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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조선의 2대 포구로 이름을 날렸던 논산 강경의 기독교 성지로 순례를 떠나본다. 사진 / 민다엽 기자
[여행스케치=논산] 논산의 강경은 과거 원산과 함께 조선의 2대 포구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엄청난 영화를 누렸다. 수많은 사람들과 교역품이 오가며 일찍부터 문호를 개방했던 강경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와 목숨을 건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이 땅 위에 믿음의 씨앗을 꽃 피운 강경의 기독교 성지를 둘러봤다.
풍요와 혼란이 혼재된 격동의 역사를 증명하듯 여전히 강경 곳곳에는 당시의 다양한 유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점은 바로 강경의 기독교 유산이다.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자 민족 계몽을 위한 선구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 한 수많은 선교사들의 헌신. 그들의 믿음의 씨앗 위에 세워진 강경의 모습을 기억하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과거 '조선 2대 포구'로 널리 이름을 날렸던 강경 포구의 풍경. 사진 / 민다엽 기자
사람과 물자가 쉴 새 없이 오가던 조선 제일의 포구
내륙 깊숙이 뻗어 들어온 금강 줄기로 일찍부터 수운이 발달하게 된 논산 강경은 원산과 함께 ‘조선의 2대 포구’로 널리 이름을 떨치며 조선 제일가는 포구로 자리 잡게 된다.
금강을 통해 서해에서 난 천혜의 해산물과 물 건너 온 각종 교역품 등을 실은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더욱이 육상 도로망도 잘 이어져 있으니, 이곳에 모인 물자들은 전국 각지로 쉴 새 없이 팔려나가게 된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만 하루에 2~3만씩이나 되었고, 나아가 중국과 일본의 상인들까지 강경에 자리를 잡고 그들만의 상권을 형성하기도 했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 한채 빛 바랜 강경 시내의 풍경. 사진 / 민다엽 기자
한국 침례교가 태동한 최초 예배지. 사진 / 민다엽 기자
“마을에 돈과 사람이 넘쳐나니 덩달아 사람들의 의식 수준과 교육열도 높아질 수밖에 없었겠죠. 따라서, 자연스레 민족 계몽이나 포구를 통해 유입된 생소한 서구 문화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강경에서 나고 자랐다는 정옥규 문화관광 해설사는 당시에 강경의 마을 분위기가 논산 일대의 여타 농촌 생활 방식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활발한 상거래로 인해 상업이나 서비스업, 일용직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강경 사람들은 합리적이고, 자기주장이 확실한 도시의 생활방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경성결교회 본관 옆에 세워진 최초신사참배거부선도비. 사진 / 민다엽 기자
신앙을 바탕으로 민족 정신을 지켜냈던 강경성결교회. 사진 / 민다엽 기자
수많은 기독교, 왜 하필 강경일까?
강경에는 의외로 ‘최초’가 굉장히 많다. 놀랍게도 충남 지역에서 가장 먼저 전기가 들어온 곳이 강경이었으며, 충남 최초로 은행이 들어섰고 최초의 근대식 호텔도 문을 열었다, 또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의 성무가 시작된 곳이자, 일제에 대항해 최초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특히 강경의 기독교 유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도 이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교회만 20여 개 남짓이다. 게다가 교단까지 전부 다르다는 점도 놀라울 따름이다.
옥녀봉에서 본 전경. 시원스레 펼쳐진 금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 민다엽 기자
옥녀봉 정상의 봉수대. 사진 / 민다엽 기자
“구한말까지 강경에는 하루 100여 척이 넘는 배가 다녔을 정도로 수 많은 사람이 오가며 무척 혼잡했어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네였던 것이죠. 게다가 소위 ‘돈’을 가진 객주들의 힘이 막강했던 탓에 아무래도 나라의 간섭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었어요. 서양의 선교사들이 감시를 피해 몰래 들어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던 것이죠.”
정 해설사는 강경의 활발한 분위기와 다양한 것들을 보고 접했던 강경 사람들의 개방적 성향, 그리고 높은 교육열이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과 잘 맞아떨어진 것 같다며 기독교가 강경 깊숙이 뿌리 내릴 수 있었던 이유를 들었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순교성지' 강경성결교회. 사진 / 민다엽 기자
김대건 신부의 첫 성무 헌양비. 사진 / 민다엽 기자
실제로, 수많은 서양의 선교사들이 강경 포구를 통해 조선에 들어와 강경을 비롯해 전국 각지로 퍼져 선교 활동을 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도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배를 타고 강경포구로 들어와, 시장 근처 객주촌에서 숨어 지내며 한달 동안 신자들을 돌봤다.
INFO 옥녀봉(규 강경침례교회, 최초 예배지)
주소 충남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
문의 041-730-4601
마을 전체에 고루 자리 잡은 기독교 유산
먼저, 강경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옥녀봉 정상에는 한국 침례교가 태동한 우리나라 최초 침례교 최초의 예배당 건물이자 지병석 집사의 초가집이 있다. 조선 말기 인천과 강경을 오가며 포목 장사를 하던 지병석 집사는 1895년 인천에서 미국 출신의 폴링 선교사를 만나 침례를 받게 된다. 이후 폴링 부부와 함께 배를 타고 강경에 있는 본인의 집으로 넘어와, 1896년 2월 9일 5명에서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강경 침례교회의 시작이다.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강경 성지 성당. 사진 / 민다엽 기자
성지 성당 별관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 민다엽 기자
이듬해인 1897년에는 4,732평의 부지를 구입해 교회 건물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지만, 이후에도 갖은 박해와 일제의 신사 참배, 방화 등으로 교회가 소실되고 많은 이들이 순교했다. 이곳은 1900년대 초까지 많은 서양 선교사들의 거처로 이용됐다.
옥녀봉을 뒤로한 채 마을 길 계단을 내려오다 보면, 1918년 창립된 강경성결교회의 옛 예배당을 볼 수 있다. 현재는 복원 중이라 자세히 살펴볼 순 없다. 강경성결교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주도했던 곳이다. 1924년 10월 백신영 전도사와 신도들은 강경 보통학교의 김복희 교사, 그리고 학생 62명과 함께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강제되었던 신사 참배에 대한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어 학교에서도 일본 위주의 역사 교육을 거부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총칼로 무장한 순사들이 들이닥쳐 교회를 폐쇄하기도 했다.
충남지역에 처음 들어선 한일은행 강경지점. 현재는 역사박물관으로 이용중이다. 사진 / 민다엽 기자
화려했던 강경의 옛 시절을 재현한 강경구락부. 사진 / 민다엽 기자
이들은 신앙을 통해 ‘민족을 위한 믿음’을 지킨 선구자 들인 셈이다. 백신영 전도사는 후(1990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받았다. 현재 본관 옆에는 ‘신사 참배 거부 선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 최초의 가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
“마침내 10월 12일 우리는 충청도 강경에 도착했습니다. 중간에 폭풍을 만나고 암초에 부딪히며 우리의 형편없는 배로는 도저히 서울까지 갈 수 없어 이곳에 상륙하기로 했습니다. 우리의 돛대는 조선의 것이 아니었고 항구를 빠져나오는데도 큰 곤경에 겪었습니다. 밤에 신자 2명이 우리를 자기들 집으로 데려가려고 왔습니다. 굵은 베로 만든 겉옷과 짚으로 만든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총 14명의 일행을 태운 라파엘(Raphael) 호가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해 강경 포구에 닻을 내렸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도착한 페레올 주교가 스승인 바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 속에는 선교사들의 목숨을 건 도착 과정이 상세히 쓰여 있다. 1961년,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을 기념해 건립된 강경 성지 성당에 가 보면 그의 일대기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강경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일본식 가옥. 사진 / 민다엽 기자
김대건 신부는 강경에서 조선의 첫 천주교 신부로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 달 남짓 시장 근처 객주촌에 숨어 지내며 신도들과 미사를 드렸다. 이후 서울로 올라간 김대건 신부는 1년도 채 지나기 전에 체포되어 1846년 9월 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불과 25세였다. “이제 저는 하느님을 위해 죽을 것입니다”라는 마지막 진술을 끝으로 사제로서 짧고 험난한 인생을 살았지만, 그가 남긴 작은 ‘믿음의 씨앗’은 이 땅 위에 꽃을 피웠다.
순교 177주년을 맞은 지난해 9월 5일, 가톨릭의 수도인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San Pietro Basilica)에 갓을 쓴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조각상’이 전 세계의 성인들과 나란히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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