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이루는 말들/김소연
한숨이라고 하자 그것은 스스로 빛을 발할 재간이 없어 지구 바깥을 맴돌며 평생토록 야간 노동을 하는 달빛의 오래된 근육
약속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한 번을 잘 감추기 위해서 아흔아홉을 들키는 구름의 한심한 눈물
약속이 범람하자 눈물이 고인다 눈물은 통곡이 된다 통곡으로 우리의 간격을 메우려는 너를 위해 벼락보다 먼저 천둥이 도착하고 있다 나는 이 별의 첫 번째 귀머거리가 된다 한 도시가 우리 손끝에서 빠르게 녹슬어간다
너의 선물이라고 해두자 그것은 상어에게 물어뜯긴 인어의 따끔따끔한 걸음걸이 반짝이는 비늘을 번번이 바닷가에 흘리고야 마는 너의 오래된 실수
기어이 서글픔이 다정을 닮아간다 피곤함이 평화를 닮아간다
고통은 슬며시 우리 곁을 떠난다
소원이라고 하자 그것은 두 발 없는 짐승으로 태어나 울울대는 발 대신 팔로써 가 닿는 나무의 유일한 전술 나무들의 앙상한 포옹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상처는 나무 밑동을 깨문 독사의 이빨 자국이라고 하자 동면에서 깨어난 허기진 첫 식사라 하자 우리 발목이 그래서 이토록 욱신욱신한 거라 해두자
생꼬르발에 대하여/김소연 아침엔 늦게까지 잠을 잘 것. 어제가 충분하게 멀리 떠나가도록. 우선 보드라운 양말에 발을 넣어야지. 그리고 현관에 놓인 슬리퍼를 신는다. 옥상에 올라간다. 머그잔을 들고서. 다세대주택들이 반듯하게 도열한 것을 내려다본다. 호호 불며 뜨거운 우유를 마시고. 버스 정류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더 멀어지는 걸 보고. 머그잔에서는 아직 희미한 김이 올라오고. 우유 냄새가 올라오고. 양말을 신길 잘했다. 그래도 잘하는 게 있다.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말하는 친구에게 영화라도 보러 가자고 응한다.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우는 입이 일그러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후원자의 명단이 끝없이 나 열될 때. 팝콘이 되지 못한 옥수수 알갱이가 몇 알 담긴. 커다랗고 텅 빈 종이컵을 옆구리에 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걸어가야지. 나라면 결말을 저렇게 안 했을 거 같아.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들 려주는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은 결말을 엿듣지 말아야지. 가족이 등장하지 않으면 인간의 비극은 표현 조차 되지 못한다는 게 너는 이상하지 않니. 하고 묻지 말아야지. 감독의 의도를 헤아리지 말아야지. 아웃 포커싱된 배경 속에서 태연스레 움직이던. 그 많던 차력사는 어디로 갔을까. 에 대해 연구해야지. 이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모자란다는 것에 탄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에 뾰루지와 가득 찬 휴지통과 무수히 만개한 일일초를 얻을 때 아무것도 쓰지 않은 날에 낯빛과 햇빛과 오후와 친구와 거의 모든 것을 얻을 때 회사를 구한 시인을 생각한다. 백봉투에 사직서를 접어 넣으며 빙그레 웃는 그 모습을. 축의 혹은 조 의 봉투처럼 사직서 봉투는 편의점에서 판매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면서. 그리고 일정을 짠다. 다시 일정을 바꾼다. 다시 일정을 취소한다. 목적에 맞게 가공된 얘기를 해야지. 간신히 거짓말만 모면해야지. 진심을 다해 진심을 감추며 누군가와 대화해야지. 바람이 부는 날에는 굴뚝과 연기가 직각이 되는 구나. 누가 그려놓은 것 같구나. 이 동네는 공장이 많긴 많구나. 그렇구나. 우유는 다 마실 것. 슬리퍼는 가지런히 벗어둘 것. 머그잔은 비린내가 나지 않게 잘 씻어서 엎어두어야 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처럼. 내일을 위하여.
폭설의 이유 / 김소연
흰 약처럼 쓰디쓴 고백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핏대를 세워 밤새 지르는 고함과도 같다 귀가 찢길 듯하다
차디찬 고백이 생피를 흘린다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는다 나는 우두커니로 확장된다
우리가 흘린 벙어리장갑 한 쌍이 보인다 깍지를 낄 순 없었지만 밑면과 밑면은 情死한 연인처럼 더 바랄게 없는 표정으로 포개어져 있다 못다 한 고백들이 정전기가 되어 그 사이로 스며든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흠뻑흠뻑 들린다 털이 많은 짐승 하나 아랫도리를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간다
유리창을 한 페이지 넘긴다 나는 하얗게로 지워진다 지워진다로 정확해진다
* 강정 시인에게
이것은 사람이 할 말 / 김소연
늙은 여가수의 노래를 듣노니 사람 아닌 짐승의 발성을 암컷 아닌 수컷의 목울대를 역류하는 물살
늙은 여가수의 비린 목소리를 친친 감노니 잡초며 먼지덩이며 녹슨 못대가리를 애지중지 건사해온 폐허 온몸 거미줄로 영롱하노니
노래라기보다는 굴곡 노래라기보다는 무덤 빈혈 같은 비린내
관록만을 얻고 수줍음을 잃어버린 늙은 여가수의 목소리를 움켜쥐노니 부드럽고 미끄러운 물때
통곡을 목전에 둔 부음 태초부터 수억 년간 오차 없이 진행되었던 저녁 어스름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여자의 노래 그래서 이것은 비로소 사람이 할 말 그래서 이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를 우노니
우리가 발견한 당신이라는 나인 것만 같은 객체에 대한 찬사
살면서 이미 죽어본 적 있었다던 노래를 노래하노니 어차피 헛헛했다며 일생이 섭섭하다며 그럴 줄 알았다며 그래서 어쩔 거냐며
늙은 여가수의 노래에 박자를 치노니 까악까악 까마귀 훌쩍훌쩍 뻐꾸기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 / 김소연
젖가슴에는 젖꼭지 대신 꽃봉오리 발가락에는 발톱 대신 자갈들이
이럴 때는 그리워하면 안 되나요 이럴 때는 딱 한 잔, 딱 두 잔, 딱 넉 잔 이럴 때는 달빛에 녹아내리는 벚꽃 잎처럼 흩날려 사라지면 안 되나요
퐁짝퐁짝 풍짝짝 사람들이 춤을 덩실덩실 출 때에 그 앞에서 음악이 되어 사라지면 안 되나요
목덜미에는 입술 허리에는 두 팔 머리카락에는 태엽 풀린 인형들 등 뒤에는 매미처럼 당신이
[ 김소연 시인 약력 ]
*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 가톨릭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 1993년 『현대시사상』에 시 「우리는 찬양한다」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옴. * 시집 『극에 달하다』(1996)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2006) 『눈물이라는 뼈』(2009)와 산문집 『마음사전』(2008) 등. *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 |