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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정의
이근호
칸트 시대에는 시간과 공간을
이 세상을 파악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간주했습니다.
별의 움직임이나 지구의 움직임은
만유인력이라는 역학 법칙을
하나님께서 절대적 기준으로 사용하시기에
뉴턴이 발견한 과학 법칙이야말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좀 더 잘 알도록 도와주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도
이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틀을 깨지 않은채
그 절대적 체계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만 상대로 다루는 것이 됩니다.
물론 구속사 해석이나 성경 해석도 이런 관점에서 실시했습니다.
그런대 현대 물리학에 이르러
이 우주를 지탱하는 절대적 기준이 새롭게 등장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비롯되는데,
곧 빛의 속도의 절대성입니다.
빛의 속도는 그 어떤 좌표계나 위치에서도 이상스럽게 변함이 없더란 말입니다.
(보통 마주 달리면 상대속도가 더 빨라지고 반대 방향으로 달리면
상대속도가 늦어지게 마련인데 이상스럽게도 빛의 속도는 변동되지 않습니다.)
빛의 속도의 절대성은 곧 공간과 시간의 변화를 당연시 하게 됩니다.
공간도 짜부러지게 되고 (일반 상대성 원리) 시간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시간 측정은 일정한 간격성이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간격이 위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조차 하기 힘든 상황일 것입니다. )
속도에 의해서 변동이 일어납니다.
즉 시간과 공간이 모든 인간 (너, 나 할 것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상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황(질량과 속도로 측정됨)에 따라 백이면 백 다 다르게 됩니다.
그 예로 높은 고지대에서는 시계조차 늦게 갑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이러한 사태를 원초까지 소급시켜 보았습니다.
그랬더니만 시간도 공간과 함께 시작되었고
결국 남는 것은 에너지 장 뿐이었습니다.
즉 현재 이 세상에 속한 모든 사물(인간이든 돌멩이든)이
오직 역학(힘과 속도)에 준해서 파악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관계 망과 장(영역)으로 갖추져 있음을
현대 물리학에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뉴턴 역학에 있어서는, 물체가 가만히 있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달려온 관성이 반대편의 힘에 의해 저항을 받고 있다는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시한 것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고입니다.
그러니까 질량을 갖고 있는 물체는 물체끼리
서로 역학적으로 밀고 밀리는 관계망으로 꽉 짜여져 있다는 주장입니다.
신은 그런 식으로 세상을 저절로 돌아가도록 창조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간론이나 공간론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역학론이 우선이 됩니다. 이전까지는 정 반대였습니다.)
이 점이 특히 중요한데, 개인이 어떻게 세상을 보느냐가 더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어떤 에너지 장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중요해져 버린 것입니다.
인체의 약 60조 개의 세포가 느끼는 시간관이나 생체리듬까지
이 에너지 장이 갖는 역학의 영향을 입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과 인간, 혹은 인간의 영혼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의해서 세상이 변동한다고 보았고,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다양한 신들의 자기네 끼리 (혹은 반신, 반인) 활동성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여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시대에서의 여호와 하나님이나 각가지 신들의 활동도,
인간들의 시간관과 공간관을 존중(?)해주는 식으로 움직였다고 보는 겁니다.
뭐든지 인간 위주로 생각해서 인간들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신들, 혹은 신도 거기에 따라와서 구원에 관해 열심히 다독거리주고 봉사해주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았고
만약 신께서 기도하는 자신의 뜻만을 들어준다면
그것은 곧 다른 이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도 있는 문제임을 눈치챘습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태어나서 짧게 살면서
뭐든지 자기 중심 위주의 절대적 시간론(인생관)과
절대적 공간론(세상관)을 갖고 성경을 열심히 보면서
나름대로 하나님관을 구축한다는 것이 얼마나 좁은 견해일 수 밖에 없는가를
현대의 과학을 잘 언급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탈출되는 것은 바른 예수님관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혹은 십자가를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 그 자체를 믿는 것이지
결코 자기 위주의 세상관에서 자신이 기대한 소망적 사건이
(예를 들면, 목회에 성공한다든지, 자기 교회가 부흥한다든지,
기독교가 이 나라에서 융성한다든지 이런 소망들)
유발되도록 하는 근거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들의 고통을 완화해주고
빨리 천국에 가고 싶은 소원을 들어주는 식으로 재림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연장으로 재림이 일어납니다.
즉 "십자가 달리신 분이 바로 이 세상 심판주였느니라"를
온 우주에 보여주는 사건입니다.(계 1:7)
예수님만을 쳐다보고 살고,
예수님으로만 만족하고 자랑하는 자는
그 어떤 시간관과 공간관에서도 해방된 자일 것입니다.
아래는 구원과 시간의 연관성에 관한 이근호 목사님의 글입니다.
시간에 대한 바른 정의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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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있어 시간과의 연관성 문제
이근호 목사
2000년 8월 12일
Ⅰ. 서 론
1. 인간의 구원성
남을 구원하겠다는 사람은 필히 자기 자신이 구원받은 방식의 범주 안에서 구원을 시도하게 된다. '나처럼 구원되면 그것이 곧 참 구원이다'는 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남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이 과연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생각인지를 먼저 검토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지하면서도 남을 구원하겠다는 의도만은 아마 하나님 보시기에 무조건 옳은 행위로 비쳐질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기 정당함 외치고서 돌아 다니는 당돌함은 허용되지 못한다. 성경은 항상 옳은 내용만이 들어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나선다고해서 성경에 대해서 참된 해석을 내릴만한 자격자로 인정해 줄 수 없다. 그것은 설교자나 성경 해석자나 자신들 자체가 방해물로 이미 등장되기 때문이다.
본 글은 인간들이 어떤 궁리를 하기에 성경 해석을 방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는가를 탐구한 글이다. 흔히 생각하기를, 성경에 나오는 진리의 말씀만 전하면 그것이 사도와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긍정적인 자아상이 구축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말씀 자체가 설교자 자신을 친다는 것은 도무지 인정치 않으면 늘 음흉한 삯꾼의 냄새나 피운다는 것은 명확한 귀결이다. 인간이 성경을 대하든 무엇을 대하든 이미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의지에 휩싸인채 일방적 해석을 내리는데 여기서 '시간 의식'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본 글은 인간의 죄악성과 그것을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들추어주는 성경의 내용을 대비하고자 한다.
성경에 말씀하는 바에 의하면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 소관이며 하나님만이 해내시는 일이다.
"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제자에게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5-26)
따라서 구원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이 동원되는가 하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견해에만 국한되어야 한다. "인간 자신들이 행한 일이 전혀 하나님의 일에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질이 없었더라"라는 고백 안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일은 실제로 없을뿐더러 그런 것을 염두에 두어서도 아니된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일에 방해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거듭난 자 안에서도 예외없이 유지되어야 있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일로서만 마감됨이 거듭난 성도를 통해 증거된다. 타인이 의해서나 본인의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서 구원되었다는 그런 구원은 하늘 나라에서는 구원이라고 간주해 주지 않는다. 그저 같은 지옥 안에서의 위치 이동을 한 결과이다.
구원이란 반드시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그 성령에 의한 구원은 반드시 구원 시켜 주신 주체자가 예수 그리스도 임을 밝히 깨닫게 해주신다.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 중심으로만 움직인다. 주님의 능력은 심지어 마귀의 존재까지 적절하게 활용하면서까지 구원에 차질이 없게 하신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4:4-5)
인간은 어느 누구 할 것이 없는 이런 능력은 없다. 따라서 인간들의 구원 시도는 모두 허사로 끝나게 되어 있다. 단순히 구원에 관한 성경 지식이나 신학 지식을 확보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이런 능력은 인간에게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구원받는 것은 오직 주님의 능력뿐이다. 예수님만이 십자가 지셨기에 하나님께서 인정받는 능력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되고자 하는 모든 방법을 '지혜'라고 표현하고 있으면서도 그 '지혜'가 모두 헛것이라도 단정해 버린다.(고전 3:20)
왜 인간의 모든 '지혜'가 헛것인가? 그것은 도저히 십자가를 받아 드릴 수 없는 지혜이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고전 2:6-9) 왜 받아 드릴 수 없는가?
그 십자가의 지혜는 하나님은 깊은 비밀에 속한 지혜이기에 인간의 머리로는 알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고전 2:4)
즉 사도 바울은 십자가 지혜를 논하면서 결코 인간의 지혜로부터 출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헛 지혜, 헛 십자가 사상으로 끝을 맺는 것이 확실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십자가 지혜 안에 잠겨 있으며 이 담긴 지혜는 인간이 밖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끄집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구원이기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지 아니하면 구원은 발생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구원관은 인간의 구원관과 이렇게 확연히 다르다.
인간의 구원관은 인간의 지혜의 바탕 위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신학을 비롯한 모든 종교와 철학과 과학과 경제와 정치와 사회, 예술을 막론하고 모두를 나름대로 스스로 자아를 고통의 운명에서 해방되기 위한 구원 노력이다. 모든 고통은, 스스로 절대자가 되어 살 수 없다는데서 기인한 근원적 분통과 안타까움에서 온다. 어쨌던 이러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원이 아닌 것과 대비되는 식으로 세상에 등장하는데 여기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킨 인간의 구원 노력과 지혜의 본질을 분해해 보면 여기에 인간의 시간관이 들어 있고 이 시간관에 따라 '자기 행함'에 대한 규정짓기과 '평가 매기기'가 동원된다.
이 시간관에 입각한 행함 원칙으로 성경에 나와 있는 말씀들을 해석하므로서 이 시대에 거짓된 구원론을 낳는다. 그리스도 중심이 되어야 될 것이 인간 중심으로 '중심 이동'이 실시되고 있는 상태이다. 오늘날 이러한 구원적 사상이 진리적 권위를 지니고 대량으로 유포되고 있다.
2. 성경적 인식의 전환
흔히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 안에 여전히 선악적 인식이 살아있다면 이는 온전한 그리스도 중심이 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선한 능력으로 자기 구원에 보탬이 되고자 하지만 악한 능력이 왜곡된 그리스도 중심을 창출하여 헛된 구원성으로 이끈다.
따라서 인간 자신을 사물(thing)로 보는 입각점에서 벗어나 인간의 능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사건(event)에 의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인식 변환이 일어나야 한다. 즉 그리스도 고유의 사건으로서만이 그리스도 중심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흔히들 이것은 계시의 활동, 혹은 말씀의 운동이라고 말하지만 구체적 내용은 바로 언약이다.
즉 언약적 사건이 생성되면 거기서 언약적 의미가 제공되고 그 언약적 의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용서)와 인간의 죄가 내용으로 담겨있다. 그러니까 언약적 사건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 어떤 인간도 은혜와 자신의 죄를 모른다는 말이 된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는 육체의 지혜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성도는 그렇지 아니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고후 1:12)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늘 생명 안에서 가두어두시는데 그 들어가는 방식이 죽음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1) 이로서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만을 밖으로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이래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증인은 순전히 성령님의 몫이다. 성령께서 성도는 날마다 십자가에 매달게 하시는 것이다.
"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갈 5:24-25)
문제는 이러한 언약적 사건을 인간 육체의 의식에 근거해서 나오게 되는 시간관념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기 존재의 구원성과 영원성을 기정사실화한채 시간론이 펼쳐지기 때문에 기껏 심오한 신학은 구축될지 모르지만 그 신학이라는 것도 늘 유혹적인 육체의 지혜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신학이든 언약적 사건을 유발하시는 주체자이신 성령님 자체가 아닐뿐더러 그분에게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본론에서는 이런 점을 보다 분명히 다루었다.
Ⅱ. 본 론
1. 인간들의 시간관
시간이 '있다', 혹은 '없다'라는 것은, 사물적 대상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그 존재를 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단 과학의 범주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과학의 범주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더 이상 진리라고 간주할 수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객관적 사물이 아닌 이 시간을 과학에서 필히 도입하지 아니하면 과학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과학이 진리로서 큰소리 칠 수 있기 위해서는 진리가 아닌 허깨비 같은 것을 가지고 체계를 정비한 후에 그 체제 안에서 논리 전개가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나중에 가서 '시간은 없다'는 식으로 도로 배척을 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아인슈타인) 일단 시간을 과학의 필수 전제 조건을 모셔야 한다는 점이 이상스러운 점이다.
과학의 이런 자세가 이상스럽게 보이는 것은 과학이 근대 이후에 모든 형이상학을 대신하는 궁극적 철학의 체제를 구축해 왔기 때문이다. 여타의 형이상학을 공박하고 공격하면서 자신 스스로 비과학적 속성 위에 건설해 왔던 것이다.
과학 시대 이전의 삶이 오늘날의 사람들 보기에 힘겹고 비위생적이고 불편해 보인다는 것은 짐작해 볼만하다. 그러나 그들이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전쟁에서의 승전보를 전하기 위하여 42,195M을 달려오지 말고 휴대폰으로 간편하게 연락하면 될 일이지만 그 때 당시의 그들은 그것이 합리적이고 달리 표현하면 과학적이었다.
이처럼 시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인류가 생겨날 때부터 지속된 것이지 과학 시대에 와서 비로소 시작한 생활이 아니다. 단지 과학 시대에는 그 시간관념이 과학이라는 형이상학에 준해서 적용되었을 뿐이다. 이 말은 애초부터 인간이란 꼭 눈에 보이는 객체적인 사물들만 염두에 두고 관찰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다는 말이다.
인간의 생활은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마음속의 직관이 기초가 되어 살아왔다. 시간이란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을 논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의식을 논해야 마땅하다.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시간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건들로 이루어진 흐르는 강물" 시간을 즉 어떤 '흐름'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과연 '흐름'이 될 수 있을까? 사건이라 것은 각기 종결점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서 '흐름'이라는 것은 적절치 않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흐르는 강물 위에 가끔 물고기가 물위로 솟아오르면서 군데군데 물을 튀기는 자국을 남기는 그런 광경 전체를 시간으로 하면 어떨까?
그러나 강물의 경우에는 물고기를 튀어 올라오지 않더라도 전체 강물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제의 시간이란 사건의 특이성이 생성되지 아니하면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아니면 아예 없는지 파악조차 불가능하다. 즉 태양이 규칙성을 가지고 움직이고 별과 달과 자연의 사계절의 변화와 거기에 따라 인체의 생리 현상이 호응해 줄 때 시간이라는 것이 감지되는 법이다.
삼풍 백화점이 붕괴 될 때, 그 더미 속에서 14일 동안이나 갇혔던 청년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는 불과 10시간 정도의 시간이 경과된 줄로 알았다고 했다. 그 청년은 고백은 실제적 우주의 별과 태양과 달의 변화에 비추어 볼 때에 분명 틀린 것이다.
그러나 생리학적 관점에서 시간관을 출발할 때 과연 그 청년의 말은 틀린 것인가? 물론 그 청년이 바깥 세상으로 나와서는 물리적인 시간관에 따라 산다. 그러나 생리적 인간 시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변 환경에 적응할 뿐이며 다시 어두운 지하 동굴에 가서는 바깥 세상과 다른 시간관을 토로할 것이다.
이것은 그 청년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인체가 주변에 적응하고 반응하는 주체성 활동성을 근원적으로 무시한 채 외부에다 요지부동의 절대적 요소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라는 것이 의문시된다. 물론 편리하다든지 많은 인류를 제대로 먹여 살리는데 필요한 대량 생산 체제를 가능케 하여 인류의 번영에 유용하다든지, 사회 유지에 있어 공동체 내의 개념의 혼란을 최소한으로 방지하는 게 필수적이다 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고에 걸친 불변의 진리, 그 자체냐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태양이 과연 인류의 복지와 건강을 위하여 하늘에 떠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고 우리 중에 누가 결정했는가? 강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이 바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흐른다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어디 있는가?
여기서 인간들은 시간을 두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하게 된다. 둘로 나눈다는 말은 둘 사이에는 서로 합칠 수 있는 사항이 못되며 필히 분리해야 한다는 점을 기성 사실화 한 것이다. 그 둘은 바로, 크로노스(chronos)로서의 시간과 템푸스(tempus)로서의 시간이다.
즉 기계적으로 균일화된 시간과 심리적 시간 의식으로 시간이다. 시간 개념이 이렇게 따로 따로 분리되다 보니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진리로서의 참 시간인가에 관한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즉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종속되고 어느 것이 우선적인 하는 것이다.
둘 다를 대등하게 여기고 존중해서 서로 보완적으로 다루면 된다는 것이 유용성에 있어서 상투적인 요령 같은 것이지만 참 진리를 찾아서 결정해야 하는 경우에는 이런 무책임한 발상은 결국 용납될 수 없다. 심리적 시간 의식은 사실상 과학적 시간관에 대드는 약자의 입장에 서 있다.
온 천지가 과학 천지가 되었기에 자연적으로 이 기계적 시간관만이 진리로 통용되고 있는 실정에 있다. 기계적 시간, 혹은 물리적 시간은 고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절대 세계로부터 흘러나오는 시간이다.
과학자들은 자연을 기계적이고 확정된 절대 세계로 객관화 시켜 놓고 탐구에 들어갔다. 질적으로 오직 하나의 보편적 질적으로 묶어 놓고 그 다음으로 그것을 계량화시켰다. 즉 양적으로 분할도 가능하고 결합도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모두다 동일한 질적 차원에 속하도록 만들어 놓고 단지 양적으로만 크다/작다, 길다/ 짧다, 무겁다/가볍다, 진하다/엷다, 넓다/좁다 하는 식으로 가치를 규정한 것이다.
여기에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빠르다/늦다, 동시적이다/순차적이다, 길다/짧다 하는 식으로 다루어진다. 도마 위에 물고기 몸통을 자르듯이 시간을 잘게 잘게 균일하게 자른다. 마치 좌표 위에서의 공간은 촘촘히 자르고 또 자를 수 있는 점들의 뭉치로 표현할 수 있듯이, 시간도 순간을 점으로 찍어 놓고 그 점들을 연결시켜 직선으로 시간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일종이란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강물이 흘러가듯이 인생도 시간의 강물 따라 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시간의 노예이며 시간의 피조물이 된다.
이러한 과학의 비정함과 냉정함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반발하기 시작한다.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과학에 의해 흡수, 통합 당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칸트는 절대 시간과 절대 공간 개념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자연이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은 움직임에 있어서도 다른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움직여지고, 정지에 관해서도 다른 저항력에 의해서 제어된다.
스스로의 움직임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어떤 합목적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서 진정 기계라면 인간 나름대로의 의지성이나 목적성이나 자유성이 나올 수가 없다는 본 것이다. 그렇다면 칸트가 생각하는 공간과 시간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직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직관은 관조가 아니다.
자연을 의도적으로 대상화 결과라는 것이다. 일종의 현상이다. 칸트가 강조하는 바는, 시간과 공간이란 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오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계론적 규정을 벗어나는 자연, 우리에게 대상화되지 않는 자연은 어떤 자연인가? 그것을 알려면 인과 법칙에서 벗어나 있는 장소를 찾으면 된다.
칸트는 그 장소를 인간의 마음으로 보았다. 거기에는 주체적 자유가 발휘되고 있는 자리이다. 무슨 상상이든 가능한 장소이다. 인간은 분명 목적을 갖고 있다. 그 목적에 맞추어 자연을 대상화하고 관찰한다면 결국 공간과 시간 관념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편리와 유용을 위하여 그렇게 자연을 조직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의 원리란 자연 통제의 원리를 의미한다.
통제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자연 이해의 한계도 알아야 된다. 여기서 마음의 자리에서는 사물화 될 수 없는 신까지 찾게 된다. 신의 관점에서 현 자연 통제의 한계를 알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란 기계적 자연 세계를 넘어서는 현상이 일어나는 자리이다. 칸트 이외에도 기계적 자연관에 대드는 사람이 있다.
베르그송은 생물 주의에서 자연 과학이 출발되기를 원했다."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고도 또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 자신의 존재이다"고 했다. 다른 자연 대상들은 피상적 개념밖에 모르지만(예를 들면, 우리가 원숭이의 마음을 아는가?) 인간 자신에 대해서는 내적으로 가장 깊이 자각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에서부터 모든 것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나 뉴우턴이나 아인슈타인에 대항해서 베르그송은 심리적 형이상학을 구축했다. 직관으로 봐서 자연은 끊임없이 생성되고 창조된다. 그러나 이성적 과학론을 주창해 버리면 과학적 이성이 하는 일이란 고작 있는 바에 대해서 설명하고 원인과 결과만을 연결시킬 뿐이다.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설명해 놓고서 제거하는 작업의 반복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여기에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도 도출될 수 없다. 즉 자연의 생성력과 창조력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놓쳐 버리는 비실재적 결말만 쥐게 된다. 자연이 과학으로 인해 이성화 되는 동시에 점점 빈약해져 간다.
변화 무쌍한 자연의 풍성함은 이런 과학 방식으로는 찾아낼 길이 없다. 여기에, 자연 세계는 단일의 질(質)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차등의 질(質)이 있다는 것을 내세우는 자가 베르그송이다. 자연에 다양한 질이 있다는 것을 그는 어떻게 아는가? 그는 직관을 내세운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기 위해 변화한다. 정신의 세계에서는 불변의 대상이라는 것은 없다. 이러한 정신의 변화를 잡아내는 것이 직관이다. 여기서 변화란, 사물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의 변화를 말한다. 생명력의 움직임이 정신 내부에서 발견된다. 이 움직임만이 실재이다.
이 움직임을 베르그송은 '지속'이라고 표현한다. 공간적 개념을 거부하고 시간적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칸트의 시간관 조차도 공간화된 시간에 불과함을 지적해 내고 있다. 지속이란,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기계론적 과학에서 말하는 등질적 시간은 이러한 변화에 부합되지 못하고 그저 지속의 양적 상징에 불과하므로 변화를 놓치는 허구적 표현이다. 자연 세계는 예견이 불가능한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창조되고 있는 그 동적 자체가 곧 실재인데 이 실재를 담아 내는 표현이 '지속'개념이다. 일종의 시간질(質)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생명체는 순간 순간 자기를 자유롭게 창조한다.
이 자유성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사실은 또 없다. 이 자유성으로 사물과 자연 세계를 분석해야 한다. 자연 세계에 의해 도리어 이 자유가 분석 받아서는 아니된다. 이 지속 개념이 우주에 관해서도 성립한다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이렇게 분석하게 되면 물질은 근본적으로 "절대적으로 나타난 바 있는 그대로이다"이다 는 점이 파악된다.
물질을 이해하기 위해 따로 과학적 인식을 재구성할 필요가 없다. 물질이란 그 내부에 신비적 속성이 따로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타난 바 그대로가 곧 본질이다. 주관과 객관이 일치되는 것이다. 물질은 변화의 운동의 도구가 된다. 인간 신체도 마찬가지이다. 운동의 각 기관들이 되지만 결코 각 기관들이 새로운 운동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 자유로운 지속성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자의에 의해서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을 순수 지속 내에 위치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밀려와서 미래로 흘러가는 그 지속에 의해서 늘 새로운 변화가 창조되어 일어난다.
그래서 지속에는 '현재'라는 것이 미래가 나아간다. 만약 지속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게 되면 등질적 시간관을 갖고 있는 과학자들은 그 정지점이 '현재'라고 부르게 되고 그 현재를 공간화 시켜 '동시성'으로 삼아서 거기서 가치와 의미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직선적 시간 사고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현재성이 주는 진리값에 따라 변함없이 살기를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이로서 베르그송은, '지속'이라는 시간개념으로부터 윤리관까지 도출한다. 자발적인 창조성의 억압하는 것이 나쁜 짓이 되는 것이다. 이 나쁜 것 중의 허구적인 기계 과학적 관점의 시간관이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도발적으로 과학적 시간관을 공박하는 이유는, 진리를 찾는 과학 작업에서 인간이 주체로서 행사할 자격을 근원적으로 폐지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진리의 근원은 소립자의 임의성에 있지 인간의 의지나 인식론에 있는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간관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시간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물질적 변화와 반응이 가역적이 되면 안되고 비가역적이 되어야 한다. 가역적(원래대로 되돌아가 버리는 성질)이 되어 버리면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이 확실히 결과인지 아닌지 원인의 원인이지, 아니면 다른 원인으로 인해 삽입된 결과인지 알 도리가 없다.
인과론에 혼란이 일어나 버리면 과학의 주특기인 미래적 예견에 차질이 생기고 우주는 제멋대로의 우주가 되어 아예 자연 세계에 대한 일정한 원칙 잡기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진다. 한번 일어난 일은 어쨌던 미래에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아니되고 그리고 그 미래의 일은 필히 과거나 현재의 일과 관련성이 있어서 나타난 현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과거나 현재와 무관한 미래의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작업에 돌입한다. 이러한 인과론을 철주를 박아 단단히 고정하는 것이 바로 시간의식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듯이,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라는 의식이다. (베르그송의 의식은, "지금의 몸은 과거의 몸과 같다"이라는 관점이다. 즉 "과거는 자동적으로 스스로 보존될 수 있다"는 원리를 내세운다.)
즉 우리의 몸도 강물의 흐름도 모두 시간이라는 절대적 기준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인간의 몸이 강물과 만나서 얻는 체험은 순간마다 다르지만 시간이 일정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사실만큼은 추호도 달라질 수가 없다는 말도 된다.
아무리 먼 거리에 상호 떨어져있다 할지라도 같은 정해진 시각에 맞추어서 같이 행동을 했다면 그 행위 사이에는 동시에 일을 했다는 동시성 개념이 필히 성립한다. 이 사실은 꼭 말로 하지 않더라도 누구도 부인 못할 상식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만큼 시간만큼은 공간의 갭을 커버하고 있고 공간의 제한성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절대적이라는 말이다. 세계의 모든 괘종시계는 어느 나라에 있는가와 상관없이 같은 리듬으로 영원까지 똑딱거린다.
이러한 시간관 아래에서의 공간은, 시간을 매개변수로 하는 방정식들에 의해서 측정된다. 중력의 힘을 받는 공간에서의 높이는 자유 낙하 시간의 제곱이라는 비율로 빈틈없이 측정할 수 있다. 시간이 균일하게 일정 방향으로 흐른다면 이 우주 공간의 어느 미래 시점에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지도 예측이 가능하다.
그런데 시간의 균일성을 과거까지 이어보면 미래에 일어난 일식이나 월식을 측정하는 것만큼 과거의 일식이나 월식도 측정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렇게 되면 과거 그 때 그 당시의 상황을 현재나 미래에 다시금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과거든 미래든, 이 현재에 다 모을 수 있게끔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시간은 아무 것도 창조하지도 않으면 아무 것도 파괴하지도 않는다. 그냥 박자에 맞춰 똑딱거리면서 진로나 표시해 줄뿐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모든 시간도 우주적인 모든 시간과 동일한 양을 가지게 되며 개인적인 시간이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따라서 물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템푸스라는 심리적 시간은 비과학적인 미신으로서 폐기 처분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오직 하나의 시간만 참 시간이 되고 나머지 개별적 시간들은 이 시간에 종속되어야 한다.
이제 시간의 양을 결정하는데 인간은 더 이상 관여치 못하고 배제된다. 정확히 균일하게 진전하는 우주적 시간만으로 만사는 명확히 이해되고 만물은 이 시간에 실려 미래로 흘러가고 있다. 예상되는 사건들을 토해 놓으면서 말이다….
독보적인 우주의 절대적 시간 하에서 자연세계는 하나의 균질화로 뭉쳐져서 변화된다. 자연도 인간도 하나로 대우받는다. 철학이나 신학이라는 이름을 앞세우면서 인간의 고유성이나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독보적 위치를 보장받고자 발버둥 쳐보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제는 과학 탐구로 인해 비로소 열려지는 우주의 참 실재성 앞에 고개를 숙이고 과학 영역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고분고분 신비로운 지식이나 동냥 받아야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리 문제를 독점한 대가로 모든 변화를 다 해명해 내어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주어져 있다. 절대적 시간 원리로서 설명해 내지 못하는 변화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다. 과연 모든 현상들이 과거나 현재, 미래 할 것없이 동일한 원칙으로 동일하게 적용시켜도 부합되는 결과들일까?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열역학계에서 맨 먼저 제기되었다.
시간이 한쪽 방향으로 흐르고 다른 방향으로 도로 역전할 수 없다는 사실들이 엄연히 있음이 확인되었다. 열은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 전이된다. 열은 비가역적이었다. 과학은 이제 이 비가역적인 사실까지 절대적 시간으로 설명이 가능했어야 했다. 과연 절대적 시간은 영원토록 이어지는가? 혹시 절대적 시간이 낭떠러지를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과학자들은 경험적 관찰을 통해 다음과 사실을 정립할 수 있었다. 자연계에서 물리적 질서 관계가 형성되면 결코 옛 질서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하는 점과 그리고 절대적 시간 안에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혼란도는 멈추지 않고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질적이 아니라 여전히 양적으로 해명하면서 양적 개념인 엔트로피(entropie)라는 용어를 등장시킨다. 엔트로피가 높다는 것은 혼란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뜻이요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더 질서 잡혀 있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세상 만물이 엔트로피 법칙(열역학 제 2법칙)에 의하면 다시 질서의 상태로 거슬려갈 수 없기에 시간이라는 것도 일방성을 지닌 채 한쪽 방향으로만 달려간다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세상은 갈수록 무질서쪽으로 치닫는다는 것은 새로운 질서 체제에 대해서 절대적 시간관에 준한 절대적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예상치 못한 것들이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의 초기 조건을 아무리 확실하게 조사해도 그 필연적 결과물에 대해서는 장담을 못하게 된다.
절대적 시간의 범주 안에서 불안스러운 물질의 미래상이 짐작된다는 것은 절대적 시간관이 결국 무의미해져 버리는 상황을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은 물리학을 순수기하학, 다시 말해서 '역사 없는' 형태로 이끌고 감으로써, 비가역성이라는 개념을 아예 물리학에서 제거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는 소립자의 존재와 변화를 다루는 양자역학의 등장에서 기인한다. 미세 세계에서는 절대시간에 준한 절대적 위치와 운동성 실체 파악에 있어 그저 통계학적 확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서 한없이 쪼개고 나누어서 관찰하는 대상에서 소립자들은 벗어나 있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량자'라고 불렀는데 이는 무한히 나누어 질 수 있는 알갱이적 성격이 아니라 하나의 뭉치로 봤기 때문이다. 고유의 임의성을 잃지않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립자들의 실제적 임의성과 우연성은, 엄밀성을 생명으로 물리계의 자만심을 심하게 훼손한 것이다. "확실하게 알 수 없다"를 양자역학의 결론 최종적 진리라고 세상에다 공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연성과 개연성이 적은 거시 세계에 관한 탐구는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물리학의 발전은 필히 우연성과 개연성이 큰 미시 세계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기적으로, 혹은 제멋대로 불쑥 생성되는 (소립자들 무리가 마치 살아있는 개체인 것처럼 서로 의견 조정을 거쳐서, 지금 자기네들을 잔뜩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인 그 과학자를 상대로 마치 장난치거나 내기하거나 숨바꼭질 게임을 하듯이 나타나는) 소립자의 모습을 잡아내기 위해서는 확률로 커버하는 일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 동안의 원칙과 엄연히 관찰되는 사실에 대한 해석 놓고 물리계는 상당한 논란이 생겼다. 비가역성, 그 자체를 명백히 부정하는 법칙 위에 비가역성을 계속 놓아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비가역성의 손을 들어줘 버리면, 나타난 결과가 미래에 비로소 생긴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것인지 (다른 말로 하면, 엔트로피가 증가해서 나타난 결과인지 감소되었기에 나타난 결과인지)를 판정할 방도가 없게 된다. 이것이 판정이 안되면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인지 아니면 미래에서 과거로 거꾸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아예 "절대 시간은 환상이다"고 외치면서 그런 쪽으로 정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리고진을 비롯한 다른 학자들은 비가역성의 실재성을 자연의 고유한 속성으로 지탱시키면서도 혼돈의 체계가 자조직적(自組織的)으로 진화해나간다는 사실을 근거로 해서 시간은 결코 인간 가슴속에서만 일방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계와 우주 자연 세계 속에서도 동일하게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이 확인된다고 했다.
즉 우주는 다함께 어울려 동조(同調)하고 동조받는 관계로서 자체적이고 자발적인 상태에서 새로운 질서를 조성하기에 뉴턴의 주장처럼, 개인적 시간이나 우주의 변동과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독단적으로 동일하게 흐르는 별도의 시간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조차도 대우주의 자연의 변화와 함께 창조되고 생성되는 진화의 결과로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어쨌던 그 동안 존재의 안정성을 기반으로 해서 등장된 시간이 이제부터는 운동의 변화성을 기반으로 시간개념으로 달라졌다. 질적 층위에 따라 상이한 시간 이해가 가능하다는 말이며 더나아가서 시간의 대칭성을 앞 뒤 동일하게 보장해 주지 못한다. 자연은 안정적 대칭을 잃지 않는 가운데서 창조가 일어난다.
곧 무에서 유의 물질 창조는,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어져 있는, 숨겨진 대칭성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이다. 소립자 수준에서 탐색해보면, 전기 전하(電荷)의 대칭성과(+와 -), 좌우의 대칭성과, 전 후가 동일하게 반응하는 시간의 대칭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전체적으로 대칭성을 가지고 유지되는 원리였다.
하지만 물질과 늘 상쇄되어 없어져 버린 반(反)물질의 존재가 제기되면서 자연의 대칭성은 실제로는 도리어 전기 전하의 비대칭성과 좌우의 비대칭성과 시간의 비대칭성적 요소가 한데 어울려 도리어 대칭성을 지탱시키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즉 이 세가지 요소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독자적으로는 절대적 불변성을 보장해 줄 수 없는 것이 물질 세계의 내막이다. 시간에 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늘 미래로 흐른다는 보장이 없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원리는, 빛의 절대적 속도 아래서(빛의 속도는 어떤 관측자의 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전달 속도가 절대적으로 일정하다. 그리고 빛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동시성이 어떻게 깨어지는가를 보여준다. 관찰자가 동시적 일어난 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일도 사실은 그것은 어디까지 관찰자 입장에서만 그러하고 다른 관찰자에 의하면 결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 된다.
즉 시간이라는 것이 속도에 따라 탄력적이라는 점이 여러 가지 점에서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괘종 시계를 공간에서 빨리 이동시킬 때는 똑딱거리는 속도마저 늦어지게 된다. 탑 위에 있는 시계는 땅 바닥 놓여 있는 시계에 비해 빨리 간다. 중력이 시간을 느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계의 속도 완화는 불안정한 기초 소립자 세계에서 큰 구별로 관찰된다. 소립자에 있어 정지하면 제 명대로 죽게 되지만 반대로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생존 기간은 길어진다. 이제 시간을 시간 자체적인 측정에 맡길 수 없다. 시간은 공간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변화와 함께 변화되며, 빛의 절대적 속도에 맞춘 역학 체제에 종속된 상태에 놓여 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시간은 시간끼리 상호 연결이 무제한적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은 이제 완전히 거짓이다.
늦은 시간차원에 속한 사람은 빠른 시간 차원 속에 사는 사람과 같은 동시성을 갖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보다 젊게 인생을 산다. 더나아가서 한쪽에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같은 시각에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이 될 수도 있다. 한쪽은 과거라고 판정하고 다른 한쪽은 미래라고 어긋난 판정을 내리게 된다. 둘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그런 통일된 시간관은 절대로 마련할 수 없다. 인간들은 제 각각의 시간대를 가지고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또한 서로를 관찰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시간이란, 시간의 정의나 개념 구성이나 존재 여부보다는 '동시성 개념'의 상대성, 즉 자연 세계에 있어 '시간적 상대성'을 보이기 위한 매개항으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심리적이든, 우주론적이든 '시간' 자체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개별적 의미성과 가치성은 어떤 식으로도 수립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심리적 면으로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우리가 놓여 있는 이 우주가 이런 우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억지로 우겨서라도 이런 물리적 우주상을 부정하고 싶다면, 빛보다 더 빠른 물질이나 입자나 있다는 것과 빛의 속도가 일정치 않다는 것을 제시한 다음에야 성립된다. 그래서 물리학적으로 봤을 때, 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도 '시간'을 개념상 현실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아직도 자기 의식에 자아내는 환상 속에 잠겨 있는 자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시간 개념'이 과학적으로 볼 때 유용하지 않고 활용도가 낮다는 말이 아니라, 실제 세계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객체로서 독자적 위치를 가질 수 없고 인간 의식의 일부 면으로 드러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진리 파악에 있어 시간에 의지하며 풀어 가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참으로 큰 오류이다. 물리적으로 우주의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이 과학시대에 들어섰어도 아직도 이러한 오류는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는데 그 주된 지역은 문학계이다.
2. 문학에 있어서의 '시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을 인간 영혼이 자신에 대한 명상하는 위기의 순간 전후에서의 필연적인 자기 확장으로서 고찰했다. 따라서 자기가 죽는다면 시간도 끝난다. 단지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 죽음 이후까지 세계를 확장시켜서 죽어 가는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의미를 덧입힐 수 있는 사전 작업을 실시할 수가 있다.
이것이 역사의식이다. 인간은 '역사'라는 이름의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놓고서 자기 생명을 거기에 위탁한 채 안심하고 숨을 거두고자 한다. 문학이란, 이 짧은 세상 안에서 마냥 즐기기만 위한 허구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역사를 조립하고 정립하기 위한 가상적인 '역사 만들기'이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영혼의 확장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실제 역사화 시키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상력의 산물이니까 '허구'라고 말 할 수밖에 없지만 실증적이고 규범적 역사와 공통성을 나누면서 영혼의 확장이 진전되고 있다는 시간적 공감대가 용납 받는다면 문학은 허구적 해석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실효성이 있다고 칭송 받는 예언자적 계열에 합류될 수 있다.
칼 포퍼가 말한 대로 어차피 역사란 없고 역사 이야기가 있을 뿐이라는데, 규범적 역사의 쇠퇴와 더불어 역사 서술은 결국 허구의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고 그렇다면 허구적 요소가 담겨있는 그 시대의 패러다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남는다.
패러다임은 바로 원시 시대부터 인간의 기본적 요구에 상응하여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 있어왔는데 그 토대는 인간성의 연속성, 즉 '시간성'이 차지했다. 예언이 곧 진리 전달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학의 존재 가치도 실제성이 농후한 시간의 내용을 제시해 내는데 있다. 시간을 어떻게 규모 있게 농축시키고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문학은 역사 안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간단한 예로 시계의 소리를 들어본다. 시계가 어떤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한결같이 '똑딱' 소리를 낸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의성어는 시계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허구적 표현이다. '똑-딱'에는 두 가지의 허구성 차이를 부여된 언어가 등장하는데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인간 자신이다. 앞 뒤 소리가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틀리다는 것이다.
'똑'이 '딱'과 서로 틀린 글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소리로 들리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똑'과 '딱' 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채 흐르고 있는 중립적 시간 의식을 상정할 경우뿐이다. 이것을 '지속'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속이 시간 체계로서 간주될 때만 처음과 끝소리가 감지될 수 있다.
이 점은 '똑-딱'처럼 동일하게 반복되는 리듬 구조를 청취하는 피실험자가 그 구조 내에 간격은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지만, 리듬군 단위 사이, 즉 '딱',과 '똑' 사이의 간격은 그것이 일정한 경우에도 자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와 있다. 똑과 딱 사이의 구별은 단순히 음성적 차이에 기인하고 있는 아니다는 이야기이다.
음성적 차이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대상을 받아들이면서 공간적ㆍ시간적 인식으로서 형태를 조성하고 리듬을 타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다. 두 번째 소리를 '딱'이라고 구별해 부른다는 사실은 첫 번째 '딱'을 염두에 둔 상태에서 시간적 구조를 즉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을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운다. 이 시계의 '똑-딱'을 우리는 시계가 나타내는 플롯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플롯은 시간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인간화시킨 구성물의 한 모델이 된다. 시간은 이처럼 인간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거시적 플롯에 따라 종말론을 이해할 때도 이 가장 기본적인 '똑-딱'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똑'은 초라한 기원이라면 '딱'은 그 초라함과 같은 양으로 상응하는 미약한 최후이다. 그런데 줄거리 구성이 '똑-딱'보다 훨씬 복잡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가령 1000페이지의 소설을 가정해 보자. 그것은 분명 이른바 우리의 '시간적 지평' 범위 내에 있지 않으므로 경험을 체계화하여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허구적 장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관계된 소리 중 두 번째의 '딱'과 같은 종류이겠지만, 분명히 보다 더 효과적이고 정교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이 장치들은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이 도중에 사라지려는 성향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똑'에 이어지는 간격 내에서 '딱'이 이어지리라는 생생한 기대와 함께 '딱'이 아무리 늦게 올지라도 그 안에 발생하는 각가지 일들은 '딱'이 확실히 뒤따를 것인 양 발생한다는 의식과 관계성을 치밀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러한 모든 플롯(구성)은 결말이 모든 지속에 부여해줄 어떤 의미를 전제하고 또 필요로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 간격에서 단순한 시간성, '딱-똑' 사이의 공허감, 즉 인간적 흥미와는 무관한 연속성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간격은 하나의 의미 있는 때, 즉 시작과 종말 사이에 위치한 카이로스(kairos)가 된다. 그것은 심리학자들이 다루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그들이 '시간적 통합'이라고 부르며 현재에 대한 지각과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의 기대를 하나의 공통된 구성에 의해 함께 묶는 방식이다.
이 구성에 의해서 단순히 연속적이라고 간주된 것이 이제는 과거가 과거로서, 미래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된다. '크로노스(chronos)'였던 것이 '카이로스'(의미 있는 특정한 한 때)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구별되나?
보통 신약 성경 사도행전 1:7에서 나타난 용어의 구분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으려한다. "크로노스(때)와 카이로스(시)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 아니요" 이 구절에 나오는 시간에 관한 두 표현에 대해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의 시간]은 강력하게 두 구별을 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즉 크로노스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이 의미에 차별을 두고 특히 지정된 시점인 카이로스을 가지고 친히 '구속사의 체제' 형성에 나셨다는 것이다.(살전 5;1/마 26:18/요 7:6/벧전 1:5)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특별하게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위기의 순간'이란 의미로, 또는 모호하게 '시간의 운명'이란 의미로 쓴다. 어떤 경우든지 그는 그 말을 '삶의 기반이 발밑에서 흔들리는' 시대인 현대 특유의 삶의 의식과 강력히 결부시키고 있다.
그런 견해는 현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줄곧 되풀이되는데, 그 한 예가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으로서, 이것은 죽음, 고통, 죄악 등의 개인적 위기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역사적으로 결정짓는 자료들과는 관련된다.
반면에 쿨만과 마시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전통적, 성서적 의미로 쓰고자 한다. 즉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 또는 '기다리는 시간' - 묵시록에 의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의미가 충만한, 즉 종말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미로 차 있는 구원의 시점이며 구원의 때이다.
방금 말한 바는 아주 극단적인 구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과거를 새로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새롭게 완성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말'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고 종말과 관련된 과거 에서 초시간적 의의를 갖는 역사적 시점들, 곧 '카이로이'가 생겨난다.
그러한 신적인 플롯(줄거리)은 '종말'과 관계되는 '카이로이'의 패턴이다. 희랍인들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도 이러한 대립항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시에 의하면. 히브리인에게는 '크로노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고 따라서 "다음에서 다음으로 지겹게 이어질 뿐인" 시간과 '카이로스'와 같은 집약된 시간 사이의 대조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시대의식(현대인은 여러 시대aiones가 겹쳐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다)과 다른 성격의 시간들 사이의 현대적 구별, 즉 신의 시간(kairos)의 도래, 신의 시간의 완성(kairos-마가복음 1장 15절). 여러 시기의 징조(마태복음 16:2-3) 등을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보는 구별에 기초가 잡힌 것은 신약 성서에서였다.
여기에서는 완성의 관념이 필수적인바, '카이로스'는 과거를 변화시키고, 구약성서의 예표와 예언의 타당성을 확인시키고, 종말뿐만 아니라 인류의 태초의 기원과의 일치도 시도한다. 그러므로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분은 현대의 일부 신학자들의 예표론적 관심과 상관성이 깊으며, 일부 문학비평가들도 그랬다. 예표들의 매력은 궁극적으로, 한가운데 처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고 시작과 종말을 조화시키는 의미 있는 시점들을 소망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느냐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제임스 바 교수 같은 자는 쿨만과 마시, 로빈슨 등의 저서를 검토하고 이 학자들의 '최상의 수준'에서 현대 성경 신학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평하면서도 모두 성서의 언어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별은 사실 신약성서의 언어에는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15에는 "때가 찼고"라고 되어 있지만,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참"이라고 번역된 문구는 "pleroma tou chronou"이다.
사도행전 1:7과 데살로니가 전서 5:1에서는 hoi chronoi kai hoi kairoi라고 씌어 있듯이, 두 용어는 변별되어 있지 않고 흠정역은 이 구절을 "때와 기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도 앞서 언급한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시간에 훨씬 큰 관심을 보여준다고 바 교수는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대조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서로 바꿔 쓸 수가 있다.
아마도 카이로스의 의미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결정적인 시간'에 가까운 것 같고 크로노스는 보다 양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바 교수에 의하면 성경에서 '카이로스 개념'을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카이로이를 '결정적인 시점들'로 이해한다할지라도 그 뜻이 성경에서만 고정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저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역설하기를 예수님마저 '旣存'(이미)과 '未存'(아직) 사이에서 긴장을 나타내는 종말론을 펼치시면서 구속사의 존재를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활동성으로 볼 때 '미완'의 부분이 미래에 남아 있고 이것을 한 줄로 이어 보면 분명 구원의 역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주님의 활동을 보게 되면 아직 미래에 펼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점에 대해서 그도 인정했다.
오스카 쿨만이 내세우는 구속사 이론에 의하면 '이미'와 '아직 아니'는 병렬적의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고 그것도 일직선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그의 또다른 저서, '그리스도와 시간'에 서는 그는 "초대 기독교도의 신앙과 사상은 공간적인 장소로서 '이 세상'이나 '저 세상'(혹은 차안이나 피안)을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와 '지금' 또는 '그 때'라는 하는 시간 구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공간적인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시간의 과정에 완전히 속해 있어 근본적인 것은 공간적인 대립이 아니라 시간의 구별이다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것도 또한 시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과연 오스카 쿨만과 같이 시간을 공간적인 구원관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식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시고 모든 말씀도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시간 의식 구조는 본능적으로 공간적 그림을 구성하며 이해하게 되어 있는데 시간을 흐르는 강물처럼 일직선적 도상(圖上)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미 공간적 사고의 일환이다. 그런데 오스카 쿨만은 이 직선적 시간인식을 가지고 아예 모든 입체적 공간적 의식 형태를 말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가 지금 사용하고자 하는 방식 자체가 없어지는 방향으로 방식을 활용하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뱀이 스스로 자기 꼬리를 먹어들어가서 결국 자기 모습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은 불합리하다. 주님도 이런 불합리한 인식을 강변하시기 위해 '이미'라는 표현까지 동원하신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주님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는 존재성에 있었지 결코 시간관 조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요 10:33)
시간을 일직선 도형으로 대체해 놓고 봐서도, '이미'란 '아직'을 직선선상에서 후차 지점에 두고 있지 않는 경우를 뜻하고, '아직 아니'는 '이미'를 일직선상으로 앞에 두지 않았을 때나 성립하는 개념이다. 수학에서 직선이란 점들의 순차적 계열에 따른다. 따라서 '아직', '아직', …의 이어짐으로 표현된 일직선뿐이든지 아니면 '이미'라는 한 점으로 직선을 끝내든지 해야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직선 위에 묵시 세계라는 명목으로 직사각형과 같은 면적이 있는 도형을 얹어 그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묵시는 시간과 점으로만 표현 할 수 있지 면적이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면 묵시란, 기껏 '많은 시간들의 연속'이라는 개념으로 왜곡되어 정의(定議)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오스카 쿨만의 이와 같은 무리수는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말씀의 완성'을 곡해했기 때문이다.
즉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긴장이 있다고 했는데, 시간 자체가 긴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을 느끼는 주체자들이 갖는 긴장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긴장이나 사도나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긴장은 '아직 아니'이라는 시간상 미착성(未着性)으로 인해 아직도 손도 못된 미해결 문제의 존속으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아니라 '이미'를 믿지 못하는 이 어두움의 세계의 속성으로 긴장했고 또 고난을 받았다.
오스카 쿨만처럼 그저 다가오는 시간에다 모든 고민거리를 위탁해서 넘겨버리는 식으로 해결 지우려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대내외적이고 심적인 악의 유혹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그들은 구원의 '아직 아니'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긴장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 있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주님이 지키겠다는 데 무슨 '아직 아니'가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이 아니 지켜 주겠다는 것인가? 성도들은 예수님이 모든 활동을 하시던 이미 말씀이 성취된 가운데서의 활동임을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구가 아직 파장을 맞이하고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끄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아직' 구원이 덜 되어서 뭔가 주님께서 일을 더 하시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저 착수만하고 마감은 아직도 되지 않은 미완성적 구원관은 예수님이나 사도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이다. 실제가 현상으로 드러날 때, 그 현상은 실제적 차원의 내용에 의해서 평가받지 다른 범주적 평가를 허용할 수 없다.
'이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이미'의 담긴 내용대로 '이미'의 가치성만을 드러내 줄뿐이다. 예수님의 '이미'는 '아직'과 대비되는 '이미'가 아니라 '이미'의 성과 자체가 '아직도' 시간 의식에 기대를 거는 그 '이미'를 공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자고 나타난 '이미'이다.
오스카 쿨만 교수의 구속사 이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을 절대적 시간에 예속된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에 인식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 선상의 한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시간의 사건들과 차별되게 대조된다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시점에 있다는 것 인해 비로소 그리스도 중심성이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나오는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이 전 구속사의 중심점 작용을 했다는 것에 준해서만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유발되는 일들이 아니라 일단 십자가 사건이라는 역사의 '중심점 만들기'를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 중심을 보여주자고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역사의 중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변모되고 만 것이다. 세상 만사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을 '시간의 중심' 혹은 '구속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을 수 합당한 사유의 연결 고리가 제시될 수 있는가? '시간의 중심'이라는 것이 과연 개념적으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오스카 쿨만의 주장대로 구속사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흘러간다면서 어찌 '중심'이라는 것이 따로 규정될 수 있단 말인가? 단절된 막대기 같으면 무게의 중심점이나 길이 중심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의 수직선과 같은 것에 중심점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한 지점에 의해서 두 개의 직선으로 분리해 나가는 분절점은 상정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스카 쿨만 교수가 십자가 사건을 구속사의 중심으로 주장하려면 구속사가 한 개가 아니라 두 번째로 새로 시작하는 또 다른 구속의 역사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견해에 부합되는 학자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이다.
이 학자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은 스스로를 넘어서 더 나아가는 성취를 지시하여 첫 성취 자체가 다시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먼저 번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이 문자대로 후대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후기 선지자의 시대에 성취된 역사는 그 예언을 추월해서 미래의 내용이 더 추가적으로 함유된 성취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도 동일하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미래의 것이 선취(先取)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향해서 무작정 '약속-성취'의 속성만을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 최종적 계시가 예수님에게는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비추월성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모든 계시가 전부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모든 사건이 완결된 후에 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최종 통치에 마주 향해 가는 아직도 열린 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아직 미완결이며 잠정적이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종말이란, 세상 종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취성 안에서 새롭게 미래로 출발하면서 또 하나의 최종 성취를 기다리는 보편사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절점 설정은 같은 구속사 선상에 놓여 있는 다른 사건들에 의해서는 자체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또 결정되었음을 증명할 길도 없다. 구속사가 되었든 보편사가 되었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의미에 대해 역사를 정립하는 방법으로는 온전히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역사나 사건 자체에서 계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계시를 배척하는 속성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늘에서 오신 의인이 나타나야 한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인식 근거로 여기는 구속사 위주의 사건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계신 분에 의한 말씀 성취 차원의 사건임을 뜻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구속사를 완성시켜 건지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이루었다는데 다른 차원의 선포이다.
예수님은 '때'를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다. 단지 실시하신 특정 '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특정 '때'를 기다리시기는 했지만 그 특정 '때'를 위해서 오신 분은 아니다. 이처럼 오스카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존재 보다 구속사라는 시간적 요소를 절대적 계시의 대용으로 삼고자 했다. 이는 유대교적인 히브리인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고대 문화에는 두 대조적인 인식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헬라)적 사유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쪽 사유, 즉 히브리적 사유를 계시 전달에 적합하다고 여겨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히브리적 사유 쪽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본래의 취지가 보다 확연해 진다는 것이다.
토를라이프 보만 교수는 그의 저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히브리 사유적 시간관의 특징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는데 있다고 했다. 과연 이러한 인식론이 계시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장애가 되었을까? 성경을 통해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바리새인들의 말씀 해석은 시간의 흐름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틀은 예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역사 인식이 도리어 메시야 앞에서 좌초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짓고 부정해 버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히브리적 사유든 아니면 헬라적 사유든 상관없이 말이다.
제임스 바 교수는 원어 분석이라든지 언어 그 자체에 무슨 비결이라도 들어 있는 온갖 해법을 거기에다 기대를 거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기껏 해봐야 연못에 자기 얼굴을 비쳐 보는 것과 같이 자기의 선입견만 되찾아 오기 마련이다. 더나아가서 기독교적 직선론과 희랍적 순환론간의 엄격한 구별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게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유명한 구절처럼 "맨 바탕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살펴보라!"에 충실하면 인간의 시간 관념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도 '아이온'(시대)과 '플레로마'(특정한 질의 때의 충만)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이런 용어들의 사용은 일종의 그 시대의 용어 사용에 있어 서로들 언어 규칙에 존중하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게임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모호한 문화적 현상들을 보아 합리적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고 물리적 시간성과 조화를 위한 목적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미래 시대에 대해서 확신 있는 내용으로 확장시켜 채우자는 데 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아무리 지금 형편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구원 될 미래를 내다보는데 생의 전부를 건다. 따라서 의미의 충만과 완성의 때, 즉 '플레로마'를 필요로 한다. 꼭 성경이나 신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문학이 이런 성향을 담고 있다. 플롯(줄거리)에 의해서 과거 및 중간의 시점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들의 물릴 줄 모르는 관심 탓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똑-딱'이라는 시간성으로 이어지는 인간성이 동일한 인간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과거의 그 인간과 현재의 그 인간과 미래의 그 인간이 그 어떤 변화를 보이지 않고 모든 면에 있어 연속적인 동일인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구속사는 이미 모든 인류의 문학과 문화가 자생적으로 배태해 오고 있는 실정인데 이 구속사가 그 내용만큼이나 실제적으로 균일한 속성을 함유하고 오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 할 수 있는가? 만약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구속사적 성향을 드러내는 모든 문학작품과 또한 성경의 내용으로 가져놓은 구속사 체계나 신학 체계는 참으로 허구적이기에 고유의 가치를 발하는 일반 문학작품과 동등한 평가 체제에 놓이게 된다.
허구성에 의해 지지를 받는 문학 표현은 독자와 저자와 공감하는 영역 안에서 구원 의미의 효과 창출을 그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의 구원의 실제성이 내다보는 것은 구원 사건의 실제적 재현이 아니라, 이야기꺼리가 수시로 첨부되어가는 구속사라는 이름의 시나리오의 완성이다.
그러니까 실제적 구원 사건이 터지는 것을 대단히 모호하고 낯선 일로 생각하고 주류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이처럼 구속사의 가치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발휘가 아니라 구원 사건에 관해 그 의미성을 수집하여 거기에다 자기 구원을 대비시켜 그 진위를 확인해 보자는데 있다.
조작이나 허구는, 문학에서 이단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필수적이다. 허상의 세계는 조작되기를 요청하고 그렇게 해서 당대의 민중들에게 그들을 지배하는 신화라는 허구성에서 되레 변화를 촉구하는 각성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만약 허구의 이러한 반발이 없다면 인간들의 옛날 신화로 자꾸만 후퇴하기 때문에 허구야말로 현재를 현재의 의미로 이해케 하고 미래로 향한 개방의 발판을 닦아주는 현재가 되도록 해준다. 문학에서의 허구란, 이처럼 시간과 시간의 간격에다 인간의 존귀함과 영원함을 집어 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동반해서 시간도 의미 있는 것으로 사용케 한다. 혼돈,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방치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혼돈을 느끼는 것은, 인간 스스로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꾸만 시간의 노예가 되려고 근성 때문에 발생된다. 문학의 임무는, 인간들의 이러한 노예성을 정확하게 지적해서 그들의 실존을 낱낱이 공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태 속에서 자아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만드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시간이 아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이제 믿을 것은 주의 재림밖에 없다"라는 표현은 문학에서의 "이제 믿을 것은 허구밖에 없다"로 표현 안에 포괄적으로 담겨 있는 셈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대비되면서 존재 확인이 안 되는 가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그런 '허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이 지금의 세계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문학, 즉 허구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허구적 표현과 시간의 틀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이를 위반하면 '신화'로 분류되어 과거의 패러다임(인식 체제)라고 핍박을 받게 된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문예적으로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실제와 현실을 그 어떤 경우에도 언어의 상징적 기능이 동원되어 '현 시대의 문학'으로 나타난다. 언어 범주가 인간의 사고 범주를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 범주를 입장에서 서서 보면 수용이 다 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완전히 수용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약조가 사회적으로 형성될 수가 있다. 기호 체제의 본질은 '나타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약'이다.
놀이를 하는 어떠한 사람도 놀이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 질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게임 안에서의 진리란, 그 게임의 규칙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자기 완결적으로 조작해 낸 것이기에, 다양한 경우들을 통해 절대조건을 대리하는 분산된 조건과 의미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 변별성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자기 사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을 변별적 구조를 통해서 잡아내려고 한다. 문학은 이 작업의 연장이다. 문학을 이루는 개인의 상상력은 사실에 있어 그 사회 구성원으로 갖는 체험의 일부이다.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 안에는 자신의 속해 있는 그 사회의 성질을 함유하고 있기에 타인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작품 활동을 한다. 접쳐진 사회 구조가 작자의 예리한 해석력으로 인해 펼쳐지고 그 틈 사이에 숨어 있어 의미가 비로소 만개 한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그 사건의 다발을 텍스트화시켜서 자체적으로 독립적 존재임을 외부에 알리고, 그 독립된 텍스트가 문학(문예)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자기 시대가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진리치를 예술적 유혹으로 포장하여 타인과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타인과 더불어 공유된 시간이기를 기대한다. 세계는, 우연은 제거되고 영원한 반복성만이 규칙으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 소통에 준한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관을 신학자들은 놓치지 않고 계시를 정의(定議)하는 아이디어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바탕으로해서 그 위에 인간 사회를 놓으면 개인주의적 계시관과 더 이상 계시를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릴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서로'라는 호칭으로 교류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 자리가 얻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친 이상 '그' 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들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너'이신 분 앞에서 '너'인채 만나게 된다. 이로서 계시는 '그' 분과 개인적인 '나'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동일성이 갖추어진 상황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대하면서 찾아드는 질문과 대답의 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모든 교육적, 훈계적 사역은 반성과 참된 회개를 유발하는 중재적 사역이 계시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각자 개인적인 '나'만 관심두고 '나' 그 자체을 본질성을 삼고 존재하는데서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부인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너' 되시는 분을 뵙기 위해서라도 동일한 부정성이 각자에게도 유발될 필요가 있는데 이 중재적 계시 활동이 지금도 교회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교회의 존재함, 그 자체는 계시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교회 역사도 나름대로 계시로 대우받는다. 인류는 이처럼 교회 존재를 구심점으로 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 안에서 남을 위한 '너'가 되도록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계시라는 것이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역사가 곧 계시가 되고 성경은 이 계시활동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로서 성경은 역사의 대상물로서 풀이 가능한 내용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쓰여짐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보편적 인식을 염두에 두고 의사 소통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물음은 끝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고, 물음의 영원성은 보편성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는 절대성이라는 계시인식은, 이미 없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까지 보편적 관념들을 동원시켜 붙잡아 묶어둔 모음집이다.
그래야지만 '나'에게서 한없이 터져나오는 물음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되고 이로인하여 '나' 자체에 대한 가치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신이 되었든 그 어떤 절대 사물의 관한 과학적 원리가 되었든 종국에는 '나'의 절대적 가치를 능가하는 가치는 '나' 자체에서 물음으로 도출될 수 없는 법이다. '나'를 중심으로한 산발적인 게임에 늘 파묻혀 사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인간 행함의 보금자리'가 장만된다. 즉 나의 행함도 계시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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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5 대구강의[지옥의 하나님37-38p.] 이근호 목사님.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면 바로 그 알게 된 인간이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러한 논리에 들어갈 수가 있죠.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는 나를 잘 관리를 해야 되는데 나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알아야 관리한다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인간이라는 것을, 나를 파악하게 될 때 인간은 무엇이냐라고 했을때 인간은 하나의 존재가 되고, 실체라는 개념이 나오고, 실재라는 개념이 나오고, 본체라는 개념이 나오고, 본질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형상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그 다음에 질료라는 개념이 나오고, 실존이라는 개념이 나온단 말이죠.
여기에 하나라는 개념, 신이라는 개념이라는 것을 덧붙여버리면 존재, 실체, 실재, 본체, 본질, 형상, 질료, 실존 이런 게 다 나오거든요. 이것이 어디에 모여지냐 하면 인간이라는 여기에 모여진단 말이죠. 그럼 여기서 이 많은 개념들 가운데 형상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형상이라는 개념이 인간이라는 존재, 실체, 실재, 본체, 본질, 질료, 실존 이런 것과 어떤 연계,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를 일일이 검토하지 아니하면 뭐가 성립 안되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개념이 성립이 되질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이 갖고 있는, 소유하고 있는 형상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내비치고 있는 하나님의 품성이나 인격이 외부에 드러난 것이 형상이냐, 그것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에서 인간의 형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아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서 인간을 아느냐 이런 문제가 나오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야 인간은 안다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더하기 형상 아닙니까.
하나님 더하기 형상을 어디서 뽑아내느냐 하면 인간을 가지고 인간이 형상 더하기 질료. 질료라는 것은 우리의 살점덩어리, 물체, 해체되면 흙으로 돌아갈 것. 그리고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흙을 인격으로 갖추게 하게 한 어떤 또 다른 정신적 요인 이걸 형상으로 본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형상과 질료 이 자체를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게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게 되면 인간을 모르게 되고. 그러니까 어떤 외부에서 인간이 무엇이냐 이렇게 해야 될텐데 신학이나 성경해석을 해도 뭘 해도 인간 내부에서 해답을 찾아서 그걸 되레 자기한테 되먹임시키는 이런 식으로 했을 때에 과연 믿을만 하냐 이 말이죠. 이렇게 나온 결론들이 믿을 만하냐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존재, 실체, 본질, 질료, 실존 등은 철학에서 말하면 존재론입니다. 이 존재론을 다른 말로 하면 형이상학이라고 합니다. 이런 존재론을 만약에 생각을 안하고 바로 성경보고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집단적으로 모여서 성경 구절 외워라 해서 앞으로 전도할 때 이런 소리나오거든 이 구절 갖다 대고 이런 소리하면 저 구절 갖다 되시면 저 쪽에서 말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만약 되버리면 이것은 조금만 신학을 공부한 사람은 뭘 느끼느냐 하면 이 성경 자체가 앞 뒤가 안 맞다는 거예요. 샌더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같은 사도 바울이 이야기해도 앞뒤가 안 맞는 거예요. 앞에서 다른 소리하고 뒤에서 다른 소리하고 다르다 이말입니다. 앞뒤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니까 성경보는 사람이 성경 좀 공부할려고 하다가 나중에 종잡을 수가 없는 거예요. 사도 바울도 왔다 갔다하고, 베드로 왔다 갔다 하고, 베드로와 사도 바울하고 서로 다투는 것 같기도 하고, 예수님하고 뒤에 나오는 사도 바울하고 안 맞는 같기도 하고. 예수님의 산상보훈가지고 한 번 가상 실험을 해보세요. 산상보훈 외에 아무 성경이 없다고 보고 마태복음 5장, 6장, 7장만 달랑 어떻게 바람에 실려서 성경이 없는 북한 사람에게 남쪽에서 바람에 실려 왔는데 보니까 5장, 6장, 7장만 달랑 날라 왔단 말이죠.
그래서 5장, 6장, 7장 딱 보니까 5장, 6장, 7장 그 끝에 뭐라 되어있냐 하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백성이다’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아니하면 마치 모레의 지은 집처럼 무너진다. 그리고 뜻대로 행하는 자야만이 반석위에 지은 집이다. 5장, 6장, 7장만 딱 떼어서 보면 그것은 백 사람, 천 사람 다 봐도 그것은 무슨 얘기냐 하면 산상설교대로 완벽하게 지켜야 구원받는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또 바람에 불어서 날아온 것을 보니까 이번엔 로마서 4장이 바람이 날라왔네. 로마서 4장도 다가 아니고 5절, 6절만 딱 날라왔는데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게 달랑 날아왔다 이말이죠.
그럼 사도 바울이 도대체 산상설교도 모르는 인간, 나보다 더 성경모르나. 산상설교할 때 태어나지 않았거나 다른 데 살았기 때문에 전혀 감을 못 잡아서 자기는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거다.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거든요. 이게 샌더스를 비롯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그거잖아요. 이걸 서로 앞뒤가 안 맞다라고 신학자 입에서 그런 소리를 할려니까 신학 후배들한테 너무 미안스러우니까 뭐라고 이야기했냐 하면 이걸 다양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걸 다양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양성이라는 이야기같으면 이 존재, 본질, 실체 등 여기서 나왔던 형이상학이 나중에 존재에서 중세에 데카르트 이후에 가면 둔스 스코투스 이후에 가면 이것이 존재에서 실존으로 바뀌어요.
존재 위주에서 실존 위주로 바뀐다고요. 그 과정이 존재 위주에서 본질 위주로 가서, 본질 위주로 간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고, 본질 위주로 가서 그 다음에 나오는게 실존 위주로 나갑니다. 실존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존재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지금 이 땅에 있는 것은 전부 다 허상이고 모형이고 진짜 실체는 어디 있는냐 하면 저기 이데아 세계에 있어요. 원이 사람마다 그리면 여러 삐뚤어진 원들을 그리지만 진짜 완벽한 둥근 원 개념은, 진짜 원형은 따로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그 원형을 분배받아서 그렇게 불완전한 원을 그리지만 원이라는 원형, 개념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는 다양하지만 다양한 이유가 그것들은 모형들이 때문에,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신의 품성을 양적으로 어떤 것은 많이 받은 것이 있고 적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선 있잖아요. 선. 착하다. 착하다는 것이 원래 신의 세계에 있어요. 플라톤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마다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마다 더 착한 사람이 있고 중간쯤 착한 사람이 있고 아주 못 된 사람이 있죠. 그런 못 된 사람이라 하지 않고 덜 착한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못됐다하는 것은 악이 있어야 되는데 이 세상에는 선한 것밖에 없어요. 존재가 이콜(=) 선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도 이야기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야기했고, 플라톤도 이야기한 거예요. 있다는 자체가 선한 거예요. 있다는 것이 그냥 있는 거이 아니고 있다는 것이 선한 거예요.
그런데 실존주의철학은 뭐냐하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지 있는 것에 어떻게 선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느냐 그것은 말도 안 된다. 그냥 있는 것은 뭐냐. 있음은 있음이단 말이죠.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뿐이지 있는 것이 어떻게 선하다 악하다 가치를 논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래서 옛날에는 악이 없고 쪼끔 선한 거예요. 적게 선한 사람은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느냐 하면 앞으로 많이 선할 수 있는 여지있는 사람이라서 인간에게 희망을 부여합니다. 많이 착한 사람은 착한 대로 희망이 있는 것은 뭐냐하면 이 사람은 죽으면 거의 신과 가까이에 좋은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희망을 주죠.
존재가 무엇이냐 할 때는 그냥 존재가 무엇이냐 묻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과연 낙담안하고 앞으로 계속 살아야 돼? 과연 살만한 세상이냐? 아니 이렇게 힘든데 살아야 되겠어?라는 것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는 그러한 철학들이단 말이죠. 실제가 아니라 사람들 격려해주고 북돋아주는 겁니다. 어제 주일학교 설교를 하는데 설교하면서 제가 물었어요. 여기 솔로몬 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애썼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하나님 좋아하십니까? ‘아니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 섬기기 안 좋습니까? ‘안 좋습니다’해요. 어른들도 마찬가지거든요.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좋아하느냐 하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가 현재 고생할만큼 그 만큼 죄를 안 지었다는 거죠. 내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데 나는 아무리 봐도 이런 고생할만큼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거죠. 하도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교회나오지 참 다른 사람같은 안 나왔다 신이시여. 나라서 나왔지. 그래서 억지로 헌금하고 억지로 예배 참석하는 거예요. 더러워서.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세리나 창기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 섬기는 것이 좋아서 섬겨요. 좋아서. 막달라 마리아같은 경우에 용서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섬겨요.
그리고 사도 바울같은 경우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내가 지금 살아서 남들은 고생한다고 하지만 이 고생하는 것도 내 지은 죄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다’. 이것이 얼마나 낮아진 건지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채무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당신들이 날 대우하지 않더라도 난 당신들을 대우하고 싶어 환장했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주의 종의 바른 태도란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내가 잘못 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교회오는 사람보면 ‘진짜 예수 당신 너무한 거 아니요?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킵니까’. 전부 다 자기가 고생 제일 많이 한대.
그래서 이 철학이라는 것이, 만약 이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학을 보게 되면 산상설교를 봐도 거기서 바로 이러한 철학의, 자기는 철학 몰라 철학 안 배울거야라고 하면서 현재 철학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의 사상을 가지고 산상설교를 가지고 산상설교를 해석하다 보니까 산상설교를 보면서 아 이것은 다 지켜야 반석위의 집이 된다라는 해석이 나오고 사도 바울보고는 이것은 완전히 농땡이쳐도 되는구나 하고 이렇게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이런 기존의 존재론적인 자기의 품고 있는 그런 본성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근대에서는 존재에서 본질로 가다가, 존재에서 본질로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인간은 허구고 진짜 존재는 플라톤에 의하면 신이 진짜고 선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선이 없고 신에게 진짜 선있다라고 나가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성을 주었고 그 본질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느냐 구원 안 받느냐, 우리가 천당가느냐 지옥가느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냐.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미 부여받은 신의 품성의 양에 따라서 결정된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본질 위주가 되면요.
잘 보세요. 철학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존재, 글자로 쓰면 굵게 써야되는데 이외에, 본질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실존 이건 허구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다가 존재만 주장하면 우리가 있는 게 허구가 되니까, 본질이, 이 본질이 존재에서 넘겨받은 본질이기 때문에 이 본질은 우수한 본질이다. 이걸 무시하지 마라.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이죠. 이 본질을 가지고 어떻게 사느냐. 바르게 살면 천사, 못 살면 악마. 이게 중세 철학이고 신학입니다. 그러나 근대에 오면 이렇게 본질주의가 되면 소위 더 착한 사람이 덜 착한 사람을 폭력적으로 압제를 하게 되고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종속시키는 그런 것이 된단 말이죠.
그러면 더 못 배운 사람은 더 똑똑한 사람에게 어떤 본질을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해놓고는 신으로부터 본질을 받은 것이 아니고 나라는 본질은 어떤 특정 인간의 본질에 예속이 되는 경우가 발생이 되니까 이게 과연 옳은가라고 자문하면서 참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으로부터 온 피조물이라면 본질이 아니고 실존이 더 우선 되어야 된다. 실존. 실존은 뭐냐하면 개별자의 가치예요. 최초의 실존 철학을 한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인데 이 사람은 뭐라고 하냐하면 단독자라는 말을 했어요.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에스겔 13장 19절요.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리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보세요.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려내서는 안 되는 영혼을 당신은 구원받았습니다라고 사기쳐서 살려내는게 된다 이말이예요. 자 그렇게 되면 사람 숫자 끌어모으는 목회는 일단 안 된죠. 그럼 사람 숫자 끌어모는 목회가 되어버리면 사람 숫자 끌어모았다는 그 자체가 사람수가 많은 교회가 하나의 진짜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집단 구원인 것처럼 행세를 하게 되요. 집단 구원인 건처럼.
마치 에스겔시대에 우리 유다 나라는 집단적으로 구원되는 것양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유포한 것처럼. 에스겔은 그걸 각개전투해서 그걸 파괴시키잖아요. 너희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에 다 구원받는다, 어떻게든 구원받는다라고 안심하고 평강이 있다고 하는데 에스겔은 각개전투로 찾아가가지고 에스겔 자신에게 떨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진실로 순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각개전투로 개별자로 전부 다 구분시키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뭐와 관계되는 겁니까. 존재가 본질이 아니라 뭐와 관계되요. 실존과 관계되요. 실존과. 실존과 관계된다면, 실존적인 측면에서 관계된다면 사도 바울의 지체, 몸의 개념과 안 맞아요. 또.
제가 사실 어제 오전 설교에 대한 토요일에 준비한 내용 가운데 이런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교인들에게 내가 묻고 싶은게 있어요. 과연 여러분들한테 교회가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어요. 왜냐하면 복음으로 구원받고 예수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교회가 뭐 필요하나라고 하는 소리가 나오더란 말이죠. 그러니까 마치 제가 듣기에는 교회가 구원받는데 필요가 없다든지, 교회가 없어야 구원이 된 양, 교회가 없다고 이야기해야 진짜진짜 구원이 된 사람처럼 행세하는 그 오해를 나타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러면 당신에게 교회가 있습니까 하면 가짜로 구원받은 사람같으면 예수 십자가 있는데 교회 뭐 필요합니까 라는 소리가 나올 거단 말이죠.
그래 되면 주님이 주신 교회있잖아요. 그죠? 주님주신 교회도 없이 천국가겠다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과연 그런 성도 봤습니까? 교회없는 성도 있습니까 세상에.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성도 있어요? 서로 사귀며. 이게 [뒤에서 본 한국교회]나와요. 분명히 제 책보고 교회를 비판하니까 사람들이 ‘아 나는 교회 안 가고 인제 집에서 혼자서 인터넷으로 믿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나올까 싶어서 “서로 섬기며, 서로 화목하며, 서로 도와주며.....”. 거기에 ‘서로 ...’를 열 몇 개 적어놨어요. 기억나죠. 그런데 왜 우리는 서로라고 해당되는 사람이 없습니까. 왜. 다 자기를 위한 구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다 이래야 될텐데. 달랑 자기가 구원하면, 구원받고 내빼면 끝나는 거예요.
이제는.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말아먹든 모르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실존이죠 실존. 철학적 용어로 실존에 해당되는 거예요. 개별자에 해당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 전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이름이 붙어있다는 것은 현재있는 피조성을 겨냥해서 이름이 붙어있거든요? 피조성이 없다면 이름이 없어져야 되요. 반드시 지은 자가 지음받은 자가 있거든요. 피조성은 이름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름의 세계 속에 이름을 가지고 들어와야 이게 교제가 되고 관계가 됩니다. 물론 이름이 그냥 호칭하는 이름이 아니고 능력을 한껏 품고 있는 이름이죠. 그리고 그 이름이, 그 이름에 담겨있는 능력대로, 맹세한대로, 언약대로 그대로 실천해 나가는 가운데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 자신의 이름을 여기 다 흩어 넣습니다. 그것은 그냥 역사를 초월해서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 같이 이름을 가진 피조성과 함께 더불어서 그 이름과 이름과 이름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으로 계속 부각시키는 방법으로 구원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름이 나중에 어떤 육체성, 인간성을 띨 때에 그것은 현재 인간이 안고 있는 이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이 문제 속에 그대로 들어오시는 것이거든요. 따라서 지금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계속 제가 이야기를 해보면 존재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실존으로 나가버리면 그 다음에 실존에서 멈추는게 아니고.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토마스 아퀴나스나 플라톤은 실존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안 썼냐하면 실존은 우연이라고 했어요. 우연. 철학적으로 이 용어를 알아야 되요. 실존은 우연이라는 거예요. 우연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잖아요. 죽으니까 잠시 있다 없어지는 안개잖아요. 그걸 철학에서 두 자로 줄여서 뭐라하면 우연이라고 합니다. 우연.
왜 그걸 철학자들은 우연이라고 하느냐. 왜 그렇게 이야기하냐 하면 사람이 신으로부터 어떤 본질을 받았으면 신으로부터 온 본질이기 때문에 이게 계속 가치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아는 철학에 의하면 신으로부터 받은 가치라고 하는 것은 신으로 받았기 때문에 신은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영원하지요. 그럼 신으로 받은 가치는 영원합니까? 영원하지 않습니까? 영원하잖아요. 그런데 영원한 게 죽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우연한 존재고 영원한 존재는 신에게 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신만 영원하지 인간은 우연한 거라는 말이죠.
그런데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민이 되는게 있었는데 뭐냐하면 인간이 만약에 우연이라면 인간이 우연이라는 사고방식이 스토아철학이거든요? 인간은 우연이니까 그냥 대충 살아라. 피타고라스학파나 디오게네스학파쪽도 마찬가지지만 그냥 대충 살아라 이러거든요. 우연이기 때문에. 우연이라는 것은 90세 살면 우연 아닌 것같죠? 그런데 천년, 만년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반딧불처럼 반짝하고 없어지죠. 순간적이죠. 토마스 아퀴나스는 본질주의자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어요. 만약 인간이 우연이라면, 인간이 진짜 우연한거냐, 인간 속에 영원한 게 없느냐. 영원한 것을 영혼으로 봤고 그 영혼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겁니다. 그런데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봤을 때 후배들한테 욕을 많이 얻어먹었다고요.
왜 욕을 먹었냐하면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신플라톤주의의 플로티누스의 사고방식이라 이렇게 본 겁니다. 만약에 영원한 것이 영혼이라면 우리는 창조론에 있어서 뭔가 많은 것을 양보를 해야 됩니다. 창조한 것이 아니고 섭리한 것이 되요. 골치 아프죠. 하나님께서 무에서 창조하신 것이 섭리한 게 된다고요. 이게 꿀홍삼이잖요. 이 탁자 위에 꿀홍삼쥬스가 있는데 제가 지금 이걸 부서버리면 없어지잖아요 그죠? 없는데. 여기있는 것을 저 쪽으로 옮기면 이것은 부서버린 것이 아니라 관리한 거죠. 관리했던 뭐했든 이 탁자위에 없잖아요. 없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없을 경우에 두가지 경우가 있단 말이죠. 하나는 관리, 섭리해서 다른 곳에 치워버렸다든지 아니면 아예 없앴던가 두가지란 말이죠. 이걸 철학에서는 구분시켜요. 소멸과 파멸로.
목사가 용어를 쓸 때 쉽게 써버리면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멸케 합니다’라고 한다면 교인이 100명같으면 100명 다 달라요. 소멸이냐 파멸이냐 자기 마음대로 해석 다 해버려요. 그런데 그 해석을 한 것에 대해서 오해마시기 바랍니다하고 명확하게 개념을 목사님이 설교할 때 짚어넣어야 될텐데 목사는 목사대로 설교하다보면 성경대로 했는데 내가 뭐 잘못인데 이러거든요. 교인들이 어떤 점에서 성경에 대해서 지금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을 해서 ‘여러분들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아마 성경과 다른 비복음적인 이런 생각들을 이미 철학적으로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런 면은 아니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이겁니다’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해야 될텐데 성경대로 했고 성경 본문대로 인용했는데 내가 뭐가 잘못인데 이래요.
그만큼 설교에 공부해야 되고 신경을 써야 돼요. 어떤 분은 설교를 들어보면 저 이야기를 들으면 세 가지 오해가 생긴다. 그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죠. 하아 저 이야기를 들어보면 네 가지의 다양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저 이야기를 들으면 저것은 아예 처음부터 오해할 수가 있다. 그런 것이 막 들려요. 들려가지고 저 대목에서는 분명히 이겁니다라고 확정짓고 그 다음을 넘어가줘야 되겠다. 이것은 제 설교를 들을 때 마찬가지예요.
이것할 때 왜 그 소리를 뺏을까. 이걸 집어넣어야 될텐데. 앞뒤를 바꿔야 되는데. 어제 오후에 돌아가면서 아침설교 때문에 많이 후회가 되었었어요. 사탄의 깊은 곳이라는 설명을 했는데 설교 다 끝나고 사탄의 깊은 곳이 뭡니까 딱 물으면 사탄의 깊은 곳이 뭔가 명확하게 이야기를 안 해준 것 같아요. 사탄의 깊은 곳은 하나님의 깊은 것과 대비되서 아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게 뭐냐하면 사탄의 깊은 곳이든 하나님의 깊은 곳이든 인간은 깊은 곳이기 때문에 깨낼 수가 없는데 깨낼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깨내는가. 그것은 바로 난데없는 어떤 이상한 행동들을 통해서 에스겔을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서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탄의 깊은 곳을 파헤치는 장면을 했어야 되는데 이걸 했어야 되는데 자꾸 바둑 복기하듯이 되새기거든요. 그래서 설교를 할 수 있는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니까. 우리 장로님도 목요일 강의하실 때 강의하시는 것이 좋죠? 강의를 해보면 반성이 되니까 수정이 가해지니까.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이 큰 행복이에요. 집사님도 자꾸 남들 붙들고 싫은 소리 해가며 전도하면 그것이 나중에 집에 오면 반성이 되고 그렇거든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금 고민이 되요. 어떻게 인간은 우연한 존재인데 우연한 존재에 어떻게 영원이 담기느냐.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걸 어떻게 해결했느냐 하면 이걸 시간론으로 해결했어요. 시간론으로. 인간은 유한하지만 시간은 유한하지 않다라고 하니까 후배 신학자들이 막 들고 나오거에요. ‘당신은 지금 영혼의 영원함과 인간의 신체의 우연함을 결합시켜서 뭐해서 잘 조화가 안 되니까 영원한 영혼 대신에 시간의 영원함을 가지고 시간은 영원하지만 인간은 시간 속의 하나의 점이다라는 식으로 그러면 토마스 아퀴나스 시간은 영원합니까’. 만약 시간이 영원하다면 이것은 무슨 사상이냐.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에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거예요. 그 시간이 영원하다는 사상이 오늘날 유명한 신학자 누굽니까.
오스카 쿨만이죠. 오스카 쿨만은 창세전에도 시간이 있었고 끝나도 시간이 있다는 거에요. 오스카 쿨만이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우연과 영원을 결합시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연과 영원과 결합된 그 지점에 뭐가 있다? 인간의 본질이 있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야기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실존이, 인간 자체가 있다고 본 거죠. 인간의 실체가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가치있다. 키에르케고르도 인간은 가치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인간은 가치있다. 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에 형상이 뭔데, 그것은 영원한 것. 그 형상이 구체적으로 뭔데,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형상 더하기 질료아닙니까. 그러니까 질료, 인간의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형상, 영원한 형상은 영혼이 되어서 영원토록 그 자립성은 영원히 존재한다, 인간의 자아성은 영원히 존재한다 이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현대 신학에서 깨져버립니다. 현대 신학의 경우에 인간의 실존에서는 뭐냐하면 인간은 우연한데. 자 어렵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우연한 데, 시간 때문에, 시간과 비교해서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주신 사건 때문에 우연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 주신 사건. 사건이 중요해서 인간이 중요하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만약 사건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건이 담기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중요한 의미을 지니며 영원성과 접촉이 된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하이데거와 불트만이에요.
그래서 불트만의 종말론을 가지고 실존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실존적 종말론이 뭐냐하면 그림으로 그리면 인간이 여기 있으면 수평적으로 시간따라가는게 아니고 위에게 수직으로 뭔가 순간적으로 사건이 임할 때 비로소 거기서 뭐가 발생되느냐하면 믿음이 발생되고 이 믿음의 사건을 일으킨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영원성에서 이죠. 영원에서 내뿜는 사건에 의해서 우리는 믿음이 생겼다라는 것이 불트만의 사상입니다. 이 불트만의 이런 사상으로 주위에서 뭐라고 평하는지 압니까. 불트만은 루터와 그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루터에서 바로 붕 날라온 사람이 불트만이다고 하죠. 루터의 십자가신학이 그냥 날아왔는데 불트만이 이런 사상을 하게 된 원인은 키에르케고르나 앞에서 있는 선배들과 하이데거의 사건철학의 영향을 결합해서 이러한 불트만의 신학이 정립된 거에요.
자 그렇다면 제가 이제까지 쭉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니까 여러분은 뭘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성경을 해석할 때 첫째, 명확하게 복음을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 이 복음이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 성경해석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만약 복음이 명확하게 안 드러나는데도 한다는 것은 중간에 뭐라고 희석시키느냐고 하면 성경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하고 희석시킵니다. 성경에 다양성이 있어버리면요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그것은 철학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플라톤의 철학은 존재, 본질, 실존 모두가 하나입니다. 하나. 결국은 모든 다양은 하나로 모야진다는 거지 이것은 약간의 철학적 사고, 논리적 사고만 갖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다 이야기한 거에요. 심지어 성경에도 나와요.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다양한 게 있다니요. 다양한 게 어디 있어요. 다양한 것은 반드시 순서를 지울건데. 다양한 건 없어요. 제가 십자가, 십자가의 피를 이야기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다양성이 있지 십자가 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제 이 본문에 들어가 봅시다. 주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다양성의 이름을 한꺼번에 원자폭탄가지고 다 터져버리고 그 터진 구멍난 그 구멍에 모든 이름을 다 부수어버리고, 그걸 빌립보서에서는 무릎을 꿇고라고 하는데 모든 이름을 무릎을 꿇리고 폭탄터뜨려서 큰 구덩이가 생기고 그 구덩이에 오직 하나만 남기는 거예요. 뭐냐. 주의 이름만 남기는 거예요. 이게 다양성입니까? 오직 단독 하나 주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이제 다양성이 아니다. 오직 유일성이에요. 존재의 유일성이 아니고 주의 이름의 유일성이에요. 사건의 유일성이라 하면 안 된니다. 사건은 계속해서 또 다른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사건의 유일성도 아니고 존재의 유일성도 아니고 무엇에 있느냐. 주의 이름.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주의 이름의 유일성. 이것이 진정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유일성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옥의 하나님] 37쪽 보시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요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하거든요?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지 아니하였다고 할 적에 이게 성경의 앞뒤하고 안 맞아요.
성경이 앞뒤가 맞는 게 없어요. 그 말이 옳아요. 창세기 4장 끝에 보면 아벨이 죽고 난 뒤에 아벨 대신 셋을 주죠. 셋을 주고 난 뒤 그 때 비로소 사람들은 무엇의 이름을 불렀다했어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있어요. 이미 창세기 4장에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어요.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계속 무슨 이름입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계속 나와요.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삭 잡으려 할 때 그 때 지명 이름이 뭡니까. 여호와이레 아닙니까. 여호와 나오잖아요. 나오는데 왜 다른 이름으로 안 줬다 이 말입니까. 왜 자료가 딴 자료라서 그래요? 그렇습니까. 성경에는 맞는게 없을 정도입니다. 따지고 보면 맞는게 없어요. 맞는 게 없다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해석가지고 해석할라고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해석해봐야 제대로 되지도 않고, 해석해봐야 사사로운 의견을 집어넣어봐야 혼란만 야기시키지.
여호와 이름이란 이름이라는 그 명칭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게 있어요. 여호와라는 호칭과 더불어 그 내용, 그 능력이 함께 병행해서 나타나야 됩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어떤 일을 실행에 옮긴다 할 때에 이것은 좀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이게 논리적으로 굉장히 어려운데. 그림으로 그립시다. 위에 2층이 있고 아래에 1층이 있죠. 아래층 사람이 여호와 이름을 불렀어요. 또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쪽 이렇게 했는데.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여호와 이런 이름을 갖고 있다. 가는 곳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았잖아요? 이렇게 했을 때 여기서 생각하는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는 그 층이 아래층이라면. 2층에서 여호와 이름이라고 이야기하는 층과 기름과 물처럼 층이 달라요. 다른 층이 있다는 이것은 뭐냐하면 언약이 어떤 언약이 투입되느냐에 따라서 그 언약은 그 때마다 그 때마다 층은 둘로 구분됩니다.
그 하나의 예를 들면 노아 때 방주 만들 때 사람들은 여호와를 알았어요. 하지만 노아가 방주라는 어떤 물체가 등장하면서 아는 그런 여호와는 2층에 해당된다면 기존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여호와는 1층에 해당되는 겁니다. 언약이라는 것은 새로운 창조력을 품고 계속 등장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무엘서를 보면 순종이 뭐보다 낫다 그러냐 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잖아요. 사울이라는 왕은 역시 율법대로 살라했는데. 새로운 언약이 투입되게 되면 기존의 언약과 새언약사이에 여기서 완전히 새언약에 추종할 수 있는 능력이,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능력이 1층에서는 안 나옵니다. 나올 수가 없어요. 2층에 있는 새로운 언약 계시에 의해서 1층에 있는 사람 중에서 진짜 여호와를 아는 사람만 따로 분류해서 구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홍해를 건넜다. 홍해를 건널 때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이죠.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요단강 건널 때 요단강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면 홍해를 가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던 1층 사람들은, 그대로 1층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은 요단강 건널 때 건너지를 못합니다. 왜? 이것은 자기가 알고 있는 여호와의 범주 바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이 더하기 빼기를 이야기하면서 시험칠 때 곱하기 나누기를 시험치는 거예요. 이것은 배운 적이 없는 시험을 해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는 그 전에 애기 밴 적이나 나아본 적이 없어요. 이것은 특히 말씀으로 얘기를 나아본 적이 없다고요. 돌발적인 사태에요. 돌발적인 사태.
여호와 이름은. 제가 왜 이래 얘기하느냐 하면. 목사님 여호와 이름이 뭡니까 할 때 제가 하는 말은 하나 밖에 없어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말이죠. 여호와 이름이라고 딱 규정짓기는 커넝 여호와의 이름이 뭐냐고 규정지을려는 그 인간을 도리어 그래서는 안된다고 공박하는 그런 능력이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러한 논리가 여러 군데 많이 나타나요. 부자청년하고 예수님하고 만날 때, ‘선한 선생이여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습니까’할 때 그 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영생은 이렇게 얻는다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뭐부터 시비를 걸어요. 왜 나보고 선하다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나보고 선하다하느냐하는 그런 물음을 왜 던졌는지를 몰라요. 지금 부자 청년은 문제가 뭐냐하면 현재 1층에 있으면서 1층에 있는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2층에 옮겨갈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1층의 이런 개념을, 십계명 개념, 선한 개념, 영생의 개념이 있다는 말은 이미 자기화된 거예요. 이미 자기한테 예속된 여호와 이름이예요.
그런데 주님의 여호와는 항상 손에 잡히는 게 아니고 도리어 인간의 손에서 빠져나오서 도리어 외부에서 그 인간을 장악하시는 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가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인도해 나가시기 때문에 이것이 여호와다, 이것이 여호와 뜻이다라고 한다면 자꾸 미끌어져요. ‘얘, 그게 다가 아니야, 그것 가지고는 모지란다, 계속 내가 널 인도해야 돼’. 새로운 사건들을 통해서 또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당황하는 순간 진짜 성도같으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십자가만 바라봅니다. 내가 바라볼 건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날 죽이겠습니다. 난 주님앞에서 늘 부서져야 됩니다. 늘 죽어야 됩니다.’라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수어야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를 만들어서 인도하는 거에요.
그냥 인도하시는 게 아니고. 나를 계속 부수는 가운데 있는데 그 부수는 작업이 뭐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의 특징은 인간의 이름을 죽인다. 그 근거를 대라고 물으면 그 근거는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완성되거든요? 지금 요단강에서 완성되는 게 아니고 그 뒤 여리고성에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계속 가요, 계속가다가 십자가에서 다 이뤄요. 다 이룬 그것을 근거로 해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이름을 죽이는 거예요. 계속 우리의 이름을 죽인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늘상 주님의 생명에 의해 죽음에 넘기움을 당하죠.
어제 오후에 제가 중요한 포인트를 이야기한 게 이겁니다. 십자가을 바라볼 때 불신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자기에게 도움되는 십자가로 바라보지만, 신자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뭐냐하면 심판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심판당하신 예수님이에요.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이에요. 심판을 통하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가 뭡니까. 심판당하신 주님의 십자가. 이렇게 해야 정답입니다. 심판을 당하는 거예요. 심판. 날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날 구원이 앞서면 안되고 그냥 심판을 당하시는 거예요. 심판당했기 때문에 그 심판당한 십자가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한테 하나님의 이름을 들이대었다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우리 이름을 심판하시는 주의 이름이예요. 심판하시는 주님의 이름이란 말이죠. 심판하시는 이름이, 그 분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이에요.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는 거예요. 그리고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내고. 여호와의 이름이 뭐냐라고 규정하는 그것마저 죽어라 이말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여 이렇게 하시지요할 때 그것마저 죽이는 거에요.
그래서 현대철학자들은 이것은 옛날 고대철학자들이 존재를 규정하는 이 철학가지고는 이러한 사건을 해명할 수 없다해서 존재의 형이상학 철학을 다 날려보낸 겁니다. 과거의 철학을 다 날려보냈는 데 왜냐하면 존재로에서부터 존재로 규정되는 건데 이것은 날마다 돌발적이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등장하는 이 사건 하나하나를 처리를 하지 못한다거죠. 그런데 그것이 성령의 십자가에서 온다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또 나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들뢰즈는 자기 욕망으로부터 온다. 인간의 모든 사건은 욕망에서부터 나온, 욕망에서부터 사건화된다. 사건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자기는 사건이 왜 터지는지 모르겠다. 자기는 광야에 비오는 이유를 모르겠고,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사건화, 다른 말로 하면 이걸 의미화라고 하죠. 그건 의미있다, 의미없다를 결정하는 것은 나의 욕망에서 나온다 이렇게 본 겁니다. 이게 들뢰즈철학입니다. 여러분 어제 보신 분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나와의 축구에서 3대 1로 졌잖아요. 졌을 때 호주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무 사건, 아무 의미없어요. 그런데 3대 1로 지는 것이 우리는 속상하다고 느끼느냐. 이것은 나의 욕망 속이 이미 이 사건과 이 사건의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내가 부여한 욕망을 그대로 하라는 겁니다.
이 철학을 그대로 신학에 그대로 가져오면 하나님께서 왜 사건을 일으킬까. 하나님 의 자기에게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에 대해서 하나 하나 의미를 주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킨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 철학이냐 하면 놀랍게도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에 나와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창조가 강하지 않고 뭐가 강하냐 하면 섭리가 강해요.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하느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 의미를 두느냐하는 이 점이 강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욕망이 있는데. 이렇게 되버리면 보세요. 하나님께 욕망이 있다했죠? 욕망은 어디에 속하느냐하면 이것은 본질에 속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본성인데. 하나님의 이 본성과 실존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를 논문으로 써라고 이야기한다면 신의 품성에 있어서, 신의 품성 개념에 있어서 신이 갖고 있던 욕망이라 하는 이것, 어거스틴은 이것을 뭐라했느냐 하면 신의 의지와 그 의지로 인한 실존은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 이것은 유명한 논문 테마가 되고 이런 논문이 수 백개 있어요. 이게 성령의 은사론과 관련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썼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 관한 글을 보면 이게 나와요. 신은 감추어져 있어요. 없어요. 스피노자의 이야기입니다. 신은 이름을 통해서 보는데 이름은 무얼 품고 있느냐하면 하나님의 본성, 속성을 품고 있단 말이죠. 인간의 의지. 이 본성이 양태를 이루면 이것이 실존이 되고 이것이 하나의 개별자가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자 여러분 이 스피노자의 말이 맞습니까. 신은 보이지 않고 이름만 등장하고 그 이름은 어떤 이름이냐 자기는 신이 갖고 있는 속성을, 능력대로 이루어지는 속성인데 이 속성에 의해서 여러 가지 양태 또는 양상을 보여주면, 양상 하나하나들이 저와 여러분이고 개이고 소이고 이런 실존들이다라고 스피노자가 주장했어요. 이걸 가지고 분여라고 하지요. 분배. 신의 속성을 분배하는 거죠.
왜 신으로부터 출발했냐 물으면 만약에 개별자로부터 출발해버리면. 신은 하나잖아요. 어떤 것도 신으로 다 하나로 모이잖아요. 신은 하나을 말합니다. 신이 둘 되면 안되지요? 스피노자는 유대인입니다. 유대교인이라서 신이 다신론이 아니에요. 어떻게든 하나로 모야져야 되요. 하나의 유일신으로 모아지기 때문에 개별자로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이렇게 되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이걸 가지고 범신론이라고 하지 않고 이걸 내재적 신이라고 합니다. 자 여기서 뭐가 약화되었습니까? 이 스피노자의 논리에서 뭐가 약해졌습니까? 창조. 창조가 약해졌죠 그죠? 그러니까 이 개별자는 우연자가 아니고 뭐가 되어버려요. 우연이 아니고 필연적이 되요. 필연적이 되고 죽고 난 뒤에는 신에게 합류하고. 신으로부터 나와서 신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로마서 11장 33절같애. 이것이 내재적 신이라는 겁니다.
그처럼 옛날 중세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성경 하나하나 그냥 대충 넘어간 게 아니고 진지하게 묻고 또 묻고 또 묻고 하는 거예요. 정확과 정확성을. 진리와 진리를 위해서. 더 깊은 진리. 더 명확한 진리를 위해서. 더 확실한 걸 위해서. 그래서 오늘날 목사들이 나는 철학공부 안한다고 하는 것은 이건 너무 성의없는거예요. 그들이 하나의 진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고민하고 애쓰고 어떤 사물하나 무심히 보지 않고 다 연관시켜가지고 모든 사건 다 꺼집어내어서 자기가 생각하는 그 진리체계에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느냐 수정해야 될거냐 말아야 될거냐를 늘 고민하면서 깊은 진리를 알려고 그렇게 애를 썼잖아요.
참 옛날 사람 믿음있니 없니 욕을 해도 그만큼 요즘처럼 교인들이 드문드문 있는 게 아니고 그 당시에는요. 그 당시는 전 백성이 다 교인이에요. 그 당시 목사나 이런 사람들이 신학에 약간 부족한 게 있으면 대번에 저쪽에서 시비걸고 나온다고요. 지금은 이런 신학문제를 이야기하면 인터넷에 써봐도 조회수도 없어요. 왜? 아예 말씀에 관심이 없어요. 전 나라가 그래요. 요즘 완전히 이런 복음이야기하면 인간문화재라고 합니다. 아무도 없어요. 실체, 본체 이거 아무 관심없어요. 철학도 그런 거 공부 안합니다 요즘은. 영화평론해요. 요새 철학은 영화 평론한다고요. ‘친절한 금자씨’의 의미가 뭔가 이런다고요.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을 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여호와라. 나는 다른 이름으로 한 적이 없다. 이 말은 새롭게 여호와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너희들이 아직도 알지 못하는, 1층에서 노는 것 말고 새롭게 전개될 뭔가 더 큰 깊은 여호와의 이름이 ‘아 여호와 이름이 이랬었든가, 하나님이 이런 분이었던가’ 새삼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데 그게 뭐냐. 그게 그 전에 것과 다른 점은 뭐냐하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루는, 언약과 처음으로 연결된 여호와 이름은 모세가 처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이름이란 뭐냐. 비로소 이 지점에 와서 언약달성과 관련되요. 언약달성.
그 전에 여호와라는 것은 인간이 부르는 거예요. 그냥 불투명해요. 아브라함이 그냥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 길을 그렇게 가는 거예요. 언약 맹세 같은 게 없어요. 숨어서 했지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지요. 그냥 자기는 자기대로 가버리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고 이랬는데 여호와 이름이라는 언약과 관련되면서 이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의해서 계속된 언약의 내용을 이제는 실천에 옮길 때이다. 실천할 때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그 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이야기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 당시에 여호와 하나님말고 그 당시에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 신들도 전부 다 각자 전능하심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느닷없이 전능하신 분이 아니고 바로 각자 사람마다 전능하심의 기준을 따로 갖고 있을 때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나름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따로 갖고 있었던 거예요. 이삭은 이삭대로 야곱은 야곱대로. 전능하신 하나님.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전능하시다는 이 형용사로 인하여 진짜 하나님의 실체가 숨겨져 있습니다. 감추어져 있고 모호하게 되어있었어요. ‘너 이웃사람 이름이 뭔데?’라고 물으니까 ‘훌륭한 이웃’. ‘그래 훌륭한 건 아는데 훌륭한 그 이웃의 이름이 뭔데? 이름을 뭐라고 하던데? 고씨든가 김씨든가 누구든데’. ‘친절하신 이웃’. ‘친절한 것은 아느데, 그 이름이 뭐라는데?’. ‘놀라우신 이웃’.‘그 놀라우신 이웃의 이름이 뭐래, 이름이 뭐래?’. ‘몰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 이제는 아브라함 개인적이나 이삭 개인적이 아니라 이젠 이스라엘 전체, 세상을 향하여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일개 신에, 다신론의 일개 신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진짜 전능한 이름으로 온 애굽과 바로왕과 이스라엘 양쪽에다 전부 다 자신의 여호와 이름의 여호와 이름됨이 드러나는 거죠. 그 전까지는 자기 택한 백성에게만 하나의 다른 여러 가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부로서의 전능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은 알지요. 이삭도 야곱도 알지만 그것이 대외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잖아요. 그걸 가지고 신학자들은 옛날 신은 여호와는, 모세의 여호와와 아브라함의 여호와의 차이점이 뭐냐. 아브라함의 여호와는 일개 가족, 종족의 여호와였고 이쪽의 모세의 여호와는 국가적으로 여호와다. 그렇게 이야기를 구분하는 겁니다. 신학자들은.
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저는 일개 종족은 같은 개인적인 혈통이잖아요. 그때는 다른 종족까지 들여다보지 않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에만 신경쓰는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남들보기에 항상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보수주의쪽 학자들은 그렇게 설명하는 게 아니고 그들은 여호와라고 안 불렀대요. 안 부르고 그냥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다만 후대 모세가 창세기를 써면서 그 때 여호와의 이름도 모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여라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여호와니까 나중에 그 여호와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 썼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비로소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렀더라’ 이것이 맞는데 모세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호와이니까 여호와를 집어넣어서 ‘그 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보수주의 학자들은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자유주의학자들은 그게 아니고 자료가 여러 가지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자료설로 이야기합니다. 보수주의학자들은 자료설을 거부하기 위해서 미리 집어넣었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저는 양 쪽의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라는 이름의 호칭이 아니라 그 실체가 범국가적으로 다 드러나는 것은 그것은 모세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왜 그렇게 주장하냐. 근거가 뭐냐. 그게 언약과 관련되어있기 그래요. 아브라함언약은 안 되느냐. 아브라함 언약 때는 그 언약이 아브라함언약이 정립될 수 있는 외부 세계에 대해서 아직 관여를 안했어요. 아브라함 언약이 적용되어야 될 외부세계에 대해서 아직까지 관여를 안했다고요. 이삭의 언약도 어때요. 야곱 외에 다른 민족에게 가할 파장은 그때까지는 아직 활동되지 안했다 이말입니다. 분명히 약속은 했지요. 에서는 한 국가가 되고 야곱도 한 국가가 된다라고 예언은 했지만 이 양쪽 다에 전능하신 여호와라고 하는 것은 모세 때에 비로소 공식적으로 펼쳐진단 말이죠.
그리고 보수주의학자들처럼 여호와 이름을 일체 몰랐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만 한다면 아브라함이 지었던 지명이 ‘여호와 이레’가 안 되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레’ 이렇게 되어야 된단 말이죠. 그게 호칭 자체에 중요성을 띠고 보수주의 쪽에서 그렇게 지금 이야기하잖아요. 그렇다면 호칭 자체가 중요하다면 그 지명이 ‘전능하신 하나님 이레’라고 호칭 자체를 그들이 그렇게 불렀던가하는 문제가 있어요. 의미말고 호칭을 ‘여호와 이레’가 아니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타나 준비하신 장소’ 라고 이렇게 했을까요. 그게 약간의 무리가 있지 않을까. 또 전에 나오는 여호와 이름을 전부 다 바꾸려고 하면 이 작업이 보통 작업이 아니죠. 그래서 지금 언약과 연관해서 나타났다.
언약과 연관해서 나타났을 때 이것은 이사야 9장에 보면 여호와 이름의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여호와의 열심이라고 하는데. 여호와의 열심. 목회자들의 제일 큰 시험거리는 뭐냐하면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연구하고 심방하고 노력한 대가만큼 교회가 활성화되지 않는다는 여기에 제일 큰 시험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교회가 복음에든지 말씀에 활성화되지 않을 때 복음이 좋아요 복음이 좋아요라고 활성화되지 않고 아침부터 교회에 찡그려서 와 가지고 끝까지 찡그리고 집에 가는 거예요. 그럼 누가 열이 나는가. 목사만 열내는 거예요. 열낼 수밖에 없죠. 찡그린 거 다 깨울려고 하니까 열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럴때 제일 큰 시험이 뭐냐하면 바로 주의 이름이 지금 주님이 부지런히 하고 있는데 주님이 나한테 허락도 안 받고 건져낼 자 건져내고 제거할 자 제거 다 하시는데 이 목사가 믿음이 없어가지고 내가 열심히 일하는 내 기대치만큼 거꾸로 교회가 꽉 죽어있고 전부 다 답답하고 성경책 가져오지도 않고 와 가지고 뒤에 있는 성경책부터 다 챙기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교회놓고 다니고. 집에서 성경 안본다는 이말이거든요. 가르치지 마라, 당신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나한테 가르치지 마라 이런 뜻이거든요. 그리곤 떡 앉아가지고 휴대폰 꺼내고 있다가 전화받으러 나가고 도대체 정신을 어디에 파는지 설교흐름 다 깨지게 만들고 이런다고요. 그럴때 주여 토요일 밤새가면서 설교준비했는데, 이래가고 설교 30분넘어가면 저쪽 할머니부터 졸기 시작하죠. 여름에는. 특히 촌교회. 장로님 기도할 때 다 자버려요. 자다가 축도할 때 일어나잖아요. 도대체 내가 그 동안 열심히 심령을 깨우소서, 영적 눈을 떠게 해주소서 하는 것도 소용없고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하면 그 목사가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들 주께서 열심을 다 해서 천국에서 제거하는 작업중이에요. 주님께서 제거하는 것도 주의 열심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목회자들이 몰라요. 탈락을 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열심인지, 공들여야 탈락되는 거예요. 그것도 모르고 자기 교인 숫자가 많아야 자기 보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 이름입니다. 이근호라는 이름을 꺾어버리고 누구 아무개 목회자의 이름을 부서버리고 죽여버리는 지금도 살아계신 여호와 이름의 특징입니다.
그걸 모세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애굽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모세는 안 할려고 그랬습니다. 안 할려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에게는 자기 일이 아니었거든요. 모세는 자기 딴에 열심히 할려고 했어요. 애굽사람을 쳐죽이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의 자존심과 위신을 고려해서 어이 우리같은 형제끼리 우리 싸워서 되겠느냐하고 서로 화목시킬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말짱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삐쳐서 도망갔습니다. 도망가가지고 어디갔는냐. 양무리치는데 가서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모든 계획이고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그야말로 우연자로서 안개로서 그냥 있는거예요. 언약이고 뭐고. 그런데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찾아와서 하는 말이, 그 말이 평소에 모세가 생각하는 그것과 전혀 달라요. 그래서 모세가 그 이야기에 또 삐칩니다. 저는 말을 못합니다. 말을 못하기 때문에 딴 사람보내소서 저는 안 갈랍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무신론자가 아니면 신자가 아니라 그랬어요. 한번이라도 무신론자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신자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신을 아는 사람이 유신론자이잖아요. 신을 아는 유신론자가 성도가 된 지금. 왜냐하면 성경에 보면 항상 유신론자는 하나님께서 뭘로 만들어놓고? 무신론자로 만들어놓고 일단 무신론자가 된 상태에서 그 다음에 하나님 자기 일에다가 집어넣어서 성도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키에르케고르가 루터에서 붕 뛰었다고 할 수 있죠. 성경 전체가 그래요. 성경 전체가 다 그래요. 모세는 하나님 일에 항상 틈만 나면 발을 빼려했습니다. 광야에서 조금이라도 말썽이 있으면 모세가 뭐라는 줄 압니까? 제가 어떻게 제가 어떤 능력이 있다고 이 많은 백성을 저에게 맞겼습니까? 저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차라리 저를 죽이소서. 이렇게 맨날 삐치는 거예요. 그리고 반석을 가리키라고 했는데 성질나서 반석을 두 번 쳐버리잖요. 그리고 모든 불평은 자기한테 다 쏠리고.
이게 욥에도 나와요. 욥기에도 앞뒤가 안맞는게 뭐냐하면 분명히 마귀가 이야기했습니다. 욥이 원망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욥은 결코 원망안한다 했잖아요. 욥기 보세요. 원망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했잖아요. 욥기 가지고 새벽기도 강해를 하면 중간에 가면 당황스럽기 짝이 없죠. 분명히 초반에 욥은 절대로 원망 안합니다해놓고 그 본문에 욥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렇게 나오니까 성경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무신론자를 만드는데 왜 인간을 그렇게 만드느냐하면 인간 속에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이름을 무신론으로 만들어줘야 여기에 하나님의 이름의, 맹세의 의한, 언약에 의한 창조가 여기에 발현됩니다.
이미 죽은 자, 사도 바울처럼 사울일 때처럼 이미 핍박하는 자, 예수님을 공박하는 자, 죽은 이름이 되어야 거기에 순수하게 여호와 이름만을 높일 수 있는 그러한 그릇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귀한 그릇, 천한 그릇 나오는 거예요. 그릇이라는 것은 담는 거예요. 담는 기능입니다. 그릇이라는 것은 자기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는 대로 담는 그릇이에요. 하나님의 이름을 채운다는 것은 그 이름 앞에 우리는 철저하게 무신론자가 되어야 되요. 안 할려고 했는데 왜 자꾸 따라옵니까 이렇게 되어야 되요.
바로 그 이름, 주의 이름에 의해서 앞으로 성경해석을 다시 쭉 해봅시다. 그래보면 여호와 이름이 투입되는 곳에 남들 치기 전에 왜 자기 백성을 치고 다른 이방나라인 아람이나 바벨론치기 전에 왜 자기 나라 유다 이스라엘을 부수는가. 왜 심판이 하나님의 집부터 심판이 개시되는가. 그것은 전부 다 주의 이름만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 이름, 인간의 이름을 부수는 그 작업이 지금도 계속 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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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식 조작을 통한 구원 시도
시간이란, 인간이 현재를 버티는 힘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현재의 힘으로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이지 과거의 힘으로 과거를 기억해 내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 영혼에 의한 '자기 확장' 시도로서 등장되는 의식이 시간 의식이다. 따라서 자기가 죽는다면 시간도 끝난다.
단지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자기 죽음 이후까지 세계를 확장시켜서 죽어 가는 자기 자신에게 영원한 의미를 덧입힐 수 있는 사전 작업을 미리 해놓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식이다. 역사란 언제는 회고적으로 서술 할 뿐, 일어나는 일을 서술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역사'라는 이름의 구원의 방주를 만들어놓고서 자기 생명을 거기에 위탁한 채 안심하고 숨을 거두고자 한다.
이처럼 마음속에 들어있는 영혼의 확장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그동안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자아를 찾기 위함이다. 이것이 '역사 만들기'이다. 그러니 '허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허구는 나름대로 이야기를 낳는다. 즉 역사란 아예 없고 역사 이야기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허구적 서술이 어떤 시간요소를 차용하여 자기 구원을 위한 이야기를 꾸며내는가? 의미를 공유하기 위해서 인간들은 연속성, 즉 '시간성'을 도입했다. 시간을 어떻게 규모 있게 농축시키고 확대시키느냐에 따라 역사 안에서 설득력 있는 의미를 갖게 했다.
간단한 예로 시계의 소리를 들어본다. 시계가 어떤 소리를 내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이 한결같이 '똑딱' 소리를 낸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 의성어는 시계로 하여금 인간의 언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는 허구적 표현이다. '똑-딱'에는 두 가지의 허구성 차이를 부여된 언어가 등장하는데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인간 자신이다.
앞 뒤 소리가 달리 들린다는 것이다. 틀리다는 것이다. '똑'이 '딱'과 서로 틀린 글자를 사용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소리로 들리게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똑'과 '딱' 사이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채 흐르고 있는 중립적 시간 의식을 상정할 경우뿐이다. 이것을 '지속'이라고 부른다면 이 지속이 시간 체계로서 간주될 때만 처음과 끝소리가 감지될 수 있다.
이 점은 '똑-딱'처럼 동일하게 반복되는 리듬 구조를 청취하는 피실험자가 그 구조 내에 간격은 정확하게 재생할 수 있지만, 리듬군 단위 사이, 즉 '딱',과 '똑' 사이의 간격은 그것이 일정한 경우에도 자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와 있다.
똑과 딱 사이의 구별은 단순히 음성적 차이에 기인하고 있는 아니다는 이야기이다. 음성적 차이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대상을 받아들이면서 공간적ㆍ시간적 인식으로서 형태를 조성하고 리듬을 타는 듯한 환각에 사로잡힌다.
두 번째 소리를 '딱'이라고 구별해 부른다는 사실은 첫 번째 '딱'을 '똑'으로 염두에 둔 상태에서 시간적 구조를 즉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을 의미 있는 지속으로 채운다. 이 시계의 '똑-딱'을 우리는 시계가 나타내는 플롯(줄거리 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플롯은 시간에 형식을 부여함으로써 시간을 인간화시킨 구성물의 한 모델이 된다. 시간은 이처럼 인간화된 모습으로 등장한다. 거시적 플롯에 따라 종말론을 이해할 때도 이 가장 기본적인 '똑-딱'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똑'은 초라한 기원이라면 '딱'은 그 초라함과 같은 양으로 상응하는 미약한 최후이다.
그런데 줄거리 구성이 '똑-딱'보다 훨씬 복잡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 가령 1000페이지의 소설을 가정해 보자. 그것은 분명 이른바 우리의 '시간적 지평' 범위 내에 있지 않으므로 경험을 체계화하여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허구적 장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장치들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관계된 소리 중 두 번째의 '딱'과 같은 종류이겠지만, 분명히 보다 더 효과적이고 정교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이 장치들은 '똑'과 '딱' 사이의 간격이 도중에 사라지려는 성향을 물리쳐야 한다.
그리고 '똑'에 이어지는 간격 내에서 '딱'이 이어지리라는 생생한 기대와 함께 '딱'이 아무리 늦게 올지라도 그 안에 발생하는 각가지 일들은 '딱'이 확실히 뒤따를 것인 양 발생한다는 의식과 관계성을 치밀하게 유지시켜야 한다.
그러한 모든 플롯(구성)은 결말이 모든 지속에 부여해줄 어떤 의미를 전제하고 또 필요로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 간격에서 단순한 시간성, '딱-똑' 사이의 공허감, 즉 인간적 흥미와는 무관한 연속성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간격은 하나의 의미 있는 시각(때), 즉 시작과 종말 사이에 위치한 카이로스(kairos)가 된다. 그것은 심리학자들이 다루는 것보다 훨씬 큰 규모에서 그들이 '시간적 통합'이라고 부르며 현재에 대한 지각과 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의 기대를 하나의 공통된 구성에 의해 함께 묶는 방식이다.
이 구성에 의해서 단순히 연속적이라고 간주된 것이 이제는 과거가 과거로서, 미래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된다. '크로노스(chronos)'이었던 것이 '카이로스'(의미 있는 특정한 한 때)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둘은 구별되나?
보통 신약 성경 사도행전 1:7에서 나타난 용어의 구분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으려한다. "크로노스(때)와 카이로스(시)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 아니요" 이 구절에 나오는 시간에 관한 두 표현에 대해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의 시간'은 강력하게 두 구별을 극으로 몰아가고 있다. 즉 크로노스가 시간의 경과를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정해진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의도적으로 이 의미에 차별을 두고 특히 지정된 시점인 카이로스을 가지고 친히 '구속사의 체제' 형성에 나셨다는 것이다.(살전 5;1/마 26:18/요 7:6/벧전 1:5)
틸리히는 '카이로스'를 특별하게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위기의 순간'이란 의미로, 또는 모호하게 '시간의 운명'이란 의미로 쓴다. 어떤 경우든지 그는 그 말을 '삶의 기반이 발 밑에서 흔들리는' 시대인 현대 특유의 삶의 의식과 강력히 결부시키고 있다.
그런 견해는 현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줄곧 되풀이되는데, 그 한 예가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으로서, 이것은 죽음, 고통, 죄악 등의 개인적 위기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역사적으로 결정짓는 자료들과는 관련된다. 반면에 쿨만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를 전통적, 성서적 의미로 쓰고자 한다.
즉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 또는 '기다리는 시간' - 묵시록에 의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의미가 충만한, 즉 종말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의미로 차 있는 구원의 시점이며 구원의 때이다.
아주 극단적인 구별이다. 그리스도는 과거를 새로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새롭게 완성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말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고 종말과 관련된 과거에서 초시간적 의의를 갖는 역사적 시점들, 곧 '카이로이'가 생겨난다. 그러한 신적인 플롯(줄거리)은 종말과 관계되는 카이로이의 패턴이다.
희랍인들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도 이러한 대립항을 결하고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인에게는 크로노스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고 따라서 '다음에서 다음으로 지겹게 이어질 뿐인' 시간과 '카이로스'와 같은 집약된 시간 사이의 대조가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시대의식(현대인은 여러 시대aiones가 겹쳐진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다)과 다른 성격의 시간들 사이의 현대적 구별, 즉 신의 시간(kairos)의 도래, 신의 시간의 완성(kairos-마가복음 1장 15절).
여러 시기의 징조(마태복음 16:2-3) 등을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대립되는 것으로서 보는 구별에 기초가 잡힌 것은 신약 성서에서였다. 여기에서는 완성의 관념이 필수적인바, 카이로스는 과거를 변화시키고, 구약성서의 예표와 예언의 타당성을 확인시키고, 종말뿐만 아니라 인류의 태초의 기원과의 일치도 시도한다.
그러므로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분은 현대의 일부 신학자들의 예표론적 관심과 상관성이 깊으며, 예표들의 매력은 궁극적으로, 한가운데 처한 자신의 위치를 지각하고 시작과 종말을 조화시키는 의미 있는 시점들을 소망하는 인간에게 어떠한 도움을 주느냐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제임스 바 교수 같은 자는 모두 성서의 언어를 잘못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크로노스-카이로스의 구별은 사실 신약성서의 언어에는 없는 것이다. 마가복음 1:15에는 "때가 찼고"라고 되어 있지만, 갈라디아서 4:4에 '때가 참'이라고 번역된 문구는 'pleroma tou chronou'이다.
사도행전 1:7과 데살로니가 전서 5:1에서는 hoi chronoi kai hoi kairoi라고 씌어 있듯이, 두 용어는 변별되어 있지 않고 흠정역은 이 구절을 '때와 기한'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서도 앞서 언급한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보다는 흘러가는 시간에 훨씬 큰 관심을 보여준다고 바 교수는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는 대조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서로 바꿔 쓸 수가 있다. 아마도 카이로스의 의미는 '결정적인 시간'에 가까운 것 같고 크로노스는 보다 양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바 교수에 의하면 성경에서 '카이로스 개념'을 얻을 수 없으며 비록 카이로이를 '결정적인 시점들'로 이해한다할지라도 그 뜻이 성경에서만 고정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저서,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역설하기를 예수님마저 '旣存'(이미)과 '未存'(아직) 사이에서 긴장을 나타내는 종말론을 펼치시면서 구속사의 존재를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을 보여주는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자체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이 없으시지만 하나님의 활동성으로 볼 때 '미완'의 부분이 미래에 남아 있고 이것을 한 줄로 이어 보면 분명 구원의 역사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주님의 활동을 보게 되면 아직 미래에 펼칠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내용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점에 대해서 그도 인정했다. 오스카 쿨만이 내세우는 구속사 이론에 의하면 이미와 아직 아니는 병렬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고 그것도 일직선을 이룬다고 한다. 또한 그의 또 다른 저서, '그리스도와 시간'에서는 그는 초대 기독교도의 신앙과 사상은 공간적인 장소로서 이 세상이나 저 세상(혹은 차안이나 피안)을 대립시키는 데서 출발하지 않고, 오히려 이미와 지금 또는 그 때라고 하는 시간 구별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공간적인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시간의 과정에 완전히 속해 있어 근본적인 것은 공간적인 대립이 아니라 시간의 구별이다 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것도 또한 시간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정한 시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과연 오스카 쿨만과 같이 시간을 공간적인 구원관과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의식을 공유하고 계신 분이시고 모든 말씀도 이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시간 의식 구조는 본능적으로 공간적 그림을 구성하며 이해하게 되어 있는데 시간을 흐르는 강물처럼 일직선적 도상(圖上)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미 공간적 사고의 연장이다. 그런데 오스카 쿨만은 이 직선적 시간인식을 가지고 모든 입체적 공간적 의식 형태를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즉 시간 의식 이전에 공간 의식이 우선되어 있다는 말인데, 공간이란 실은 점들의 집합이고, 시간은 공간의 부정(否定)이며, 공간은 점의 부정이기에, 시간은 점의 부정에 대한 부정이다. 바꿔 말해 점성적인 속성이 곧 시간이다 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란 점으로 나타나는 '지금'의 연속이 되어 버린다. 그런데 뱀이 스스로 자기 꼬리를 먹어 들어가서 결국 자기 모습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일은 불합리하다. 그런데 인간의 합리는 자기 모습이 결코 살아지지 않는 한도에서는 합리이다. 시간관도 이 바탕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있어 주님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아들이라는 존재성에 있었지 결코 '이미', '아직'이라는 시간관 조작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요 10:33)
시간을 일직선상으로 그려놓으면 이미란 아직을 직선 상에서 후차 지점에 두고 있지 않는 경우를 뜻하고, 아직 아니는 이미를 일직선상 앞에 두지 않았을 때나 성립한다. 수학에서 직선이란 점들의 순차적 계열에 따른다. 따라서 아직, 아직, …의 이어짐으로 표현된 일직선뿐이든지 아니면 이미 라는 한 점으로 직선을 마감해야 해야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직선 위에 묵시 세계라는 명목으로 직사각형과 같은 면적이 있는 도형을 얹어 그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묵시는 시간과 점으로만 표현 할 수 있지 면적이 있는 공간으로 표현하면 묵시란, 기껏 '많은 시간들의 연속'이라는 개념으로 왜곡되어 정의(定議)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스카 쿨만의 이와 같은 무리수는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말씀의 완성을 곡해했기 때문이다.
즉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긴장이 있다고 했는데, 시간 자체가 긴장을 갖는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질을 느끼는 주체자들이 갖는 긴장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긴장감이나 사도나 초대 교회 성도들의 긴장감은 '아직 아니'라는 시간상 미착성(未着性)으로 인해 아직도 손도 못된 미해결 문제의 존속으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아니라 '이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이 어두움의 세계의 속성으로 긴장했고 또 고난을 받았다.
오스카 쿨만처럼 그저 다가오는 시간에다 모든 고민거리를 위탁해서 넘겨버리는 식으로 해결 지우려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미 완성되었기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대내외적이고 심적인 악의 유혹과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그들은 구원의 '아직 아니'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중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긴장이 아니라 기쁨 가운데 있었다. 성령이 주는 기쁨이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4-7)
이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주님이 지키겠다는 데 더 이상 아직 아니가 무의미하다. 주님이 아니 지켜 주겠다는 것인가? 성도들은 예수님이 모든 활동을 하시던 이미 말씀이 성취된 가운데서의 활동임을 믿었다. 따라서 그들은 지구가 아직 파장을 맞이하고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끄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아직 구원이 덜 되어서 뭔가 주님께서 일을 더 하시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저 착수 만하고 마감은 아직도 되지 않은 미완성적 구원관은 예수님이나 사도에게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사고이다. 실제가 현상으로 드러날 때, 그 현상은 실제적 차원의 내용에 의해서 평가받지 다른 범주적 평가를 허용할 수 없다.
이미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이미'의 담긴 내용대로 '이미'의 고유 가치만을 드러내 줄뿐이다. 예수님의 이미는 '아직'과 대비되는 '이미'가 아니라 '이미'의 성과 자체가 아직도 시간 의식에 기대를 거는 그 '이미'를 공박하는 기능을 수행하자고 나타난 '이미'다.
오스카 쿨만 교수의 구속사 이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을 절대적 시간에 예속된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에 인식하고 있다는데 있다. 즉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진 것이 아니라 구속사 선상의 한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이 다른 시간의 사건들과 차별되게 대조된다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시점에 있다는 것 인해 비로소 그리스도 중심성이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나오는 십자가 사건이 아니라 그 십자가 사건이 전 구속사의 중심점 작용을 했다는 것에 준해서만 그리스도 중심성을 인정하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유발되는 일들이 아니라 일단 십자가 사건이라는 역사의 '중심점 만들기'를 위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 중심을 보여주자고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역사의 중심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변모되고 만 것이다.
세상 만사가 그리스도 중심이라는 것은 옳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을 '시간의 중심' 혹은 '구속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을 수 합당한 사유의 연결 고리가 제시될 수 있는가? '시간의 중심'이라는 것이 과연 개념적으로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표현이다.
오스카 쿨만의 주장대로 구속사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흘러간다면서 어찌 중심이라는 것이 따로 규정될 수 있단 말인가? 단절된 막대기 같으면 무게의 중심점이나 길이 중심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의 수직선과 같은 것에 중심점이라는 개념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한 지점에 의해서 두 개의 직선으로 분리해 나가는 분절점은 상정 할 수 있다.
따라서 오스카 쿨만 교수가 십자가 사건을 구속사의 중심으로 주장하려면 구속사가 한 개가 아니라 두 번째로 새로 시작하는 또 다른 구속의 역사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견해에 부합되는 학자가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이다. 이 학자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의 약속은 스스로를 넘어서 더 나아가는 성취를 지시하여 첫 성취 자체가 다시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먼저 번 선지자가 이야기한 것이 문자대로 후대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후기 선지자의 시대에 성취된 역사는 그 예언을 추월해서 미래의 내용이 더 추가적으로 함유된 성취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도 동일하기에 예수님의 부활도 미래의 것이 선취(先取)되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궁극적 목적을 향해서 무작정 '약속-성취'의 속성만을 보이는 역사가 아니라 최종적 계시가 예수님에게는 먼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부활만큼은 비추월성을 지닌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의 모든 계시가 전부 우리에게 다 알려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신성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모든 사건이 완결된 후에 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최종 통치에 마주 향해 가는 아직도 열린 미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 안에서 아직 미완결이며 잠정적이다 고 보고 있다.
이처럼 판넨베르그가 말하는 종말이란, 세상 종결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취성 안에서 새롭게 미래로 출발하면서 또 하나의 최종 성취를 기다리는 보편사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절점 설정은 같은 구속사 선상에 놓여 있는 다른 사건들에 의해서는 자체적으로 결정될 수 없고 또 결정되었음을 증명할 길도 없다.
구속사가 되었든 보편사가 되었든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의미에 대해 역사를 정립하는 방법으로는 온전히 받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역사나 사건 자체에서 계시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계시를 배척하는 속성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늘에서 오신 의인이 나타나야 한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들이 인식 근거로 여기는 구속사 위주의 사건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 계신 분에 의한 말씀 성취 차원의 사건임을 뜻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 인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3-24)
즉 현재 인간들이 아무리 역사를 끌고 다녀봤자 죄 가운데 죽는 세계 안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는 구속사 자체를 완성시켜 건지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 그리스도 중심으로 다 이루었다는데 다른 차원의 선포이다.
예수님은 때를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말씀을 성취하신 분이다. 단지 실시하신 특정 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특정 때를 기다리시기는 했지만 그 특정 때를 위해서 오신 분은 아니라 말씀의 성취를 위해 오셨다.
이처럼 오스카 쿨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존재 보다 구속사라는 시간적 요소를 절대적 계시의 대용으로 삼고자 했다. 이는 유대교적인 히브리인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다.
흔히 고대 문화에는 두 대조적인 인식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헬라)적 사유가 그것인데 그 중에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한 쪽 사유, 즉 히브리적 사유를 계시 전달에 적합하다고 여겨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히브리적 사유 쪽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의 본래의 취지가 보다 확연해 진다는 것이다. 토를라이프 보만 교수는 그의 저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에서 히브리 사유적 시간관의 특징은, 궁극적인 목적을 지향하는데 있다고 했다.
과연 이러한 인식론이 계시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장애가 되었을까? 성경을 통해서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마 22:41-46)
바리새인들의 말씀 해석은 시간의 흐름에 준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의 틀은 예수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궁극적 목적을 지향하는 역사 인식이 도리어 메시야 앞에서 좌초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짓고 부정해 버리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히브리적 사유든 아니면 헬라적 사유든 상관없이 말이다.
인간의 시간 관념 속에는 카이로스와 크로노스 외에도 아이온(시대)과 플레로마(특정한 질의 때의 충만) 같은 것들도 있다. 물론 이런 용어들의 사용은 일종의 그 시대의 용어 사용에 있어 서로들 언어 규칙에 존중하겠다는 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게임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모호한 문화적 현상들을 보아 합리적으로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도 있고 물리적 시간성과 조화를 위한 목적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미래 시대에 대해서 확신 있는 내용으로 확장시켜 채우자는 데 있다. 인간은 생래적으로 미래를 지향한다. 아무리 지금 형편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구원 될 미래를 내다보는데 소홀히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의미의 충만과 완성의 때, 즉 '플레로마'를 요청한다. 성경이나 신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역사관이 이런 성향을 담고 있다. 플롯(줄거리)에 의해서 과거 및 중간의 시점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인간들의 물릴 줄 모르는 관심 탓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똑-딱'이라는 시간성으로 이어지는 인간성이 동일한 인간성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과거의 그 인간과 현재의 그 인간과 미래의 그 인간이 그 어떤 변화를 보이지 않고 모든 면에 있어 연속적인 동일인으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구속사는 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인류의 문학과 문화가 자생적으로 배태해 오고 있다. 작품에 담겨있는 구속사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재현이 아니라, 이야기거리가 수시로 첨부되어가서 구성된 구속사라는 이름의 시나리오이다.
이렇게 되면 이러한 구속사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주님에 의한 실제적 구원 사건을 대단히 모호하고 낯선 일로 생각하고 주류 밖으로 추방해 버린다. 자신들이 만든 구속사의 가치는, 구원 사건의 실제적 발휘가 아니라 구원 사건에 관해 그 의미성을 수집하여 거기에다 자기 구원을 대비시켜 그 진위를 확인해 보자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작업으로 인해 지금도 바람같이 일하시는 성령의 구원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허구란 문학에서 이단아적인 사고가 아니라 필수적이다. 허상의 세계는 조작되기를 요청하고 그렇게 해서 당대의 민중들에게 그들을 지배하는 신화라는 허구성에서 되레 변화를 촉구하는 각성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만약 허구의 이러한 반발이 없다면 인간들의 옛날 신화로 자꾸만 후퇴하기 때문에 허구야말로 현재를 현재의 의미로 이해케 하고 미래로 향한 개방의 발판을 닦아주는 현재가 되도록 해준다. 문학에서의 허구란, 이처럼 시간과 시간의 간격에다 인간의 존귀함과 영원함을 집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동반해서 시간도 의미 있는 것으로 사용케 한다.
혼돈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도 방치해 두는 법은 없다. 인간들은 혼돈을 겁내며 그것을 필연성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려 하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독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자꾸만 시간의 노예가 되려고 근성 때문에 발생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지 시간이 아니다. 만약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기다린다고 한다면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이제 믿을 것은 주의 재림밖에 없다"라는 표현은 문학에서의 "이제 믿을 것은 허구성밖에 없다"로 표현 안에 포괄적으로 담긴 셈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와 대비되면서 존재 확인이 안 되는 가상의 세계라는 의미에서 그런 '허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 허구의 세계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그래도 뭔가 이 지금의 세계를 도와주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허구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허구적 표현과 시간의 틀을 경과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신화로 분류되어 과거의 패러다임(인식 체제)라고 핍박을 받게 된다. 성경을 문학적으로, 문예적으로 해석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실제와 현실을 그 어떤 경우에도 언어의 상징적 기능이 동원되어 '현 시대의 문학'으로 나타내 보자는 것이다.
언어 범주가 인간의 사고 범주를 다 수용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언어 범주를 입장에서 서서 보면 수용이 다 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완전히 수용한 것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는 약조가 사회적으로 형성될 수가 있다. 기호 체제의 본질은 '나타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규약'이다.
놀이를 하는 어떠한 사람도 놀이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 질 수는 없는 법이다. 게임 안에서의 진리란, 그 게임의 규칙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자기 완결적으로 조작해 낸 것이기에, 다양한 경우들을 통해 절대조건을 대리하는 분산된 조건과 의미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 변별성만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인간이 자기 사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마찬가지이다. 이 사회를 변별적 구조를 통해서 잡아내려고 한다. 구속사는 이 작업의 일부이다.
문학을 이루는 개인의 상상력은 사실에 있어 그 사회 구성원으로 갖는 체험의 일부이다.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 안에는 자신의 속해 있는 그 사회의 성질을 함유하고 있기에 타인과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작품 활동을 한다. 접쳐진 사회 구조가 작자의 예리한 해석력으로 인해 펼쳐지고 그 틈 사이에 숨어 있어 의미가 비로소 만개 한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사건이라고 간주하고 그 사건의 다발을 텍스트화시켜서 자체적으로 독립적 존재임을 외부에 알리고, 그 독립된 텍스트가 문학(문예)의 옷을 걸치고 나타나서 자기 시대가 요구하고 확인하고 싶은 진리치를 예술적 유혹으로 포장하여 타인과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자기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타인과 더불어 공유된 시간이기를 기대한다. 세계는, 우연은 제거되고 영원한 반복성만이 규칙으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이것이 언어 소통에 준한 인간 사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관을 신학자들은 놓치지 않고 계시를 정의(定議)하는 아이디어로 삼는다.
그리스도의 화해 메시지를 바탕으로 해서 그 위에 인간 사회를 놓으면 개인주의적 계시관과 더 이상 계시를 두고 주도권 싸움을 벌릴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우리'라는 호칭으로 교류가 되는 하나님의 계시 자리가 얻어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화해의 손길을 뻗친 이상 '그'분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나'들은 '우리' 안에서 언제나 '너'이신 분 앞에서 '너'인 채 만나게 된다. 이로서 계시는 '그' 분과 개인적인 '나'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동일성이 갖추어진 상황 안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 찾아드는 질문과 대답의 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교회'라는 단체에서 시행되는 모든 교육적, 훈계적 사역은 반성과 참된 회개를 유발하는 중재적 사역으로서 계시적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각자 개인적인 '나만 관심 두고 '나' 그 자체를 본질성을 삼고 존재하는데서 벗어나서, 자발적으로 자기를 부인하시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 '너' 되시는 분을 뵙기 위해서라도 동일한 부정성이 각자에게도 유발될 필요가 있는데 이 중재적 계시 활동이 지금도 교회에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교회의 존재함, 그 자체는 계시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교회 역사도 나름대로 계시로 대우받는다. 즉 자기 교회 위주의 신의 계시사(啓示史), 신의 구속사도 따로 편성되어 계시의 일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29장, 30장, 31장… 계속 되면서 하나 하나가 신의 계시로 편입되면 계속 미완성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처럼 교회 존재를 구심점으로 늘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을 '우리' 안으로 이끄시며 그 안에서 남을 위한 '너'가 되도록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미 있는 교회를 도저히 부정하지 못한다고 장담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계시라는 것이 성경이라는 텍스트에 국한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역사가 곧 계시가 되고 성경은 이 계시활동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로서 성경은 역사의 대상물로서 풀이 가능한 내용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쓰여짐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보편적 인식을 염두에 두고 의사 소통하기 위하여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의 물음은 끝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고, 물음의 영원성은 보편성에 대한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는 절대성이라는 계시인식은, 이미 없어져 버리고 사라져 버리는 것들까지 보편적 관념들을 동원시켜 붙잡아 묶어둔 모음집이다.
그래야 지만 '나'에게서 한없이 터져 나오는 물음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되고 이로 인하여 '나' 자체에 대한 가치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되었든 그 어떤 절대 사물의 관한 과학적 원리가 되었든 종국에는 '나'의 절대적 가치를 능가하는 가치는 '나' 자체에서 물음으로 도출될 수 없는 법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산발적인 게임에 늘 파묻혀 사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인간 행함의 보금자리'가 장만된다. 즉 나의 행함도 계시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뜬다.
http://crossvillage.org/이근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