 수 있습니다. 대부분이 잘 해보려는 의지와 열정에 이기심이 끼어들어 생긴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갈등과 불목으로 미움의 벽만을 쌓아 올릴 수만은 없습니다. 원망과 불신의 자물쇠로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평생 살수만은 없습니다. 그것은 나를 가두고 묶어두는 폭행입니다. 그 갈등과 불목 속에서는 나도 너도 사랑과 자비와 인정에 목말라하는 사람입니다. 아니 나만큼 너도 그렇게 목마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그 공감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며느리든 시어머니든, 자녀든 부모든, 잘 산든 못 살든, 건강한 사람이든 아픈 사람이든, 심지어 잘못을 하고 죄를 지은 사람도 모두 ‘물’이 필요합니다.
3)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 – 사랑을 만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과거에 남편 다섯, 그리고 지금 함께 사는 남편도 사실은 남편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사마리아 여인의 처지를 묵상해봅니다. 그 누구에게도 ‘아내요 사랑받는 여자’일 수 없었던 불행한 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을 따라다닌 수치스러운 꼬리표는 ‘이 남자 저 남자에게 몸 붙여 사는 부정한 여인, 쉬운 여자’였습니다. 그 설움, 그 상처, 그 고뇌를 누가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인의 겉모습, 겉으로 드러나는 생활형편이 아니라 속마음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여인을 소중한 한 사람으로 존중하고 마주해주셨으며, 여인과 여인의 죄(잘못)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들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았던 그 여인을 가엾이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그 여인도 누군가에 ‘물’을 줄 수 있는 소중한 사람으로 삼으셨습니다.
온 동네의 소문난 죄인이던 여인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죄로 가리어졌던 자신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여인이 그리스도이신 분을 알아 뵙고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자비를 입어 복음-기쁜 소식,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의미 없이 버려지는 물과 같았던 사마리아 여인의 삶을 ‘흥을 돋우는 포도주’로 바꾸어 주셨고, 이제 그 여인은 사람들에게 구원자 예수님을 증언하고, 또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을 복음으로 흥하게 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다가가시고 손을 내밀어 주신 사람은 하느님 사랑을 느끼며 자신의 참 모습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사랑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그 사랑을 이웃에게 증언하고 또 실천합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죄인이었던 사람이 구원의 표징이 되어 그가 머문 자리와 함께 사람들을 구원과 기쁨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셨듯이 그 크고 풍성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그 사람을 기쁨과 구원의 포도주로 바꾸어 주십니다. 또한 성체성사를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기에 예수님이 하신 그대로, 자비와 사랑의 물을 형제들에게 떠 줄 수 있게 하십니다.
가정 안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어떤 이유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어머니이지만 어머니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녀임에도 성적이나 직장, 하는 행동이나 습관을 이유로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봉사자, 어떤 지역에 사는 사람, 어떤 일을 하는 사람,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같은 믿음과 성령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요 형제자매로서 먼저 인정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와 사랑의 물을 마시게 해주신 예수님이라면 지금 나의 가족과 형제에게 어떻게 하셨을까요? 지금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나에게도 또 너에게도, 가족과 형제에게도 지금 필요한 것은 평가나 비교, 단죄나 질책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의 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아무런 조건 없이 다가가 격려해주고 도와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그 물을 마신 사람은 그 순간부터 그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되고, 또 다른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4. 간음하다 잡힌 여자 (1) -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그와 같이 예수님을 모시고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은 사랑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몸에서는 사랑과 자비의 향기가 풍겨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에게는 상대가 이웃,원수, 악인과 선인, 의로운가 불의한가, 내 편인가 아닌가, 자기를 사랑하는가 박해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의 몸에서 사랑과 자비의 빛과 향기가 발하고 있는가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과 거룩한 삶의 기준이며,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정과 본당을 사랑하는 모습이고, 형제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건네신 질문을 우리도 받고 있습니다.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거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명확합니다. 그러나 진정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진 것은 ‘아는 것과 아는 대로 사는 것과의 거리’를 줄이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죄책감과 죄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께 받은 ‘자비와 사랑의 되새김, 곧 묵상’으로 가능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 관한 복음은 보는 이마다 큰 감동과 자발적인 회개, 그리고 새로운 삶을 이끌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건에 개입되기 전까지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물론이고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각은 ‘교리와 규정’에 따른 엄한 징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그 교리와 규정은 하느님 백성으로서 간직할 바른 품위와 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어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는 ‘증거’였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듯 가깝거나 먼 형제와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가족처럼 소중히 여기는 삶의 지침이었습니다. 사람을 저주하는 규정이 아니라 축복하는 규정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교리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교리였습니다. 공동체를 갈라지게 하는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을 믿고 바라며 서로 한 마음 한 몸으로 살도록 하는 기준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그 교리와 규정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핵심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로 하느님의 백성이며 자녀가 된 우리들도 그에 맞갖은 바른 품위와 생활을 갖추게 하는 교리와 규정을 받았습니다. 그 교리와 규정은 하느님의 자녀요 구원받은 사람임을 나의 생각과 판단과 행실을 통해 드러나도록 이끌어주는 지침들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의 사람임을 드러내는 구체적인 표징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모두는 교리와 규정에 따른 죄나 잘못, 실수와 부족함에 대하여 말할 때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이해와 격려라는 자비에 굶주려 있습니다. 오늘은 네가, 내일은 내가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한 이해와 격려로 드러나는 자비는 개인과 개인이 서로 주고받을 수도 있고, 공동체 차원에서 받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먼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오늘 나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말과 실천들을 마주한 사람은 내일 자비로움과 너그러움으로 나에게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 차원에서는 누군가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오늘 그 가족과 본당 공동체가 따뜻하게 돌보고 보태주면, 그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가족과 공동체에 마음을 건네며 그 사랑에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나와 너’가 함께 하여 ‘우리’가 되고, 그런 ‘우리’가 많아지면 나의 가정과 본당 공동체는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의 교리와 규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너’가 아니라 ‘나’라는 사실입니다.
5.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2) -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단죄와 비난을 멈추고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품고 있는 생각, 내가 건넬 말, 나의 시선, 그리고 나의 손이 상대방에게 평화와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인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향한 사람들의 생각과 시선, 말과 행동은 온통 단죄와 비난으로 일관되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마저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하며 단죄하고 비난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강요하고 재촉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가정과 본당 공동체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이나 실수,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험담을 하고, 책임지지 않는 비난을 하고, 대책이나 대안은 없이 질책만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고 일치시키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향했던 그 날카롭고 차가운 시선을 내 자신에게 돌리시는 것입니다. 내가 끊임없이 어떤 사람에 대해 말을 한다면 사실 그 말은 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바라보는 기회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상대방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고 돌봐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 교부들은 <언어의 단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곤 했습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을 험담하고 그들의 잘못을 퍼뜨린다면 사순 시기나 특별한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가족이나 공동체의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나쁜 말을 하고 단죄하고 복수심으로 타오르고 있다면, 그리고 만족함과 감사함을 가지지 못하고 이기심과 탐욕을 이어간다면, 외적인 단식은 사실상 아무런 영적인 유익함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단식은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과 단식으로는 가정과 본당 공동체에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예수님의 말씀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단죄하던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며 모두 떠났습니다. 그 자리는 오직 그 여인을 자비롭고 사랑스럽게 보시는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도록 그를 일으켜 보내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여인의 삶은 어떤 변화를 시작했을까요?
우리도 예수님처럼 가족과 형제들에게 다시 살게 하고 바르게 가도록 일러주는 생각과 말과 시선, 그리고 그런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다시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다시 본연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6. 최후의 심판, 최후의 사랑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이제 오늘 이 시간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그분의 모습을 닮은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임을 나누었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을 때,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순간에 우리는 비로소 ‘나’로서 온전히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나의 존재의 이유와 삶의 목적을 올바로 또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로부터 받은 신앙은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주고 그렇게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런 ‘나’에게 나와 같은 ‘너’가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나도 너도 똑같이 사랑입니다. 사랑의 이유이며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안에서 나와 너는 ‘우리’가 되고 ‘우리’로서 살 수 있습니다. 부부라는 ‘우리’에서 시작하여 부모와 자녀, 친구와 형제들이 ‘우리’로서 서로 존중하고 자비를 베풀게 되면 하느님 사랑이 꽃피어 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꽃피는 부부생활, 가정, 본당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나와 너, 나의 가정과 너의 가정, 그 가정들을 품는 본당은 결코 무관하지 않고 결코 소외되거나 배척받을 수 없는 하느님의 한 가족이고 우리 형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서 사는 사랑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은 물이 포도주가 되듯,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평화를 안겨줄 것입니다. 지금 자신은 물론이고 나의 주변에도 그런 포도주가 될 물과 같은 나를 목말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의미 없이 버려지는 물과 같았던 사마리아 여인을 기쁨을 돋우는 포도주로 바꾸어 주셨고, 이제 그 여인은 사람들에게 구원자 예수님을 증언하고, 또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여 사람들을 복음 기쁘게 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우리도 그 여인과 같이 하느님 나라를 이루고 선포하는 사도로서 부르고 계시며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응답이란 형제들에게 향하는 나의 말과 행위에 자비와 사랑, 평화와 일치를 담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자비롭고 너그러운 말과 실천들을 경험한 사람은 내일 자비로움과 너그러움으로 나에게 보답하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오늘 그 가족과 본당 공동체가 따뜻하게 돌보고 보태주면, 그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가족과 공동체에 마음을 건네며 그 사랑에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정리를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 심판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누가 나의 사랑과 자비에 굶주리고 목말라하며, 누가 나의 인색함으로 헐벗고 방황하고 있으며, 누가 나의 무관심으로 홀로 병들어 신음하고 외로워하고 있으며, 누가 나의 무자비함으로 죄와 고통에 묶여 있습니까? 달리 말해서 누가 하느님 나라를 지금 이 순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누가 그 하느님 나라를 그들에게 이루어줄 수 있고 선포해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 ‘우리’라는 따뜻한 시선과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 사랑에 찬 봉헌과 희생으로 다가서는 우리 자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의 마음과 나의 시선과 손길과 발걸음에서 시작되고 선포됩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는 우리 자신에게 가까이에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부족하지만 사순 시기를 묵상하며 작성한 내용입니다.. 작은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