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고 사람들은 항상 죄를 짓기 때문에 죄를 용납하는 것을 용서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워맥 목사님의 친척들이 어느 한해, 명절을 맞아 워맥 목사님 집에서 모이려고 했었답니다. 미국은 주가 50개나 되니,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면 모인 그 집에서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 조카 한명이 당시 동거 중이었고 동거남을 데리고 오겠다고 연락해 왔는데 워맥 목사님이 고민하시다가 그 조카에게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의 혼전동거는 용납하지 않는다. 내 집에서 결혼하지 않은 두 남녀를 함께 재워 줄 순 없단다. 너는 따로 숙소를 알아보아라." 그랬더니 감사하게도 명절이 되기 전에 그 둘은 혼인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는 결과가 좋았지만 조카가 오히려 화를 내고 실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 해도 워맥 목사님 때문에 무고한 조카가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니고 자기 죄의 현실에 자신이 부딪힌 것이지요. 워맥 목사님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가 그 죄의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지 않았을 뿐.
혹시 우리도 나 자신의 죄나 자기변명, 또는 미혹에 부딪혀 놓고 그 현실을 깨닫게 해 준 사람에게 상처 받았다고 거듭 자신을 속이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한번은 수업 중에 한 학생이 워맥 목사님께 질문하길, 자신의 자녀가 동성연애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했는데 자녀를 끝까지 사랑하고 용서하되 그러한 라이프 스타일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다면 집에서 내 보내야 한다고 답을 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하나님은 너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나도 너를 사랑하고 용서한다. 하지만 동성연애는 죄이며 나는 그 죄를 내 집안에서 용납하지 않겠다.' 이것이 사람은 용납하되, 죄는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 우리에겐 참 생소한 방법이지요? 제가 워맥 목사님께 이 부분을 배우면서 '우리는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용납은 하는구나'하고 깨달았습니다.
동거하는 여자 조카가 동거남을 데리고 집으로 온다고 할 때 대부분 이렇게 반응할 겁니다. "온다는데 어떻게 따로 숙소를 잡으라고 하나, 그냥 재워야지. 근데 걔는 도대체 왜 그러고 산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용서는 하지 않으면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조카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계속 자신의 죄를 이어가는 면죄부를 받습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죄를 죄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
적용이 어려우면 어린 자녀의 경우로 생각해 보면 됩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 거짓말도 좀 하면서 살아야지. 어떻게 진실만 말하고 살겠냐... 근데 벌써 부터 거짓말이나 하고 못된 것 같으니라고..." 이것이 죄는 용납하고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대로 죄를 용납하지 않되 용서하는 방법은 "엄마는(아빠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네가 거짓말 한 것을 용서한다. 하지만 거짓말은 나쁜 거야. 앞으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번에 거짓말을 했으니 _______을 해야 돼." 하면서 반성할 수 있도록 벌 비슷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때 화를 내면서 다그치면 상대방은 용서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징벌 없이 지나간다면 아이는 또 그 죄를 반복할 것이고 인간은 영적이기 때문에 용서는 않되 용납이 되는 환경 속에서는 아이가 안정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잘 들어보지 못한 얘길 하면 많은 분들이 자기의 상황을 들어 질문을 하십니다. "우린 이런 경우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야 저는 모르죠^^; 성령께서 알려주실 겁니다. 모든 상황에 동일한 방법을 적용을 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이 얘길 듣고 제가 정신이 확 들었듯이 여러분들 중에서도 당장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드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배우자나 다른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오히려 가정에 불화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죄를 죄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정상(?)으로 용납 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을 수 있으니까요. 세상은 죄로 타락했고, 믿지 않는 자들은 죄인이고, 의인이 된 성도들도 육신적이기에 죄를 용납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이, 용서하고 용납하지 않는 것 보다 더 쉬운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들 하겠지요.
하지만 죄를 용서하지 않고 용납하는 인간관계는 항상 불안하고 항상 불미스런 일이 생깁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일 수록 항상 분란이 많고 상담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죄를 용서하되 용납하지 않는 인간관계는 굳건하게 세워져 가며 더욱 성숙해져갑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니 당연한 거지만 말입니다.
이 말씀을 배우고 제 삶에 적용해 보고, 또 가르치고, 배운 사람들이 삶에 적용하는 모습을 지켜봐 왔는데 인간관계의 변화는 한 쪽이라도 어느 정도 성숙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갑자기 되지는 않습니다. 위에 언급했듯이 오히려 가정에 불화만 생기고 죄의 문화가 더 강해진 경우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우리의 마음이 좋은 땅이 아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획기적인 진리라 얼른 반응했지만 내 안에 뿌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돌짝 밭이요.
어쨌든 간에 죄는 용서의 대상이지 용납의 대상이 아닌 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 삶에 실현될지 우리 각 사람과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