約誓感懷
濯溪 全致遠
天地紛紛國勢傾
中興誰是破虜兵
含羞冒恥生猶愧
擧義扶綱死亦榮
許國恨無三令喚
同心令得百人名
鼓行響應紅衣將
明日趨風白馬營
약서감회
탁계 전치원
세상은 어지럽고 나라는 위태로운데
누가 다시 나라를 일으키고 적군을 무찌를까?
수모속에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워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다면 죽어도 오히려 영광스럽네
나라위해 군대를 호령할 사람이 없는 것이 한스러운데
지금 당장 같은 마음인 의병동지를 100명을 얻었네.
홍의장군 곽재우 진영에 가서 돕고자 하니
내일 장군처소에 백마를 타고 질풍같이 달려가리라.
◎ 곽재우[ 郭再祐 ]
요약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출생-사망 /1552 ~ 1617
본관/현풍
자/계수
호/망우당
시호/충익
출생지/경남 의령
주요저서/《망우집》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晉州姜氏)로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출생하였다.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罷榜)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군세는 더욱 커져 2천에 달하였고, 5월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조정에서는 이 공을 인정하여 그해 7월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을 제수하였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다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어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를 수축하였다. 또한 1차 진주성전투에 휘하의 병사들을 보내어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승리하는데 조력하였다.
1595년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면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을 맞아 싸웠다. 이후 계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창암진(蒼巖津) 강가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하고 있다가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하였고, 10월에는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또 다시 낙향하였다가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12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린 후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마절도사·삼도수군통제사·한성부 좌윤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제수를 거부하고 낙향을 거듭하였는데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죄 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는 등의 일련의 사태를 보고 더 이상 관직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그의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고, 그의 사우(祠宇)에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곽재우 [郭再祐] (두산백과)
◎ 전치원 [ 全致遠 ]
요약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의병장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대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학문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출생-사망 /1527 ~ 1596
본관/완산(完山)
자/사의(士毅)
호/탁계(濯溪)
국적/한국
활동분야/정치
주요저서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경상도 초계(草溪)에서 태어났다. 1542년(중종 37) 이희안(李希顔)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으며, 1546년(명종 1) 향시에 합격하였다. 이후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계속하며 김우옹(金宇顒)·정구(鄭逑)·노흠(盧欽)·김면(金沔) 등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스승 이희안의 손자인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하여 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 등지의 적을 공격하였고, 김면·정인홍(鄭仁弘) 의병과 함께 무계진(茂溪津)·정암진(鼎巖津) 등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이 공로로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변평천옥희실기(卞坪川玉希實記)》와 《임계난리록(壬癸亂離錄)》을 저술하였다. 문집인 《탁계집》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치원 [全致遠]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