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고모령(顧母嶺)을 아십니까?
대구광역시의 수성구 만촌동에 위치한 고개이다. 만촌동 인터불고호텔에서 팔현(八 峴)마을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고개이다. '비 내리는 고모령'이란 노래의 배경지로 이름나 있다. 주변에 있는 대구선 철도의 고모역은 대구선 이설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고모령 지명유래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힘이 장사인 남매와 어머니에 얽힌 전설이 전해온다. 어머니가 집을 돌아보았다는 의미인 '고모(顧 母)'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모령 표석
1991년 수성구의회에서 새운 노래비
고모령 안내판
출발지점
고모령의 송림 사이의 길
고모령 건강쉼터
고모역
고모역복합문화공간
비내리는 고모령
1.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올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 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2.맨드라미 피고 지고 몇 해 이런가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
어이 해서 못 잊느냐 망향초 신세
비 내리던 고모령을 언제 넘느냐
3.눈물어린 인생고개 몇고개드냐
장명등이 깜박이는 주막집에서
손바닥에 쓰린하소 적어가면서
오늘밤도 불러본다 망향의 노래
1946년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에 현인 이 부른 이 노래는 일제시대 故鄕을 등지고 他鄕으로 떠나야 했던 젊은이들의 슬픔과 恨을 담은 노래로 數 많은 이들의 心琴을 울린 노래이디.
顧母嶺은 大邱市 壽城區 晩村洞에 있는 자그마한(?) 고개 인데 이에 얽힌 두 가지 傳說이 있다. 하나는 말 그대로 호랑이 담배 피는 時節의 傳說이고, 하나는 거의 實話로 봐야 한다.
1.고모령의 전설
옛날 顧母嶺에 홀어머니와 어린 男妹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스님이 지나가다가 혼잣말로 한마디 했다. “이 집이 가난한 것은 前生에 德을 쌓지 않아서다.”
이 말을 듣고 어머니 와 어린 男妹는 德을 쌓기 위해 흙으로 繼續 山을 쌓았는데,
그 山봉우리가 바로 現在의 母峯, 兄峰, 弟峰 세個의 山峰우리라고 한다.
그런데 그後 山을 쌓던 두 男妹 가 서로 높이 쌓으려고 시샘하여 싸우게 되고, 이 模襲에 失望한 어머니는 子息을 잘못 키웠다는 罪스러움에 집을 나와버렸다.
집 나온 어머니가 하염없이 걷던 길이 只今의 顧母嶺 길이고, 고개 頂上에서 집을 뒤돌아 본 것이 ‘어머니가 뒤돌아봤다’고 해서 顧母嶺 이 되었다는 것이다. (顧 :돌아볼 고)
2.고모령의 실화
日帝 强占期 때 顧母嶺은 徵兵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의 集結地였고, 이들이 탄 列車는 반드시 顧母嶺 고개를 넘어가야만 했는데·· 그 當時 蒸氣機關車 性能으로는 높은 傾斜의 顧母嶺을 한 번에 올라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顧母嶺에서는 列車가 더디게 고개를 넘어야 했고, 이 때 徵兵가는 아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모여든 어머니들로 그 一帶가 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
3.가사의 음미
가사는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라는 슬픈 내용으로 시작하여, 고모령에서 어머니와 헤어진 화자(話者)가 오랫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심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노래 속의 고모령은 한 맺힌 이별의 장소로 그려지며 "눈물 어린 인생고개"로 은유되기도 한다.
이 곡은 "어머니의 존재를 녹여 당시 대중들의 가슴을 울린 민중적인 노래였다는 해석"이 있다. 스스로를 "망향초 신세"라 자조하면서 비통하게 향수를 달래는 내용은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했던 격동기의 시대 상황과 잘 어우러졌고, 이후 오랫동안 애창되었다. 1969년에는 임권택 연출로 이 노래의 제목을 딴 동명의 멜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한국방송의 성인가요 프로그램인 가요무대가 2005년에 방송 20돌을 맞아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장 많이 방송된 노래를 발표했을 때, <울고 넘는 <박달재〉와 <찔레꽃〉에 이어 전체 순위 3위를 차지하여 꾸준한 인기를 입증했다.
2001년에는 노래의 무대인 고모령에 노래비가 세워졌다. 앞면에는 노래의 가사가, 뒷면에는 이 노래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를 향한 영원한 사모곡(思母曲)으로 널리 애창되기를 바란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3.고모령의 변화
1991年 壽城區 議會에서 이곳에 노래碑 를 세웠는데, 안타깝게도 이듬해에 이 노래비를 취재하다 열차를 피하지 못해 殉職한 韓國日報 寫眞記者 김문호 (當時 29歲)의 不忘碑 도 함께 세워져 있다.
1925年 에 門을 연 顧母驛은 1970年代 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利用하는 汽車驛이었으나 只今은 사람이 타고 내리는 列車는 停車하지 않고 貨物車만 머무르는 簡易驛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첫댓글 사연 많은 고모령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