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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벧전 2:24, 새번역) 그는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아 상함으로 여러분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말씀을 근거로 판단하는 방법을 몰랐을 때는 저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 듣는데 그러면 나는 예수님의 양이 아니란 거네?' 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데 나는 밤에 잠을 못 자니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지 않으시는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점점 하나님께 원망이 생기고 뭔 일만 생기면 전부 하나님 탓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온 표현들은 우리에게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한번은 제가 이해하지 못한 표현들을 아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제가 꼬치꼬치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들도 사실 잘 모르고 그냥 추상적으로, 애매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렇다 보니 삶에는 전혀 적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추상적 표현이라는 것은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높인다."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며 삶에는 어떻게 적용하는 것일까요? 저는 구체적이고 쉬운 적용 방법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과학'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보기엔 지구가 둥글지 않은 것 같지만 과학이 말하길 지구는 둥글다고 하면서 둥근 모양의 지구본도 보여줍니다. 그러면 대부분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며 '지구가 둥글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느낌'은 바로 접어 버립니다. 또, 제 집에는 방마다 온도계가 있습니다. 가끔 아침에 일어날 때 추위가 느껴져서 온도계를 보면 25도 언저리인데 제가 그 온도계를 보며 "이 온도계는 고장 났어. 나는 추운데 25도라니?"라며 온도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런 온도에도 내가 한기를 느끼는구나.’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어제 밤에는 바삐 움직이다 보니 너무 덥고 땀이 나서 온도계를 보니 동일하게 25도였습니다. 그러면 ‘이 온도계는 정말 고장이 났어. 같은 온도에서 덥고, 춥고 할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지 않고 '온도는 동일한데 내 몸이 더울 때도, 추울 때도 있구나.'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이렇듯 과학과 기계에도 이런 권위를 부여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어때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안 믿는 사람들은 고사하고 우리 믿는 거듭난 성도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까지 말씀을 대할 때는 내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아집니다. ‘말씀은 내가 치유 받았다고 하지만(벧전 2:24) 나는 아직 병세가 있는걸? 왜 낫지 않는 걸까?’ 이 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이미 나은 것을 믿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을 더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내 몸이 더울 때와 내 몸이 추울 때의 온도가 같다면 온도계가 고장 난 것이고 내 경험이 맞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 저의 논점이 무엇인지 아셨을 것입니다. 성경말씀과 대치되는 것을 삶 가운데 경험할 때 무엇을 더 높이십니까? 더 높인다는 것은 그것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번에는 제가 치유를 예로 들겠지만 재정과 인간관계에 같이 적용하며 들어보십시오. 내 질병은 그대로이지만 '나는 이미 치유 받았다(벧전 2:24)'라는 사실을 더 높이는 사람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질병의 증상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이미 나았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방의 온도가 25도라고 온도계가 알려주는데도 내 몸이 춥다면, ‘온도계가 고장 난 게 아니라 내 몸에 문제가 있구나.’라며 나의 경험을 의심하듯이 말입니다.
워맥 목사님께서 앓던 질병과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제가 2학년 때인가, 그러니까 2009-2010년쯤에 워맥 목사님 오른쪽 귀에 큰 염증이 생기더니 계속 진무르다 점점 커졌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콜로라도의 강한 햇볕에 그을렸는데 손으로 세게 건드려서 염증이 더 해졌다고 합니다. 그것이 오래가다 보니 사람들마다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고 우리 학교에서 집회를 할 땐 외부인들이 저에게까지 묻기를 “치유를 전하는 사람이 왜 낫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말이 오간다는 것을 알게 되신 워맥 목사님께서 그것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미 치유되었고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아침마다 내 귀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너는 이미 나았다고 말입니다." 물론 목사님은 진정으로 믿었기에 진심에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믿지 않는데 말만 이렇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튼 그래도 좀처럼 낫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 저는 졸업을 했으며 이후에 학교를 찾았을 때도 그것은 더 커졌으면 커졌지 낫지는 않았습니다. 이쯤 되니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 의사들이 한두 명씩 다가와서 '그건 피부암이에요.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라며 요구하지도 않은 진단을 내려주기도 했답니다. 물론 다들 좋은 뜻에서 그랬겠지요.
그러다가 2016년도에 인도네시아에서 워맥 목사님을 만났는데 치유가 완전히 드러났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워맥 목사님의 귀는 완전히 새 귀 같이 되었고 염증의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피부암이란 소리를 듣고 도려냈다면 한쪽 귀는 완전히 없어졌을 텐데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정말로 '믿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말을 정죄로 듣지는 마십시오. 저도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는데 누굴 정죄하겠으며 그러한 경지에 올랐다 해도 은혜로 받은 걸 가지고 누가 누굴 정죄하겠습니까?
워맥 목사님은 자신의 영에 이미 존재했던 이 치유가 몸으로 나타나는 데는 6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문제였다고 했습니다. 또한 왜 6년이나 걸렸는지, 뭐가 문제였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어쨌든 치유가 나타난 것이 중요하지 6년이 걸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분과 동일한 믿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을 가까이서 본 사람들은 그분이 그저 평범한 옆집 아저씨와 같다는 것을 알기에 앤드류 워맥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와 그분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판단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입니다. 성경말씀인가 아니면 현상, 즉 내 경험인가?
여러분, 경험을 뛰어넘는 것이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현재 경험하고 있는 현상에 머무르는 것에는 아무런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치료의 방법으로 병원에 가거나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 것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믿는 대로 해야지 믿지도 않으면서 남이 그렇게 해서 나았다고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극심한 통증을 느끼거나 골든 타임이 있는 치료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도 필요에 따라 약을 먹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병원에 가기도 합니다. 자기의 믿음만큼 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조이스 마이어의 고백을 소개하자면, 그분은 치유의 기적을 믿고 말씀 안에 치유가 있음을 점점 더 믿게 되었으며 그것을 의지하는 방법을 점점 더 배워 가신다고 했습니다. 조이스 마이어 목사님도 워맥 목사님의 주장을 존중하시고 자신의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워맥 목사님을 찾아오시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앤드류 워맥을 찾아가라고 하셨다네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조이스 마이어 목사님은 워맥 목사님이 가지고계신 치유의 기준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시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실력 있는 크리스챤 의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신다고 합니다. 암 수술도 몇 번 받으셨고 최근에는 골반의 모양을 바로잡는 어려운 수술까지 받았는데 그 결과 그동안 조금만 걸어도 생기는 허리 통증을 해결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그렇게 간증하시는 조이스 마이어 목사님을 저도 존경하고 있고 그러한 방법으로 치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제 생각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워맥 목사님이 주장하는 파격적인 치유를 붙잡아야만 하는 순간도 있습니다. 의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질병을 만났을 때입니다. 작은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지 못했는데 큰 것을 믿음으로 극복하려니 쉽게 되질 않는 것입니다. 1kg짜리 아령을 들어 올리지 못했는데 갑자기 10kg를 들어올려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제가 수도 없이 받았던 질문이고 제 안에서도 수도 없이 일어났던 질문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역시 치유, 재정, 인간관계 이 모든 영역에 적용하면서 들어주십시오. "나는 믿는데 왜 치유가 되지 않는가? 나는 믿는데 왜 재정이 풀어지지 않는가? 나는 믿는데 인간관계 문제가 왜 해결되지 않는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이미 된 것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에는 감정이 따라옵니다. (감정을 믿는 게 아니라 믿으면 감정이 결과적으로 온다는 말입니다.) 감정이입이 잘 되는 돈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군가 10억을 내 통장에 송금했고 그 숫자를 내 눈으로 보았다고 해 봅시다. 아직 은행 쪽에서 어떤 처리가 되지 않아 출금은 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해 봅시다. 감정이입을 해 보십시오.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당장 출금하지 못하니 답답하십니까, 아니면 10억이라는 돈이 생긴 것에 대해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정말이지 한번 감정이입을 해 보십시오. 진짜 믿는다면 감정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그 상태에서는 "믿었는데 왜 안 되나?"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습니다.
동일한 이치로 당신은 이미 치유 받았습니다. 은행 통장이 아니라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그것에 집중하십시오. 이미 부요한 자입니다. 당신의 모든 부르심도 하나님의 영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을 이 땅에서 경험하느냐, 못하느냐는 내가 그것을 믿어 생각을 새롭게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왜 안 낫지?"라는 말은 새롭게 되지 않은 생각이 하는 말입니다. 새롭게 된 생각은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몸의 질병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 우리의 생각도 많은 치유가 필요합니다. '왜 안 되지?'에서 '이미 됐구나. 나는 그것을 바라보리라.' 쪽으로 뛰어넘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시 18:29)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왜 안 되지, 왜 안 되지' 하면서 한탄하고 근심하는 것은 거짓과 비 진리를 묵상하며 극대화 하는 것입니다. '나는 자격이 없는데 이미 이루어 주셨고 이미 내 영 안에 있다니 너무 감사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새롭게 된 생각입니다.
우리를 위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한탄과 근심이 아니라 오직 믿음과 존귀, 감사만을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분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만을 드리는 오늘이 되길 바라며 그길로 우릴 인도하시는 성령님만을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