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 소설 "전설3 [일루전ILLUSION] 제3부 건국과 단정반대 운동"은 제1장을 제대로 매듭짓지도 못한 채로 제2장을 시작한다면서 제2부의 제2장을 제3부의 제2장인 양 다시 연재하기 시작했었습니다. 그것을 몇 주 지나서야 발견하고 부랴부랴 이왕의 게시물들을 삭제하는 소동을 빚고 사과했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제3부 원고 파일을 사용해야 했는데 제2부 원고 파일을 제3부인 줄 잘못 알고 천연덕스레 연재하면서 그나마도 여러 주일이나 제대로 확인을 하지 않았던 소홀함이 빚은 망발이었습니다.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도록 넋 빠진 짓이어서 부끄러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그동안 속임수로 독자들을 속여서 어리둥절하게 만든 폐단에 대한 속죄는 제대로 치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빌면서 다시 연재를 시작합니다. 제1장의 마무리를 다시 하고, 제2장을 시작하기 위해서 연재 분량을 오늘에 한해서 갑절을 게시합니다. 그 동안 제3부 제1장은 전매리가 대구로 들어와서 혼자라도 거처를 마련하고 호구지책이 다급해져서 일 자리를 구하러 다닌 끝에 영수학원에서 국어과를 맡는 강사직을 얻게 됩니다. 그러는 과정에 난데없이 목사가 된 외팔이 심문모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우연이지만 두세 차례 거듭하게 되는 과정에서 문모가 곽양수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매리는 양수를 찾아서 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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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고요 최지훈 작
왜옥동네의 전설•3
일루전ILLUSION
제3부 건국과 단정 반대 (제9회)
1. 심문모와 전매리-9끝
“그러나마나 곽 선생님은 피아노 교습하는 일이 재미있으십니까?”
“하, 그 참, 곽 선생이 아니라 곽 비서 동지라니까.”
“…….”
나는 그 비서동지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는 어디까지나 곽 선생은 곽 선생이지 곽 동지가 아니니까요. 그를 곽 선생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가 나의 사람이었지만 동지니 비서니 하는 당의 직함으로 부르면 그는 나를 떠나 있는 다른 사람이 돼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의미 없는 글자인지 무늬인지를 그렸습니다. 그것은 그냥 손가락으로 바닥을 긁거나 문지르는 행위였습니다.
“피아노 교습, 그거 하나도 재미가 없소. 정말 이놈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으니까 그 짓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기는 하지만 말이오. 그래 전 동지는 학원 일이 재미있소?”
“저어, 그런데예, 선생은 아니 ……비서동지께서는 거처하는 데가 없이 이렇게 트에서 먹고 자고 하기보다예, ……좀 비좁겠지만도 지가 거처하는 데로 들어와서 같이 지내시마 안 되시겠어예?”
“지금 거처에서도 지내기에 불편하지 않은걸.”
“지금 내가 얻어 놓은 방은 좁기는 해도 둘이 누울 수도 있으이까 생활에 불편하지 않을 깁니더. 책상도 있고예. 뭣보다도 고래에 불이 잘 들어 방 전체 골고루 아주 따십니더. 오늘이라도 고마 살림 보따리 들고 옮깁시더.”
내가 칭얼대듯이 사뭇 졸라댔더니 마지 못한 척하면서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이 이미 깊었는데도 보따리를 챙겨 내가 얻어놓은 셋방으로 옮겼지요. 아마 밤 열시나 돼서 자리를 깔고 누울 수 있었습니다. 저녁끼니는 이사 보따리를 들고 중국집에서 짜장면으로 해결하고요.
우리는 정말 얼마 만에 해후를 즐기는 밤이었나를 헤아리는 것 자체가 가마득하게 느껴졌습니다. 참으로 여러 해 헤어져 있다가 만난 사람인 것처럼 우리는 좁은 방에서 설쳐댔습니다. 끔찍한 기쁨이나 행복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면 바로 그날 밤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제1장 끝/ 2021-10-20 수요일)
2. 단정 반대 투쟁-(1)
단기 사이칠일(1948)년 정월.
국련[UN]한국임시위원단(UNTCOK(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이 입국했으나 삼팔이북에서는 입북을 거부당했다.
그것은 지난 해 11월 미-소 군사위원회의 회의가 결렬될 때 이를 빌미로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겠다고 선언한 것에 대해서 소련이 반대(거부)했기 때문에 유엔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자 아예 상임이사국 회의로 시작되는 처음부터 총회의 의결 때까지 반대와 거부의 태도로 나왔었다. 그럼에도 진행된 총회의 의결에서 9개국으로 구성되기로 되었으나 소련방의 한 나라인 우크라이나가 참가를 거부해서 입국할 당시에는 프랑스, 중국(현재 타이완) 등 상임이사국과 영연방의 국가들인 인도, 캐나다, 호주 그리고 시리아와 엘살바도르와 필리핀 등이었다. 그들의 입북이 거부되자 그들은 총선을 지지하는 지역만이라도 총선을 실시하자는 안이 제안되자 영연방국들인 호주, 캐나다가 거부했고, 인도와 시리아가 기권했다. 나머지 4개국이 찬성해서 삼팔이남 만의 총선 일정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광복절 3주년 기념일에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한다는 과정의 일정도 결정되었다.
그러자 나라 안은 바로 이 나라가 단군 개천 이래 처음으로 민주주의에 의한 공화국의 건국을 위한 선거라는 것을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사실 투표에 의한 선거는 이미 삼팔이북에서 2년전 1976년 11월에 실시된 적이 있었다. 소위 임시인민위원회를 인민들이 직접 선거로 뽑힌 대표자를 중심으로 하는 정식 인민위원회를 창설한다는 명목으로 선거를 실시했었다. 미리 전국 각지의 대표가 될 후보자를 한 장의 종이에 사진과 함께 열거해서 노동당이 단독적으로 지명해 놓고 이들 모두에 대해 찬반을 묻는 흑백투표라는 방식의 공개 투표로 98% 가까운 투표율과 실질적으로 100%라고 하는 99% 이상의 찬성으로 뽑힌 대의원을 선출한 선거였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이른바 민주주의 선거의 4대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고 자랑했다. 그 중 평등의 조건을 이룬다는 뜻으로 여성도 꼭 같이 남성처럼 한 표의 투표권 행사를 시행했다.
이러한 건국 일정이 알려지자 남조선노동당에서는 이에 대한 보이콧 선언과 함께 거국적으로 총선 반대 운동을 전개할 것을 선언했다. 당연히 남로당 경북 도당도 이에 따라 비록 지하운동이기는 하지만 적극적인 활동의 명분이 된 단정반대 운동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10월 20일(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