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3 이양선(異樣船) 출몰
이양선에 대한 최초의 조선 기록은 정조 21년(1797년) 9월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호가 동해안을 탐사한 것이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군함과 상선들이 조선 연안에 자주 출몰했다. 특히 중국이 서양 열강에 문호를 연 184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 연해에 출몰하는 서양 선박의 수는 더욱 늘어났다. 《헌종실록》 헌종 14년(1848년) 12월조에는 “본년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해서 쫓으려 해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 중에는 상륙해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먹기로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양선들이 조선을 찾은 목적은 크게 네 다섯 가지였다. 즉 조난이나 피항 및 물자보급, 해안선 탐사, 무역 통상, 선교, 군사적 응징 등이었다. 이양선의 국적도 점차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프랑스와 영국 선박이 주류를 이루다가 점차 러시아와 미국의 선박까지 가세했다. 영국 선박은 주로 통상을 요구하거나 탐사 활동이 주목적이었다. 프랑스는 조선이 자국의 선교사를 박해한 데 대해 군사적으로 응징하려고 조선을 찾아왔다. 미국은 통상과 무역을 요구하거나 자국민이 살해된 데 대해 응징하는 게 그 목적이었다. 독일과 러시아 등은 통상을 요구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양선의 종류도 변해갔다. 19세기 전반까지 조선 해역에 나타난 이양선은 모두 범선들이었다. 하지만 조선해역에 출몰하는 배들은 거의 모두 대포 등으로 무장하고 있어서 조선 정부에서는 군함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1860년대 들어와서는 점차 목제 범선에서 철제 증기선으로 바뀌어갔고 이양선들은 대개 대포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이양선을 바라보았다가 점차 공포감에 사로잡혀갔다. 일반 관민들은 서양 오랑캐가 조선의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하러 온 것으로 알고 동요했다. 이양선이 해역에 출몰하면 변방의 위기를 알리는 봉홧불이 타올랐고 조선 조정에서는 해안의 관리들에게 이양선을 엄중히 감시하라는 훈령을 잇달아 내려보냈다. 이양선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은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 표류해온 서양 선박에 대해서는 식량이나 식수, 목재 등을 공급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육로나 해로를 거쳐 송환시켜주었다. 하지만 이양선들이 가축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약탈하는 등 난폭한 행위를 일삼자 점차 그들에 대해 인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통상을 요청하러 온 이양선에 대해서는 외국과 무역을 금한 국법에 위배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특히 불법으로 내지에 침입하거나 군사적 응징을 위해 찾아온 이양선들에 대해서는 관민이 힘을 합쳐 저항했다.
1866년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병인양요)과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 1871년 미국함대의 침략(신미양요) 등이 잇따라 일어나자 조선에서는 배외 감정이 팽배해져갔다.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강화해나갔다. 민심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국론을 통일하며 전통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유학자들의 위정척사 사상을 이론적 근거로 삼아 서양 자본주의 열강의 도전을 극복하려 했다.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두 차례의 양요로 서양 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면서 정통 유학자들은 대항논리를 마련해야 했다. 그들의 위정척사 사상은 정통 성리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서양의 도전을 극복하려 한 것이었다. 기정진, 이항로, 최익현 등은 조선과 중국을 문명과 정통성의 중심으로 보고 서양을 오랑캐와 금수의 나라로 규정했다. 주자학의 화이사상(華夷思想)이 이론의 근거였다. 그들은 서양 과학기술의 선진성을 부정하고 외국과 통상을 금지해 양물이 나라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정척사 사상은 서양의 도전을 윤리적 측면에서 파악하고 그 대응방법도 윤리적 측면에 치중하는 한계가 있었다.
초기 개화파의 비조로 꼽히는 박규수는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화공책을 써서 셔먼호를 격침시켰다. 하지만 셔먼호의 잔해를 한강으로 올려보내 증기선을 연구하도록 했다. 그는 이미 서양 과학기술의 선진성을 인식하고 이를 본받으려는 개화사상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대원군은 강경한 쇄국정책을 펼치면서도 서양식 무기와 증기선의 위력을 실감했다. 서양 무기와 군함제작을 지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기술자를 특채해 군함과 무기를 자체 제작하도록 격려했다. 하지만 서양의 과학기술에 어두웠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낮선 배들이 몰려오다
이양선 출몰도
이양선 출몰도
서프라이즈호(미국,1866)
1866년 5월 12일(음)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Surprise)가 평안도 철산 선천포 해안에 난파되어 선원 6명이 표류해왔다. 서프라이즈호는 감초 등 물품을 싣고 중국 산동반도 지부를 출발해 유구로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났던 것이다. 당시 철산부사 백낙연을 비롯한 조선인 관리들은 선원들에게 음식과 의류 등을 지급한 다음 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이송했다. 1866년 10월 24일 북경주재 미국 공사관 서기관 윌리엄스(Samuel Williams)는 당시 미국 국무장관 시워드(Seward)에게 당시 상황을 보고했다.
윌리엄스, <서프라이즈 보고문>, 1866년 10월 24일
본인은 미국 범선 서프라이즈호 난파사건과 이들 선원들이 조선 및 청국 관리들로부터 받은 대우, 이들의 송환도중 프랑스 선교사들로부터 받은 친절한 행위에 대해 귀하에게 보고하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본인은 맥케슬린의 이야기를 토대로 주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 보고하는 바입니다.
6월 24일 범선 침몰로 선원들은 스쿠너 선을 떠나 한 섬에 상륙했는데, 섬 주민들은 선원들에게 쌀을 공급했다. 그들은 밥을 먹은 즉시 섬을 떠나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폭풍우로 그 다음날까지 이 섬에 머물지 않으면 안되었다. 서북쪽으로 약 20마일쯤 항해했을 때, 본토쪽에 작은 촌락을 발견했는데, 선원들은 가능한 한 이 촌락으로 올라가서 음식물과 휴식처를 얻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본토 연안으로 접근 상륙하자 약 2백명의 본토인들이 선원들을 둘러싸면서 관리가 와서 접견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다. 선원들은 중국인 요리사를 통해 자기 처지를 설명한 후 겨우 2일분의 양식을 공급받았다. 그러자 또 다른 관리가 와서 똑같이 이들을 일일이 심문했다. 조선 문정관은 선원들에게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조그만 구내에 가두고서 수비병이 감시하게 했다. 나흘째 되는 날 세 번째 관리가 서울에서 파견된 중국인 역관 한 사람을 대동하고 이곳에 도착했는데, 이때부터 이 중국인 역관이 선원들을 접대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이들은 선원들에게 좋은 음식과 담배를 제공했고, 심지어 환자에게는 의약품까지 지급했다. 이 마을에서 24일간 유숙한 후 서울로부터 파견된 특별 호송관이 이들을 인수, 중국 변경으로 호송했다.
(신동아 편집부 엮음, 《한미수교 100년사》, 동아일보사)
제너럴 셔먼호(미국,1866)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
고종 3년(1866년) 6월 미국 상인 프레스턴(W. B. Preston)은 중국 천진에 있던 영국계 범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찾아왔다. 조선과 직접 통상하는 게 프레스턴의 목적이었다. 당시 셔먼호에는 선장을 필두로 서양인 5명, 중국인 13명, 흑인 2명 등 총 19명이 타고 있었다. 또한 런던 선교회에서 중국에 파견한 영국인 선교사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중국식 이름은 최난헌)가 통역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셔먼호는 6월 18일(양력 7월 29일) 천진을 출항해 잠시 지부에 기항했다가 7월 7일 대동강 하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황해도 황주목 삼전면 송산리 앞에 정박했다. 이때 황주목사 정대식, 역관 이용숙 등이
셔먼호에 다가가 조선에 찾아온 까닭을 물었다. 토마스는 조선인 관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배는 영국, 미국, 청국 등 3국의 상인이 산동반도 지부를 떠나 평양으로 향하는 중이다. 배 모양은 비록 병선과 비슷하지만 실은 귀국의 종이, 쌀, 금, 인삼 등과 우리가 싣고 온 서양 베, 기명 등을 교역하고자 한다. 귀국을 침범할 뜻은 전혀 없다. 물물교환이 끝나면 곧 돌아갈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다시 왕경으로 가서 교역해보겠다.”
황주목사는 외국 선박이 조선과 교역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으니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셔먼호는 조선 관리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7월 13일 평양부 신장포에 이르렀다. 평안도 감사 박규수는 중군 이현익과 서윤 윤태정 등을 파견해 또 다시 연유를 물었다. 토마스 일행은 교역의 목적을 밝힌 다음 천주교도 박해의 이유를 따져 묻고 야소교는 천주교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중군 등은 천주교와 야소교는 국법으로 엄금하고 있고 교역 또한 불허하니 즉시 퇴거하라고 요청했다.
셔먼호가 대동강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는 마침 상류에서 폭우가 쏟아져 수위가 높아져 있었다. 배가 더 전진하려 하자 중군 이현익 등이 위험을 경고했다. 그러나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16일에 만경대 한사정 부근까지 가서 정박했다. 셔먼호는 일행 가운데 6명이 별도로 작은 배를 타고 상류로 향했다. 중군 이현익은 이를 추격해 제지하려 했으나 도리어 포로로 잡혀 셔먼호에 감금당했다. 서윤 신태정은 셔먼호에 가서 중군의 석방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9일 아침 셔먼호는 다시 조총 등을 발사하며 왕강정 앞에 이르렀다. 일행 가운데 5명이 다시 조탄으로 올라갔다. 이 무렵 강변에는 평양 백성들이 운집해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포로 송환이 실패하자 군중들이 격분해 화살과 소총, 돌 등을 던져 사태는 험악해졌다. 프레스턴 일행은 결국 셔먼호의 뱃머리를 하류로 돌려 양각도 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흥분한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나타나 작은 배로 셔먼호에 돌입해 이현익을 구출해냈다. 그 동안 대동강의 수위가 낮아져서 셔먼호는 꼼짝달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양선이 대동강에 침입한 사실을 보고받은 대원군이 이 이양선이 프랑스의 천주교 신부를 살해한 사건 때문에 보복하러 온 것으로 판단하고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만약 즉각 물러가지 않으면 몰살시키라”고 긴급 하달했다. 박규수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22일 철산부사 백낙연과 서윤 신태정에게 화공과 포격을 지시했다. 박규수도 몸소 현장에 나와 독전했다. 양측의 교전은 전쟁이나 진배없었다. 양측의 교전으로 셔먼호는 실탄이 다 떨어져갔다. 24일 조선군은 배 두 척을 한데 묶어 땔감을 가득 실었다. 거기에 유황과 초석을 뿌려 양쪽에 화약을 장전하고 도화선을 달아 안개가 짙게 낀 틈을 타서 도화선에 불을 붙여 화염에 휩싸인 배를 셔먼호로 돌격하게 했다. 드디어 셔먼호에 불길이 타올랐다. 다급해진 토마스 목사와 중국인 한 명이 백기를 들고 뛰어나와 항복했으나 흥분한 군중이 그들을 붙잡아 살해하고 말았다. 셔먼호에 탔던 프레스턴 이하 전 승무원이 희생되었다. 조선측에서도 13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성록》 고종 3년 9월 15일
<황주 이양선에 대한 황해감사 박승휘의 치계>(1866년 음력 7월 15일)
이양선이 황주목 삼전방의 송산리로 앞 바다에 정박한 사정에 관해 치계를 올리는 바 황주목사 정대식이 이달 9일 오후 4시에 성첩해 치보한 것을 접했다. 목사 정대식의 입회 아래 우후 신영한, 역관 이용숙, 영군관 지 명 등이 이달 7일 오후 8시경에 이양선이 정박해 있는 곳으로 출발해 다음 날 8일 아침 4시경에 도달했다. 형리 이기로, 영리 신몽진 등에게 먼저 지방관이 문정하려는 뜻을 통고하게 했더니 와서 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배 가까이 갔다. 그들 수십명은 각기 총 칼을 차고 뱃머리에 늘어서 배에 오르는 것을 허락했다. 그들 중 4인이 의자에 앉거나 혹 초두에 걸터 앉아 함께 자리할 것을 청했다. (…)
배의 구조는 안에는 회를 발랐으며 밖에는 흑가유(黑加油)를 발라 칠과 같았으며 위에 백분(白粉)이 있었다. 사방 판옥(板屋)이 두 곳인데 한 곳은 관인(官人)이, 한 곳은 종인(從人)이 거처했다. 면마다 창구멍이 있는데 유리를 끼웠다. 두 돛대는 모두 송목(松木)으로 잘 다듬어 기름을 발랐고 위에 백양목(白羊木) 방기(方旗)를 달았으며 돛은 흰색 양대릉(羊大綾)으로 만들었다. 양쪽으로 각각 대포 일좌를 설치해 밑에 나무바퀴와 위에 철통(鐵?)이 있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데 세 차례 쏘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소리가 천둥 같아 이목을 놀라게 했다. 또한 장총 세 자루를 둘러보았는데 총구 끝에 한자 가량의 창도(槍刀)를 꽂았다. 조총은 적은 것은 차고 큰 것도 걸어놓아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웠으며 환도는 서양인 4명이 각 한 자루씩 지니고 있었고 광채가 빛났다. 옥내의 서책, 서장(書張), 금종(琴鐘), 고약 등의 잡화를 두루 살펴보았지만 다 기록할 수 없다. 종인들이 거처하는 곳을 보고자 했으나 예의를 들어 꼭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막아 보지 못했다. 이래로 마치 우리 나라의 적은 고깃배 같은 파란 색의 소정(小艇)을 매달았다.
적재한 물건들은 양목 등 통상화물이라 말했으나 선저(船底)를 보여주지 않아 적치의 허실과 수효를 알지 못한다. 수작하는 중에 글을 써 보이기를 우리가 대미(大米), 우육(牛肉), 달걀, 채소, 땔나무 등을 보내주면 양포를 대신 주어 답례하겠다고 했다. 만일 중국인이나 각국인이 표류하면 관에 알리지만 양인이 내양(內洋)에 월입(越入)한 일도 뜻밖이며 더욱이 스스로 처리하기도 곤란했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이곳과 같은 벽촌의 수령으로서는 마련하기도 어렵고 바람에 맞추어야 하니 곧바로 시행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다.
이에 최난헌이 사색(辭色)을 달리해 말하기를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만일 우리측이 제공해줄 뜻만 있다면 자기들 배로 강가까지 나아갈 것이니 어려운 일이 아니라면서 어찌 이 땅 저 땅에 구애될 것인가 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정지를 끌어당겨 품에 집어넣으며 계속해 재촉하므로 부득이 행선으로 돌아가는 즉시 마련해 보내주겠다고 대답하니 문정지를 내주면서 보내주는 것에 반드시 사례하겠다고 재차 말했으나 사례할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대미 1석, 우육 30근, 달걀 60개, 채소 20속, 시목 20단을 공급해주었으며 그 배가 떠나기 전에 돌아오기가 어려웠으므로 잠시 진두(津頭) 근처에 머물며 동정을 살폈다.
(신동아 편집부 엮음, 《한미수교 100년사》, 동아일보사)
《일성록》 고종 3년 7월 27일
<평안감사 박규수의 치계>(1866년 음력 7월 27일)
평양부에 정박하고 있는 이선이 더욱 창광(猖狂)해져 포와 총을 쏘아대고 우리 나라 사람을 살해하니 이를 제승(制勝)하는 방책은 화공밖에 없었다. 일제히 방화해 그 배를 연소시키니 그들 중 최난헌과 조능봉이 뛰어나와 살려줄 것을 간청했다. 그들은 즉각 결박되어 강안으로 끌려나왔으며 분노한 군민에 의해 타살되었다. 나머지 자들도 모두 섬멸되어 소요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신동아 편집부 엮음, 《한미수교 100년사》, 동아일보사)
윌리엄즈(주청(駐淸) 미국 공사관 서기관), <제너럴 셔먼호 사건 보고문>(1868년 7월 31일)
1866년 12월 15일자 베링게임의 급송문서 제124호와 조선에서 미국 스쿠너선 제너럴 셔먼호의 운명에 관한 건.
본인은 조선 사절단 중 한 사람을 만나서 제너럴 셔먼호에 관련된 자세한 진상을 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셔먼호 사건 당시 그 자신이 평양에 없었지만,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올라갔다가 강의 수량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운항이 어렵게 되었고, 선원들은 셔먼호를 경비하면서 강 중심으로 운항시키려고 했으나 실패,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본인에게 말했다. 이때 조선 군민들은 셔먼호로 올라왔고 쌍방간에 언쟁이 벌어지더니 마침내 주먹다짐이 일어나고 유혈사태까지 일어났다. 격분한 조선군민은 총공세를 가해 선원 20여명(미국인 3명, 영국인 2명, 중국인 및 馬來人 19명 등 총 24명) 전원이 조선군민에 의해 현장에서 타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셔먼호에 게양된 깃발과 다른 외국 국기를 확연하게 구별할 수 없었지만 이 배가 프랑스 소속의 선박인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원 전원이 몰살되었으며 난파된 선체는 아직도 평양 대동강 연안에 남아 있다고 확언했다.
조선 당국으로부터 보내온 회답을 북경에서 접수하기 전에 코르벳함 세난도어호가 셔먼호 탐문차 조선 방문의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왔다. 그런데 세난도어호의 함장 페비거는 1868년 3월에 본인의 ‘서신 A’에서 언급한 소문(4명 억류설)의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세난도어호를 이끌고 조선 서해안(황해도 장련 오리포)을 방문한 것이다. 그가 조선에 있을 때 회신 한 통을 받았다. 이것은 1867년 미국 증기선 와추세트호가 셔먼호 탐문차 조선을 방문했을 때 셔먼호 사건 해명을 요구한 편지에 대한 회답임에 틀림없다. 페비거 함장이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은 1866년 8월경에 살해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며 그들이 이 같은 비참한 운명을 초래한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조선군민에게 성급하고도 난폭한 도발행동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신동아 편집부 엮음, 《한미수교 100년사》, 동아일보사)
로드 암허스트호(영국, 1832)
1832년(순조 32년) 동인도 회사 소속 영국 선상 로드 암허스트호(Lord Amherst)가 선장 리즈(Rees)의 지휘 아래 조선을 찾았다. 이들은 동인도 회사의 요청에 따라 통상무역에 관한 자료를 조사, 수집하기 위해 청, 조선, 일본에 파견된 것이다. 암허스트호는 7월 18일(음력 6월 21일) 황해도 장연현 창선도(몽금포 앞 바다)에 나타났다가 현지의 관리와 필담을 나눈 후 7월 22일(음력 6월 25일)에는 충청도 홍주 고금도 해안으로 내려왔다. 조선 관리들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상선의 크기는 길이가 약 45미터, 넓이가 9미터, 선원 수는 67명이었다. 배 가운데에는 각종 무기가 실려 있었는데, 대포 8문, 총 35정, 창 24개, 환도 30자루와 각종 무역품을 싣고 왔다고 한다. 암허스트호는 약 1개월간 조선 해역에 체류했다.
이 배에는 미국 선교부 네덜란드 교회 소속 선교사인 독일인 귀츠라프(Karl Friedrich Gutzlaff)가 등승했는데, 그는 황해도와 충청도를 돌면서 한국 최초로 개신교 전도사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성경책과 중국어로 번역된 지리, 수학 등 서적을 조선인에게 배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다만 조선 지방관에서 서적 4권을 전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의료사업을 실시하고 감자 종자 재배법을 처음으로 전수해주었다. 하지만 암허스트호가 떠난 후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감자는 모두 파헤쳐지고 말았다고 한다.
《순조실록》 순조 32년(1832년) 7월 21일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의 흔도사단(?都斯?)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애란국(愛蘭國)·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木)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瓜]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파(把)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杉)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칸[間]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羔]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쳛]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旗)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전(前)·중(中)·후(後)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樽]와 병(甁)은 유리였으며 숫가락은 은(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좌(座)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는 4품(品) 자작(子爵) 호하미(胡夏米)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이며, 제1과장(第一쥓長)은 파록(波菉)이고, 제2과장은 심손(心遜)이고, 제3과장은 약한(若翰)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이며, 과계(쥓計)는 벽다라마(?多羅馬)·행림이(行林爾)·임홍파(林紅把)·가파지(加巴地)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랍니(拉尼)·야만(耶퐐)·주한(周翰)·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에 10인, 손해(遜海)에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와 무리(無理)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이요, 근반(짲班) 시오(施五)·시만(施慢)·시난(施難)·시환(施環)·시섬(施첍)·시니(施尼)·시팔(施八)이었습니다.
용모(容貌)는 더러는 분(粉)을 발라 놓는 것처럼 희기도 하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머리를 박박 깎기도 하였고 혹자는 백회(百會) 이전까지는 깎고 정상(頂上)에서 조그만 머리카락 한 가닥을 따서 드리운 자도 있었으며, 입고 있는 의복은 혹은 양포(洋布)를 혹은 성성전(猩猩氈)을 혹은 3승(升)의 각색 비단을 입고 있었는데 웃도리는 혹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기도 하였으며 혹 소매가 좁은 모양을 입기도 하고 혹 붉은 비단으로 띠를 두르기도 하고, 적삼은 단령(團領)을 우임(右휥)하고 옷섶이 맞닿은 여러 곳에 금단추(金團錘)를 달았으며 소매는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였는데 작위(爵位)가 있는 사람이 입는 문단(紋緞)은 빛깔이 선명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것은 호하미(胡夏米)는 푸른 비단으로 족두리처럼 만들었는데 앞쪽은 흑각(黑角)으로 장식하였고, 그 외의 사람은 붉은 전(氈)이나 흑삼승(黑三升)으로 더러는 감투 모양으로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으로 만들었고 혹 풀[草]로 전골냄비 모양으로 엮기도 하였습니다. 버선[襪子]은 흰 비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백삼승(白三升)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등에 꿰맨 흔적이 없었고, 신[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은 발막(發莫)과 같았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큮璃器) 5백 개, 초(硝) 1천 담(?), 화석(火石) 20담, 화포(花布) 50필,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담, 등대(燈臺) 30개, 등롱(燈籠) 40개, 뉴(?)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兩)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과의 교역은 유래(由來)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하(?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법란서국(法蘭西國)·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대여송국(大呂宋國)·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식력국(寔力國)·영정도국(伶?都國)·대청국(大淸國)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법란치국(法蘭治國)·하란국(荷蘭國)·파려사국(波呂斯國)이라 하고,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都斯?)·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썍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년 2월 20일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와서 국왕의 명으로 문서와 예물을 귀국의 천세 계하(千歲階下)에 올리고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공무역(公貿易)을 체결하여 양포(洋布)·대니(大?)·우모초(羽毛쿑)·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 등의 물건으로 귀국의 금·은·동과 대황(大黃) 등의 약재(藥材)를 사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바칠 예물은 대니(大?)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과 우모(羽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려색(棕櫚色) 1필, 황색 1필, 양포(洋布) 14필, 천리경(千里鏡) 2개, 유리기 6건(件), 화금뉴(花金紐) 6배(排)와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종이라 하였습니다.
또 7월 12일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배 한 척이 서산(瑞山)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의 주사창리(舟師倉里) 앞 포구(浦口)에 와서 이 마을 백성들을 향하여 지껄이듯 말을 하면서 물가에 책자(冊子)를 던지고는 바로 배를 돌려 가버렸는데, 던진 책자는 도합 4권 중에서 2권은 갑(匣)까지 합하여 각각 7장이고 또 한 권은 갑까지 합하여 12장이었으며 또 한 권은 갑도 없이 겨우 4장뿐이었다 하기에, 고대도(古代島)의 문정관(問情官)이 이 일로 저들 배에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금월 12일 묘시(卯時)에 종선(從船)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밤을 새우고 13일 미명(未明)에 돌아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7인이고 책자 4권을 주었으나 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저들이 식량·반찬·채소·닭·돼지 등의 물목 단자(物目單子) 한 장을 써서 내면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소 2두, 돼지 4구(口), 닭 80척(隻), 절인 물고기 4담(?), 갖가지 채소 20근(斤), 생강(生薑) 20근, 파부리 20근, 마늘뿌리 20근, 고추 10근, 백지(白紙) 50권, 곡물 4담(?), 맥면(麥麵) 1담, 밀당(蜜糖) 50근, 술 1백 근, 입담배 50근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저들이 주문(奏文) 1봉(封)과 예물 3봉을 전상(轉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니, 저들이 마침내 물가에 던져버리고 또 작은 책자 3권과 예물의 물명 도록(物名都錄) 2건(件)을 주었다고 하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별정 역관(別定譯官) 오계순(吳繼淳)이 달려가서 문정(問情)하였는데, 그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문서와 예물을 저들이 끝내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여 여러 날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17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우리 배와 매 놓은 밧줄을 잘라 버린 뒤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고 서남쪽을 향하여 곧장 가버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저들 배는 빠르고 우리 배는 느리어 추급(追及)하지 못하고 문서와 예물은 결국 돌려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이 배는 필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 나라들의 행상(行商)하는 배일텐데, 우연히 우리 나라 지경에 이르러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교역을 시도해보려 하다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들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다만 그 주문과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자못 의아합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속셈을 비록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처리에 있어서는 의당 신중히 해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과 역관 등으로 하여금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櫃)에 봉해 두게 하고 우리들에게 준 책자를 빠짐없이 모아 함께 봉(封)하여 본주(本州)의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충 수사(公忠水使) 이재형(李載亨), 우후(虞候) 김형수(金瑩綬),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가 문정할 때에 거행이 지연되고 처리가 전착(顚錯)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대로 파직의 율로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영길리국은 비록 대국(大國)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열에 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책자로 보면 민월(쮆越)과 광주(廣州) 등지로 왕래하는 상선(商船)이 1년이면 60, 70척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 나라에 와서 정박한 사실이 혹 대국에 전해질 염려도 없지 않으니 우리 나라에서 먼저 발설(發說)하여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으로 하여금 사실을 매거(枚擧)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순조실록》 순조 32년 7월 21일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도광(道光) 12년 7월 초4일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 등의 첩정(牒呈)을 첨부한 공충도 관찰사(公忠道觀察使) 홍희근(洪羲瑾), 수사(水使) 이재형(李載亨)이 인차(鱗次)로 치계(馳啓)한 바에 의하면, 본년 6월 26일 유시(酉時) 경에 이양선(異樣船) 1척이 본주(本州) 고대도(古代島)의 안항(安港)에 정박하였는데, 듣기에 매우 놀라운 일이라서 역학(譯學) 오계순(吳繼淳)을 차송하고 본 지방관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배가 정박한 곳으로 달려가서 합동으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언어가 통하지 않아 문자를 대신 사용하여 이곳에 오게 된 동기를 상세히 힐문하였는 바, 그들 대답에 ‘우리들은 모두 영길리국 난돈(蘭墩)의 흔도사단(?都斯?) 땅에 사는 사람들로서 선주(船主)는 호하미(胡夏米)인데, 서양포(西洋布)·기자포(碁子布)·대니(大?)·우단초(羽緞쿑)·뉴자(紐子)·도자(刀子)·전도(剪刀)·요도(腰刀)·납촉(蠟燭)·등대(燈臺)·등롱(燈籠)·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천리경(千里鏡) 등의 물품을 가지고 귀국의 소산물을 사려고 본년 2월 20일 배에 올라 본월 26일에 이곳에 왔으니, 귀국의 대왕에게 전계(轉啓)하여 우호(友好)를 맺어 교역하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동선(同船)의 선원(船員)은 총 67인으로 4품(四品) 자작(子爵)이라고 칭하는 선주(船主) 호하미(胡夏米)를 제외하고는 모두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로서 과계(쥓計)와 초공(梢工)·수수(水手)의 복장은 혹은 양포(洋布), 혹은 전자(氈子), 혹은 삼사포(三梭布), 혹은 단자(緞子)이고, 옷의 양식은 혹은 포자(袍子)로, 혹은 괘자(퉧子)로, 혹은 단삼(單衫)으로 하였으며, 모자(帽子)는 양식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그 빛깔이 혹은 붉고 혹은 검고 혹은 푸르기도 하였으며 더러는 풀로 엮은 것도 있었습니다. 배는 공선(公船)인데 표호(票號)는 안리(安利)이고, 넓이는 6파(把), 길이는 30파였으며, 의간(?竿)에는 층범(層帆)이 3개 달리고 또 물을 긷는 작은 배 4척이 있었습니다. 배 안의 집물(什物)을 일일이 점검하려고 하니 저들 말이 교역하기 전에 멀리서 온 사람의 물건을 보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며 여러 차례 설왕설래(說往說來)하였으나 끝내 보여 주지 않았는데, 이 배는 왕래하면서 행상을 하는 배로서 풍랑을 만나 표착(漂着)한 것과는 다름이 있으므로 사세가 강박할 수 없어 상세히 검열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유하기를, ‘번방(藩邦)의 사체(事體)로는 다른 나라와 사사로이 교린(交隣)할 수 없고, 더구나 우리 나라는 자래로 전복(甸服)과 가까이 있어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아뢰고 알려야 하므로 임의로 할 수 없는데, 너희들이 상국(上國)의 근거할 만한 문빙(文憑)도 없이 지금까지 없었던 교역을 강청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니,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지방관이 어떻게 경사(京司)에 고할 것이며 경사에서는 또 어떻게 감히 위에 전달(轉達)할 것인가?’ 하니,
저들이 개유하는 말을 듣지 않고 줄곧 간청하여 전후로 10여 일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본년 7월 17일 유시(酉時) 경에 조수(潮水)를 타고 서남쪽을 향하여 갔다는 등인(等因)으로 구계(具啓)하니, 이에 의거하여 조량(照諒)하기 바랍니다. 주거(舟車)가 통하는 곳에서 유무(有無)를 교역하는 것은 나라의 떳떳한 일이나, 번신(藩臣)은 외교(外交)가 없고 관시(關市)에서 이언(異言)을 살피는 것이 더욱 수방(守邦)의 이전(彛典)에 속하는데, 소방(小邦)은 대충 분의(分義)를 아는 만큼 각별히 후(侯)의 법도를 지켜 비록 해마다 으레 열리는 개시(開市)에 있어서도 오히려 반드시 칙자(勅咨)의 지휘를 기다려서 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의 영길리국은 지리상으로 동떨어지게 멀어 소방과는 수로(水路)의 거리가 몇 만여 리가 되는지 모르는 처지에 망령되이 교린을 핑계하고 교역을 억지로 요구하였으니, 사리에 타당한 바가 전혀 아니고 실로 생각 밖의 일이었습니다. 경법(經法)에 의거하여 시종 굳이 방색(防塞)하였더니, 저들도 더 어쩌지 못함을 알고 바로 돌아갔습니다. 교역에 관한 한 조항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없겠으나, 변경(邊境)의 정세에 관한 일인만큼 의당 상세히 보고해야 하겠기에 이렇게 이자(移咨)하는 바이니, 귀부(貴部)에서 자문 내의 사리(事理)를 조량하여 전주(轉奏) 시행하기를 바라고 이에 자문을 보내는 바입니다.” 하였다.
알세스트-라이라호(영국, 1816)
알세스트호의 선장 맥스웰
알세스트호의 선장 맥스웰
1816년(순조 16년) 7월 영국의 맥스웰(Murray Maxwell, 1775~1831) 대령과 홀(Basil Hall, 1788~1844) 대령이 거느리는 알세스트호(Alceste)와 라이라호(Lyra)가 북경에 파견된 외교사절 암허스트경(Sir Jeffrey William Pitt Amherst)을 천진 하구까지 호위해갔다가, 사절 일행이 임무를 마치고 광동으로 돌아오는 동안 알세스트호와 라이라호는 조선의 서남 연해안을 측량했다. 두 배는 9월 1일에는 황해도 대청군도에 나타났다가(영국 군함은 이 군도를 Sir James Hall's Group이라 명명했는데, 리라 호 함장의 아버지인 에든버러 지리협회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때 영국함이 정박한 육지에서 작은 배가 나와 사태를 살피고 갔으며, 라이라호 함장이 한 촌락에 상륙해 주민에게 금전과 물품을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고 한다) 당일에 출범해 3일에는 충청도 외연열도 부근에 도착해 그 가운데 한 섬에 상륙했으나(영국함은 이 섬을 Hutton's Ireland라고 명명했는데, 지리학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주민과 회담조차 할 수 없었으며, 다시 4일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접경인 군산만(비인현 마량진 갈곶)으로 들어왔다.
알세스트호와 라이라호는 5일 닻을 올려 다도해를 거쳐 8, 9일에는 추자군도를 측량하고 섬사람과도 약간의 물물교환에 성공했다. 그들은 조선연해를 떠돈 지 10일 만인 9월 10일에 유구(琉球)로 떠났다. 라이라호는 영국으로 귀항하는 도중 다음해 8월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들렀다. 함장 홀은 그곳에 유폐 중이던 나폴레옹을 찾아 조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이 항해로 서양에서는 거의 상상적인 해도밖에 가지지 못했던 조선 서해안의 지형이 처음으로 대략 밝혀졌다.
베질 홀 선장은 여행기 《Voyage of Discovery to the West Coast of Korea and Great Loo-Choo Island)》를 써서 1818년 런던의 John Murray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순조실록》 순조 16년(1816) 7월 19일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의 장계에,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銅쫭臼)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0,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 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나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眞書캸)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書캸) 내용에, ‘영길리국(英吉利國)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금년 윤6월 초순 사이에 우리 영길리국에서 5척의 배로 우리 영국왕(英國王)이 차정한 사신과 수행한 사람들을 보내어 천진(天津) 북연하(北蓮河) 입구에 도착하여, 지금 왕의 사신 등이 모두 북경에 나아가 황제[萬歲爺]를 뵈었으나 천진 외양(外洋)의 수심이 얕은데다가 큰 바람까지 만나 배의 파괴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각 선척이 그곳에 감히 정박하지 못하고 지금 월동(췺東)에 돌아가서 왕의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귀국하려고 합니다. 이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으니, 해헌(該憲)은 음식물을 사도록 해 주고 맑은 물을 가져다 마시고 쓰도록 해 주십시오. 왼쪽에 우리 왕께서 보낸 사신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으니 증거가 될 것입니다. 가경(嘉慶) 21년 월 일에 씁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홀 일행을 문정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
홀 일행을 문정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로나호(영국, 1866)
고종 3년(1866년) 2월 선장 제임스 모리슨(James Morrison)이 이끄는 영국 상선 로나호(Rona)가 상해를 떠나 충청도 앞 바다에 도착했다. 그달 12일(음력, 양력 3월 31일)에는 해미현 조금진 근처에 정박했다. 평신첨사 김영준과 해미현감 김응집 등의 지방관은 로나호에 접근해 내항 목적을 물었다. 이 배에 타고 있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과 통상을 목적으로 국왕에게 예물을 바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국왕에게 바칠 예물로는 담요 3장, 탁자보 1장, 시계 1개, 천리경(망원경) 1개 등이었다. 조선 관리들은 조선이 외국과의 통상을 법으로 금하고 있기 때문에 속히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로나호는 3일 뒤 해미에서 물러나 상해로 돌아갔다.
엠페러호(영국,1866)
오페르트가 타고 왔던 엠페러호
오페르트가 타고 왔던 엠페러호
로나호를 타고 조선을 찾아왔던 오페르는 고종 3년(1866년) 6월 26일(양력 8월 6일) 증기선 엠페러호(Emperor)를 구입해 다시 충청도 해미현 조금진에 이르러 통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해미현감 김응집이 또 다시 거절하자 오페르트는 북상해 7월 11일 강화부 월곶진에 정박했다. 문정하러 온 역관에게 통상 허가를 간청하고 서울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청했다. 오페르트는 역관에게 통상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울까지 들어가겠다고 협박했다. 이들의 협박에 견디지 못한 문정관은 청국에서 통상을 허가받았다는 문서를 받아오면 통상에 응하겠다고 답했다. 오페르트는 청의 공문을 받아오겠다며 9월 20일 월곶진을 물러나 상해로 돌아갔다.
세실호(프랑스,1846)
1846년(헌종 12년) 6월에는 프랑스의 해군소장 세실(Jean Baptiste Thomas Cecile)이 군함 3척(Cleopatre호, Victorieuse호, Sabine호)을 이끌고 홍주 외연도 앞 바다에 나타났다. 1839년 기해사옥 때 프랑스인 신부 모방, 샤스탕, 앙베르가 처형된 사건을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는 한강 입구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외연도 주민들에게 조선 정부에 보내는 서신을 전달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주민들은 서울과 거리가 멀어 전달하기 어렵다고 거절했다. 세실은 어쩔 수 없이 나무상자에 편지를 담아 외연도 앞 바다에 던져버리고 떠났다. 이 편지에는 조선 정부의 회신을 받기 위해 1년 후에 다시 오겠다고 적혀 있었다.
이듬해 1847년(헌종 13년) 세실 제독의 후임으로 해군대령 피에르(La Pierre)가 군함 2척(La Gloire호, Victorieuse호)을 이끌고 전라도 신지도에 나타났다. 조선의 회답을 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프랑스 군함에는 마카오에 유학중이던 조선인 신부 최양업이 통역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태풍이 부는 계절이어서 프랑스 원정함대는 암초에 부딪쳐 좌초하고 말았다. 그들은 애초의 목적은 뒷전으로 하고 조선측에 원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조선 정부는 그들에게 조운선 세 척을 빌려주었으나 느리고 둔해 쓸 수 없다고 해서 결국 상해에서 영국 선박 3척을 임대해 그들을 돌려보내 주었다.
《헌종실록》 헌종 12년 6월 23일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충청 수사(忠淸水使) 정택선(鄭宅善)의 장계(狀啓)를 보니, 이르기를 ‘홍주(洪州) 외연도(外煙島)에 사는 백성이 작은 궤자(櫃子) 하나와 저지(楮紙) 한 조각을 가져와서 바치고 말하기를, 「이양선(異樣船)이 와서 본도(本島) 앞 바다에 떠 있는데, 궤자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지는 저들과 섬 백성이 사사로이 서로 문답한 말입니다.」 하였습니다. 일이 철저히 사문(査問)하고 궤자를 돌려주어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 홍주 목사(洪州牧使) 서승순(徐承淳)·수우후(水虞候) 김원희(金遠喜)에게 압송(押送)해서 넘겨주고 효유(曉諭)하여 돌려주게 하라는 뜻으로 조사(措辭)하여 관문(關文)을 보내어 신칙(申飭)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이양선이 여러 날 동안 머물러 있었으나, 미처 정상을 묻지 못한 것은 진실로 아주 허술한 일이었으며, 이미 섬 백성이 문답한 필적(筆蹟)과 궤자를 가져와 바친 것이 있으면 곧 뜯어보고 낱낱이 아뢰었어야 할 것인데, 철저히 사문하기 위하여 문정관에게 압송하였다 하고, 애초에 궤자 가운데의 것이 어떤 물건이고 문답한 것이 어떤 말인지에 대하여 한 마디 말이 없으니, 어찌 이러한 사체(事體)가 있겠습니까? 만약 의심하여 겁낸 것이 아니면 책임을 남에게 미루는 것이니, 해당 수사(水使)를 우선 파출(罷黜)하고, 해부(該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무겁게 감단(勘斷)하게 하소서. 그리고 궤자와 문답한 필적은 곧 형지(形止)를 갖추어 치보(馳報)하라는 뜻으로 엄히 신칙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헌종실록》 헌종 12년 7월 3일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운철(趙雲澈)이 장계(狀啓)하여 이양선(異樣船)과 섬 백성이 문답한 것을 적은 종이와 이양인(異樣人)의 글을 베껴 올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불랑서국(大佛朗西國) 수사 제독(水師提督) 흠명 도인도여도중국각전선 원수(欽命到印度與到中國各戰船元帥) 슬서이(瑟西爾)는 죄 없이 살해된 것을 구문(究問)하는 일 때문에 알립니다. 살피건대 기해년에 불랑서인(佛朗西人)인 안묵이(安?爾)·사사당(沙斯當)·모인(慕印) 세 분이 있었습니다. 이 세 분은 우리 나라에서 큰 덕망이 있다고 여기는 인사인데, 뜻밖에 귀 고려(貴高麗)에서 살해되었습니다. 대개 이 동방(東方)에서 본수(本帥)는 우리 나라의 사서(士庶)를 돌보고 지키는 직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와서 그 세 분의 죄범(罪犯)이 무슨 조목에 해당되어 이러한 참혹한 죽음을 받아야 하였는지를 구문하였더니, 혹 귀 고려의 율법(律法)은 외국인이 입경(入境)하는 것을 금지하는데, 그 세 분이 입경하였으므로 살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수가 살피건대, 혹 한인(漢人)·만주인(滿州人)·일본인(日本人)으로서 귀 고려의 지경에 함부로 들어가는 자가 있더라도 데려다 보호하였다가 풀어보내어 지경을 나가게 하는 데 지나지 않으며, 몹시 괴롭히고 해치는 등의 일은 모두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세 분은 한인·만주인·일본인을 대우하듯이 마찬가지로 대우하지 않았는지를 묻겠습니다. 생각하건대 귀 고려의 중임(重任)을 몸에 진 대군자(大君子)는 우리 대불랑서 황제의 인덕(仁德)을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만, 우리 나라의 사서는 고향에서 만만리(萬萬里) 떠나 있더라도 결단코 그에게 버림받아 그 은택을 함께 입지 못하게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황제의 융숭한 은혜가 널리 퍼져서 그 나라의 사민(士民)에게 덮어 미치므로, 천하 만국(萬國)에 그 백성으로서 다른 나라에서 그른 짓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있어 살인이나 방화 같은 폐단에 대하여 사실을 심사하여 죄를 다스렸으면 또한 구문할 수 없겠으나, 그 백성에게 죄가 없는데도 남이 가혹하게 해친 경우에는 우리 불랑서 황제를 크게 욕보인 것이어서 원한을 초래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대개 본수가 묻고 있는 우리 나라의 어진 인사 세 분이 귀 고려에서 살해된 일은 아마도 귀 보상(貴輔相)께서 이제 곧 회답하실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내년에 우리 나라의 전선(戰船)이 특별히 여기에 오거든 귀국에서 그때에 회답하시면 된다는 것을 아시기 거듭 바랍니다. 본수는 귀 보상에게 우리 나라의 황제께서 그 사민을 덮어 감싸는 인덕을 다시 고합니다. 이제 이미 귀국에 일러서 밝혔거니와, 이제부터 이후에 우리 나라의 사민을 가혹하게 해치는 일이 있으면, 귀 고려는 반드시 큰 재해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재해를 임시하여 위로 귀국의 국왕에서부터 아래로 대신(大臣)·백관(百官)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돌릴 수 없고, 오직 자기가 불인(不仁)하고 불의(不義)하며 무례한 것을 원망할 수 있을 뿐일 것입니다. 이를 아시기 바랍니다. 구세(救世) 1천 8백 46년 5월 8일.” 하였고, 겉봉에는 고려국 보상 대인 고승(高麗國輔相大人高陞)이라 하였다.
《헌종실록》 헌종 13년 8월 4일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저들의 서봉(書封)을 이제 겨우 베껴 왔으므로 등본(謄本)을 입계(入啓)합니다마는, 그 서사(書辭)는 양식과 배를 바라서 본도(本道)의 감사(監司)에게 보낸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지난해의 글과 같은 예(例)로 볼 수 없으니, 감사의 답서(答書)에 양식과 배는 바라는 대로 각별히 베풀겠다는 뜻으로 좋은 말로 답을 하면 사면(事面)이 온편할 것입니다. 글 가운데에 이미 회문(回文)을 받겠다는 말이 있으므로 또한 결정이 없어서는 안되니, 괴원(槐院)을 시켜 지어내게 하여 내려보내서 문정관(問情官)을 시켜 임역(任譯)과 함께 사리에 따라 타이르게 하고, 감사의 답서도 마찬가지로 지어내어 완백(完伯)에게 내려보내어 전해 보내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종실록》 헌종 13년 8월 9일
부사직(副司直) 성근묵(成近?)이 현도(縣道) 편에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듣자옵건대, 지난해에 홍주(洪州)에 온 이양선(異樣船)이 이미 흉서(凶書)를 보내어 몰래 국경을 넘어온 양인(洋人)으로서 사옥(邪獄) 때에 주살(誅殺)된 자를 우리가 죽였다고 하였다 하니 그 사연은 변명할 것도 못됩니다만,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적(賊)의 와주(窩主)가 된 자는 형적(形跡)이 이미 드러나서 하루도 용서할 수 없으므로 정상을 궁극히 핵사(탢査)해야 할 것인데도 조정(朝廷)에서 관대하였던 것은 다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하고 불치(不治)로 다스린 것이니, 만리 밖에서 밝게 보고 70일 만에 와서 귀화하는 일이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적모(賊謀)가 남몰래 점점 더하고 화란(禍亂)을 교결(交結)하여 빚어내어 이번에 고군산(古群山)에 양선(洋船)이 온 일이 있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과연 표류하여 온 배이겠습니까? 해적(海賊)이겠습니까? 표류하여 온 배로 대우하여 마치 먼데서 온 자처럼 회유한 것이 어찌 반드시 응변(應變)하는 기책(奇策)이 있어서 이른바 심복(心腹)을 드러내고 정실(情實)을 드러내어 본연(本然)의 약한 것을 보인다는 것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적이 온 것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고 머무르는 데에는 반드시 믿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사당(邪黨)으로서 와주가 된 자 중에 반드시 그 사람이 있을 것인데, 불문에 붙인다면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 노사(虜使)를 베기를 청한 것과 같이 청할 사람이 오늘날에 어찌 없겠으며, 강홍립(姜弘立)이 향도(嚮導)한 것과 같은 일을 오늘날에 다시 보겠습니까마는, 양적(洋賊)이 노사와 같지는 않더라도 저 사당은 강홍립과 비슷하다는 것을 모르는 듯합니다. 우리가 적을 헤아리는 것이 도리어 적이 우리 나라를 엿보는 것만 못한데, 한갓 사술(邪術)에 속고 사적(邪賊)에 깔보이며 오직 요사(妖邪)를 보양(保養)하는 것을 화란을 늦추는 장책(長策)으로 여긴다면, 장차 우리 소중화(小中華)의 온 고장이 함께 멸망하여 요수(妖獸)·괴조(怪鳥)가 되어도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부터 융적(戎狄)의 화(禍)에 어찌 선악을 가릴 만한 것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이 적으로 말하면 방자하게 의리를 말하고 전에 없던 이단을 새로 만들어 성인(聖人)의 도(道)를 위협하니, 이것은 화이(華夷)·인수(人獸)가 갈라지는 큰 요점입니다.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도는 자신이 난신(亂臣)·적자(賊子)가 되는 일이 아니나,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인의(仁義)가 막히면 짐승을 이끌어 사람을 먹게 한다.’ 하고 또 ‘능히 양주·묵적을 물리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 하였습니다. 저 사선(使船)이 말[馬]처럼 바다를 마구 다니면 이는 거의 범에 날개가 달린 듯하여 더불어 대적할 자가 없을 듯하나, 요사를 부리고 제 힘을 믿는데도 천하에 적이 없다는 것은 신이 전에 듣지 못한 것입니다. 대개 요(妖)가 덕(德)을 이기지 못하고 사(邪)가 정(正)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지를 세운 상리(常理)이니, 이제 천지가 무너지고 인류가 다한다면 그만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어찌 요(堯)·순(舜)·주공(周孔)의 도가 해외(海外)의 요사한 적에게 욕을 보게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성지(聖志)가 근학(勤學)에 있고 성학(聖學)이 주경(主敬)에 있는 것은 의논할 수 없습니다마는, 궐유(闕遺)의 유무는 오직 예념(睿念)의 반성에 달려 있으니, 허물이 있으면 일식(日蝕)·월식(月蝕)처럼 숨기지 않고 고치며 착한 것을 보면 바람·천둥처럼 신속히 옮겨서 성지가 그칠 데를 알고 성학이 매우 밝아 정론(正論)이 크게 행해지고 정기(正氣)가 성장(盛壯)하여 대명(大明)이 중천(中天)하여 만물이 다 보듯이 하신다면 저 음사(陰邪)한 자가 감히 그 사이를 범하겠습니까? 또한 어찌 양학(洋學)이 근심스럽고 사당이 두렵겠습니까?” 하였는데, 비답하기를,
“이양선이 해마다 오는 것은 매우 놀랍다. 이제 그대의 상소를 보건대, 사(邪)를 물리치는 말이 매우 절실하고 명쾌하니, 비류(匪類)가 들으면 마음을 고치고 자취를 감출 만하다. 나머지 진면(陳勉)한 여러 가지가 수천 마디에 가까운데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마지않는 뜻을 알 수 있으니, 어찌 마음에 간직하지 않겠는가? 가을의 선선한 기운이 점점 생기니, 그대는 되도록 빨리 조정에 나와 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을 도우라. 내가 바야흐로 측석(側席)하여 기다린다.” 하였다.
《헌종실록》13년 8월 11일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홍희석(洪羲錫)의 장계(狀啓)를 보니, 고군산(古群山)에 왔던 이양선(異樣船)은 이미 떠났다 하였습니다. 이른바 서봉(書封)이라는 것은 사의(辭意)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저들은 이미 떠났고 미처 물리치지 못하였고 보면,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곧 뜯어 본 뒤에 글을 베껴서 본사(本司)에 올려보내고 원본(原本)과 물건들은 우선 그 진장(鎭將)한테 봉류(封留)하고 두 막(幕)을 봉폐(封閉)하고 또한 유의하여 지키게 하고, 섬 백성이 한 달에 걸쳐 물건을 대어 주느라 폐단이 많았을 것이니, 본도(本道)에서 각별히 조치하여 있을 곳을 잃고 흩어지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이번 일은 갑자기 응변(應變)하느라 혹 잘못된 것이 많을 것입니다. 답서(答書)를 써서 보이는 일도 늦어서 미치지 못하여 저들이 돛을 올리고 헛되이 돌아가며 물건을 남겨 두었으니, 뒷날의 염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들의 글 가운데에 이미 대청국(大淸國)과 화친(和親)하였다는 말이 있으니, 반드시 오문(澳門)에 살도록 허가된 자들 가운데의 일종(一種)일 것입니다. 일찍이 임진년(壬辰年)·을사년 영선(?船)이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도 다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한 일이 있었는데, 이번은 두 해에 비하여 더욱 정상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전후 불란서의 사실과 기해년 양인(洋人)에게 용률(用律)한 일을 괴원(槐院)을 시켜 연유를 갖추어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역행(曆行) 편에 예부에 부쳐 보내고 이어서 황지(皇旨)로 양광 총독(兩廣總督)에게 칙유(飭諭)하여 다시 오는 폐단이 없게 하도록 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추자도 영국선(영국, 1860)
철종 11년(1860년) 4월 16일에는 영국 선박 1척이 전라도 영암 추자도에 표류해온 일이 있었다. 이 배에 탑승했던 영국인 30명, 청국인 28명이 상륙해 천막을 치고 구조를 요청했다. 전라우도 수군 우후 박재인 등이 문정한 결과 조운선 2척을 빌려주어 상해로 돌려 보내주었다.
사마랭호(영국,1845)
1845년(헌종 11년)에는 영국 해군대령 벨처(Sir Edward Belcher, 1799~1877)가 이끄는 영국함 사마랭호(HMS Samarang)가 5월 9일 홍콩을 떠나 유구 열도, 제주도, 거문고 해역을 탐사, 측량한 뒤 일본과 필리핀을 거쳐 1846년 영국으로 귀환했다. 사마랭호는 6월에 제주도 정의현 우도에 처음 정박했는데, 소를 약탈하고 제주도 본도를 돌아다님으로써 제주도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그 전인 헌종 6년 12월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영국선 2척이 제주도 가파도에 와서 소를 약탈해간 일이 있었다. 사마랭호가 제주도에 나타났을 때, 제주도민들은 한라산으로 피난을 하고 육지와 교통도 끊겨 큰 혼란을 겪었다. 당시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었던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지난 스무날 이후 영길리(英吉利, 영국) 배가 정의현 우도(현재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면 우도)에 와서 정박했는데, 이곳으로부터 약 2백 리쯤 떨어져 있네. 그런데 저 배는 별다른 목적 없이 한갓 지나가는 배인데도, 온 섬이 시끄러워 지금까지 20여 일이 지나도 소요를 가라앉힐 수 없네. 제주성은 마치 한 차례 난리를 겪은 것 같다는데, 이곳은 겨우 일깨워 가르쳐주어 다행히 제주성과 같은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네. 경득이를 곧 보내려고 했으나 이 일 때문에 배가 묶여 이제야 장계를 올리네.”
(《추사집》)
사마랭호는 6월 25일부터 우도를 중심으로 제주도, 거금도, 거문도 일대를 탐사하고 해도 3장을 작성했다. 사마랭호에는 중국인 오아순이 통역으로 동승하고 있어서 조선인들과 필담으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사마랭호는 제주도를 떠나 7월 16일 거문도에 도착했다. 약 4일 동안 거문도 해역과 각 섬을 측량하고 거문도를 해밀튼항(Port Hamilton)이라 명명했다. 벨처 선장은 귀국한 후 1848년 영국 해군성에서 《사마랭호 항해기(Narrative of the Voyage of HMS Samarang)》를 출간했다. 이 항해기로 서구 열강들은 거문도가 선박의 중간 보급기지로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훗날 거문도가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었고 1885년에는 영국 해군이 거문도를 기습 점령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한편 정의현감 임수룡은 역관 이인화를 통해 사마랭의 측량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사마랭호는 제주도내에 상륙했으나 조선측에서 주민과 교섭하는 것을 일체 불허했다. 그들은 귀환할 때 외국 지도, 종려나무 부채 등을 선물로 주고 갔으나, 제주목사가 엄밀하게 봉해 보관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좌의정 김도희의 주장에 따라 청과 일본에 각각 이 사건을 통보해 변경의 방비를 경계하도록 했다. 특히 청에 대해서는 광동의 영국 당국자에게 통고해 다시는 외국 배가 조선에 출몰하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다.
《헌종실록》 헌종 11년 6월 29일
이 달에 이양선(異樣船)이 호남(湖南) 흥양(興陽)과 제주(濟州)의 바다 가운데에 출몰 왕래하며 스스로 대영국(大英國)의 배라 하면서 이르는 섬마다 곧 희고 작은 기를 세우고 물을 재는 줄로 바다의 깊이를 재며 돌을 쌓고 회를 칠하여 그 방위(方位)를 표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묶어 그 위에 경판(鏡板)을 놓고 벌여 서서 절하고 제사를 지냈는데, 역학 통사(譯學通事)가 달려가서 사정을 물으니, 녹명지(錄名紙)라는 것과 여러 나라의 지도(地圖)와 종려선(棕櫚扇) 두 자루를 던지고는 드디어 돛을 펴고 동북으로 갔다.
《헌종실록》 헌종 11년 7월 5일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에 대해서 제주(濟州)에서 사정을 물었을 때에 받은 번물(番物) 여러 가지는 그대로 봉하여 제주로 돌려보내 인봉(印封)해 두고 혹 뒷날 이것을 가지고 증거로 삼을 때를 기다리게 하겠습니다마는, 이 배가 세 고을에 두루 정박한 것이 거의 한 달에 가까운데 상세히 사정을 묻지 못하였습니다. 번인(番人)의 형적은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운데, 일찍이 선조(先祖) 임진년에 영국 배가 홍주(洪州)에 와서 정박하였을 때에 곧 돌아갔어도 그때 곧 이 연유를 예부(禮部)에 이자(移咨)한 일이 있었고, 그 뒤 경자년에 또 저들의 배가 제주에 와서 정박한 일이 있으나 잠깐 왔다 빨리 가서 일이 매우 번거롭기 때문에 버려 두고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번은 임진년의 일보다 더 이정(夷情)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있고 사정을 묻는 가운데 청나라 통사(通事)가 있다 하였다 하니, 사전의 염려를 하지 않아서는 안될 듯합니다. 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역행(曆行) 편에 예부에 이자하고 황지(皇旨)로 광동(廣東)의 번박소(番泊所)에 칙유(飭諭)하여 금단하게 하도록 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올 봄 칙행(勅行) 때에 황지로 한 통관(通官)만을 보내게 하고 그대로 칙례(則例)에 실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폐단을 염려한 것이 이처럼 지극하므로 우리 나라로서는 다만 따라서 봉행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마는, 칙행에 상사(上使)·부사(副使)가 있고 보면 접대할 때에 통관 한 사람으로는 실로 주선할 수 없고 먼 길에서의 사고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으니, 한두 사람을 더 정하겠다는 뜻도 예부에 이자하여 절행(節行)에 부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헌종실록》 헌종 11년 9월 15일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접때 영국(英國) 배에 관한 일 때문에 이미 예부(禮部)에 자보(咨報)할 것을 우러러 청한 바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日本)은 강화(講和)한 이래 무릇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서로 통보하고 종적을 헤아릴 수 없는 이양선(異樣船)일 경우 더욱더 엄히 막아 변방의 걱정을 함께 돌볼 뿐더러 혹 사법(邪法)이 전파될세라 염려하여 여러 번 이 때문에 서계(書契)가 왕복하였으니, 《동문휘고(同文彙考)》에 실려 있습니다. 이번에 양선(洋船)이 순식간에 출몰한 것은 비록 그 요령은 알지 못하나 신의로 교린(交隣)하는 의리로서는 사실에 의거하여 서로 통보해야 할 듯합니다. 또 그들이 들어서 알고 통보하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책망한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고, 혹 그 배가 저들의 지경으로 옮겨 가서 저들이 먼저 통보한다면 우리로서는 찐덥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이양선이 왕래한 상황을 상세히 갖추어 동래 왜관(東萊倭館)에 서계를 보내고 동무(東武)에 전보(轉報)하게 하여 변방(邊防)을 경보하고 전약(前約)을 이행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실비아호(영국,1855)
철종 6년(1855년) 영국 선박 실비아호(Sylvia)가 부산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애서아말호(프랑스,1859)
1859년(철종 10년) 5월에 상해에서 출발한 영국상선 애서아말호(愛西亞末)가 동래 초량 앞 바다에 정박해 여러 물자를 요구했다. 조선 관리들은 훗날의 폐가 있을 것을 두려워해 이를 거절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약재와 식료품만을 제공해주었다.
남백로(영국,1856)
철종 11년(1860년) 윤3월에 영국 선박 남백로호(南白老)가 상해에서 일본으로 가다가 동래 신초량 앞 바다에서 말을 구한 일이 있었다.
며리계(미국,1852)
1852년(철종 3년) 12월 21일에 북해도 부근에서 고래잡이를 하던 미국 포경선 1척이 폭풍에 휩쓸려 경상도 동래부 용당포 앞 바다에 표착했다. 미국 배가 조선에 나타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부산첨사 서상악은 이 사실을 경상감사 홍설모에게 알렸고, 홍설모는 이것을 정부에 보고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며리계’(아메리카)라고 수없이 반복했다는 것만 기록에 남아 있다.
《일성록》 철종 4년 1월 6일
부산첨사 서상악이 보내 방금 도착한 첩정(牒呈)에 의함. 이양대선 1척이 이 달(철동 3년 12월) 21일 12시경 남쪽 바다에서 나타나 용당포 앞 바다에 표류해 떠 있으므로 구봉봉군 곽돌쇠(郭突釗)가 그날 오후 2시에 이를 진고(進告)했다. 그래서 성화(星火) 같이 초탐(哨探)하기 위해 두모포 만호 정순민을 용당포로 보냈다. 뒤따라 도작한 이 첨사의 첩정에 초탐장인 두모포 만호가 그 배를 초탐하기 위해 노를 저어 나아갔더니 과연 이양선 1척이 포구 앞 바다에 떠 있더라고 했다. 같은 날 오후 2시에 정박했는데 예입(曳入)해 안전하게 정박시키려 했으나 따르려 하지 않아 소선들을 많이 보내 각별히 수호(守護)하게 했다. 이양선이 외양에서 나타난 후로 지금까지 포구 근처 바다에 정박해 있으니 수호를 소홀히 할 수 없어서 개운포 만호 본진 2전선장 최우륜을 파견해 밤을 지내는데 아무 폐가 없도록 수호하게 했다. 이양선이 바다 가운데 정박하고 있으므로 예입해 안박(安泊)케 하고자 했으나 그들이 머리와 손을 내저어 응하지 않으니 그들의 뜻에 따라 그곳에 머무르게 했다. 그 배가 이미 안박에 응하지 않으니 더 이상 오래 지체할 수 없어 성화 같이 내달아가 곧 문정(問情)할 것과 역인(譯人)을 임명할 것 등을 신칙(申飭)했다. 뒤이어 도착한 첨사의 첩정은 용당포 앞 바다에 정박하고 있는 배가 특이한 점이 있는지 문정하기 위해 첨사가 지방관인 동래부사 유석환과 함께 동 포구에 도착했다 했다. 그랬더니 좌수우후 장도상도 또한 도착했으므로 역관을 임명해 문정하도록 신칙했다.
그날 수본(手本)에 훈도 김시경, 별차 김정구가 소통사 김예돈 등을 데리고 배에 올라 이양선 앞으로 나아가니 그 배 안의 모든 사람이 일제히 나와 밧줄을 내려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었다. 배의 모양은 극히 사치스러웠고 사람의 모습은 모두 고괴(古怪)해 머리는 고슴도치 같이 산발했으며 담전(?氈)과 흑칠한 가죽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우리 나라 전립(戰笠)과 비슷했다. 생김새는 코가 높고 수염은 없으며 눈은 황색 혹은 파란색이며 몸에는 간혹 살을 찔러 만든 문신이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흑갈색의 담전인데 모두 소매가 좁고 바지 차림이었으며 발에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모두 43명이고 그 가운데는 20세 가량의 여자가 한 사람, 4~5세 가량의 사내아이가 하나 있으며 머리는 양털 같은 백색이었고 옷이나 모습은 뱃사람들과 다른 바가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 기피함이 없이 웃으면서 맞이했다. 언어가 도무지 통하지 않아 글을 써서 국호와 표도(漂到)한 연유를 물었더니 역시 소통하지 못했다. 붓을 들어 글씨를 쓰도록 청했으나 구릉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며 전자(篆字)도 아니고 언문도 아닌 전혀 알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단지 배와 자신들을 가리키면서 ‘며리계(?里界)’ ‘며리계’(아메리카) 운운할 뿐이었다. 그들 가운데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생김새가 다른 2인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접촉하니 왜말을 잘했으므로 바로 왜인이었다. (…)
소재한 변물(?物)을 일일이 점검해 보았더니 배의 길이는 25파(把)이고 높이는 8파, 폭은 5파, 선중 간격은 12간이었으며 안에 침실을 꾸며 놓았는데 유숙하는 곳이었다. 첫 번째 돛대는 높이가 13파, 두 번째는 12파, 세 번째는 25파였으며, 매돛은 3층의 모양이었다. 뱃머리의 대포 1좌, 조총 12자루, 마침(磨針) 50개 등이 있었고 양미(糧米) 12궤, 경유(鯨油) 5통, 마안(馬鞍) 2건과 우독(牛犢)이 각 1쌍, 돼지 개 닭 오리가 여러 마리 있었다. 그리고 위에 든 두 사람은 왜국인이 틀림없으므로 관례에 따라 마땅히 왜관을 통해 돌려보내야 하므로 소지한 물건들과 함께 우리 배에 옮겨 실었다. 이양선은 각별히 영호(領護)했고 이 배의 변물 수효와 배와 사람의 모양은 그림으로 그려 비변사에 올려 보낸다.
(신동아 편집부 역음, 《한미수교 100년사》, 동아일보사)
호네트호(영국,1855)
철종 6년(1855년) 영국의 중국함대 소속인 호네트호(Hornet)가 독도를 실측했다. 이들은 독도를 호네트도라고 명명했다.
투 브러더스(미국,1855)
1855년(철종 6년) 6월에는 미국 포경선 투 브러더스(Two Brothers)에서 일하던 어부 4명이 선장의 학대를 피하고자 작은 배로 동해를 횡단하다가 강원도통천에 표착된 바 있었다. 이것은 미국인이 최초로 한국 땅을 밟은 기록이다. 당시 통천 군수 이봉구의 보고를 받은 강원감사 이공익의 장계로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조정에서는 이방인 4명에게 융숭히 접대하고 이들을 서울과 의주를 거쳐 북경에 호송해주었다.
《비변사 등록》 철종 6년(1855년) 6월 2일
강원감사 이공익의 장계를 보니 통천군수 이봉구의 첩정(牒呈)을 매거(枚擧)해 말하고 있다. 즉, 본군의 진 앞 바다에 홀연 소선 1척과 몇몇 사람 모습이 나타나서는 함께 표몰(漂沒)했다가 나룻가에 이르렀다. 배는 바위에 부딪쳐 파쇄되었고 사람은 간신히 헤엄쳐 살았는데, 육지에 오른 자가 4명이었다. 급히 쫓아가 살펴보니 이국인이었다. 언어 문자가 모두 불통했으며 그들은 단지 수족과 구안(口眼)을 움직여 형용할 뿐이었다. 포구 근처의 큰 배를 가리키면서 세 손가락을 높이 쳐들어 삼범선(三帆船)의 모양을 만들었다. 갈고리를 던져 고기 잡는 것으로 고래 잡는 형상을 보이고, 입을 모아 숨을 내불어 세찬 바람의 모습을 나타내고, 손을 들어 뒤집어 배가 전복된 것을 표현했으며 몸을 모래 위에 뉘여 눈을 감고 다리를 뻗어 사람이 죽는 시늉을 하고 땅을 파 옷을 묻으며 눈물 흘리며 우는 것은 필시 동료가 엄사(?死)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쪽을 가리키면서 발을 들고 걷는 모습을 하는 것으로 고국에 돌아가고자 함을 나타내려 한 것 같았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글씨를 써도 글자를 모르니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된 연유인지 하나도 알아내지 못했으나 우선 음식을 주고 엄히 수직(守直)했다. 그래서 역관을 파견해 문정하는 일과 배를 만들어 호송하는 문제 등을 묘당(廟堂)에서 사뢰어 처리해 줄 것을 청한다고 했다. 언어 문자가 이미 통할 수 없었으나 배가 파쇄되었음은 분명하니 그들이 육로나 수로를 따라 되돌아가는 것은 해득(解得)한 것이 반드시 그럴 듯한 연후에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정할 여관을 해당 관서에서 즉시 파송해 자세히 조사 치보(馳報)토록 함이 어떻겠는가? 왕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신동아 편집부 엮음, 《한미수교 100년사》, 동아일보사)
팔라다,보스토크호(러시아,1854)
복원된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
복원된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
철종 5년(1854년) 러시아 군함 팔라다호(Pallada)와 보스토크호(Vostok)가 도문강 입구에 나타나 측량을 하고 다시 남하해 동해안 일대를 측량했다. 이들은 영흥만의 안쪽인 송전만을 라자레프항(Port Lazareff), 영일만을 운코프스키만(Unkovski)이라고 각각 명명했다. 이것은 당시 동해안에 대한 거의 완벽한 측량이었다고 전한다.
프로비던스호(영국,1797)
1797년(정조 21년) 9월 영국의 군함 프로비던스호(HMS Providence號)가 해군중령 브로턴(William Robert Broughton, 1762~1821)의 지휘하에 동해안을 탐사했다. 이것은 영국적선이 조선 땅에 처음 정박해 조선인들과 만난 우리측의 첫 기록이었다. 프로비던스호는 10월 3일(양력) 청진 근해에 도착했고, 10여일 동안 남쪽으로 내려가 10월 13일 해질 무렵 부산 용당포에 도착했다. 당시 군함의 길이는 약 27미터, 폭은 약 10미터 정도이며 대포 16문을 장착하고 있었다. 브로턴 함장 일행은 부산항을 탐사한 후 10월 21일 조선을 떠났다. 브로턴 함장은 귀국해 1804년 《북태평양 탐사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ific Ocean 1795~1798)》를 런던의 T. Cadell & W. Davis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당시 왕조실록과 브로턴 함장의 항해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조실록》 정조 21년(1797) 9월 6일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李亨元)이 치계(馳啓)하기를,
“이국(異國)의 배 1척이 동래(東萊) 용당포(龍塘浦) 앞바다에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배 안의 50인이 모두 머리를 땋아 늘였는데, 어떤 사람은 뒤로 드리우고 머리에 백전립(白氈笠)을 썼으며, 어떤 사람은 등(?)으로 전립을 묶어 매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전립(戰笠)과 같았습니다. 몸에는 석새[三升] 흑전의(黑氈衣)를 입었는데 모양새가 우리 나라의 협수(挾袖)와 같았으며 속에는 홑바지를 입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랗습니다. 역학(譯學)을 시켜 그 국호(國號) 및 표류해 오게 된 연유를 물었더니, 한어(漢語)·청어(淸語)·왜어(倭語)·몽고어(蒙古語)를 모두 알지 못하였습니다. 붓을 주어 쓰게 하였더니 모양새가 구름과 산과 같은 그림을 그려 알 수 없었습니다. 배의 길이는 18파(把)이고, 너비는 7파이며 좌우 아래에 삼목(杉木) 판대기를 대고 모두 동철(銅鐵) 조각을 깔아 튼튼하고 정밀하게 하였으므로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 윤득규(尹得逵)가 치계하기를,
“동래 부사(東萊府使) 정상우(鄭尙愚)의 정문(呈文)에 ‘용당포에 달려가서 표류해 온 사람을 보았더니 코는 높고 눈은 푸른 것이 서양(西洋) 사람인 듯하였다. 또 그 배에 실은 물건을 보니 곧 유리병·천리경(千里鏡)·무공은전(無孔銀錢)으로 모두 서양 물산이었다. 언어와 말소리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고, 오직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네 글자가 나왔는데 이는 바로 왜어(倭語)로 장기도(長崎島)이니, 아마도 상선(商船)이 장기도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한 것 같다. 우리 나라 사람을 대하여 손으로 대마도(對馬島) 근처를 가리키면서 입으로 바람을 내고 있는데, 이는 순풍을 기다리는 뜻인 듯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풍이 불면 떠나보내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정조실록》 정조 21년 9월 6일)
브로턴 함장의 《북태평양 탐사 항해기(A Voyage of Discovery to the North Pacific Ocean 1795~1798)》
1797년 10월 12일
이른 아침 우리는 그 육지(용당포)에 사람이 살고 있음을 곳곳에 불이 지펴지는 것을 통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배에서 본 모습은 장관이었다. 우리는 또한 일본 어선 4척이 이 앞 바다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육지는 중앙에 산이 있어 그것이 봉우리처럼 솟아 있었고 바다보다 비교적 높은 위치에 육지가 펼쳐져 있었다. 산줄기는 경작을 한 흔적이 있었고 여기저기 언덕에는 얼마 안 되는 나무들이 엉성하게 서 있었다. 동쪽 해안선은 바위나 절벽으로 울퉁불퉁했고 거친 파도가 해안선을 무섭게 치고 있었다.
10월 14일
아침에 일어나니 우리는 사람들이 가득 탄 보트에 둘러싸여 있었다. 개중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끼어 있었다. 이들이 호기심에 어린 눈동자로 우리를 쳐다보았는데, 그들은 다들 이상한 우리 함선을 살펴보러 온 모양이었다. (…)
아침에 우리는 물을 찾으러 육지로 올라갔다. 우리가 정박한 이유도 사실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주민 한 사람이 우리에게 깨끗한 물이 흘러내리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그곳은 배와 가까운 아주 편리한 장소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무와 물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나무는 이곳에서도 구하기가 힘들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한동안 먼길을 거닐며 산책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졸졸 따라왔다. (…) 마을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부두에는 온갖 배들이 여러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 배들은 중국배와 비슷했으나 모습이 매끈하지 못하고 끝맺음이 거칠어 배 만드는 기술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배들은 대부분 돛단배였다.
우리가 다른 마을에 당도하자 마을 주민들은 우리를 멈춰 세웠다. 주민들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게 빌었다. 목에다 손을 긋는 시늉을 하는 것이 자신의 목숨에 관련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 점심 식사를 하러 함선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계급이 높은 듯한 사람들이 배를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커다란 목욕가운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의상이나 모습은 평민들과는 딴판이었다. (…) 그들은 우리에게 왜 우리가 이곳에 왔느냐, 목적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한 대답이 그들에게 아무런 만족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아 염려되었다. 우리는 서로가 속내를 알리지는 못했다.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했기 때문에 남자들은 곧 기분이 좋아져서 곧 배에서 내려 사라졌다. (…)
저녁에 배로 돌아오자 수많은 방문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어두워져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아서 우리는 거의 폭력을 쓰다시피 하며 그들이 타고 온 배로 밀어냈더니 마침내 육지로 되돌아갔다.
밤이 깊이 안심을 하고 있는 사이 그들이 다시 보트를 타고 우리 곁으로 오는 것을 보고 우리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돛단배에는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었고 그들은 거의 윽박지르듯 우리 배 위로 올라오겠다고 했다. 그들이 우리 배안으로 올라오는 것은 막았으나 그들은 우리 함선 옆에 닻을 내리고 대기했다. 종전과 다른 언동과 행동을 접하자 우리는 그들을 의심하게 되었고, 모든 선원이 제 위치로 돌아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게 되었다. 조금 지나자 불을 밝힌 보트 한 척이 와서 다른 배에 횃불을 나누어주었고, 한동안 양측이 서로 바라보며 대결하다가 한국 배들은 지쳤는지 닻을 올리고 육지로 되돌아갔다.
10월 15일
신선한 바람이 불고 날씨가 상쾌했다.
아침 식사 전까지 한국 배가 한 척도 없다가 식사가 끝날 때쯤 두 대의 배가 남자 여러 명을 싣고 우리 선박까지 다가왔다. 그 안에 탄 사람들은 고급관리인 듯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의상보다 훌륭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배 두 척에는 창을 든 몇 명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흰색과 파란 색으로 야단스럽게 치장된 옷을 입고 있었고, 팔은 노란색이었다. 군인들의 모자에는 공작새 깃털이 꽂혀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쌀과 말린 바다 해산물(김)을 선물로 주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질문하는 내용으로 보아 그들은 우리가 단지 빨리 이곳에서 떠나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지금 떠나는 것이 불가능하며 나무와 물과 먹을 것을 구해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다. 그들은 곧 나무와 물을 배달했고 나는 손으로 소를 가리키며 먹을 것을 달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을 주려고 했으나 서양돈의 가치가 이곳에서는 전무했으므로 그들에게 소를 팔라고 설득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답답했다. 우리가 원하는 물자를 구하지 못하고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타고 몹시 실망스러웠다.
얼마 후 지금까지 본 민간인들과 훨씬 다른 멋진 가운과 모자를 쓴 (조정에서 보낸) 세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훨씬 재질이 좋은 옷감이었다. (…) 그들은 눈을 우리쪽 갑판으로 응시하고는 시종일관 근엄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 높으신 분들은 어젯밤 해가 진 후 멀리서부터 여기에 당도한 사람들 같았다. 바로 이들이 우리의 해안 착륙을 반대한 사람들 같았다. 우리는 이들이 호기심 때문에 우리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심각한 사항을 알리려고 온 사람이라는 사실에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사실 이 세 사람의 방문 때문에 우리를 구경하러 오는 수많은 주민들의 방문이 중단되어 오히려 반갑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 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 선원들이 해안으로 산책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져버렸다. 배에서 망원경을 가지고 해안선이나 육지를 관광하고, 함선에 물을 버리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 세 사람 주변에서 그들을 보좌하고 섬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사실상 우리는 배를 자유자재로 운항할 수 없었다. 이 보초를 선 사람들은 구경 오는 주민들을 대나무 막대기로 휘둘러가며 쫓아버렸다.
10월 17일.
오후가 되니 그들이 우리에게 물병과 큰 통에 물을 보내주었다. 나중에 다시 우리가 쓰는 물탱크를 가지고 가니 물을 채워주었다. 이런 일과가 이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군인들은 늘 그들의 조그만 보트에 타고 있는 누구에게선가 지시받은 듯 일률적으로 척척 대처해 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스럽게 불었고, 배 위에 탄 군인들이 우리에게 나무와 물을 지속적으로 보급해주었다. 오후에 그 높은 신분의 세 사람의 보좌관쯤 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방문했다. 우리가 충분한 나무와 물을 보급받았으니 이제 출항할 준비가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배가 3일 후에야 출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틀만 더 머물다가 떠날 것을 강요했고,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이들은 우리가 마련한 것을 잔뜩 먹은 후 해안으로 돌아가 우리의 뜻을 주인에게 전하러 떠났다.
10월 20일
비가 그치자 그 친구들이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당장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볼 것을 다 보지 못했고 날씨마저 항해에 적합하지 않다고 대답했다. 사실 우리 앞에 크게 파도치는 바다가 보였고, 그 파도가 해안가를 내리치며 풍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어제 해변을 탐사한 것에 대해 꼬투리를 잡았다. 그들은 우리가 한 그 짓은 금지된 사항이라고 거칠게 항의했다. 다시 한번 우리가 해변가 왼쪽에 있는 하얀 집 부근에 정박하고 하선하면 몹시 힘든 고초를 당할 것이며 심지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의 산책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곧 4대의 보트를 우리 쪽으로 보냈고, 그 배에는 각양각색의 화려한 옷을 입은 군인들이 한명씩 끼어 타고 있었다. 그들의 감시는 그렇게 온종일 계속되었다. 해가 지자 그들은 우리를 떠났다. 우리는 그들의 허락을 받고 마을 가까이 가서 물을 길어왔다.
10월 21일
아침이 밝자 우리를 감시하는 눈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곧 항구의 스케치를 완성하기 위해 언덕으로 올라갔다. (…) 남쪽에 내려 항구를 배회했으나 감시단에게 들키지는 않았다. 아침식사를 위해 함대에 돌아오니, 우리가 없어진 것을 알고 마을 전체가 난리가 나 있었다. 감시단의 배들이 우리를 추적하러 여기 저기로 보내졌는데도 그들은 우리를 찾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배로 돌아온 우리를 감시단 책임자가 찾아왔다. 배에 올라온 그는 우리가 출항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했다. 나는 그가 가장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바라보곤 하던 망원경과 권총을 그에게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서로 만족스럽게 악수를 하고 출항했다. 곧 항을 빠져나왔고, 한국 친구들을 만난 일이 사뭇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먼 바다에 나와서 보니 주변에 사는 모든 마을 주민들이 바닷가 곳곳에 모여 우리가 출항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조건도 없이 보급해준 물과 나무에 몹시 고마워하며 그곳을 떠났다.
(박영숙 편저, 《서양인이 본 꼬레아》, 삼성언론재단, 1997, 8~13쪽)
이양선 구경하기
조선 근해에 출몰한 이양선은 조선인들에게 무척 낯설었다. 거대한 선체와 증기기관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배에 탄 이방인의 모습 등에 압도당했다. 다음은 1866년 음력 7월 15일에 황해도에 나타난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조선 관리가 묘사한 대목이다.
“배의 구조는 안에는 회를 발랐으며 밖에는 흑가유(黑加油)를 발라 칠과 같았으며 위에 백분(白粉)이 있었다. 사방 판옥(板屋)이 두 곳인데 한 곳은 관인(官人)이, 한 곳은 종인(從人)이 거처했다. 면마다 창구멍이 있는데 유리를 끼웠다. 두 돛대는 모두 송목(松木)으로 잘 다듬어 기름을 발랐고 위에 백양목(白羊木) 방기(方旗)를 달았으며 돛은 흰색 양대릉(羊大綾)으로 만들었다. 양쪽으로 각각 대포 일좌를 설치해 밑에 나무바퀴와 위에 철통(鐵?)이 있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데 세 차례 쏘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소리가 천둥 같아 이목을 놀라게 했다. 또한 장총 세 자루를 둘러보았는데 총구 끝에 한자 가량의 창도(槍刀)를 꽂았다. 조총은 적은 것은 차고 큰 것도 걸어놓아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웠으며 환도는 서양인 4명이 각 한 자루씩 지니고 있었고 광채가 빛났다. 옥내의 서책, 서장(書張), 금종(琴鐘), 고약 등의 잡화를 두루 살펴보았지만 다 기록할 수 없다. 종인들이 거처하는 곳을 보고자 했으나 예의를 들어 꼭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이라며 막아 보지 못했다. 이래로 마치 우리 나라의 적은 고깃배 같은 파란 색의 소정(小艇)을 매달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양선의 출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근대초기 한국문화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